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선교사] 기적의 아침

오늘 아침도 나는 변함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가 사는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간보호센터에 나가시는 어머니를 매일 아침마다 이곳에서 배웅하고 오후에 어머니를 다시 영접하기 때문이다.

잘 다녀오시라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손을 흔들어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옆에 있는 소나타 자동차의 문이 열리더니 운전석에 앉은 이웃분이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제가 늘 지켜보지만 너무 보기 좋으세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두 분이 꼭 손을 붙잡고 다니시는 것 여러 번 보았는데 친정 어머니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 시어머님이세요.”

“아, 그래요. 꼭 친정엄마와 딸 같았어요. 요즘 며느리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데…저도 사실 곧 동생이 모시던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 오거든요. 우리 어머니는 나이는 많으셔도 치매가 없고 정신은 맑으세요.”

그렇게 오늘 아침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분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노모를 모시는 관심에서 시작해서 이야기가 진전되어 가면서 그 이웃분이 감리교 권사님(남자)인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머, 저도 청년 때는 감리교 신자였어요. 신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해서 장로교인이 되었지만요.” 그랬더니 그 이웃 분은 “그리고 저는 청주 사람이거든요” 한다. 나는 곧 놀라면서 큰소리로 “와우~ 저도 청주 사람이에요. 청주에서 살다가 신학공부 위해서 35세에 청주를 떠났었지요” 그리고 이웃분의 이야기가 또 이어진다.

“얼마 전 제가 다녔던 교회에 가 보았어요. 청주 육거리에 있었거든요” 나는 또 탄성을 지른다. “어머! 제가 다니던 교회도 육거리에 있었어요. 사도감리교회 라고…”

그러자 이번엔 그 이웃분이 “어? 바로 그 사도교화를 제가 다녔어요. 79년과 80년… 고시공부를 5년 하면서 힘들 때 새벽기도회도 나갔었지요” 한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참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럴 수가 나의 청년 때 신앙생활을 함께 한 분을 수십 년 후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서 만나서 이웃이 되다니…

거기다가 그 이웃 분은 남편의 모교인 충북대학교 졸업생이었다. 남편과 동문인 셈이다. 더욱이 그 이웃분이 살던 집은 수곡동으로 남편이 나와 결혼하기 전까지 하숙을 했던 동네였다.

그 이웃분과 나는 고향이야기, 교회 이야기, 대학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등등 끝없는 이야기의 주제가 생겨났다. 게다가 그 이웃분은 가치관조차 자신은 효도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여긴다고 한다. 세상에… 그것조차 우리 부부와 같았다.

아니 이런 이웃을 진즉 알게 해 주시지 않고 이제야 알게 되다니… 물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늘 인사는 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이웃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이곳에 이사 온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말을 트고 지내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사는 집의 옆집에 사는 부부와 딸에게 이야기를 걸었다가 혼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이웃분의 바로 옆집에 사는 분들과 교제하고 싶어서 먼저 인사를 건넸었다고 한다. 옆집의 주인 남자분에게 그리고 여주인에게 나중에는 그 집의 고등학생 딸에게까지 이야기를 걸었단다. 이웃으로 지내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얼마 후 초인종이 울려서 나가보니까 이웃집 부부가 함께 와서 벨을 누르고는 그 이웃분에게 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우리 식구들에게 자꾸 말을 거느냐 무슨 정보를 캐내려고 그러느냐 하면서 말이다.

나와 대화하던 그 이웃분은 그 일로 마음이 몹시 상해 있었다. 언제 찾아가서 자기도 따지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옆집에 살아서 인사나 하고 지내자고 말을 걸었는데 왜 그리 오해하느냐고 따져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이웃분에게 말했다. “찾아가서 따지지 마세요. 괜히 싸움만 날까 걱정돼요. 그냥 그분들 위해 기도해 주시고 말거는거, 싫어한다니까 볼 때 마다 그냥 웃어만 주세요” 했다.

아파트에 입주해서 2년 가까이 산 이웃과 인사라도 하고 교제하고 지내려고 말을 걸었다가 어처구니없는 봉변과 오해를 당했으니 그 심정이 능히 이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나도 우리집 이웃하고 볼 때마다 웃으면서 인사를 하기엔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오늘을 사는 이기적인 현대인들의 모습인 것이다.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다가오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나이든 분들보다는 젊은 사람일수록 더욱 개인주의 성향이 많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의 남편 K선교사도 전도하기 위해 아파트 안에 있는 그룹인 시니어모임에 가입하고 감사라는 직책까지 가지게 되었다. 전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들어간 것이다. 시니어들과 함께 식사도 몇 번하고 했지만 전도 하지는 못했다.

이런 현실이니 한국에서는 전도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선교지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선교지에선 조금만 마음을 열면 다 친구가 된다. 조금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집도 오고 가고…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눈다. 그리고 정을 나눈다.

요즘도 내가 가끔 들어가는 선교지에서 나는 늘 힘을 얻고 온다. 내가 들어가면 수개월이 지났든지 몇 년이 지났든지 그들은 곧 친해진다. 어제 만나고 막 헤어진 사람처럼 반갑게 대한다.

그래서 선교지에 들어가 두세 주 보내는 시간은 외로울 틈이 없다. 함께 탁구를 치고 산책을 하고 수영을 하고 각자 집에서 한 가지씩 요리를 해서 가지고 와서 나누며 유쾌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이제 꽤 나이가 든 내가 선교지에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 같은 연배의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분들은 나보다 훨씬 나이든 사람처럼 행동을 하기 때문에 나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40대 50대들과 논다.

지난번에도 선교지에 들어가서 두주를 보내고 나오는데 그녀들은 섭섭해 어쩔 줄을 모른다. 함께 탁구를 치며 놀고 난 후 그녀들이 나에게 말했다. “罗老师(나 선생님) 노후엔 이곳에 와서 우리와 함께 살아요. 그러면 정말 좋겠어요. 꼭 그렇게 하실 거죠?”

이래서 나는 사람사는 맛이 풀풀나는 선교지가 좋다. 때만 되면 선교지에 다시 들어가려고 차렷 준비이~ 하고 있다. 남편 K선교사는 “당신이 가는 곳이면 나는 어디든 갈 거야” 하는 사람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남편과 내가 자식의 도리를 다마치는 그날, 우리는 다시 케리어 하나 끌고 그곳으로 갈 것이다. 주님께서 청년의 때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 하셨던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라고 말씀 하셨던 그곳으로 나는 돌아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또 눈물이 난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 삶의 현장이 이곳이다. 어머니 모시고 선교회 사무실겸 개척교회를 열고 살아가고 있는 때이다. 이때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좋은 믿음의 이웃을 만난 것이다. 진실로 오늘 이 아침이야말로 얼마나 기적의 아침인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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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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