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복음 동역자 나사렛 형제들

지은나교회의 ‘깊은 바다 카페’의 첫 손님은 신림동에서 목회하고 있는 L목사님이었다. L목사님은 이미 몇 주 전에 “지은나교회의 빔 프로젝터는 저희 교회가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연락을 해 왔다.

그러나 우리교회가 빔 프로젝터로 하지 않고 텔레비전으로 빔 프로젝터를 대체하기로 했다고 하자 L목사님은 바쁜 목회 일정 가운데서도 빔 프로젝터를 할 만큼의 헌금을 현금으로 준비해서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

L목사님은 “요즘 부흥하려면 김포로 가라는 말이 목회자들 간에 있습니다”라며 덕담까지 아끼지 않았다. 또 구정을 앞두고 있을 때여선지 L목사님은 사과까지 한상자를 사 가지고 우리교회를 방문해 주었다.

L목사님은 우리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전에도 늘 어머니가 좋아하실 빵이나 카스테라 과자 등을 사가지고 자주 우리교회를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더욱이 L목사님은 우리 교회의 깊은 바다색 카페의 첫 손님 이었다. 그런데 이 L목사님이 누군가하면 바로 우리의 신앙의 고향인 청주CCC의 출신의 나사렛 형제이다.

이번 지은나교회가 인테리어를 마치는 데는 여러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사렛 형제들의 도움이 컸다. 우리교회 난방을 저렴하게 설치해준 온누리 공조의 L사장님도 나사렛형제였다.

L사장님은 우리교회 유아실에만 냉난방이 안 되는 것을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덕트방식의 냉난방 설치를 무료로 해주었다. 그럼으로써 유아실에 냉난방이 안 되어 고민하던 나의 고민이 단번에 해결될 수 있었다.

또 우리 교회 인테리어가 시작되었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전전긍긍하던 어느날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역시 나사렛 형제이면서 현 CCC간사님이기도 한 W간사님 이었다.

우리와 함께 C국 선교사이기도 했던 W간사님 부부는 한국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캠퍼스 사역을 하고 있었다. 요즘은 대학가 사역도 캠퍼스 안에서만 감당하기가 녹록치 않아서 학교 근처에 카페를 만들어 놓고 사역을 하고 있는 추세이다.

W간사님이 자신이 사역할 카페를 인테리어를 하면서 부산의 한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우리 교회 인테리어 하는 것도 함께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내가 예산을 세운 우리 교회 인테리어 비용은 총4천만 원이었다. 예배당과 카페의 인테리어 그리고 냉난방기와 음향, 성구와 집기를 전부 합쳐서 세운 예산 이었다. 인테리어를 시작할 때는 빌린 돈 2천만원으로 일단 시작을 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인테리어를 시작 하자 인테리어에 필요한 비용이 신기하게도 점차 채워지기 시작 하였다. 성구와 집기로 후원한 분들도 있었고 현금으로 후원한 분들도 있었다.

그렇게 여러 개인으로부터 후원된 것이 35%쯤 되었다. 그리고 W간사님이 연결하여준 부산의 모기업을 운영하는 나사렛형제로부터 총 인테리어 비용의 거의 40% 가까운 금액을 지원 받았다.

그렇게 하여 교회 인테리어 비용의 75%가 채워졌다. 이제 남은 25%가 채워져야 하는데 75%를 채워주신 하나님이 25%를 채우시지 못하시랴 라고 스스로를 안위(安慰)하면서 기도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내 신앙여정에 있어서 CCC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우선 CCC맨이던 남편을 만난 것 부터가 그랬다. 당시 대학을 졸업하고 나사렛이던 남편을 청주지구 나사렛 모임에서 만났다.

다음으로는 CCC와 연관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있다. 내가 나사렛월례회에 참석하던 도중에 당시 나의 세 살배기 아들이 4층에 있던 CCC창문에서 밑으로 떨어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어린 아들은 기적적으로 한군데도 다치지 않고 생명을 건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 가족이 선교훈련을 받고 C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그때 서울 부암동에 있는 CCC본부에서 김준곤 목사님으로부터 CCC 협력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처럼 CCC와 떨어져서는 나의 신앙여정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고백이다. 아마도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후에 김준곤 목사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무척이나 상심하며 슬피 울었었다.

영락교회에서 한국교회장으로 치러진 김준곤 목사님의 장례예배에 나는 남편 K선교사와 함께 참석을 하였었다. 한국 땅에 최초로 ‘대학생 선교회’를 세운 고 김준곤 목사님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였다.

수많은 청장년 대학생들의 가슴에 민족 복음화의 비전을 심어 주셨기 때문이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하시면서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슬로건은 당시 청년이었던 내 심장도 뛰게 하였다.

지금이야 목사요, 선교사요, 선교학 박사이기도 한 나이지만 당시엔 나는 대학생도 아니었다. 대학에 진학을 못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며 직장 나사렛이었던 나는 그 비전에 가슴이 뜨거워져서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80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복음화대성회에 직장에 휴가를 내고 참석했었다. 집회의 마지막 전날이던가, 김준곤 목사님은 대회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요청하였다.

목사님은 비자 발급이 어려운 공산국가에 여러 직업을 가지고 선교사로 나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러 직업들을 거론하시다가 나중에는 정 재주가 없는 사람은 ‘식모선교사’로라도 나가라고 하였다.

‘식모선교사!’ 이거야 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 나는 벌떡 일어섰다. ‘식모 선교사’로 헌신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선교사로 헌신한 후 17년이 지나서야 C국 선교사로 가족과 함께 파송을 받게 되었다.

어느해 여름인지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CCC여름 수련회에 아이들 셋과 함께 우리 가족이 참석하고 있었다. 캄캄한 밤 별빛만 가득한데 김준곤 목사님은 백문일답을 시작하셨다.

고 김준곤 목사님이 어떤 질문을 해도 우리 회중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도!!” 라고 대답하는 시간이었다. 목사님이 백가지 질문을 던지고 우리는 입을 모아 “예수 그리도!!”라고 합창을 했었다.

예수님을 위해 즉 복음을 위해 생애를 바친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생애를 바친 사람을 돕는 사람 역시 동일하게 복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준 나사렛 형제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

작지만 세계적인 교회(왜 세계적인 교회인지 우리 교회 와보면 즉시 알 수 있다)인 지은나 교회(지구촌 은혜 나눔의 교회)를 세우는데 도왔던 모든 분들은 진정 천국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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