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21]

광주시민을 명중시킨 무장시민 총기난사(1)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3장 ∙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7. 광주시민을 명중시킨 무장시민 총기난사(1)

5월 27일 새벽부터 아침 사이에 상무관 쪽에 배치되어 있었던 무장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쪽에는 계엄군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우리는 광주경찰서를 바라보고 상무관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상무관 앞에는 계엄군이 없었다” (김현채 1989).

광주해방구 수사기관인 조사부 요원들은 M16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신만식은 상무관 쪽, 즉 도청 정문 바깥에 무장시민들이 배치되어 있는 쪽으로 M16 사격을 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본관 2층 복도에 서서 상무관 쪽을 향해 M16 총을 있는 힘껏 드르륵 드르륵 긁어댔다” (신만식 1989).

신만식은 상당히 많은 M16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1층과 2층 사이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던 그는 한번만 M16을 연발 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연발 사격을 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아픈 몸을 질질 끌고 본관 2층으로 올라온 나는 끝까지 싸우고 죽으리라는 결심을 하며 상무관 쪽으로 다시 한번 있는 힘껏 총을 긁어댔다” (신만식 1989).

사진 23 ▲ 도청방어 책임자였던 위성삼은 5월 27일 새벽의 시민군 총기난사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27일 새벽녘에 얼핏 잠이 들었는데 비상이 걸렸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무기고에서 탄약을 배급하고 시민군을 배치시키면서 계엄군이 쏘기 전에는 절대 먼저 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런 뒤에 정문 쪽으로 점검을 하러 갔는데 갑자기 2층에서 총소리가 났다. 나는 우리 편이 잘못 보고 쏘는 줄 알고 쏘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상황실로 들어갔다. 상황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위성삼 1988b).

신만식이 이렇게 상무관 쪽으로 M16을 쏘았기에 전일빌딩에 탄흔이 생기고, 그 쪽 방향에 배치되어 있었던 무장시민들이 M16 총상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위성삼은 도청 1층에서는 그의 조사반 동료 양승희가, 본관 2층 복도에서도 그의 동료 신만식이 M16총을 드르륵 드르륵 긁어댄 것을 어둠 속에서도 인지할 수 있었다.

민간인들이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지만, 총이 깡패들 손에 들어갔을 때는 더욱 위험하였다. 윤상원의 최측근 이양현이 예고 없이 갑자기 도청의 모든 전등을 소등하여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되자 ‘건달 대장’ 신만식은 당연히 상무관 쪽에 무장시민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고 무조건 그쪽으로 M16을 긁어댔다.

이 와중에 위성삼은 가두 방송원이던 송원공업전문대 여학생 박영순이 상황실에 있는 줄로 알고 상황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던 것인데, 그 안에서도 무장시민 총기 오발 사고로 인해 무장시민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위성삼은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럼없이”라는 제목의 증언록 에서도 도청 2층의 무장시민들이 도청 정문 쪽의 무장시민들을 향하여 사격한 사실을, 그리고 무장시민 총에 얼굴을 맞은 무장시민이 상황실로 들어온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27일 새벽녘에 얼핏 잠이 들었는데 비상이 걸렸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무기고에서 탄약을 배급하고 시민군을 배치시키면서 계엄군이 쏘기 전에는 절대 먼저 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런 뒤에 정문 쪽으로 점검을 하러 갔는데 갑자기 2층에서 총소리가 났다. 나는 우리 편이 잘못 보고 쏘는 줄 알고 쏘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상황실로 들어갔다. 상황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때 한 시민군이 얼굴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들어왔다. 방송하는 여자들과 함께 그 사람을 치료하고 있는데 밖에서 총소리가 났다(위성삼 1988b).

그때는 이양현이 상황실을 제외한 도청 내의 모든 전등을 소등한 상태라 2층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윤석루 기동타격대 대장이 사격 명령을 내렸으나 총을 어디다 대고 쏘라는 것인지 대원들이 몰라 사실상의 난사 명령이 되었다. 기동타격대 제7조 조장 김태찬(당시 19세)은 2층 복도 대원들이 무조건 아무데나 총을 대고 갈겨 대원 총에 대원이 맞았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밤 12시가 되어서 2층 민원실에서 저녁밥을 먹었는데, 그날 따라 벌건 돼지고기가 나왔다. 그 전에는 계속 닭고기만 나왔었다. 밥을 먹고 나니까 거기에서 일하던 고등학생이 “형! 나 갈라요”하고 말하길래 보내주고, 또 어떤 애들은 총을 달라고 해서 “너희들은 살아야 된다”고 하면서 뺨을 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대기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따다당’ 소리가 났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2층 복도에 있었는데 모두가 총을 벽에 세워 놓고 앉아 있는 상태였고, 총탄은 나의 경우 3클립을 가지고 있었다. 총소리가 나기 전까지 모두 앉아서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나도 솔직히 죽는다는 것이 실감이 안 났다.

공격개시와 함께 총을 쏘는데 너무 긴장을 해서 손이 떨리고 총탄이 안 나갔다. 옆의 애에게 말했다.

“야! 총탄이 안 나가야.”

“그럼 이리 줘봐라.”

그애는 내 총을 점검했다.

“야! 임마 총탄이 두 알 박혔잖아.”

그러고는 내게 총을 넘겨주었다. 총을 쏘는데 그 녀석이 옆에서 ‘픽’ 쓰러졌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야, 임마, 얼른 일어나야.”

몸을 만지니까 따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나하고 장난치던 애가 죽으니까 정말 그때서야 죽음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옆에서 죽자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도 났고, 아니면 이성을 잃었다고나 할까. 그때부턴 무조건 갈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종기 씨가 총을 회수하러 왔다.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2층 상황실로 올라가는데, 그때 계엄군이 도청 건물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김태찬 1988).

김태찬의 증언으로도 재삼재사 확인되듯이 2층 복도의 무장시민들이 도청 정문 쪽으로 총을 갈긴 것이 먼저였고, 그 사이 소리 없이 뒷담을 넘고 숨소리도 죽이며 도청 본관 쪽으로 이동한 3공수 특공중대가 도청 현관에 막 도착한 때는 그로부터 약 30분쯤 지난 후였다.

그러면 김태찬 옆에서 총을 쏘던 무장시민은 왜 갑자기 쓰러졌던 것일까? 16세 청소년 구성회가 아래층에서 위층 쪽으로 총을 쏘았고, 광주운동권 김영철이 민원실에서 두 발의 오발탄을 쏜 것도 2층에서 한 명의 무장시민이 총상을 입은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김태찬이 무조건 총을 갈기기 시작했는데 그 방향이 정문 쪽이었다. 위성삼과 염동유가 정문 쪽에는 같은 편이 있으니 그쪽으로 쏘지 말아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2층에서는 막무가내로 자기편을 향하여 총을 갈겼다.

기동타격대 제1조 조장 이재춘은 방위병 군복을 입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수부대 모자를 쓰고 있어서 무장시민들이 보기에도 공수대원처럼 보였다. 당연히 도청 분수대 화단 뒤에 무장시민들이 배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남선과 신만식과 김태찬 등이 그쪽으로 M16 소총 연발사격을 하였을 때 이재춘 옆에 있던 두 명의 광주상고 1학년 학생 문재학과 안종필이 그 총에 맞았다. 문재학 군은 목을, 안종필 군은 목 아래를 맞았는데 둘 다 그때 나이가 16세였다. 광주상고 1학년 단짝친구 두 명이 동시에 광주시민들의 총에 맞아 열사가 된 사건을 이재춘은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도청 분수대 앞쪽의 화단 뒤에 숨어 있었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계속적으로 들려왔다. 나와 같이 다른 화단의 뒷부분에서 지키고 있던, 도청으로 지원 나온 두 명의 시민군이 푹 고꾸라졌다. 내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했는데 고개를 들고 있다가 총을 맞았다. 그들은 상무관 쪽의 군인들에게 총을 맞은 것이다. 나는 그때 항쟁기간 중 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했는데 어린 나이의 지원병들이 죽어가자 너무나 섬뜩했다. 나는 지원병들이 총을 맞기 전까지만 해도 상무관 쪽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편인 줄 알고 군인들을 향해 군인들의 동태를 묻기까지 했다. 지원병 2명이 죽자 나는 무조건 상무관 쪽을 향해 총을 갈겨 대고 낮은 포복으로 도청 안으로 들어왔다(이재춘 1989).

도청 안에도 상무관 쪽에도 무장시민들만 있었다. 이재춘 역시 상무관 쪽의 무장시민들을 향해 총을 갈겨 대었다. 그러나 문재학 군과 안종필 군은 상무관 쪽 무장시민들이 쏘는 총에 맞았던 것이 아니라 도청 안 무장시민들이 쏘는 총에 맞았다. 도청 분수대 앞쪽의 화단 뒤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가 도청 돌담을 넘어오는 무장시민 총탄에 목을 맞은 문재학 군은 그 총탄에 턱까지 손상되었다. 그런 사실은 문 군의 모친 김길자의 증언에 이렇게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재학이를 신묘역으로 이장하는 날, 아들의 뼈를 고르는 어머니의 손이 한없이 떨리고 설움이 가슴에 북받쳤다. 재학이 얼굴의 뼈는 코 아래쪽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살아있는 재학이를 단 한번만이라도 보듬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어머니를 보고 환히 웃어주면 살아생전의 재학이 얼굴을 다시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져서 재학이를 부르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 (문재학, 김길자 2006, 328-329).

사진 24 ▲ 무장한 광주상고 학생들의 모습이 사진에서 보인다. 왼쪽의 수염 기른 장발족 청소년은 광주상고 3학년 정희문 학생이다.

문재학과 동시에 광주시민 총에 맞은 광주상고 1학년 학생은 안종필 이었다. 5월 19일 오전에 광주 시내의 모든 초중고에 휴교조치가 내려졌음에도 누군가가 5월 20일 전화로 광주상고 학생들을 학교로 불러내 무장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날부터 무장단체 활동을 하던 종필이의 모습을 그의 어머니 이정임씨는 몇차례 현장 목격하였는데, 5월 24일경에도 총을 메고 시민군 차를 타고 다니던 종필이의 모습을 이정임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24일경, 집 앞 산수오거리에 나섰다. 총을 메고 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차체를 두들기며 큰소리로 뭐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소리는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였다. 유심히 살피던 어머니 눈에 종필이가 보였다.

“아야 종필아! 종필아 얼른 내려라. 얼른 내려!”

“엄마, 나 도청에 들어갔다가 금방 갈게. 얼른 집에 들어가 있어.” 눈에 들어온 아들을 두고 그냥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도청으로 달려가 기어이 종필이를 찾아냈다(안종필, 이정임 2006, 367-368).

사진 25 ▲ 어머니 이정임씨가 현장목격한 16세 소년 안종필의 무장한 모습은 광주사태 영상물에도 나온다. 그 때는 고등학생들이 빡빡머리였던 시절 이었음에도 의외로 광주상고 학생들 중에 장발족이 많았음이 눈에 띈다. 위의 캡처에서 앞에서 총구를 앞으로 겨누고 있는 더벅머리 무장소년 얼굴이 안종필의 학생증 사진과 흡사하다.

5월 27일에 맨 처음 사망자 수가 발표되었을 때는 국군 사망자 수와 무장단체 사망자 수가 엇비슷하였는데, 그것은 임수원 중령이 의도적으로 무장단체 사망자 수를 줄여 발표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임 중령이 인솔한 특공조의 임무는 도청을 점거한 무장 난동자들로부터 군 무기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청 안에는 윤상원과 박종규 등 단 두 구의 무장시민 시신만 있었다. 임 중령은 무기회수 임무 완수 후 즉시 원대 복귀하느라 도청광장에 가 볼 이유가 없어서 거기 광주시민 총에 맞은 무장시민 시신 10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 턱이 없었다.

임수원 중령이 인솔한 78명의3공수여단 11대대 특공중대는 올 때도 도청 뒷담을 넘어 들어왔고 두 시간 후 아침 6시30분경에 20사단 61연대에 작전을 인계하고 원대 복귀할 때도 오던 길로 복귀하였으므로 그 반대 방향인 분수대 주변의 사망자들을 보지 못하였다.

사진 26 ▲ 5월 27일 새벽 도청 2층 복도에 배치된 무장시민들은 도청 정문쪽에 배치된 무장시민들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자기 편을 향해 집중 사격하였다. The guns of militia in the provincial government hall aimed at other militias near the main gate.

날이 훤하게 밝은 후 도착한 20사단 61연대 병력이 분수대 주변 및 도청 정문 바깥을 청소하던 중에 문재학과 안종필과 박성용 등 무장시민 시신 10구를 발견하여 도청 안뜰로 옮겼다.

임수원 중령이 인솔한 78명의 특공조는 도청 안에서 단 한 명의 무장시민에게도 총을 쏜 적이 없었지만, 임 중령의 특공조가 원대복귀하기 위해 떠난 후 도청광장에서 무장시민 시신 10구를 발견한 20사단 61연대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기에 도청 구간 12구의 무장시민 시신이 모두 계엄군과의 총격전 희생자들인 것으로 억측하고 20사단 작전일지를 기록했다.

지난 30여년 동안 5·18측의 프로파간다 영상물들은 도청 뜰에 나란히 눕힌 15구의 시신 사진과 영상만 자꾸 보여주고 시간별로 5월 27일 새벽 도청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혀 말해주지 않음으로써 국민에게 그들이 도청 안 전투 희생자인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객관적 진실은 도청 안에서는 전혀 총격전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임수원 중령이 인솔한 특공조는 단 한 명의 무장시민에게도 총을 쏜 적이 없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새벽 4시부터 도청광장 쪽의 자기 편을 향해 약 30분간 총기난사하였던 도청 안 무장시민들은 막상 4시 반경 임 중령의 특공조가 도청 본관에 도착하였을 때는 모두 항복 권유 방송대로 순순히 항복하였다.

사진 27 ▲ 새벽4시 교회 새벽종소리가 울리자 YMCA 마당에서 북한군 황두일이 아주 큰 소리가 나는 총을 쏘았는데, YMCA 바로 옆 관광호탤에 투숙하고 있었던 외신기자들이 모두 잠을 깰 만큼 크게 총성이 울렸다. 도청 안 무장시민들에게는 그 총소리가 정문 바깥 도청광장에서 나는 소리로 들려 그때부터 약 30분간 도청광장 방향으로 총기난사를 하였는데, 거기에는 단 한 명의 군인도 없고, 무장시민만 50 여명 배치되어 있었다. 이 총기난사로 인해 문재학과 안종필 등 광주상고 학생들을 포함한 10명의 광주시민이 사망하였다.

무장난동군과 계엄군 사이의 전투는 계림국민학교 인근과 YWCA 회관에서만 잠깐 있었는데, 이 두 전투에서 각각 2명씩 발생한 사망자 4구의 시신도 보병부대 20사단 61연대 병력이 도청 안뜰로 운구한 후에 외신기자들이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도청 안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시신들은 그 전투 중 군인 총에 맞아 사망한 희생자들인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었다.[11]

이재춘은 공수 모자를 썼을 뿐만 아니라 그가 상무관 쪽으로 갈겨댄 총이 M16이었다. 그러니 그가 도청광장에서 M16 총기난사를 하였을 때는 도청 안 무장시민들 귀에는 그 총소리가 계엄군의 M16 총소리로 들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진 28 ▲ 문재학과 안종필 등 광주상고 1학년 무장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있었으며, 5월 27일 새벽 분수대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가 도청 안 무장시민들이 분수대 쪽으로 집중 사격하는 총에 맞고 쓰러져 있고 그 옆 무장시민 지프차에 39번이란 일렬번호가 매겨져 있다. 이 지프차는 5월 21일 오후 1시 반경 난동자들이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러 군경을 향하여 돌진시켰을 때 분수대에 부딪쳐 찌그러진 지프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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