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칼럼] 당신은 친구입니까?

옛날 이솝이야기 중에 “곰과 두 친구” 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절친한 친구 두 명이 숲 속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들의 우정은 변하지 말자.”고 말하면서 서로간의 우정을 확인하는데 갑자기 야생 곰이 나타난다. 무시무시한 곰의 모습을 보고 한 친구는 다른 친구를 내버려둔 채 재빨리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고 남은 친구는 급한 나머지 얼른 바닥에 엎드려서 죽은 척을 하였다. 곰은 죽은 척 한 친구의 곁으로 다가가서 한동안 냄새를 맡듯이 킁킁거리다가 얌전히 돌아갔다.

곰이 사라지자 나무 위로 도망갔던 친구는 다시 내려와서 죽은 척 했던 친구에게 “혹시 곰이 자네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했나?”하고 물어보았다. 이에 그 친구는 “곰이 이렇게 말하더군. 위험에 처했을 때 혼자 살려고 도망가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라고 저런 친구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조언해 주고 떠났다.”

오늘날에는 혼자라도 살아야 한다는 쪽이 현실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른다. 오히려 나무에 올라간 사람이 피하지 못하고 죽은척한 사람을 억지를 부린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친구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친구로서 소유한 우정은 변치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진정한 친구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가 정말 진정한 친구인지를 알 수 있다.

과연 당신은 어떠한 친구이고, 무엇을 위한 친구이고, 누구를 위한 친구이고, 언제나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가와 어디서나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유익을 위해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자신은 상대방에게 친구가 될 자격이 없다. 자신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상대인 친구를 이렇게 저렇게 이용한다면 그것은 친구라고 볼 수 없다.

나에게도 이런 부류의 친구라고 하는 자가 있었다.

그가 미국에 올 때부터 학교를 소개해주고, 일거수일투족 거의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 한국에서도 나를 이용한 한심한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친구라고 부르니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아 도와주었다.

일 년에 한번 우리 집에 와서 일주일간 지내며, 사람 만나러 가면 라이드해주고, 공항에서 픽업·드롭도 다 해주었다. 갈 때 미인한지 나의 아들에게 100불, 내 가방에 몰래 100불을 넣고 간다.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먹이고 재우고 모든 것을 일주일간 다 해주었지만 내가 돈을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그가 엘에이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집으로 한 번도 나와 식구들을 놀러와 보라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다. 그의 부인은 “우리도 집이 있으면 초대할 텐데, 집이 아직 없어서 초대를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에 “집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냐”라고 그 친구에게 말해주었다.

한번은 우리 식구가 한국에 다녀올 일이 있어 공항까지 라이드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집에서 공항이 너무 멀어 대려다줄 수 없다”고 한다. 집이 아무리 멀어도 1시간 거리에 있는데 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가 한국에서 오기로 했는데 우리집 앞에 차 한대를 세워두고 나중에 가지러 오겠단다. 나는 싫은 마음에 “차가 망가져도 책임 못 진다”고 했다. 그랬더니 교회 파킹랏에 두고 가겠단다. 또 “싫다”고 말했더니, 그제야 하는 말이 자신의 부인이 시애틀에서 오는데 나더러 공항에 나가 픽업을 해서, 우리집에서 재우고, 자신은 차를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부부의 말은 언제나 일치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전혀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가 없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를 더 얘기하려 한다. 그가 중고차를 사려고 한 적이 있었다. 어느날 찾아와서는 “중고차를 사는데 딜러에서 연락이 오면 모두 틀림없이 맞는다고 해달라”고 한다. 자신이 출석도 하지 않는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우리 학교의 교수로 매달 4,000불을 받고 있다고 대답해 달란다. 친구라고 하기 이전에 목사라는 하는 자가 자신의 거짓말도 모자라 다른 사람한테까지 거짓말을 강요하는 모습에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런 자를 과연 친구라고 볼 수 있는가? 어떠한 친구를 두고, 어떠한 친구가 되고 있는가? 상대방에게 상처 주고, 상대를 이용해만 먹으려 한다면 과연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친구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를 위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고 돕고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해준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성경에서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서로, 함께, 우리”라는 단어이다. 하나님 역시 창세전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하셨다. 나만 생각하고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자신이 먼저 베풀라. 자신이 베풀지 않으면서 남을 이용하려 하지 말라.

이동규 목사(앵커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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