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18]

대장 없는 무장 난동자 떼거리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3장 ∙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5. 대장 없는 무장 난동자 떼거리

광주의 무장시민들은 시민군 이었는가, 무장 난동자들 이었는가? 시민군이란 명칭은 광주사태 당시 사용된 적도 없으며, 이것은 5·18을 몹시 왜곡하는 잘못된 용어이다. 어느 무장단체를 시민군이라 부르려면 반드시 대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한 적도 없었고, 광주의 무장 난동자들에게 대장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방위병 출신 박남선은 5월 25일 밤, 즉 광주사태가 끝나기 30시간 전에야 비로소 상황실장으로 임명받았고, 상황실장은 전투조가 아니라 상황 기록 및 통신 업무를 맡았다.

광주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하기는커녕 민간인들의 총기 무장을 지지한 적도 없었다. 한 예로, 전남대학교 명노근 교수와 송기숙 교수는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지지하는 운동권 교수였다. 그러나 5월 21일 무장시민들이 등장하자 이 두 교수는 기겁을 하고 죽을 각오로 무장 시민들과 싸우는 입장이 되었다.

이 두 교수가 전남대 교수회의의 지지를 얻어 전남대 3학년 김창길 학생을 학생수습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이 조직의 임무는 무장시민들의 무기를 회수하여 군부대에 반납하는 것이었다. 그건 언제 공비나 무기반납을 거부하는 무장시민 총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모험이었는데도 목숨 걸고 광주사태 주동자들에게 무기반납을 호소하였다. 학생수습위원회가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하고 도청에서 철수한 때는 5월 26일 늦저녁이었다. 그것은 계엄군 광주재진입이 몇 시간 남지 않았기에 마지못한 철수였다. 이정도로 광주민심은 깡패처럼 보이는 자들의 총기무장을 반대했었다.

상식적으로 만약에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거나 혹은 광주의 어떤 운동(movement)이었다면 시민군 전투력이 날로 강해져서 5월 27일 전투력이 5월 21일의 전투력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것이다. 단숨에 전라도 38개(44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와서 도청을 점령하고 11공수여단을 근 이틀간 추격한 괴무장 단체의 전투력은 천하무적의 전투력이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의 무장시민들의 모습은 아무런 전투력이 없는 민간인들의 민낯 그대로였다. 그러면 군사강대국 한국의 최정예 공수부대 3개 여단을 단숨에 무찌른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가졌던 괴무장 단체가 불과 엿새 만에 세계에서 가장 전투력이 허술한 오합지졸로 변신한 이유를 광주단체들은 뭐라고 설명하는가?

후방교란 임무를 완수한 공비들이 5월 26일 갑자기 광주에서 빠져나간 후 광주에는 시민군 대장이 없었다. 시민군 대장이 누구였는지를 문재인이 아는가, 광주시장이 아는가?

박남선은 자신이 시민군 대장이었다고 자처하지만 그의 그런 주장은 당장 세 가지 문제에 부딪친다.

첫째는 만약 박남선이 시민군 대장이었다면 어째서 1985년에 출간된 황석영의 책에서 박남선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다.

두 번째 문제는 5월 20일의 방송국과 세무서 방화, 5월 21일의 무기고 습격, 광주교도소 습격, 도청 함락 등을 누가 총지휘하였느냐의 문제이다. 상황실은 5월 22일에 비로소 이재의가 만들었으며, 이재의는 결코 시민군을 위한 상황실을 만들었던 것이 아니요, 박남선은 5월 25일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상황실장이 되었는데, 시민군 상황실장이 아니라 ‘시민투쟁위원회’ 상황실장이었다.

세 번째 문제는 만약 박남선의 시민군 대장이었다면 어째서 시민군 대장이 아닌 윤상원을 위한 ‘임을 위한 행진곡’만 있고, 시민군 대장 박남선을 위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없는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만약 무장시민들을 시민군이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지휘관이 있어야 한다. 박남선의 증언록을 보면 5월 27일 새벽에 공비 황두일이 예비역 대위로 가장하고 박남선에게 작전 코치를 해주고, 근 100명의 무장 난동자들을 인솔하여 어디론가 간 후에 영영 소식이 없다. 박남선의 증언을 탈북군인들의 증언과 비교해 보면 황두일은 이때 도청에서 북한군을 철수시킨 것으로 보인다. 만약 광주에 행방불명자가 있다면 그들은 북한군이 북한으로 복귀하였을 때 따라간 자들일 것이다.

황두일이 꽤 많은 무장병력을 빼간 후 도청에는 전투력에 관한 한 오합지졸들만 남았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은 겨우 6명뿐이요, 방위병 출신 박남선과 두 명의 방위병 탈영병 이재춘과 신만식을 제외하면 모두가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이거나 고등학생들이었으며, 심지어 중학생들도 있었다. 그러면 19세의 윤석루 기동타격대 대장에게 총지휘권이 있었는가? 전 날 오전 9시에 윤석루를 기동타격대 대장으로 임명한 박남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기동타격대는 전투조가 아니라 순찰조였을 뿐이다.

조선대 학생 위성삼의 시각에서는 도청방어 총책임자는 박남선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3년 군복무를 마치고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위성삼에게는 병장이 이병의 졸병일 수 없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시민군 대장 계급이 공수부대 예비역 장성이지만 실제로는 중학교 2학년 중퇴 학력의 박남선은 방위병 이병 제대하였다. 당연히 위성삼의 입장에서는 병장이 이병보다 상급자였다.

그러나 광주운동권으로서 윤상원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이양현의 시각에서는 위성삼이 대장 역할을 수행했다는 견해는 코미디이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윤상원과 이양현 등 광주운동권이었으며, 오랫동안 치밀한 사전준비가 있었다. 그런데 5월 25일경에야 비로소 도청으로 굴러들어온 지 하루밖에 안 된 풋내기가 대장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양현의 시각에서는 무장봉기 총지휘권은 임시혁명정부 기획위원인 자신에게 있었다.

이렇듯 대장 노릇하는 사공들이 윤석루, 윤상원, 박남선, 위성삼, 이양현 등 여럿이요, 저마다 고함지르며 명령을 내리니 무장 난동자들 대열이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대혼란 상태가 야기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청을 사수한다면서 작전지휘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무릇 원시사회에서도 군대 조직에는 반드시 대장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광주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하고, 그 지휘계통을 편제한 적이 있다면 반드시 대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시민군을 편성한 적이 없으며, 단지 5월 21일 낮에 공비가 분배한 총기를 덮썩 받은 철부지 청소년들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시민군 대장은 없었으며, 무장 난동자들은 있었으되 시민군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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