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16]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3장 ∙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1980년 5월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하였을 때 결코 그 목적이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거나 무장난동자들을 사살하는데 있지 않았다. 광주시내에서 기관총을 포함한 수천 정의 총기가 돌아다니고, 막대한 양의 다이너마이트 폭약과 수류탄 등이 돌아다니고, 수십 만발의 실탄이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난동자들의 무기 강제 회수를 한시라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정부와 계엄군은 무장한 난동자들에게 그 날 자정까지 무려 닷새간이나 무기 자진 반납 기회를 주었으나 무기 자진 반납을 거부한 쪽은 난동자들이었다. 그래서 강제 회수 외에는 다른 대안이 전혀 없었다.

5월 27일 새벽 사상자가 생긴 이유는 무장시민들이 자기편을 향해 총기 난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6일 문재학 군의 어머니 김길자 씨가 『전두환 회고록』 출판 및 배포 금지 요구에 앞장섰다. 그러나 문재학은 전두환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 총에 맞았다.

전남도청 안에서 계엄군과 무장시민들 사이에 전혀 총격전이 없었다. 만약에 총격전이 있었으면 도청 안에 양편 모두의 사상자 수가 엄청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장시민들은 도청 안에서 전혀 시신을 보지 못하였다. 이재호가 2층 민원실에서 박남선 상황실장의 유탄발사기에 맞은 윤상원의 시신을, 그리고 위성삼이 1층 상황실에서 무장시민 총기 오발 사고로 쓰러진 박병규의 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시신 10구는 모두 도청 돌담 바깥 분수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도청 안 무장시민들이 도청광장 쪽 자기 편을 향해 총기난사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고는 계엄군이 도청 뒷담을 넘기 전에 발생하였으며, 김길자 씨의 아들 문재학 군(광주사태 당시 광주상고 1학년)도 분수대 쪽에 배치되어 있었다가 도청 안에서 무장시민들이 쏜 총에 맞아 열사가 된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1. 광주시민 총 맞고 5·18 유공자 된 사연

김준태가 5월 27일 오후 3시경 광주관광호텔 앞을 지나다가 바로 그 주변에 세워진 대형아치에 총구멍이 나있는 것을 보았다(김준태 1988, 529). 그 전에는 없었던 총구멍이 그 날 갑자기 생긴 이유는 그날 새벽 4시 경부터 약 30분간 도청 안 무장시민들이 그 방향으로 간헐적인 총기난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5월 15일 광주시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의 진실’이란 제목으로 공개한 분석 자료에서 이런 픽션 소설을 추가하였다: 계엄군은 5·18 마지막 날인 27일 탱크를 앞세워 광주시내에 진입한 뒤 오전 3시부터 옛 전남도청 등을 향해 총기를 난사한 이후 헬기에서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분석반은 결론냈다(최경호 2017).

그런데 탱크는 상무대 기갑학교 탱크였으며, 계엄군은 20사단이었으며, 무장난동자들 무기 강제회수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에 맞추어 주민들에게 쌀 등 생필품을 배급하고, 시가지 청소 등 대민봉사를 하기 위해 온 부대였다. 그 날 새벽 광주는 무장난동자들이 기관총을 쏘는 도시였으며, 무장시민들이 5천여정의 총과 30만발의 실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군인들이 도저히 비무장으로 진입할 수가 없어서 선두에 기갑학교 탱크가 퍼레이드용으로 배치되었던 것이지, 결코 무장시민들과의 전투를 목적으로 탱크를 앞세웠던 것은 아니다.

5·18유공자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공자들이 1980년 5월 27일 도청 정문 안팎의 도청구간에 있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그때까지 도청을 점거하고 있었던 광주시민들의 총에 맞음으로써 5·18 열사가 되고, 5·18국가유공자들로 인정받게 되었다.

윤상원과 동갑내기였던 정상용은 윤상원이 5월 25일 밤에 새로 구성한 임시혁명정부 성격의 투쟁위원회 외무담당 부위원장이었다. 정상용은 광주사태 이후 ‘광주의거구속자회’, ‘전남 민주주의 청년연합’ 등을 결성하다가 5.18 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당시 녹음 증언을 하였던 바, 그 녹음증언을 1988년에 월간 『엔터프라이즈』 가 입수하여 6월호에 실었다. 그 증언 녹취록에서 그는 도청 본관 건물 내에서는 계엄군 총격에 의한 사망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날 밤 0시쯤 기해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거기에 대항하여 우리는 무기를 지급하고 인력배치 및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주로 도청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는 몇 개 빌딩과 외곽을 경계했으나, 특수 훈련된 공수부대와 일반시민들과의 싸움이란 처음부터 승패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도청이 완전히 점거된 것은 새벽 5시경이었고, 그 외 광주공원이라든지, 여러 빌딩에서의 총격전은 더 지속되었다.

그날, 총기를 지급받은 나는 도청 본관 건물 복도에서 도청 앞 광장에 있는 분수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계엄군은 우리의 경계 배치가 취약했던 뒤쪽으로 진입해서 새벽 3[5]시경 1층을 장악해 버렸다. 2층에 있던 우리들은 복도가 점거되자 도청 기획실, 국장실로 밀려들어가 새벽 4시부터[4시 30분부터] 5시, 체포될 때까지 1시간 동안 농성을 했다.

죽음을 준비하던 그 한 시간, ‘감정의 혼란이 오고 두렵지 않을까’라고 평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대단히 침착해지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결국 나는 한 시간의 농성 끝에 투항 요구를 받고는 투항했던 사람 중 하나이다. 주로 간부진들은 도청 본관 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살았지만 외곽에 배치됐던 사람들은 대부분 전사했다(정상용 1988, 66-67).

만약에 도청 본관 건물에서 전투가 벌어졌었다면 당연히 주동자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남선의 유탄발사기에 맞은 윤상원을 제외한 단 한 명의 주동자도 사망은 커녕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정상용이 증언하듯 그를 포함한 무장시민들은 분수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으며, 분수대 쪽에 배치되어 있던 무장시민들 중에서만 10명이 사망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고등학생들이었다.

정상용이 주동자들은 2층 복도에 있다가 도청 기획실과 국장실로 들어가 농성을 하였다고 하였다. 농성은 전투가 아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과 계엄군 사이에는 전혀 전투가 없었다는 사실은 핵심 주동자 정상용의 증언으로도 이처럼 분명하게 확인된다.

도청 본관에서는 전혀 계엄군과 무장시민들 사이에 아무런 전투가 없었다. 도청 본관을 점거하고 있던 무장시민들은 분수대 쪽 자기 편을 향하여 한참 사격한 후에 도청 기획실과 국장실 등으로 들어가 자기들끼리 모여 있다가 항복 권유 방송을 듣고 모두 순순히 총을 버리고 항복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면 왜 정문 바깥 쪽, 즉 분수대 쪽에 배치되어 있었던 무장시민 10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박남선 상황실장은 만약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하면 그 방향은 농성동뿐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박남선 수기를 보면 그의 그런 의견을 참고한 북한군 황두일은 5월 27일 새벽 3시에 도청에서 무장병력을 빼내어 계림국민학교 방향으로 분산 배치하였다. 그 상황을 일본인 사진기자 風間公一는 이렇게 보도한다:

새벽 2시인데도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고 다니면서 『불을 끈 채 옷을 챙겨입으라』고 일러주었다. 또 학생 한사람이 찾아와서는 어떤 카메라맨에게 일러주기를 『4시에 군이 진격해 올 것이며, 우리는 그들과 맞붙어서 싸울 것이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도청으로 뛰어갔다. 새벽 3시경이었다. 학생들은 대답은 『사실이 그렇다』고 했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도 약 2백명쯤 되는 사람들이 대열을 지어 구보해 와서는 총기들을 받아들고는 다시 지프나 트럭에 분승되어 어디론가 어두운 거리를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風間公一 1985, 269).

이어 새벽 4시 경부터 주로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50여명의 무장시민들이 농성동 방향과 전남도청 중간지대인 도청 광장 쪽에 배치되어 있다가, 도청 2층 복도의 무장시민들이 농성동 방향, 즉 금남로 방향으로 총기난사를 하느라 그 중간지대에 배치된 자기편을 향해 총을 쏘게 된 것이었다.

2. M16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난동자들

박남선은 5월 26일 밤에 도청 안 무장시민들 중 상당수가 국군 군복차림에 M16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26일도 이제 저물고 있었다. 금남로를 한눈으로 굽어보고 있던 도청 건물에 하나 둘 전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정문과 현관 앞에는 M16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보초를 서 있었고, 앞뜰 곳곳에서 어딘지 모르게 엉성해 보이긴 했지만 무장을 한 많은 시민군들이 모여 있었다. 정문 보초의 제복이 바뀐 지도 벌써 5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때 헤드라이트를 켠 채 바쁘게 노동청 모퉁이를 돌아 도청 정문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차가 3층 복도에 서 있는 나의 눈에 띄었다. 차는 정문에서 멈추려는 듯 속도를 줄이더니 멈추지 않고 그대로 현관 앞까지 굴러와 멈추어 섰다.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군복차림에 M16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두 사람이 뛰어내렸다(박남선 1988, 369).

사진 18. ▲ 동아일보 사진기자는 도청 안 무장시민 기관총 옆에 여러 정의 M16 소총이 놓여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5월 26일의 난동자들의 무기 보유 현황을 박남선 상황실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도청을 점령한 후 도청의 구내식당이던 민원실의 지하실을 반으로 나누고 한쪽은 탄약고로 그리고 다른 한쪽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탄약고와 무기고에는 실탄 약 20만발과 TNT 2천여 상자 그리고 LMG와 캐리버 50기관총과 몇점의 M16 소총, 약 4천여점의 카빈소총이 있었다(박남선 1988, 376-377).

같은 사실을 박남선은 그의 최근의 저서 『오월그날: 시민군 상황실장 광주상황보고서』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무기고는 우리가 도청을 점령한 후 도청의 구내식당이던 민원실의 지하실을 반으로 나누고 한쪽은 탄약고로, 다른 한쪽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탄약고와 무기고에는 소총 실탄 약 20만발과 TNT 2,000여 상자, 그리고 LMG와 캐리버 50기관총과 몇 정의 M16소총, 약 4천여정의 각종 소총이 있었다(박남선 2014, 74).

박남선이 “몇점의 M16소총”이라고 한 것은 무장시민들이 보유했던 수십 정의 M16 소총들의 일부이다. 도청 안 무장시민 태반이 M16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확인된 숫자만 총 34정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캐리버50 기관총 옆에 놓여있는 총들은 전부 M16이다.

사진 19. ▲ 광주에서 부역자들을 지휘한 공비 전용 트럭 위에는 12.7mm M2 기관포가 거치되어 있었다.

무장난동자들이 보유한 무기류 중에는 LMG와 캐리버 50기관총 외에도 M1919기관총도 있었으며, 기관총보다 훨씬 파괴력이 강한 12.7mm M2 기관포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상황실장과 기동타격대 대장 등 몇몇 주요 간부들에게는 권총도 지급되어 있었다.

위 19번 사진에서 보듯이, 공비 전용 군용트럭이었던 10번 차가 있다. 이 육중한 군용트럭 (60트럭) 위에 50구경, 즉 12.7mm M2 기관포가 거치되어 있다.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LMG기관총과 흡사하지만 웬만한 건물에 연사하면 벽이 다 뚫리고 주택 한 채쯤은 다 무너뜨려 버릴 정도로, 기관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위력을 가진 포이다.

닌동자들은 도청 지하실 외에도 전일빌딩 지하실과 사직공원 내 체육관을 별도의 무기 저장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전일빌딩 지하실에도 기관총과 수백 정의 카빈소총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광주공원에도 6.25전쟁 때 국군과 미군이 사용했었던 BAR들이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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