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평론] 아시나요… ‘6·25전쟁 4대 의혹’

오늘은 6.25전쟁 68주년이다. 6.25전쟁에서는 남북한 군보다 미국과 중공과 소련이 거의 전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그 중에서도 모택동의 역할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그것은 지금의 북핵 정국에서 시진핑의 중국이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6.25전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당사자였던 중국측이 작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6.25전쟁을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The 자유일보는 그런 측면에서 중국측 자료를 통해 △김일성이 서울에서 3일간 머뭇거린 이유 △김일성이 모택동의 인천항과 군산항 요새화 제안을 거부한 이유 △스탈린이 휴전을 계속 미룬 이유 △미국이 당시 스탈린 점령지 만주를 모택동에게 선물한 이유 등 6.25전쟁 4대 의혹을 전격 연재공개한다.

【전격공개】 중국 자료를 통해 본 ‘6·25전쟁 4대 의혹’

<1> 식민지에서 해방으로 다시 전쟁으로

◇힘없는 민족의 갈대 운명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없었던 한민족은 식민지의 2등 족속으로서 쌀을 바치라면 쌀을 바쳤고 쇠를 바치라면 쇠를 바쳤고 사람을 바치라면 사람을 바쳤다. 노래를 부르라면 일본 천황에게 목숨을 바치러 가는 조선의 아들을 위해서 장행가(壯行歌)를 불렀고, 시를 지으라면 일본 군대에게 몸을 바치러 가는 조선의 딸을 위해서 위안부(慰安賦)를 지었다.

고작 식민지 20년 만에 독립운동은 마음속 울화통 전선에서 이뤄지는 일이었지, 더 이상 청산리나 봉오동, 압록강이나 두만강에서 벌어지는 실제 무장투쟁이 아니었다. 만주의 100만 관동군과 조선의 5만 일본 군대에 맞서 싸울 군대는 식민지 30년 만에 근근이 양성한 광복군 5천이었다.

그나마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프랑스 조계(租界)마저, 상해임시정부의 방패막이였던 프랑스 조계마저 일본이 접수한 후에는(1937) 천막 수준을 겨우 면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장개석의 힘과 동정에 절대적으로 의지했고 수만 리 중국의 오지로 쫓겨 다니는 신세라, 바위에 부딪치는 계란의 역할도 못했다.

일제 말에 이르면, 조선이나 만주에서 일본의 헌병 1명, 경찰 1명 죽이는 것도 청사에 길이 빛날 일이었다. 독립운동, 그것은 이불 킥에 지나지 않았다.

한민족은 그토록 나약했다. 일본의 230만(중국에만 120만) 중무장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강대국의 은총이 아니고는 한민족의 운명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언감생심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해방 후에도 무궁화 강산은 강대국의 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을 홀로 물리친 미국과,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Little Boy)가 터지고야 부랴부랴 참전해 어부지리를 취한 소련의 입김이 절대적이었고, 나중에는 일본군이 쫓겨난 중원에서 통일의 꽃사슴을 잡은 중공의 손이 한반도를 향해 미소 양국에 못지않은 유형무형의 북서풍을 일으켰다.

샘 아저씨(Uncle Sam)는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한반도에 대한 무관심과 턱없는 정보 부족 탓으로, 19세기 이래 150여 년간 오매불망 동아시아에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려던 시베리아 곰과, 영원한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왕 서방에게 번번이 의표가 찔렸다.

다행히 미국은 실수를 금방 알아차리고 이내 실수를 만회했다. 미국의 실수 만회와 ‘잘 살아 보세’ 한국의 용수철 도약으로 휴전선 이남은 지상낙원(파라다이스 코리아)이 되었지만, 중소(中蘇)의 공산 제국주의와 ‘반동분자 때려잡자, 대를 이어 때려잡자, 3대를 이어 때려잡자’ 북한의 자유낙하(free fall)로 휴전선 이북은 생지옥(헬 조선)이 되었다.

◇스스로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황소 한국

경제는 한국이 대(對)중국과 대(對)홍콩 합해서 연간 약 800억 달러(*)의 흑자를 보고, 군사는 국군이 미군과 연합하여 중국의 해방군과 북한의 인민군과 러시아의 극동군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스스로의 성취에 자긍심이 없고 미국의 안보 울타리에 감사할 줄 모른다. 기아와 공포의 생지옥 북한, 공산당과 공안(경찰)의 나라 중국,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 Oligarch 권력형 독과점 재벌)와 비밀경찰의 나라 러시아에 스스로 코뚜레를 꿰고 리모컨 고삐를 넘겨주려고 안달이다.

(*각각 수출 1421억 달러, 수입 979억 달러, 2017년 기준; 수출 328억 달러, 수입 16억 달러, 2016년 기준)

[중국 통일 후 모택동이 한반도와 인도지나에 선물한 독배]

1945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은 100년의 굴욕 끝에 중원의 사슴을 사로잡은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강청(江青 장칭)과 8억 인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하게 블루스를 춘 게 아니라, 자금성 황금 보좌에 앉아 천자국(天子國)의 ‘에헴’ 짓이었다.

한반도와 인도지나반도에 전쟁을 부추긴 것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주변 국가를 분열시키고 약화시켜 중국의 아시아 패권(覇權)을 유지하는 중화주의(China First) 정책을 펼친 것이다. 그게 바로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서남공정(西南工程)이었다. 그것은 아직도 미완으로서 계속 추구되고 있다.

북한에는 5만 정병(精兵)을 보냈다. 사심 없이 중국 통일을 도운 5만 배달민족에게 수고했다고 무언의 약속대로 약소하나마 간도를 뚝 떼어 준 게 아니었다. 장차 적화통일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라며 소련군과 미군이 모두 철수한 한반도에서 일시에 힘의 균형을 무너뜨려,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의 군침이 절로 입안에 가득 고이게 만든 것이다. 아마 김일성은 자면서도 침을 질질 흘렸을 것이다, 통일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황홀한 꿈을 꾸면서!

이어 공산당 시황제는 베트남에는 1884년 청불전쟁에서 프랑스에 패배한 굴욕도 씻을 겸 고작 소총부대 2개인가 4개인가 대대밖에 없던 때에 6개 사단을 중무장시킬 무기와, 기관단총과 대포 포함한 현대식 무기와 그들을 훈련시킬 군사고문단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월맹이 4년간 불철주야 준비해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것이 바로 저 유명한 디엔비엔푸(奠邊府 전변부) 전투(1954)였다.

베트남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 결정적인 중공의 지원이 없었으면 그까짓 소총부대 2개 내지 4개 대대가 설령 10년 후 10개, 20개 대대로 늘었다 해도 턱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땅굴 파는 것도 6ㆍ25의 후반기에 진지전에서 인민 해방군이 터득한 것을 로열티 한 푼 안 받고, 월맹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준 것이다.

베트남이 미국을 물리쳐?

중공과 소련의 무기와 군수품이 없었으면, 100년이 지나도 불가능할 일이었다.

뭐,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을 물리쳐?

미국의 노골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베트남전에 소련과 중공이 군인은 안 보내고 무기와 물자를 보냈듯이, 이번에는 미국이 바로 그런 작전을 역이용하여 시베리아 곰 사냥에, 소련 붕괴 작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 결과가 소련의 해체였던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영웅 레이건이 말귀 좀 알아듣는 고르바초프에게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고르바초프가 군비경쟁의 허망함을 깨닫고, 핵 단추에 납땜질하고, ‘레이건 형님, 감사하오!’ 하면서 조용히 항복하고,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glasnost 개방)하고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perestroika 개혁)하는 길로 나아감에, 마침내 소련이 항복하고 15개 나라로 갈라졌더라, 이건 중2까지 가르치고 중3만 되면 그렇게 신화를 역사로 가르치면 안 된다.

그런데 아직도 역사 아닌 그 따위 숱한 신화들을 한국인들은 좌우를 떠나 여태껏 5천만이 확고부동한 진실로, 만고의 진리로 믿고 있으니, 대체 언제쯤이면 이 나라 지식인들은 ‘소설’ 삼국지 수준의 역사 공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 <계속>

◇ 필자 최성재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전 영어교사
문화·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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