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30] – 황석영의 가짜정보에 낚인 문재인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5장 ∙ 문재인이 바로잡아야 할 5·18 기록

2. 황석영의 가짜정보에 낚인 문재인

황석영이 1985년에 출간한 책 『광주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이 2017년 5월 26일에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전시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황석영이 가짜 5·18 정보를 파는 장사꾼이었음을 보여주는 오류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본다면 상체에 아무런 총상 없이 멀쩡히 살아있는 김영찬 군이 목 관통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황석영 책 74쪽에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이 볏짚 단을 가져와 불을 질러 장갑차를 폭파시켜 버리자고 하면서 짚단에 불을 붙여 바퀴부분에 던져 넣었다. 별로 효과가 없음을 알고 시 민들은 장갑차의 위 뚜껑을 열고 그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시도했으나 열리지 않자 그대로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안에 있던 공수대원 이 뚜껑을 열고 Ml6 총구를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내밀며 뜨거운 듯이 팔을 휘젓고 공중에 두 발을 쏘더니, 이어서 정조준 하여 앞에 보이는 학생을 쏘았다. 순간 그 어린 고교생은 픽 쓰러졌고 사람들은 흩어져서 골목에 찰싹 붙었다. 잠시 후 그들은 총을 겨눈 채로 장갑차를 다시 몰고 지나갔고, 쓰러져서 아직 꿈틀거리는 학생을 몇 명의 청년이 일으켜 안고 몇 발짝도 옮기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두었다. Ml6 총탄이 목을 관통했는데 머리가 덜렁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학생은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이었다(황석영 1985, 74).

사진 47 ▲ 황석영은 그의 저서 74쪽에서 군인 총에 맞은 적도 없으며, 멀쩡히 살아있는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이 목 관통상으로 비참하게 죽은 것처럼 묘사하는 아주 희한한 소설을 썼다.

황석영의 위의 단락에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 김영찬이 장갑차 해커를 열고 불붙은 집단을 넣어 그 안에 타고 있던 군인들을 태워 죽이려 한 것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다. 당시 문화 방송국(MBC) 경비는 광주향토사단(31사) 담당이었다. ROTC 장교 한동석 중위 인솔 하에 20명으로 구성된 1개 소대가 문화방송국을 경비하고 있었는데, 시위군중의 방송국 방화가 5월 19일 낮에 이미 시작되었다.

공비들은 북한으로부터 광주의 방송국들에 방화하려는 지령을 받고 있었으며, 공비들이 선동하는 군중이 몰려와 화염병을 던지며 방화를 시도하였을 때 며칠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지쳐 있는 20명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급히 셔터문을 내렸을 때 소대 병력도 직원들을 따라 안으로 피신하였지만 한 명이 아직 바깥에 있었을 때 셔터문이 닫히는 바람에 폭력군중에게 몰매 맞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상급 부대에 보고되자 장갑차 한 대가 문화방송국 쪽으로 출동하였다가 도중에서 폭력군중에게 에워 쌓인 채 감시경이 파손되어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사진 48 ▲ 1988년에 이 증언을 한 위성삼은 1980년 5월 19일 한 명의 공비 및 김영찬 군과 더불어 불붙은 볏짚 단으로 국군 장갑차를 폭파시키려 하였던 조선대 학생이다. 그는 황석영의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는 김영찬 군이 광주사태 사망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엄연히 살아있는 생존자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난동자들의 방송국 방화를 저지하다 어려움에 처한 소대 지원을 나온 장갑차는 상무대 기갑학교 국산장갑차였으며, 그 안에는 기간병들로 구성된 5분대기조가 타고 있었다. 감시경이 깨져 장갑차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그 안의 9명의 군인들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군중이 해커 위에서 불덩이를 던져 넣어도 피할 곳이 없었다. 바로 그런 약점을 노려 김영찬 군이 불붙은 볏짚 단을 해커 아래로 떨어뜨려 군인들이 타 죽게 하려 했던 것이다.

장갑차 안에는 전라도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상무대 기갑학교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교육기관이었으며, 향토사단처럼 부대원 대부분이 전라도와 제주도 호적의 병력이었다. 따라서 광주시민들에게는 장갑차 안의 군인들을 태워죽이려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으며, 이것은 공비가 시킨 짓이었다.

살기를 띤 군중심리에 휩쓸렸던 또 한 명의 학생 이름은 군복무를 마친 조선대 학생 위성삼이었다. 그래서 그때 김영찬 군이 자기 옆에서 조금 다쳤을 뿐 죽지 않은 사실의 현장 목격자 위성삼은 황석영의 책 74쪽의 허위기록을 이렇게 고발한다:

그때 계엄군들이 밀고 들어왔다. 시위대는 동원예식장 앞으로 후퇴했다. 그곳에는 장갑차 한 대가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장갑차 앞부분 양옆에 달린 감시경이 파손되어 있었다. 한 시민이 어디서 구했는지 볏짚 단을 가져와 불을 붙여 바퀴부분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나는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장갑차의 어느 부분이 약한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볏짚 단을 장갑차 뚜껑에 올려놓자 느닷없이 뚜껑이 열리면서 M16 총구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총구가 불을 뿜었다. 빈 차인 줄 알았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당황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위협사격이라고 생각하고 시민들에게 “공포탄이니 도망가지 말자”고 외쳤다. 그런데 어떤 고등학생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학생의 명찰을 보고 조선대부고 야간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눈 깜짝할 사이 장갑차는 총을 겨눈 채 도망가 버렸다. 나는 몇 명의 시민들과 함께 그 학생을 계림파출소 부근까지 옮겨 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다음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 학생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도 죽은 걸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 확인한 바에 의하면 살아있다고 한다(위성삼 1988b).

위성삼이 이 증언을 하였던 1988년에 김영찬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 황석영은 공수대원이 정조준 하여 앞에 보이는 김영찬 학생의 목을 쏘았다고 기록하였으나, 바로 그 군인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려 하였던 위성삼과 김영찬 두 명 모두 공수대원은커녕 군인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다. 장갑차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전라도 병력으로 구성된 상무대 기갑학교 기간병들이었는데, 모두 겁에 질려 해치 바깥으로 상체는커녕 얼굴도 내밀 수 없었다.

사진 49 ▲ 황석영이 그의 1985년 저서에서 1980년 5월 19일에 사망하였다고 기록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의 이름은 김영찬이다. 그러나 김영찬은 사망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는 사실이 1988년 7월에 체증된 김영찬 본인의 증언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김영찬의 증언에서는 “짚단에 불을 붙여 뚜껑을 열려고 하다가 열리지 않자 그냥 뚜껑 위에 올려놓은” 난동자는 김영찬 본인을 포함 하여 세 명이다:

가서 보니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중간지역에 장갑차 1대가 보였다. 청년들이 짚단 5개 정도에 불을 붙여서 장갑차 밑에 던졌으나 더 이상 타 들어가지 않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장갑차 앞에 붙어 있던 밖을 내다보는 유리로 된 장갑차 눈을 깨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깨지질 않아서 옆에 있던 청년이 안 되겠다면서 짚단을 뚜껑을 열고 집어넣어야겠다며 말했고, 나와 그 청년 둘이서 짚단에 불을 붙여 뚜껑을 열려고 하다가 열리지 않자 그냥 뚜껑 위에 올려놓고 동원예식장쪽 인도로 뛰어갔다.

그때 장갑차는 동원예식장 반대편 쪽 도로에 있는 상태였는데, 장갑차 뚜껑이 빼꼼히 열리면서 총대가 보이더니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는 그때 총소리를 처음 들어봤다. 무서워서 도망가려고 하는데 옆에 어른들이 공포탄이니까 무서워 말라며 그냥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했다(김영찬 1988).

만약 황석영이 기록한 대로 김영찬 군이 1980년 5월 19일에 머리가 덜렁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는 채로 사망하였다면 1988년에 위의 증언을 한 김영찬은 유령이란 말인가?

황석영이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 김영찬이 죽었다고 기록하여 책을 출간한 해는 1985년이요, 위성삼과 김영찬이 김영찬은 살아있음을 증언한 해는 1988년이다. 그런데 왜 이런 잘못된 기록을 수정하지 않았는가? 지금 이낙연 국무총리가 가짜뉴스를 없애겠다고 하는데 이런 가짜뉴스는 그대로 놔둘 것인가?

황석영의 책을 영어로 번역한 설갑수는 대원 외국어고등학교 재학 시절 황석영의 이런 광주괴담을 읽고 낚인 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미국 유학 시절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하고 영문판을 출간하였다. 설갑수가 황석영의 책을 번역하였던 1999년에는 그 학생이 목에 관통상은커녕 전혀 상반신에 총상을 입은 적도 없었고, 버젓이 살아있는 생존자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때였다. 그럼에도 설갑수는 이런 기본적인 팩트 체크를 전혀 하지 않고 이렇게 번역하였다. One example Kap Su Seol, the translator of Kwangju Diary, is responsible for promoting the false narrative of Gwangju Uprising is this sentence he translated into English:

…but he died within minutes. The bullet had severed his neck. The young man’s head dangled from his body. He was a night school student from Chosun High School(Lee Jai Eui 1999, 60).

What a dirty fiction, what a white lie about the young man who has had been alive without no injury at all on his neck!

전혀 상체에 총상을 입지 않은 생존자 김영찬 군에 대하여 설갑수는 거짓말을 보태어 번역하였다. 74쪽의 황석영의 원문은 이렇다: “그는 숨을 거두었다. Ml6 총탄이 목을 관통했는데 머리가 덜렁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학생은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야간부 학생이었다” (황석영 1985, 74). 괴담 작가 황석영도 목을 관통했다고 했지, 목을 잘랐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설갑수는 ‘관통하다’는 뜻의 penetrate 대신에 ‘절단하다’는 뜻의 sever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설갑수의 영어 문장 “The bullet had severed his neck”는 “총탄이 그의 목을 절단했다”라는 의미가 된다.

황석영이 악의적으로 지어낸 광주괴담도 한국군에 대한 너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데다가 이렇게 한층 과장된 어휘가 사용된 영어 번역판을 읽은 독자들이 얼마나 한국군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겠는가?

제70주년 국군의날 행사에서 열병과 시가행진을 싸이공연으로 대체하고, 북한군 남침 통로를 열어주는 등 2018년 현재 문재인의 정책은 북한군에 상당히 우호적이고, 한국군에 상당히 적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문재인 본인이 고의적 거짓말로 국군에 적대감을 품게 하는 황석영의 광주괴담에 낚인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

1982년에 노무현과 문재인이 김현장 변호를 수임한 것이 광주사태 배후에 북한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의 결정적 단서이다. 1982년 노무현과 문재인이 동업으로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를 창업하고 처음 수임한 사건이 광주운동권의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변호였다.[15]

계엄군 총은 실탄이 없는 빈총이었으므로 발포도 없었고, 광주시민들 중 아무도 전두환을 본 이도 없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발포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본 이도 없고, 또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목격자도 없고 증거도 없이 왜 광주단체들이 전두환이 발포명령자라는 주장을 근 40년간 해왔는가? 그 이유는 광주사태는 북한이 개입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의 시작은 김현장이 5월 19일부터 21일 사이에 전남 구례와 전북 남원과 전주 등지에서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북한방송이 불러주는대로 써서 작성한 유언비어 삐라 ‘전두환 광주살륙작전’이다. 김현장은 광주사태 때 광주에 없었다. 단지 5월 26일 저녁에 전남도청에 잠깐 들러 “이제라도 미국 신부 선교사들을 인질로 납치하자”고 선동한 직후 곧 바로 부산으로 출발하였을 뿐이다. 김현장은 자기가 목격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북한방송의 광주사태 유언비어 유포 공작에 협조하였을 뿐이었다.

김현장이 5월 26일 저녁 6시경에 갑자기 전남도청에 출현하여 도청시민군 지도부에 “미국 신부 선교사들을 인질로 납치하자”고 제안하였을 때 그 제안은 김현장 개인 의견이었는가 아니면 그와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던 김대중이 사전에 시켰는가 아니면 그가 평소 청취한 북한방송 영향이었는가?

전주성당 문정현 신부 등 정의구현사제단은 김현장이 북한방송 청취 하며 작성한 유언비어 삐라를 전주성당 고속복사기로 수만 장 복사하여 전국에 살포하였다. 그 이래로 광주단체들이 전두환이 발포명령자라고 주장하며 내놓는 근거는 달랑 이 악성 유언비어 삐라 한 장뿐이다.
광주사태를 최대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북한의 공작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82년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배후는 김현장이었다. 그때도 여전히 북한이 남한 운동권에 지령을 하달하는 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던 김현장이 문부식 등 고려신학대학 학생들을 선동하여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게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부산의 고려신학대학 학생들이 방화한 것이었으나, 북한방송이 김현장의 활동을 금방 방송하던 때라 결국 꼬리가 잡혀 재판에 회부되었고, 노무현·문재인 법률사무소가 이 사건을 수임하였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반미 종북 변호를 인권변호라고 불렀으며, 이때부터 스스로 인권변호사를 자처하였으며, 이것이 그의 반미 종북 노선의 출발점이었다.

이것이 부산에서 열린 재판이었는데 뜻밖에도 광주운동권 박형선이 김현장 변호를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와 노무현 변호사를 만났는데, 이 박형선이 훗날 노사모를 만들어 부정선거운동으로 노무현을 대통령 만들어 준 킹메이커(kingmaker)였다.

그러면 박형선과 문재인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문재인이 5∙18 기념식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라고 지시한 이유가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황석영이 박형선의 여동생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든 노래이며, 박형선 부탁으로 만든 노래이다. 박기순은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1년 반 전이었던 1978년 12월 성탄절에 오빠 박형선 집에서 자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것을 근거로 5∙18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박기순이 5∙18 묘지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에 묘지 참배자들은 박기순이 시민군 활동을 하다가 공수부대 총에 맞은 희생자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데, 문재인의 상식으로는 참배자들과 방문자들과 외국인들에게 그런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연탄가스 중독 사망자의 경우 광주사태와는 전혀 관계없으며, 광주사태 발생 여러 해 전의 연탄가스 중독 희생자라는 표시를 정직하게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만약 문재인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순수하게 5∙18을 재조사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박기순이 광주사태 발생 훨씬 전에 자기 오빠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것이 어째서 5∙18 유공자로 인정받을 근거가 되는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든가, 만약 설명을 못하겠으면 그런 가짜 유공자들을 솎아내어야 한다.

박기순의 오빠 박형선은 시민군도 아니요, 광주사태 때 광주사태 현장에 있기는커녕 전혀 광주사태 구경을 한 적도 없었는데 어떻게 5∙18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가? 도대체 박형선이 광주사태와 무슨 관계인가? 광주사태의 진실을 규명하려면 먼저 5∙18 유공자들의 정체에 대한 투명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문재인 정부가 5∙18 유공자 명단을 전부 공개하고, 가짜 유공자들을 소환하여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였기에 5∙18 유공자가 되었는지를 일일이 밝히는 것이 광주사태 진실규명의 첫걸음일 것이다.

그러면 문재인이 5∙18 기념행사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도록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이 노래는 박형선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자기 여동생을 위하여 황석영에게 부탁하여 만들어진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광주사태 때 부른 노래가 아니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해 1982년에 황석영이 박형선의 여동생 및 그녀와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윤상원을 위해 벡기완의 시를 표절하고, 쏘련 탱크 부대 군가곡을 표절하여 만든 노래이다.

사진 50 ▲ 2016년 10월 24일 JTBC 뉴스 화면. 위 문건이 청와대 문서요, 국가기밀문서라고 한사코 우기는 손석희의 국정농단 소설 작성기법으로 설명하면 2004년 2월 11일 당시 노무현 정부 정무수석 문재인이 청와대 문건을 유출하여 최순실에게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손석희가 태블릿을 조작하여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 증거를 조작하려고 애를 많이 썼겠지만, 그의 조작 작품이 완전하지 못했다. 2004년 2월 11일 작성한 문서이면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무수석 문재인이 작성한 문서인데, 어떻게 그 문서가 9년 후에 출범한 박근혜 정부 기밀누설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인지 손석희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손석희의 국정농단 보도에 한가닥의 진실은 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 국정농단이 있었다. 어떤 국정농단이었는가? 그것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여주인공 박기순의 오빠 박형선과 문재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박형선이 부산저축은행 대주주였을 때 문재인의 로펌이 부산저축은행 대주주들로부터 총 70억원을 수수하였다.

1996년의 5∙18 재판에서 전두환은 계엄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당황한 5∙18 정치검사가 급조한 전두환 비자금 유언비어의 경우 뇌물을 준 자도 없고, 그 뇌물로 인한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 등 비자금 실체가 없다. 그것은 2016년 연말경에 안민석 의원이 사기탄핵에 이용하려 지어내 퍼뜨렸던 최순실 재산 관련 가짜뉴스에 가히 비견될 만한 가짜뉴스였다. 그러나 문재인이 받은 뇌물성 수임료의 경우 준 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며 그 실체가 분명하다.

농민운동권 박형선이 김대중 정부 시절 갑자기 건설회사 사장으로 변신하더니 노무현 정부 시절 국책사업을 독식 수주하였다. 그때 노무현 정부 국책사업을 수주하던 회사들의 대표들이었던 노사모 간부들이 부산저축은행 대주주들이었는데, 정부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공사비용 등을 부산저축은행 금고에서 자기 돈처럼 꺼내갔다. 이러한 부산저축은행 대형금융비리 초기에 금융감독원이 감독하려 하자 2003년 7월에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유병태 금감원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후로 금감원은 부산저축은행 임원들 및 대주주들의 금융 비리를 묵인하여 비리가 점점 더 산더미처럼 커졌다. 그래서 부산저축은행 소주주들과 예금자들이 모르게 떼인 돈이 무려 9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6.25 참전용사 등 무수한 소시민들이 평생 모은 돈을 잃었다. 이처럼 문재인 및 그의 로펌이 받은 뇌물성 수임료는 피해자들이 누구인지 아주 분명했다.

문재인 및 그의 부산 로펌이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받은 70억 원은 문재인이 ‘임을 위한 행진곡’에 애착하는 이유를 최소한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김대중 정부 시절 갑자기 큰 사업가로 변신한 부산저축은행 대주주 박형선이 ‘임을 위한 행진곡’ 여주인공 박기순의 오빠이고, 이 노래는 황석영이 그녀를 위해 지어 그녀 영전에 바친 노래였다.

그런데 박형선과 문재인의 관계는 1982년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박형선이 사업가가 아니라, 광주와 해남의 농민운동권이었을 때였는데, 김현장의 변호를 의뢰하기 위해 노무현과 문재인의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왔다. 박형선이 혼자 왔더라도 그의 배후에는 큰 조직이 있었다. 노사모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박형선에게 광주운동권 조직이 있었고, 그 조직 명칭만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박형선이 나중에 바꾼 것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초의 박형선의 동지들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반미 종북 세력의 한 핵심이었던 김현장의 재판에 <남민전> 잔당세력이 움직였던 것이며, 그 세력이 나중에 노무현과 문재인의 정치 기반이 되었다.

박형선과 황석영은 절친한 사이였으며, 그래서 노무현과 문재인도 황석영과 친해졌고, 1985년에 황석영의 5∙18 도서가 출간되었을 때 노무현이 황석영 책 홍보를 열심히 해 주었다. 그래서 문재인의 5∙18 지식은 황석영의 책에 뿌리박고 있다. 그런데 황석영은 광주사태 때 서울에 있었고, 역사연구가도 아닌데 그가 어떻게 5∙18 도서를 석 달 만에 집필할 수 있었는가? 정확히 말하면 황석영은 집필을 한 것이 아니라, 북한의 광주사태 도서를 대량 표절하여 자신의 문체로 다듬었다.

멀쩡히 건강하게 살아있는 사람을 황석영이 목이 잘려 죽은 것으로 기록해 놓고 법조인이 그런 거짓말을 맹신하고 거짓말을 따라 법적 판단을 하고 역사를 해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실제로는 5월 19일에 총기 사망자가 아무도 없었음에도 황석영이 김영찬 군이 계엄군 총에 맞아 목관통상으로 사망하였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였고, 그 거짓말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에 김영찬이 계엄군 발포 최초 사망자로 잘못 기록되었고, 그 여파로 5∙18 역사 이론에 큰 오류가 생겼다. 왜냐하면 그 귀결은 많은 작가들이 5월 19일 계엄군 최초 발포가 있었다고 글을 쓰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동이기 때문이다.

김영찬 군은 군인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장갑차 안에 갇힌 군인들을 불에 태워 죽이라고 김군에게 시킨 공비가 쏜 무성총에 맞았다.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하기 전에 실탄을 지급받은 때는 5월 27일 새벽 단 한 차례뿐이었고, 5월 19일의 총은 모두 실탄 없는 빈총이었다.

김영찬 군은 나중에 전혀 엉뚱한 장소인 동원예식장 쪽 인도에서 하복부에 무성총 총상을 입었기 때문에 아무도 총소리를 못 들었다. 평상시도 아니고 폭력군중이 도로를 꽉메우고 있었을 때 M16에 맞았다면 M16은 연발 사격이라 옆 사람들도 모두 맞았고, 장갑차 해치 위에서 쏘면 하반신이 아닌 상반신에 맞는다. 공비들의 도시 게릴라전은 군인보다는 시민에게 총상을 입히는 전술이었고, 무성총은 공비들만 소지하고 있었던 동구(東歐)제 무기였다.

지난 2018년 5월에 문재인은 김선옥씨 성폭행 사건 가해자였던 광주 지역의 한 경찰서장을 계엄군과 혼동하고 계엄군 성폭행 의혹을 조사 하라고 지시하는 촌극이 있었다. 이처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1985년 판 112쪽에서는 황석영은 안병하 전라남도경찰국장을 공수부대 장교로 혼동하는 오류를 범한다:

오전 10시 30분 내무부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남 도청으로부터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였다. “이제 우리는 철수한다”는 마지막 교신을 보낸 후 전화는 불통되었다.

군 헬리콥터가 도청과 조선대, 전남대 사이를 오가며 도청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던 시민들의 시체와 진압 무기, 탄약을 옮기고 도청의 주요 기밀서류 등을 안전 장소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시민들은 더욱 확고하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황석영 1985, 112).

황석영은 내무부를 공수부대의 상급부대로 착각하였으나, 내무부는 전남도청과 전라남도경찰국의 상급기관이었다. 그때는 전남도경 건물이 도청 안에 있었고, 도경국장 사무실도 거기 있었으므로 도경국장이 자기 사무실에서 내무부 직통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석영은 경찰헬기와 군 헬기를 동일시하는 오류도 범하였다. 5월 21일 오전 10시 30분경에 도청광장에 착륙한 헬기는 군 헬리콥터가 아니라, 경찰 헬리콥터였으며, 조선대와 전남대 사이를 오간 적이 없으며, 광주사태 최초 희생자들이었던 경찰 4명과 경찰관 중상자들을 후송하고 있었다. 난동자들이 도청을 점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전라남도경찰국이 이때 헬기로 도청과 경찰국의 주요 기밀서류들을 안전 장소로 수송하였다.

같은 책 243쪽에서 황석영은 무장한 광주시민 박남선과 방위병 탈영병 신만식을 공수대원으로 오기한다:

같은 시각, 도청 본관에서는 뒷담을 타고 넘어 들어와 시민군의 전열을 교란시킨 공수대원 두 사람이 2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복도에 늘어서서 밖을 향해 사격하던 시민군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 들어 정문의 양 옆 담벼락 아래 배치되어 있던 시민군들을 쏘았다. 아래쪽에서는 동료 시민군이 자기들을 쏘는 줄 알고 쏘지 말라고 외치면서 쓰러졌다(황석영 1985, 243).

위의 황석영의 책 인용문에서 5월 27일 새벽 도청 정문의 양 옆 담벼락 아래 무장시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내용은 사실이고, 무장시민들이 복도에 늘어서서 도청 바깥 무장시민들을 향해 사격하였다는 내용도 사실과 부합한다. 그러나 밖을 향해 사격하던 무장시민들 틈에 공수대원 두 사람이 슬그머니 끼어 들었다는 황석영의 문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 두 사람은 무장난동자들이 점거한 도청에서 각각 상황실장 직함을 사용하던 박남선과 조사부장 직함을 사용하던 신만식이었다.

이상은 소설가 황석영의 광주사태 도서에서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들 중 극히 일부의 몇 가지 예이다. 황석영의 책에서 일부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무장폭동 상황을 기록한 일지에서 온 것으로서 참고할 만한 내용이 더러 있다. 그러나 누가 죽었다고 하는 문장이나 국군을 잔인한 살인기계로 묘사한 내용 등은 북한판 5·18 도서를 표절한 허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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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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