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22]

광주시민을 명중시킨 무장시민 총기난사(2)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3장 ∙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7. 광주시민을 명중시킨 무장시민 총기난사(2)

2017년의 제37주기 5∙18 기념식 때 문재학 군의 어머니 김길자 씨가 발포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문재학과 안종필 등 광주상고 1학년 학생들이 배치된 쪽으로 총을 쏜 유일한 무장세력은 무장한 광주 시민들뿐이었다. 5월 27일 새벽에 총을 지급받고 분수대 앞 화단 옆에 배치되어 있다가 도청 본관 2층에서 무장시민들이 분수대 쪽을 향해 쏘는 총에 맞아 사망한 조대부고 3학년 박성용은 이미 5월 21일부터 총을 들고 다녔던 사실을 그의 어머니 김춘수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래서 인제 그놈을 찾지도 못하고 식구들은 이놈이 어디서 죽어 부렀다고 울고불고 초상집 같이 됐는디 21일 날엔가 밤에 그놈이 들어왔데요. 그랑쩨 18일날 나가서 21일날 밤에 들어온 거지라. 신역 얘기랑은 그때 들어와서 해준 거지라. 지도 인자 총을 들고 댕긴다고, 그럼서 지가 하고 댕긴 이야기를 하는디, 김기열씨 아들하고 우리 성룡이 하고 동창인갑디다. 그러니까 그 동안 총을 들고 차 타고 댕기다가 친구집이라고 그집에 갔는갑써. 나한테는 못오고 엄마한테 총을 들고 오면 야단난리가 날 것 같고 하니까 친한 친구집엘 갔는갑제. 그래서 총을 들고 그 집에를 가니 김기열씨가 깜짝 놀랐제. 공부허는 어린 학생이 총을 들고 왔응께. 오죽 놀랬것소(김춘수 1988, 13).

어린 학생이 총을 가지고 다닌다고 김기열씨한테 뺨을 맞은 박성용은 눈물을 흘린 후 집에 왔으며, 그의 어머니는 그 후로는 박군이 외출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난 후 5월 26일에 박군은 방림동에서 자취하는 친구 집에 갔다 오겠다고 하고, 어머니는 도청 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허락해 주었다 (김춘수 1988, 14).

그 날에는 도청광장에서 궐기대회가 두 번 있었으며, 집을 나온 후 곧장 오후의 궐기대회에 참석한 박성용은 무장봉기 주동자들이 고등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듣고 다른 고등학생들과 함께 YMCA 회관으로 몰려가 지원하였다. 박성용의 친구 문재학은 5월 26일 밤에 자기 집으로 전화한 사실을 김춘수는 이렇게 증언한다:

26일날 밤에 중흥동 아들(문재학)은 “나 도청에 있다”고 밤에 전화를 해왔다고 합디다. 그래서 “얼른 집으로 오라”고, “거기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다”고 헝께 “다 이렇게 죽어가는디 나만 살자고 가야”고 고집 아들은 그랬다고 그럽디다(김춘수 1988, 17).

문재학과 안종필과 박성용 등 자신이 인솔한 세 명의 고등학생들이 광주시민 총에 맞아 쓰러진 후 이재춘은 그 때 분개하여 상무관 쪽을 향해 총을 갈겨 대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지원병들이 총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상무관 쪽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편인 줄 알고 군인들을 향해 군인들의 동태를 묻기까지 했다. 지원병 2명이 죽자 나는 무조건 상무관 쪽을 향해 총을 갈겨 대고 낮은 포복으로 도청 안으로 들어왔다(이재춘 1989).

기동타격대 제1조 조장이라 칼빈이 아닌 M16을 지급받았던 이재춘은 오로지 광주시민들을 향해서만 M16 사격을 하였다. 시민군 보급부 조장 천순남은 5월 27일 새벽 자신이 인솔하여 상무관 쪽에 배치한 사람들은 모두가 무장한 광주시민들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 여섯 명은 도청으로 들어가 왼쪽 식당에서 밥을 먹고 버스에 대기하고 있었다. 27일 새벽 4시경 기동타격대 3조인가 4조에서 계엄군이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을 무전기로 전해주었다. 곧이어 상황실장의 방송이 들려왔다.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모여주십시오. 계엄군이 광주시로 진입해 들어오려는 중이니 시민들은 도청에 모여 죽더라도 같이 죽고 살더래도 같이 살아 끝까지 광주시를 지킵시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청 안에서는 고등학생이고 대학생이고 할 것 없이 총을 지급하여 YWCA, YMCA, 도청, 은행 건물 등 주요 건물에 배치하는 등 서둘렀다. 갑자기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틀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연락을 못한 것이 떠올랐다. 식량을 마련해 두지 않은 안사람이 괘씸하여 쌀을 구하러 시내까지 왔다가 이렇게 된 것이었는데.

갑자기 집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사 임영록에게 집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차를 타고 광주은행 본점 쪽으로 가는데 1, 2, 5 기동타격대가 내가 탄 차를 못 가게 막았다.

“지금부터 상황실에서 외부로 나가는 차량은 발포를 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누가 그랬느냐?”
“상황실장 박남선이가 그랬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가지 못하고 상무관에 버스를 댔다. 무전기에서는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소식을 알려오지, 방송을 하고 다니는 거리는 온통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오히려 방송 때문에 사람들은 전혀 얼씬거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우리도 총을 쏘기 시작하면 실탄이 더 필요할 것 같아 탄창 하나, 카빈 실탄 12발씩을 여섯이서 나누었다. 그때는 누가 총을 관리하여 나누어준 것도 아니고 무기가 있는 곳에서 가져가도 아무런 규제도 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도 총을 주면서 잘 쏘라고까지 하였다.
상무관 앞에서 계엄군이 들어올 것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아 깜박 잠이들고 말았다(천순남 1988).

무장시민들의 카빈소총에는 30발씩 자동으로 연발 사격할 수 있는 탄창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그 외에도 호주머니에 여러 발의 실탄을 넣고 다녔다. 상무관은 계엄군이 금남로를 지나 도청광장에서 도청 정문에 접근할 경우 협공할 수 있는 매복 지점이었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단 한 명의 군인도 금남로를 통과하거나 도청광장에 출현한 적이 없었다. 군인들은 모두 도청 정문 쪽이 아닌 뒷문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아무리 기다려도 도청광장에는 무장시민들만 있고 계엄군이 보이지 않자 천순남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고등학생들은 총만 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총소리가 나면 얼른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기본 수칙조차 전혀 모르고 있다가 변을 당하였다. 이 날 새벽 분수대 앞에 배치되어 총 들고 서 있다가 도청 안 무장 시민들이 쏘는 총에 맞아 숨진 광주상고 1학년 학생들은 무장 고등학생들의 반장 최치수가 YMCA회관으로부터 인솔해온 학생들 이었다. 최치수는 자기가 몇 명의 고등학생들을 도청 주변으로 배치하였음을 증언한다:

도청 앞으로 나오니 3백 명 정도가 분수대 옆에 서있었는데 도청을 사수하기 위해 남아있다고 했다. 그곳을 통솔하던 선배가 나를 보더니 그 사람들을 인솔하여 YMCA로 가라 했다. YMCA에 도착해 40대 남자 한 명이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은 거수하라고 해 총과 실탄을 지급했다. 내가 도청 주변에 병력을 인솔한 다음 YMCA로 가니 나머지 인원들이 사격술을 배우고 있었다(최치수 1989).

5월 26일 저녁에 YMCA강당에 모인 고등학생들을 위한 밤참은 밤 10시에 제공되었다. 절반이 공짜 밥만 먹고 집으로 갔다. 1백여 명이 남았지만 새벽 2시 반경에 또 간식을 요구했다. 보급부장 구성주 는YMCA 안에 모인 고등학생들이 배치되기 전에 밥과 콜라와 환타를 요구했던 일화를 이렇게 증언한다:

YMCA 안에는 2백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도청 안에서 죽을 각오로 싸울 사람은 도청으로 들어오라”고 누군가가 소리치자 1백여 명이 도청으로 들어왔다.
지원자 중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되는 학생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가까운 집으로 돌려보내고 남은 학생이 1백명이 된 것이었다.
당시 군대에서 장교를 지냈다는 지원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몇 사람과 함께 계림동 쪽으로 배치되었다. 그 사람들이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여 비상식량과 빵과 음료수를 갖다주었다. 몇몇 고등학생이 “나는 콜라 주세요”, “나는 환타 주세요” 하고 손을 벌렸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죽기를 각오해야 할 전쟁터에서 그런 사치스러운 말을 하다니 용납할 수 없는 자세를 보고 무섭게 나무랐다.
보급부는 나를 포함하여 한일은행 앞으로 무장하고 갔다. YMCA, 전일빌딩 옥상에는 LMG 기관단총을 설치하였다 (구성주 1988).

누가 YMCA 건물과 전일빌딩 옥상에 LMG 기관단총을 설치하였는가? YMCA 강당에 모여있었던 고등학생들 중에는 여학생들도 많았고, 모두 소총 조작법도 모르는 애들이었다. 도청을 점거한 무장시민들 둥 중에도 군복무경험이 있는 시민은 5명도 채 안되었다.

5월 27일 새벽의 도청 무장난동자들 중에는 중학생들도 끼어 있었다. 광주사태 25주년에 광주일보 임주형 기자는 당시 전남중 3학년이었던 이동용의 증언에 자신의 추정을 덧붙여 이렇게 요약한다:

갑자기 1층에서 “기동타격대 모두 모여”라는 소리가 들렸다. 시민군은 아군의 목소리라 여기고 모두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씨도 내려가던 중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 순간 끔찍한 장면이 펼쳐졌다. 앞서 내려가던 시민들이 계엄군의 사격을 받고 쓰러진 것이다. 집합 명령은 계엄군의 유인작전이었다 (이동용, 임주형 2005).

“집합 명령은 계엄군의 유인작전이었다”는 임주형 기자가 총기무장 중학생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추정으로 덧붙인 말이다. “기동 타격대 모두 모여”는 계엄군의 유인작전이 아니라, 박남선 상황실장의 명령이었다. 박남선은1층 상황실에서 계속 무장 청소년들에게 그런 말투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최치수는 그가 고등학생들을 도청 정문 주변에 배치한 후 도청 일층 상황실에서 박남선 상황실장과 함께 있었다가 그가 “이층으로 뛰엇”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층으로 올라간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27일 새벽 2시경 도청 상황실에는 시외곽지역에 배치됐던 병력들로부터 계엄군이 진입해 온다는 무전보고가 숨가쁘게 들어왔다. 새벽 3시 30분쯤 사방에서 총성이 들리고 소란스러워지자 나는 도청 상황실에서 나와 정문 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한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좌측 20∼30미터 전방에서 계엄군이 나에게 총을 난사했다. 총소리를 듣고 상황실에 혼자 있던 박남선 상황실장이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층으로 뛰엇.”
그를 따라 나도 허겁지겁 이층으로 올라갔다. 어느 방으로 들어가니 수습대책위원이던 이종기 변호사가 혼자 앉아 있었다. 그제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온몸을 살펴보니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다 (최치수 1989).

그런데 위의 최치수의 증언 내용 중에서 상황실 유리창을 계엄군이 깨뜨렸다는 주장은 오류이다. ‘건달 대장’ 출신 조사부장 신만식은 상황실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낸 인물은 자신이었음을 증언한다:

군인들이 내가 있던 상황실로 들이닥쳤다. 나는 얼른 수화기를 놓고 잽싸게 책상 밑으로 엎드렸다. 이미 도청 안은 정전이 된 상태라 캄캄했다. 그런 후 곧바로 예전 조사과 반장을 하다 도망간 사람으로부터 받은 M16 총을 들고 유리창을 깨고 상황실 뒤편으로 뛰어내렸다(신만식 1989).

박남선의 상황실과 신만식의 조사과는 5월 25일부터 한 사무실을 칸막이만 해놓고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27일 새벽 4시경에 이양현 기획위원이 도청 전등을 갑자기 소등한 직후부터 박남선과 신만식은 서로 칸막이 저편의 무장시민을 계엄군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남선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시 1층 상황실로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무장시민들의 집단발포를 부추겼고, 박남선이 다시 상황실로 들이닥쳤을 때 그를 계엄군으로 착각한 신만식이 M16 총을 들고 유리창을 깨고 상황실 뒤편으로 뛰어내렸다.

앞에 인용된 증언록에서 최치수가 언급한 좌측 20∼30미터 전방의 총성도 계엄군이 아니라, 총기무장한 중학생들이 쏜 총의 총성이었음이 손남승 상황실 부실장의 증언에서 밝혀진다:

지휘관들은 확성기를 통해 무조건 항복하라고 했으나, 전투가 시작되고 나는 다시 자세를 낮추어서 상황실로 되돌아왔다. 여기서 박남선 씨를 만났는데 그는,
“죽을 때가 된 것 같다. 끝까지 싸우자.”
라는 인상적인 말을 했다. 나는 상황실에서 도청 쪽을 보고 총을 몇 번 쏘았다.
정문 쪽에 사람이 없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분수대 쪽에서 오는 병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도청 뒤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나는 차를 은폐물로 삼아 몸을 숨겼다. 그쪽에는 기껏해야 13세 정도 되는 어린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나는 이들을 끌고 옆 민간인 집으로 넘어갔다. 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총을 가지고 있으면 다 죽는다. 총을 버리고 따로따로 도망가라” 하며 도망갈 통로를 가르쳐주었다.
잠시 후 도청 주변의 수색이 시작되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자수하라는 목소리와 함께 총을 난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옆집 담을 다시 넘어갔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총과 실탄, 그리고 상황일지를 그곳 화장실에 버렸다(손남승 1988).

이처럼 도청 뒤쪽에서 총기무장한 중학생들이 무장시민들 쪽으로 총을 쏘는 것을 목격한 손남승은 광주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전남대 학생 이었다. 손남승은 전남대 운동권 중에서 무기를 들고 총을 쏜 유일한 학생이었으나, 광주시민 쪽을 향해서만 총을 쏘았다.

무장봉기 주동자들은 5월 19일에도 전남도청 점령을 시도했었다. 그 날 경찰 병력이 도청 정문을 지키고 있었고, 난동자들은 곡괭이로 도청 뒷담을 허물고 도청 안으로 들어오려다 실패하였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5월 27일 새벽에 무장시민들은 계엄군이 정문 쪽이 아닌 뒷문 쪽으로 진입할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대원들에게는 뒷담을 허물지 않아도 로프를 이용해 넘어오는 방법이 있었다. 임수원 중령이 인솔하는 3공수여단 11대대 특공중대는 그 방법으로 뒷담을 넘어 진입하였다.

사진 29 ▲ 무장난동자들은 5월 22일부터 도청 안뜰 등에 보관해 두었던 LMG 기관총들을 5월 26일 저녁에 도청 본관 3층 옥상과 전일빌딩 10층 옥상과 전남대학 부속병원 12층 옥상 등에 각각 두 정씩 설치하였다.

대부분의 무장시민들은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만 16세 청소년 들이었지만 손남승은 전남대 3학년의 고학력자였다. 무장시민들 중에서는 몇 안 되는 고학력자였던 손남승은 어쩌다가 자기 편을 향해 총을 쏘게 되었는가? 그것은 군복차림에 공수모자를 쓰고 M16으로 무장한 채로 분수대 쪽을 지키고 있던 이재춘이 상무관 쪽으로 총을 갈긴 후에 포복으로 도청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황실에 숨어서 도청 쪽으로 총을 몇 발 쏘자 상황실 무전기에서 “정문 쪽에 사람이 없다”는 소리가 잡혔다. 도청 안 무장시민들의 집단 발포로 이재춘 옆의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과 안종필 등이 쓰러지자 모두 도망갔는데 정문 쪽에 사람이 있을 리가 있는가?

실제로는 계엄군 병력이 분수대 쪽에서 온 적이 전혀 없으나 그렇게 착각한 손남승은 분수대 쪽에서 오는 병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뛰쳐나가 정문으로 달린 후 정문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때 도청 바깥 뒤쪽에서 담장 옆에 붙어 정문 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기껏해야 13세 정도 되는 어린 아이들,” 즉 무장 중학생들은 전남대 운동권 손남승을 계엄군으로 인식하고 총을 쏘았던 것이다. 마침 거기에는 염동유의 기동타격대 제3조가 오전 1시경에 주차한 차가 있어서 그는 그 차를 은폐물로 삼아 몸을 숨겼다. 잠시 후 13세 무장중학생들이 총을 버리고 도망가도록 통로 안내를 한 후 옆집 담을 넘어 도망갔던 손남승은 다시는 도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계엄군 특공조 66명 전원이 한 명씩 로프를 타고 도청 뒷담을 넘는데 20분이 걸렸으며, 도청 뒷담을 넘은 후 각 건물 등 엄호물 벽에 찰싹 붙어 이동하는데 다시 10분 이상 소요되었다. 그때가 새벽 4시30분이 좀 넘은 때였으며, 그때 도청 안 무장시민들은 이미 각자 지급받은 수십 발의 실탄을 도청광장 쪽의 자기 편을 향해 사격하는데 전부 소모한 뒤였다.

새벽 4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장시민들이 서쪽 방향, 즉 도청광장 쪽으로 약 30분간 총을 쏘고 있는 사이 계엄군이 정반대 방향에서 도청 뒷담을 넘어온 것을 무장시민들이 뒤늦게야 깨달은 상황을 전남대 운동권 김윤기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총구를 도청 앞으로 향한 채 긴장해 있는데 느닷없이 도청 뒤편에서 M16 긁는 소리가 났다. 순간 나는 힘이 쑥 빠지면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눈에 적들이 보이면 좋겠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앞뒤에서 드르륵 총 긁는 소리는 나를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계속 그곳에서 버텼다.
조금 있자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사람도 나와 같이 겁이 났던지 무조건 총을 쏘았다. 나도 총이라도 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총을 잡아당겼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분명히 총을 쏘았는데도 총알이 나가지 않자 겁이 덜컥 났다. 총은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카빈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탄창에 이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뒤쪽으로 다 들어온다.” 하면서 뒤쪽으로 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김윤기 1989).

서쪽 방향, 즉 정문 쪽과 분수대 쪽에 배치된 시민들을 향하여 맹사격하라고 그때까지 선동하던 방위병 출신 상황실장 박남선이 무장시민들의 집단발포 방향과 정반대 방향인 동쪽에서 계엄군 3명이 거미처럼 벽에 착 달라붙은 채 본관을 향해 오는 것을 본 것은 그때였다:

나는 뒤편의 상황을 보기 위해 부지사실로 뛰어올라갔다. 몇 명의 시민군이 창가에 총을 걸치고 계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서자 계엄군 3명이 거미처럼 벽에 착 달라붙은 채 본관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어깨에다 총을 밀착시키고 조준하였다. 그러나 의식과는 다르게 손가락의 힘이 쪽 빠지는 것을 느꼈다. 계엄군은 계속 접근해 오고 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신체가 직접 보이지 않을 때에는 총구가 갈라지도록 총을 쏘아댔으나 막상 눈앞에 나타나자 계엄군을 쏘아 죽일 수가 없었다. 나는 총을 내려 창가에 기대어놓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라고 외치면서……(박남선 1988, 95).

도청 안 무장시민들이 분수대와 전일빌딩 방향으로 약 30분간 총기난사를 하였을 때는 아직 계엄군이 도청 건물에 진입하지도 않았었고, 도청 안 무장시민들의 집단발포로 분수대 쪽 무장시민 10여명이 쓰러진 뒤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도청 뒷담을 넘은 계엄군이 벽에 착 달라붙은 채 본관을 향해 접근하였음이 박남선의 최근 저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뒤편의 상황을 보기 위해 부지사실로 뛰어갔다. 몇 명의 시민군이 창가에 총을 걸치고 계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자 계엄군 3명이 거미처럼 벽에 착 달라붙은 채 본관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어깨에다 총을 밀착시키고 조준하였다(박남선 2014, 89).

무장시민들은 그때까지도 서쪽으로, 즉 정문과 분수대 방향으로 사격을 하고 있다가 도청 안에서도 무장시민들의 총기 오발 사고로 두 명이 쓰러지고, 도청광장의 무장시민 10명이 사망한 후에야 비로소 박남선이 ‘사격중지’를 외쳤다.

장교까지 합해서 70여명의 3공수여단 특공조가 도청 본관까지 오는데 성공하였을 때는 무장난동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어둠 속에서 자기 편을 향하여 총기난사하던 무장시민들은 막상 계엄군의 모습이 눈에 띄자 대부분 도청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사무실 문을 굳게 잠그고 있었다.

계엄군의 작전목표는 무장난동자 사살이 아니라 무기회수였으며, 설사 계엄군이 쏜 총이 한두방 있었다고 해도 도청 건물 구조상 사무실 구조가 복도로 들어와 문을 열게 되어 있어서 총알이 사무실 안으로 날라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조사부는 시민들을 납치하여 난폭하게 조사하던 부서였다. 그런 조사부 부장 김준봉도 공수대원은 절대로 무장시민을 겨누고 총을 쏘지 않았으며, 설사 바깥에서 공포탄을 쏘더라도 도청 사무실 구조상 절대로 총알이 안으로 날라올 수 없었음을 증언한다:

나는 옆에 있던 동료 3명과 함께 2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같은 부서에 있지 않아 그들이 누구인지 잘 모를뿐더러 어둠 속이라 구별이 되지도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극도로 긴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정적을 깨고 느닷없이 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하사, 이하사 저쪽으로…….”
잠궈놓은 현관문의 유리를 깨고 들어온 공수들이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배치되고 있는 성싶었다.
잠시 후 바로 귓전에서 총소리가 났다.
“드르륵.”
“항복하고 나와라.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복도 창문으로는 총탄이 불꽃을 튀기고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밖에서 공수들이 다니는 것과 총을 쏘는 것이 보였지만 총소리에 질려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총을 쏘면 우리가 있는 곳이 들통나는 게 두려워 총을 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총은 카빈이고 공수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M16이어서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은 싸움이라 판단한 때문이기도 했다.
공수들은 계속 총을 쏘면서 항복하고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 사무실 구조가 복도를 들어와 문을 열게 되어 있어서 총알이 안으로 날라오지는 않았다.
우리는 책상 밑에 숨어 있다 급박해지자 총을 한 방 쏘며 외쳤다.
“나가요.” 하면서 한 발의 총을 쏘았다(김준봉 1989).

김준봉의 사무실 유리창을 깬 자는 그의 조사부 동료 신만식 이었음에도 김준봉은 공수대원이 깬 것으로 억측하였다. 김준봉이 자기 옆에 있던 동료 3명과 함께 2층 사무실로 들어가고서도 어둠 속이라 그들이 누구인지 구별이 되지도 않았는데 하물며 사무실 바깥에 누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김준봉은 문이 잠긴 사무실 안에서 소리만 들었으나 바깥에서 유리창을 깬 자는 방위병복을 입고 있던 신만식이었다.

박남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사과의 초대 반장 김양오는 자기에게 조사받은 광주시민들의 금품을 갈취하여 도망갔다. 김양오가 5월 21일부터 M16 총으로 무장하고 조사과 반장(혹은 조사부장)으로 행세하다가 시민들의 금품을 가지고 도망간 후 그의 M16은 후임자 신만식의 것이 되었다. 신만식은 자기가 그 M16 총으로 김준봉의 사무실 유리창을 깬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얼른 수화기를 놓고 잽싸게 책상 밑으로 엎드렸다. 이미 도청 안은 정전이 된 상태라 캄캄했다. 그런 후 곧바로 예전 조사과 반장을 하다 도망간 사람으로부터 받은 M16 총을 들고 유리창을 깨고 상황실 뒤편으로 뛰어내렸다 (신만식 1989).

김준봉은 자기가 조사부장이고 신만식은 자기 부하였다고 말하고, 신만식은 자기가 조사부장이고 김준봉은 자기 부하였다고 말한다. 그들이 조사부 동료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준봉의 귓전에서 들린 총소리도 공수들이 쏜 것이 아니라, 신만식이 2층 복도에서 쏜 것이었음을 신만식은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본관 2층 복도에 서서 상무관 쪽을 향해 M16 총을 있는 힘껏 드르륵 드르륵 긁어댔다. 그랬더니 상무관 쪽에서 대번에 내가 있는 곳으로 총알이 날아들었다(신만식 1989).

신만식이 상무관 쪽을 향해 M16 총을 힘껏 드르륵 긁어대자 도청 정문 문 옆 수위실 쪽에서 상황실 부실장 손남승이 응사하였다. 손남승을 계엄군으로 착각한 신만식은 바깥으로 나가 숨었다가 다시 2층으로 올라와서 “끝까지 싸우고 죽으리라는 결심을 하며 상무관 쪽으로 다시 한 번 있는 힘껏 총을 긁어댔다” (신만식 1989). 김준봉 일행이 들은 총소리는 신만식이 연발 사격한 M16 소총 소리였다.

사진 30 ▲ 무장난동자들은 수십 정의 M16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진에서 기관총 삼각대 바로 밑에 놓여있는 총기 석 자루 모두 M16이다.

만약에 계엄군이 김준봉의 사무실을 향해 총을 쏘았다면 문에 탄흔이 있을텐데, 상황 종료 직후 달려온 외신기자들은 손남승이 도청 본관을 향해 쏜 총탄 자국 외에는 탄흔을 전혀 보지 못하였다. 신만식이 도청 2층 복도에서 오랫동안 있는 힘껏 M16 총을 드르륵 드르륵 긁었지만 군인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다. [12] 그는 군인 그림자도 보지 못했지만 저 멀리 상공에서 들리는 항복 권유 방송 소리를 듣고 “혼자 도청 담을 넘어 노동청 가는 길목의 하수구 뚜껑을 열고 들어갔다”(신만식 1989).

도청 본관 옥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무장난동자들의 기관총이 오히려 무장시민들의 도청 방어에 재앙이었다. 천장 위에서 나는 요란한 난동자들의LMG 기관총 발사 소리는 오히려 2층의 무장시민들로 하여금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도청 본관은 3층 건물이었으므로 3층 옥상의 기관총 소리는 2층 복도에서는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귀청이 따갑게 크게 들렸다.

무장난동자들의 기관총 소리가 울리는 동안 11공수 특공조 70 여명이 어둠 속에서 도청 뒷담을 넘어 도청 본관으로 이동하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건물 벽을 엄호물로 삼아 세 명씩 이동하느라 먼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특공조는 비로소 도청 본관 위치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광주학살’로 잘못 불리게 된 사건의 진실은 도청 본관에 도착한 계엄군 특공조는 단 한 명의 무장시민에게도 총을 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청 본관 옥상에서 쾅쾅 울리는 자기편 기관총 소리에 스스로 놀래 자빠져 한참 도청광장의 자기네 편을 향해 총기난사하고, 자기네 끼리 총을 쏘았던 무장시민들은 막상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자 모두 순순히 항복하였기 때문에 도청 안에서는 아무런 총격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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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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