[오피니언] 흐려져 가는 한국인의 이성(理性)

흐려져 가는 한국인의 이성(理性)

이성이란 태어날 때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워진 식별력이다. 이성으로 인간은 진실과 거짓, 선과 악 혹은 아름다움과 추한 것 등등을 분별할 수가 있음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그럼으로 이성이 흐려지면 인간은 인성을 상실하여 동물과 다름없는, 인간답지 못한 존재가 된다. 한국에는 그런 사람들을 개돼지로 비유하는 욕설들이 있다.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도덕적 가치와 법적질서가 마비되어 불신과 불안한 불신의 무법사회가 형성된다고 한다. 이러한 무질서한 사회를 부정부패로 한때 국가부도를 맞은 그리스에서는 예부터 아노미(Anomie)현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국남성의 평균수명을 넘도록 한 세상을 살다보니 나에게는 흐려져 가는 한국인의 이성이 요즘처럼 절박하게 염려되는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매일 진위(眞僞)를 식별할 수 없도록 포장된 거짓이 만연해가고 있는 탓인 듯하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속일뿐만이 아니라 부모형제 그리고 자식들까지 속이면서도 태연하게 산다. 속임은 지식의 유무나 관직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이성이 흐려지면 언제나 찾아오는 속물인가 싶다.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알게 모르게 속이고 속는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로 부터 막강한 힘을 주워받은 한 나라의 주인이 되었지만 이성이 흐려져서 정치적인 호도(糊塗, Temporality)에도 쉽게 현혹(眩惑)되어 유권자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가 싶다.

한 미국신문(Wall Street Journal, 2009.8.26)에 사람은 네살 반을 시작으로 하루에도 수 없이 거짓말을 하면서 한 세상을 산다는 기사가 있었다. 한국의 한자 중에도 위(僞)자로 시작하는 말이 수없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속이고 속는 생활풍조는 오늘의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속임은 지력과 권력을 지닌 영리한 엘리트들의 것일지 모른다. 동물세계의 정글에서처럼 속는 대상은 어느 시대의 어떤 사회에서도 어리석(Absurdity)고 무능한 다수의 대중들이다. 그렇다면 속임의 올가미에 쉽게 빠져드는 어리석은 대상이 없다면 속임은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속임을 당하는 어리석은 우리에게는 이성이 망가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또 다른 묘안이 있다면 돌다리를 두세 번 두드리는 자세일 것이다. “아는 길도 물어 가라” 혹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는 교훈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거짓 중에는 이웃 간의 선의의 거짓말도 있겠지만 국가나 지역사회에 큰 화가되는 사기, 위증 혹은 역모와 같은 허위조작도 빈번하다. 때로는 상식을 벗어난 형태의 거짓 언행들이 어린이의 거울이 되는 교육자들을 포함하여 법을 만들거나 법을 관장하는 최상류층의 지식인들 간에도 예외가 아니다. 한 예로서 조선중기의 학자정치가 김성일은 통신사 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그곳의 침략정황을 살피고 1591년에 돌아와, “일본은 결코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라는 이유로 사실을 속인 그의 위증상서는 당시 십만양병을 제안한 대학정치가 병조판사(이이, 1536-84)를 파직한 조정으로 하여금 안일무사하게 임진왜란(1592-1598)을 맞게 했다. 7년에 걸친 그 왜침으로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고, 경작지의 3분의 2는 황무지로 변했다.

대중의 정직한 눈과 귀가되는 신문방송의 지식인들의 속임은 더 대중적이고 집합적이다. 그래서 언론인의 속임을 선동이라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2008년 한국사회를 공포에 떨게 한, 병원체 프리온(Prion)이 감염된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전염된다는 광우병일 것이다. 이성이 마비된 한 방송인의 거짓으로 서울에서는 유모차를 끈 주부들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득의만면하게 반정부와 반미운동을 했으나 국제적으로는 대한민국은 배은망덕한 인성을 지닌 사람들의 나라라는 웃음거리를 남겼다. 한 통계학자에 따르면 미국으로부터 2013년 기준(218천톤)으로 육우 61만 마리를 매년 수입한다 해도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200경(1경은 10,000조의 1)의 1이라고 했다.

드디어 2016년 그 촛불들은 광화문에 운집하여 제18대 여성대통령을 탄핵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가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고 있는 동안 새로이 선출된 대통령이란 자는 UN의 세계지도자들에게 한국국민은 세계역사에 유래가 없는 ‘촛불혁명’ 정부를 탄생시켰다고 자랑했다. 주전 6세기 이집트의 한 요새를 밝은 성으로 밝힌 촛불이 한국에서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 살리는 행사로 변해오고 있다. 그들에게 촛불은 여럿이 모여 바람을 견디면서, 상처로 얼룩진 나라의 미래를 위해 어두운 밤을 새우면서 아침의 태양을 기다리는 희생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이는 언행을 묵인하며 용서하다가 익숙해지면 어느새 아군과 적군도 정확히 분별할 수 없는 이성으로 추락한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에게는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들, 심지어는 오늘의 풍요로움을 있게 한 산업용사들의 피땀에도 고마움 느낌이 없다. 이토록 고마움을 모르는 비겁한 이성으로서 어찌 남들처럼 행복해 질수가 있으리오. 다수라는 군중의 숫자로서 민주주의가 성숙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어리석음이 무엇으로 무질서 아노미사회를 어떻게 탈출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지금 골고루 주어진 우리의 이성이 마비되지 않도록 전심을 다하자고 외치는 것이다. 그것은 거울에 비췬 얼굴을 볼 때 마다 내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를 자신에게 묻고 또 물음으로서도 가능하지 않은가도 소원해 본다. 우리가 사람답게 거듭나는 길은 흐려진 이성이 회복됨으로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방용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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