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20]

광주시민을 정조준한 무장시민의 총구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사진 21 ▲ 5월 26일 밤까지 용감하게 광주시민들을 체포하던 무장시민들이 27일 새벽에는 용감하게 같은 편 무장시민, 즉 광주시민들을 향해 총기난사를 하였다. 2층 복도 난간에서뿐만 아니라 1층 상황실에서도 무장시민들이 도청 정문 쪽을 향하여 총을 쏘고 있었다. 김준봉의 조사반은 5월 25일부터 상황실 내에 칸막이를 쳐놓고 한 사무실을 상황실 요원들과 같이 쓰고 있었다. 총을 쏠 줄 모르는 동신고교생 양승희는 창문에 총구를 올려놓고 도청 정문 쪽을 향하여 연발 사격을 하였다.

제3장 ∙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6. 광주시민을 정조준한 무장시민의 총구

YMCA에서 북한군 황두일의 사격목표물이 무엇이었을까? 금남로를 사이에 두고 YMCA 맞은편 전일빌딩에도 동쪽 방향으로 우측 도청광장과 도청에도 온통 무장시민들 뿐이었는데 그는 어디다 총구를 겨누고 총을 쏘았던 것일까? 여하튼 마치 그의 총성이 신호탄이라는 듯 그 순간부터 도청 4층 옥상 위 무장난동자 기관총 사격이 시작되었고, 옥상 기관총 소리에 깜짝 놀란 2층 무장시민들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어디를 향해 쏘았는가? 군인들을 향해서? 아니다. 분수대 쪽에 배치된 광주상고 1학년 학생 문재학 등 무장시민 50여명을 향해 집단 발포하였다.

위성삼은 정문을 앞으로 해서 시민군을 10명씩 배치하자마자 동쪽의 도청 안 무장시민들로부터 서쪽의 도청 경비 시민들 쪽으로 총탄이 날아온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 장석화 위원: 그 때가 몇시경입니까?
○ 증인 위성삼: 새벽 3시경입니다. 그런데 그 때 옥상에서 M16 으로 우리들을 향해서 총을 쏘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 무엇 때문에 쏘느냐 우리편 아니냐!” 총을 쏘지 말라고……(제145회 국회 1989, 4:2).

박남선은 바로 그 시각에 무장시민들이 있는 쪽을 향하여, 즉 도청본부 자신의 위치에서 서쪽 방향인 분수대 쪽과 정문 쪽을 향하여 맹사격을 한 무장시민은 자신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분수대 건너편 어둠의 도시에다 총을 그어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고 분노에 대한 절규였으며 이 학살극에 뛰어든 나의 역할이었다.
나는 총알을 다 쏜 다음 탄창을 갈아끼우고 2층으로 올라갔다. 많은 동지들이 나를 따랐다. 2층으로 올라서자 복도의 유리창을 모두 깨라고 고함을 질렀다.
『챙그랑-탁!』
유리창은 파열음을 쏟으면서 조각들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나는 총구를 유리가 없어져 텅 빈 창턱에 올려놓고 금남로를 내려다 보았다. 분수대 근처와 정문앞 곳곳에 시체가 널려있었다. 몇 걸음 안되는 곳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아득한 죽음의 땅에 쓰러져 있었다. 거리에는 노란 섬광이 반딧불처럼 반짝이면서 날아다니고 비명소리, 총소리가 범벅이 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계속 긁어대기 시작했다. 총의 약실에서는 탄피가 낙엽이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졌다 (박남선 1988, 380).

조금 전 박남선은 박영순을 시켜 시민들이 도청 정문 앞으로 모이라고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하게 하였다. 만약 그 방송에 호응하여 도청광장과 도청 정문 앞에 모여든 시민들이 있었더라면 모두 박남선의 총에 맞아 전멸할 뻔하였다. 동일 사건을 박남선은 그의 최근 저서 『오월그날: 시민군 상황실장 광주상황보고서』 제2부에서 좀 더 상세히 기록하는데, 무장시민들의 총기난사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분수대 건너편 어둠의 도시에다 카빈총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
한 크립의 총알을 다 쏜 다음, 탄창을 갈아 끼우고 도청 2층으로 올라갔다. 많은 시민군들이 아니 동지들이 나를 따랐다. 몇 사람을 재외하고는 평소에는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었는데…(박남선 2014, 85).

박남선 상황실장이 1층 상황실에서 총기난사를 하다가 2층으로 올라갔었을 때 신만식만 따라 올라갔다. 박남선과 신만식은 무장시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5·18 국가유공자임에도 황석영은 이 두 명의 무장시민을 “공수대원 두 사람”으로 기록하는 대실수를 범하였다:

같은 시각, 도청 본관에서는 뒷담을 타고 넘어들어와 시민군의 전열을 교란시킨 공수대원 두 사람이 2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복도에 늘어서서 밖을 향해 사격하던 시민군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 들어 정문의 양 옆 담벽 아래 배치되어 있던 시민군들을 쏘았다. 아래쪽에서는 동료 시민군이 자기들을 쏘는 줄 알고 쏘지 말라고 외치면서 쓰러졌다 (황석영 1985, 243).

그때 철모를 쓰고 공수대원 복장을 한 기동타격대 조장들이 있었고, 방위병 신만식 등의 방위병 군복 얼룩무늬가 공수부대 군복 얼룩무늬와 아주 비슷해서 일반시민들의 눈에는 구별이 안되었다. 황석영의 기록대로라면 2층에서 박남선을 공수대원으로 오인한 무장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때는 무장시민들끼리도 서로를 모르던 때라 다수의 기동 타격대 대원들조차 그가 상황실장인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월그날: 시민군 상황실장 광주상황보고서』 86쪽에서 박남선의 증언이 이렇게 이어진다:
2층으로 올라서자 복도의 유리창을 모두 깨라고 고함을 질렀다. ‘챙그랑~탁!’ 유리창이 파열음을 쏟으면서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는 유리가 깨진 유리창 턱에 총구를 올려놓고 금남로를 내려다 보았다. 분수대 근처와 정문앞 곳곳에 우리 시민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박남선 2014, 86).

도청 2층 복도 창가에 배치된 무장시민들이 도청 정문 쪽에 배치된 무장시민들을 향해 30분간 간헐적 사격을 하였다. 박남선 본인이 주도하여 분수대 쪽으로 맹사격 하였다. 이렇듯 문재학과 안종필 등 고등학생들이 배치된 분수대 쪽을 향해 총기난사한 박남선은 1954년 9월 전남 화순군에서 출생하여 1969년 5월 광주 숭일중학교 2년을 중퇴하였다. 그의 총기난사 증언이 같은 책 같은 페이지에서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계속 적들에게 총을 난사하였다. 총의 약실에서는 탄피가 낙엽이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졌다. 총신은 빨갛게 달구어져 불속의 쇠처럼 식식거리고 있었다 (박남선 2014, 86).

박남선은 자신의 사격으로 여러 명의 무장시민들이 쓰러진 것을 보고서도 계속 그쪽을 향해서만 총기난사를 하였다. 바로 이때 도청 안 무장시민들이 도청 전면 건물 1층부터 3층까지 복도의 유리창을 전부 깨고 창틀에 총을 거치하고 배치되어 있던 상황을 황석영은 이렇게 기록한다:

도청 방어병력은 도청의 담벽 주위로 전면과 측면 쪽에 2, 3명이 1개조가 되어 2미터 간격으로 밀집 배치되었다. 도청의 뒤로는 약 40여 명 정도만 부속건물에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전원은 도청 전면 건물 1층부터 3층까지 복도의 유리창을 전부 깨고 도청 앞 광장을 향하여 배치됐다 (황석영 1995, 233).

청소년들은 사격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데다 방금 깡소주를 마셨기에 취해 있었다. 그들은 피곤했고, 생전 처음 가까이서 들리는 총소리에 당황하였고, 도청 전등이 모두 소등되어 있어서 자기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아 얼떨떨하였다. 그들 눈에 보이는 빛은 도청 정문 저편 금남로의 불빛뿐이었으며, 대부분 미진학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무장시민들의 모든 총구가 그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1층에서 박남선 상황실장이 사격을 개시하자 2층에서 윤석루 기동타격대 대장이 사격 명령을 내렸다. 도청 2층 복도의 창은 모두 도청 정문 방향이었으며, 창 유리를 깨고 총을 거치하였을 때는 총구가 모두 정문 쪽에 배치된 무장시민들을 향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사격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 명령은 대원 전원이 그 방향으로 사격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장시민들이 새벽 4시경에 사격을 개시하기 전에는 20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두 시간 후에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8만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듯 무장한 광주시민들이 사용한 실탄 양으로 계산해 보면 전쟁상황이었다.

국군 철모를 쓰고 도청 주변에 배치된 무장시민들은 도청 본관에 배치된 무장시민들이 자기를 계엄군으로 오인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도청 안 무장시민들 쪽에서는 이미 계엄군이 도청광장까지 당도하였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심리적 공황 상태가 되어 그 쪽을 향해 결사적으로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기동타격대 제1조 조장 이재춘은 박남선과 이양현과 신만식과 김태찬과 양승희와 손남승 등 여러 명의 무장시민들이 서쪽 방향인 도청 정문과 분수대 방향으로 사격하였을 때 자기 옆 무장청소년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가 총에 맞고 고꾸라졌음을 증언한다:

캄캄해서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꽤 많은 수가 도청이나 계림동 쪽으로 출동한 것 같았다. 그들은 총을 잘 쏠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중에 몇 명이 나에게 총을 어떻게 쏘냐고 물어왔다. 그들의 말은 총기교육을 받았는데도 총기 사용하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사태는 아주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도청으로 들어온 지원병들은 대부분 고등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나는 도청 분수대 앞쪽의 화단 뒤에 숨어 있었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계속적으로 들려왔다. 나와 같이 다른 화단의 뒷부분에서 지키고 있던, 도청으로 지원 나온 두 명의 시민군이 푹 고꾸라졌다. 내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했는데 고개를 들고 있다가 총을 맞았다(이재춘 1989).

위성삼이 50명을 정문 쪽에 배치하기 전에 윤석루가 배치한 기동타격대가 있었다. 기동타격대 제3조는 유일한 모범조였으며, 전날 오후부터 새벽 1시까지 시내 순찰을 한 후 전혀 휴식 없이 정문밖에서 경비를 섰다. 그런데 군 복무 경험이 없었던 19세의 청소년 윤석루는 교대 병력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을 까맣게 모른 체 오히려 그쪽을 향하여 집중사격 명령을 내렸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는가!

아직 청소년이었던 윤석루 기동타격대 대장보다 4살이나 위였던 제3조 대원 염동유의 직업은 다방 주방장이었으며, 기동타격대 대원들 중 오정호와 더불어 가장 연장자였다. 윤석루가 편성한 기동타격대 대원들은 16세 청소년들이었으므로 23세의 염동유가 가장 연장자였던 것이다. 가장 연장자인 자기가 도청 정문 바깥에서 두 시간이 넘도록 경비를 서고 있는데 교대시켜 주기는커녕 자기 조를 향해 총질을 하는데 너무 화가 나서 도청 정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서 “어디 대고 총질이냐? 모두 다 죽인다!”고 악을 썼다. 대선배가 그렇게 악을 썼는데도 총질을 멈추기는커녕 도청 안의 무장시민들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청 바깥 무장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대기 시작한 사실을 염동유가 증언한다:

도청 정문 앞에 차를 세워두고 정문 앞에서 경비를 섰다. 그때는 시멘트로 만든 화분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방패막을 삼았다. 나와 정광호 씨는 함께 있었고, 다른 대원 3명은 옆에서 경비를 섰다. 정문 밖에 경비를 선 대원은 우리뿐이었다.

새벽 3시쯤 되었을 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계엄군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계엄군들이 도청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뒤쪽으로 들어왔다. 도청 쪽에서 총알이 날아와 방패막으로 삼고 있던 화분에 맞았다. 화분이 시멘트라 돌가루가 내 얼굴로 튀어 얼굴에서 피가 났다. 나는 순간 흥분하여 도청 정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악을 썼다.

“어디 대고 총질이냐? 모두 다 죽인다!”
그렇게 악을 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담배를 3분의 2쯤 피우는데 본격적으로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염동유 1989).

그러면 도대체 도청안 무장시민들이 전일빌딩 방향으로 총질을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단 한 명의 계엄군이라도 분수대와 전일빌딩 쪽에 있었는가? 염동유는 분수대 주변에서 도청 경비를 하던 기동타격 대원들은 단 한 명의 계엄군 그림자도 보지 못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조금 전의 기세는 사라져버리고 다만 M16의 연발로 나가는 총소리에 기가 질려 있었다. 나와 정광호 씨는 군복 상의를 벗어 길바닥에 던지고 가지고 있던 카빈 총 역시 길바닥에 던졌다. 군복 하의와 경찰 혁대, 수갑, 기동타격대증은 미처 버리지 못했다. 총소리가 뜸했다가 다시 연발로 들리곤 했다. 총소리가 뜸해지자 우리는 손을 들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도청 안과 분수대쪽에서는 계엄군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염동유 1989).

광주 서석국민학교 5학년을 중퇴한 당시 24세의 농사꾼 기성공은 도청 화장실 창문 밖에 총구를 대고 연발 사격을 하고 있었기에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없게 되자 어떤 고등학생은 사무실 구석을 변소 공간으로서 활용하여야 했던 사연을 황석영이 기록한다: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고 했다. 공수부대원은 아닌 것 같아서 열어 주었더니 고등학생이었다. 그는 대변이 마려워 못 견디겠다고 했다. 학생은 사무실 구석에 가서 일을 치루고 있었다 (황석영 1985, 244).

광주해방구 본부 조직 중에 ‘조사반’이라는 것이 있었다. 김준봉은 조사반에는 동신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양승희 외에도 중앙 여고생 경아 등 여고생 및 여중생도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후 나는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다. 계엄군은 오지 않았다. 한전 앞까지 오다가 철수했다는 보고만 들어왔다. 우리 조사반은 구관이 명관이라고 해서 내가 조사부장이 되고 양승희, 위성삼, 손용준, 신만식, 중앙여고생 경아와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경아 친구 등으로 새롭게 인원이 구성되었다. 방송실 옆으로 사무실을 옮겨 상황실과 함께 썼다. 그리고 잡혀와 있는 정향규에게 나는 수갑을 채워버렸다 (김준봉 1989).

그런데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경아 친구”라는 말의 직설적 표현은 “초등학교 졸업한 소녀”이다. 광주해방구 최고의 사법기관이었던 조사반 반원들의 학력 수준은 이처럼 의외로 낮았다.

시민들을 납치하여 도청으로 끌고 오는 무장시민들을 나중에 시민군 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조사부 부장이었음을 자처하는 신만식은 자신은 건달세계 대장으로서 조사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었다고 증언한다:

이렇게 시작한 서울 생활의 대부분을 나는 건달 세계에서 보냈다. 내가 일했던 곳은 남산 밑에 있는 ‘한진고속’을 무대로 인근 사창가의 기둥서방이나 소매치기 등이 70-80여 명 정도 있었다. 체격도 좋은 나는 건달 생활 1년 만에 두각을 나타내 ‘한철석’이라는 가명까지 쓰면서 행동대장을 했다. 이후로는 종로까지 진출해 뉴서울관광호텔 부근에서 구두도 닦으며 종로 부근의 건달들과도 어울렸다.

종로에서 살다가 마음을 잡으려고 회사에 취직하여 열심히 일했다. 그렇다고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이면 항상 시내를 나돌아 다녔다. 회사에 다니면서 월급도 받았지만 저축은 생각도 못 하고 주로 시내에 나가 다 써버렸다. 이런 생활을 3년 정도 하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로 내려와서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공과기술학원을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이것도 적성에 맞지 않아 별로 흥미를 못 느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며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나의 일을 부탁하곤 하셨다. 그 덕분에 ‘아세아자동차’에서도 근무했고, 다른 회사에도 나갈 수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밤이면 광주시내로 나가 시내를 배회하는 여러 사람을 나의 조직으로 꾸려 내가 대장을 했다. 처음에는 제일다방을 중심으로 한 제일파를 조직하고, 이후에는 조직이 커지자 시내의 큰 조직인 OB파의 새끼조직으로까지 부상했다. 언젠가는 OB를 완전히 잡을 생각이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한철석’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화물차를 사서 양동 주위에서 사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양동의 건달 세계에도 몸담게 되었다(신만식 1989).

건달세계 대장은 쉬운 말로 깡패 두목이다. 5월 21일 공비들이 광주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 해방구를 설치한 순간부터 광주법원과 광주 경찰서는 해방구 무장단체에 종속되었다. 공비들은 해방구가 설치된 지역을 대한민국 영토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이상 광주법원 상위기관이 법무부가 아니었고, 전남도경 상급기관이 내무부가 아니고, 모두 해방구 조사부의 지배 하에 있게 되었다. 즉, 광주해방구 조사부장은 대법원장과 검찰총장 이상의 사법권과 수사권을 겸하여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가 바로 깡패 두목이었던 것이다.

시민들이 조폭두목에게 조사받고 인민재판 받는 것이 광주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사법 정의의 구현이었는가 아니면 무법천지의 극치였는가? 건달세계 대장에게 조사를 받는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모두 살려 달라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신만식은 경찰 간첩 혐의로 자기에게 조사를 받은 화순 주민 박인숙이 자기에게 어떻게 목숨을 구걸하였는지를 증언한다:

5월 27일 새벽이 되었다. 나는 그때도 시민들의 신고로 잡혀온 여러 사람을 조사하고 있었다. 대충 30명 가량이 잡혀와 있었다. 도청 함락 직전에는 간첩혐의로 잡혀온 박인숙과 배00 부부를 조사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이 간첩혐의로 잡혀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 어디서 살아?”
“화순 못 미처 1유판리에 삽니다.”
“그럼 000 알아?”
내가 아는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이름을 댔더니 여자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내 발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그분을 잘 압니다.”
독침사건 등으로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살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여자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다(신만식 1989).

대한민국을 적국으로 간주하는 광주해방구 용어에서 ‘간첩’은 사복 경관을 지칭하였다. 무장시민들이 시민들 중에 사복경관이 있다는 색안경을 쓰고 시민들을 보았을 때는 여러 시민들이 사복경관으로 보여 체포 대상이 되었다. 이렇듯 조사부는 애매한 시민들을 사복경찰 혹은 사복군인으로 엮어 체포하여, 조사하고, 심지어 인민재판으로 즉결 처형도 하는 부서였다. 5월 27일 새벽에도 도청에는 무장시민들에게 잡혀와 갇혀있는 시민들이 30명 가량 있었는데, 이분들은 다행히 그 날 아침 광주에 재진입한 계엄군들 덕분에 구출될 수 있었다.

사진 22 ▲사진에서 5월 23일 해남 농민 김인태씨를 납치하여 오른 팔을 낚아채고 도청 안 조사실로 끌고가는 밤색 바지 입은 청년이 박병규와 많이 닮았다. 조사실로 끌려간 김인태씨는 조사받다가 사망하였다. 박병규 역시 5월 27일 새벽 4시 반경에 도청 안에서 무장시민들의 총기오발사고 희생자가 되었다. 김인태 납치를 지휘하는 박남선의 손에 M16유탄발사기가 들려 있으며, 윤상원도 5월 27일 새벽에 박남선의 유탄발사기에 맞아 사망하였다.

5월 26일 밤까지 용감하게 광주시민들을 체포하던 무장시민들이 27일 새벽에는 용감하게 같은 편 무장시민, 즉 광주시민들을 향해 총기난사를 하였다. 2층 복도 난간에서뿐만 아니라 1층 상황실에서도 무장시민들이 도청 정문 쪽을 향하여 총을 쏘고 있었다. 김준봉의 조사반은 5월 25일부터 상황실 내에 칸막이를 쳐놓고 한 사무실을 상황실 요원들과 같이 쓰고 있었다. 총을 쏠 줄 모르는 동신고교생 양승희는 창문에 총구를 올려놓고 도청 정문 쪽을 향하여 연발 사격을 하였다.

1988년 월간 국민일보 10월호에 “죽은자가 산 자에게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위성삼은 도청 뜰 앞에 방어선을 치고 무장시민들을 배치하는 순간 2층 난간의 무장시민들이 도청 뜰앞 쪽으로 M16을 난사하였으며, 1층에서도 상황실 쪽에서, 즉 조사실에서 양승희가 총을 쏘고 있었을 때 무장시민 한 명이 상황실에 쓰러져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27일 새벽 살풋이 잠이 들었는데 새벽 4시경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우리들은 재빨리 움직여 탄약을 배급받고 도청 뜰앞, 옆, 뒤에 방어선을 쳤다. 엄폐물을 중심으로 각 2인 1조씩 배치를 시키고 있을 무렵 갑자기 2층 난간에서 M16이 난사되었다.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상대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무조건 “우리편이니 쏘지 마라”고 외쳤다. 그랬더니 이내 총구는 다른 곳을 향했다. 번뜩 상황실에 남아 있던 여고생과 박영순씨를 떠올리고 얼른 대피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1층 상황실로 뛰어오르는 순간 상황실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낮은 포복으로 상황실에 접근한 나는 상황실로 뛰어 들어갔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려고 하면서….

들어가 보니 총기 오발사고로 시민군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평소 부상을 대비해 배에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다니던 나는 배에서 붕대를 풀어 그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다 (위성삼 1988a: 24-25).

동신고교생 양승희가 도청 바깥 쪽 무장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을 때 상황실 가까이에서 도청 안 무장시민의 오발탄에 맞아 쓰러진 무장시민의 이름은 동국대 1학년 박병규였다. 광주 출신으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5월 19일 광주로 내려온 박병규는 바로 그날부터 난동자들과 어울려 폭력시위 현장을 누볐다. 박병규가 나흘 만인 5월 22일 새벽에 비로소 잠깐 집에 들렀을 때 ‘가시가 잔뜩 달린 몽둥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모친 김양애는 이렇게 증언한다:

며칠 동안 소식이 없던 병규가 22일 새벽에 불쑥 집에 들어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물론이고 얼굴, 머리 모양새가 영락없는 거지 형상이었다. 게다가 손에는 가시가 잔뜩 달린 몽둥이까지 들고 있었다. 지금껏 어디서 무엇 하다 이제사 오느냐며 안부반 나무람반으로 다급하게 묻는 내게 병규는 전남대학교에서 싸우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밥은 물론이고 물 한모금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어 배가 고파 집에 왔다고 했다. 서둘러 밥을 지어 먹이고 옷을 갈아 입게 한 다음 목욕, 이발까지 시켰다. 가시가 달린 몽둥이를 들고 싸워서 그런지 병규 손바닥에는 여러 개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나는 눈이 어두워 딸 경순이가 가시를 빼주었다 (박병규·김양애 1988).

5월 22일에야 두어 번 집에 들어왔던 박병규의 손에는 가시 박힌 각목이 들려 있었음을 그의 여동생 박경순은 이렇게 증언한다: “손에는 각목을 들고, 갈아입지도 못한 옷에, 머리는 덥수룩하게 길어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에 박힌 각목의 가시들을 하나하나 빼주고, 거친 머리카락도 잘라주었다” (박병규, 박경순 2006, 336).

박병규가 5월 22일 새벽 잠깐 집에 들려 아침식사를 하기가 무섭게 난동자들이 그를 데리고 나갔으며, 그 후 나흘간 아무 소식이 없었던 그가26일 오후 8시 30분에 도청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그 마지막 통화를 여동생 박경순은 이렇게 증언한다:

“어, 경순이냐? 나 여기 어딘 줄 아냐? 여기 도청 무슨 국장실이다. 국장 의자에 앉아서 전화한다. 하하, 엄마 좀 바꿔주랴.”
병규의 목소리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전화를 건네받은 어머니는 아들에게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말이라는 것을 그때의 어머니는 알지 못했다 (박병규, 박경순 2006, 338).

병규는 장난기가 가득했으며, 바로 그런 장난기 가득한 분위기에서 청소년들은 도청에서 술 마시고 양담배 피고 있었던 것이다. 병규가 말한 무슨 국장실은 해방구 조사실이 붙어있는 상황실이었으며, 몇 시간 후 바로 그곳에서 병규는 무장시민 총에 맞아 사망한다. 위의 여동생 경순이 증언한 마지막 통화를 병규의 모친 김양애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날 저녁 8시 30분경에 병규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걱정하시는 건 알지만 여기 있는 친구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들어갈 수가 없네요. 내일 아침에 일찍 갈께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5월 27일 새벽 광주를 재진압하러 쳐들어온 군인들의 총을 맞고 병규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박병규·김양애 1988).

박병규는 그의 조사부 동료였던 고등학생이 낸 총기오발 사고 희생자였다. 5월 27일 새벽의 무장시민 총기난사 희생자들 중 가장 먼저 신원이 확인된 인물이 박병규였다. 점심시간 무렵 조광흠 조선일보 광주주재기자와 조성호 한국일보 기자 등 한국기자들이 상황실에서 꽃을 깔고 반듯이 누워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군복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조광흠 기자는 그가 동국대학교 전자계산학과 1학년 박병규라는 사실을 금방 확인하였다. 도청건물 내에서는 박남선의 유탄발사기에 맞아 사망한 윤상원 외에 유일한 희생자는 박병규였다.

박병규의 사인은 흉부 관통상(좌흉부 맹관 총창)이었는데, 자기 등 뒤에서 날아오는 오발탄에 맞아 생긴 총상이었다. 사고 발생 경위는 이러하다.

5월 22일 이재의는 도청 1층 서무과 사무실을 상황실로 정하였으며, 이때부터 박병규는 도청에서 숙식을 하며 상황실 출입을 자주하였다. 그가 26일 오후 8시 30분에 집으로 전화를 걸 수 있었던 것도 그는 상황실 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부장은 김준봉이었는데, 양승희는 고등학생이요, 위성삼은 군대도 갔다 오고 조선대 4학년이었지만 양승희가 먼저 조사부 부원이 되었기 때문에 부반장 감투를 쓰고, 위성삼은 양승희 부하 역할을 하였다. 조사실은5월 25일부터는 상황실에 칸막이를 하고 상황실 한 공간을 사용하였다.

양승희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조사반 부반장이라는 감투가 있어서 새벽 3시경에 자동소총을 지급받았다. 총을 쏠 줄 모르는 양승희가 상황실 창문에 총구를 올려놓고 방아쇠를 당기니 한 클립 14발이 모두 발사되었다 (한국교회협의회 1987, 7:582). 박병규는 상황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했는데, 양승희의 총이 연발 발사되고 있었을 때 등에 관통상을 입었다.

불과 6시간 전이었던 전 날 밤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던 바로 그 전화기 옆에 쓰러진 박병규는 송원공업전문대 여학생 박영순과 동신여고생의 간호를 받았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박영순은 계엄군이 도착하기 두 시간 전에 방송실에서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읍니다”라고 방송하였던 여대생이다. 이렇듯 박병규는 아직 계엄군이 도청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무장시민 총기난사 사고로 사망한 사실의 두 명의 현장목격자가 조선대 학생 위성삼과 송원공업전문대 학생 박영순이다.

어떤 청소년들은 폭력시위에 가담하면 어른들과 달리 무척 과격해진다. 고등학생이었던 양승희는 5월 20일 오후 6시 30분에는 공영터미널 앞 로터리에서 경남 소속 8톤 트럭을 발견하자마자 화염병을 투척하여 불태워버렸다. 화물 트럭을 불태우면 그 안에 탄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는 그 다음날 새벽에는 KBS 방송국 방화 및 파괴에 가세하였다. 그 날 밤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하고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되자 그는 그 다음 날 온종일 정문에서 총 들고 경계근무를 서고, 다음날 23일 아침부터 25일 밤까지 도청 복도에서 경계근무를 섰으며, 26일 오후 1시에는 광주해방구 정치 기구였던 ‘시민투쟁위원회’ 조사과 조사부반장이 되었다.

양승희는 총을 쏠 줄 모르는 고등학생으로서 오발 사격을 하였지만, 총을 쏠 줄 알면서 광주시민 방향으로 M16소총을 쏜 무장시민은 양승희의 조사과 동료(건달 두목) 신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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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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