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대중의 생애는 우리가 열등한 민족성과 문화인 증거

@ 청년마케팅 트위터 캡처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20년 7월부터 최익주 선생의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가제)> – 국민의 반성과 국가적 전환점(부제)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글이 출판되기 이전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회차별로 매주 한편씩 실리게 되며, 글의 배포는 무방하나 무단전재는 금한다. 글의 소유는 전적으로 저자 최익주 선생에게 있음을 알리며,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무방하다.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는 저자가 20년여 전부터 대한민국이 인간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 한계에 봉착했고, 또다시 혼란과 위기와 망국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을 연구했다. 이에 저자는 대한민국이 부디 새롭게 출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산업화 이후의 시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련의 최근 사건들을 통해 그 문제점 되짚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바르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편집자주>

5. 김대중의 생애는 우리가 열등한 민족성과 문화인 증거

역사와 현대사 내내 우리(민족성, 국민성, 인간성, 문화)가 얼마나 열등했는지 가장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김대중이다.

김대중의 인생은 참으로 처절하고 아이러니했다.

김대중이 타고난 지능과 어렸을 때의 총명함으로 생각한다면 훗날 대한민국을 구해낼 ‘난세의 영웅’이나, 선진복지 국가로 도약시킬 ‘백마 탄 왕자’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열등한 문화와 민족성과 환경과 인연들 속에서 열악하게 성장했고, 결국 나라와 국민에게 애국하고 공헌해야 할 대통령이 되자 북한의 독재정권에게 거액을 전달해서 핵무장을 시켜줬다.

이는 나라와 국민에게 획기적으로 공헌해야 할 인재가 오히려 치명적인 역적 짓을 저지른 대역 죄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 필자는 30대 후반에 책(이제는 바꿔봅시다)을 출판해서 “대통령을 김대중으로 바꿔 보자.”라고 호소했을 정도로 열렬한 지지자였다. 필자의 부친(99세)은 김대중(초등학교와 목포상고)의 3년 선배로서 한때는 그를 아끼고 밀어줬던 지지자였다.)

김대중의 1차 부적응

김대중의 엄마는 하의도의 부둣가에서 주막을 운영했고, 껍데기만 양반(김해 김씨)인 동네 양아치의 첩이 되었으며, 김대중은 서자(첩 자식)로 태어났고, ‘서자’라는 이유로 제사 때는 마당에 덕석을 깔아놓고 절을 올릴 정도로 무시와 차별 속에서 자랐다.

그러던 중 그의 총명함을 알아본 담임선생의 도움(조언, 경제적 지원)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와 밤 봇짐 해서 목포로 도망쳐 나왔고, 북교 국민학교를 마치고 목포상고(5년제)에 입학했다.

이는 김대중의 소년기가 열악하고 열등했으며, 도피하는 인생(밤 봇짐)을 통해서 터전이 목포로 바뀐 배경이다.

​아마도 김대중이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에서 태어났다면 그처럼 더러운 차별과 멸시를 당하지 않았거나, 덜 당했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고향을 등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웃과 친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세계적인 인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 내내 열등한 문화와 민족성이었고, 극심한 학대와 착취와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김대중도 그중에 한 명이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반성해야 할 열등하고 잔악했던 우리의 과거(문화, 역사, 민족성, 인간관계)이며, 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대사와 인간성과 국민성이고, 바로잡아야 할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잔재들(차별, 비난, 투쟁, 대립, 분열, 원망, 분노, 적대시 등)이다.

(* 친일파청산과 적폐청산보다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했던 것은 우리끼리 차별하고 분열하고 적대시했던 잔재들을 말끔하게 청산하는 것이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김대중의 2차 부적응

김대중은 일본인들이 절반이었던 목포상고를 수석 입학했고, 1-4학년 내내 1등이었다. 하지만 4학년 후반부터 항일의식이 싹트면서 반항아로 바뀌었다. ​당시에 그가 모교(일본)에 반항한 것이 2차 부적응이었다.(* 김대중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순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김대중의 3차 부적응

김대중은 목포에서 상선회사(‘목포상선’)를 운영했고,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했으며, 고향인 하의도에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 그런데 그는 집안 어른에게 큰절을 올리다가 담뱃대로 머리를 얻어맞았고, 머리가 터져서 피를 쏟아냈다. 문중의 어른 왈(曰) “서자 놈이 감히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양반 가문에 먹칠하려고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머리를 감싸고 목포로 돌아왔고, 불모지인(실향민들이 많은) 강원도 인제로 올라가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것이 또다시 김대중이 목포를 떠나서 타향에서 살길을 찾은(성공한) 제3의 부적응(도피)이었고, 여기까지는 아주 똑똑하고 촉망되는 인재였다.

(* 김대중은 자신이 몸담고 살았던 제2의 고향(목포)에서도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존중도 지원도 인정도 받지 못했고, 타향(인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다음 선거는 목포에서 당선되었다.)

김대중의 4차 부적응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받다가 결국 해외로 도피(4차 부적응)했다.

김대중의 5차 부적응(치명적인 약점)

그는 일본에 머물던 중 김일성(조총련 간부)으로부터 거액(25,000달러)을 받았다. 이는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의 독재정권과 인연을 맺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북한에 연결되는(코가 꿰이는) 5차 부적응에 해당된다.

(* 필자는 한동안 ‘김대중의 고액 수수설’에 설마 했다. 하지만 이후에 관련된 증언들과 증인들이 나오자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김대중의 6차 전환점(미국의 도움)

그는 일본(호텔) 체류 중에 중앙정보부(이후락)에 의해서 납치되었고, 바다에 수장될 순간에 미국(헬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으며, 미국의 품에 안기는(보호받는) 제6의 기회(행운)가 생겼다.

김대중의 7-8-9-10차 전환점

이후 김대중은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과 야당총재와 대통령출마·낙선, 정계은퇴 선언, 은퇴번복 선언, 대통령 당선이라는 제7-8-9-10의 기회들이 계속 주어졌다.

총명함과는 정반대인 김대중의 역적 행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제5의 도피(부적응)에서 조총련(김일성)의 유혹에 코가 꿰어버림으로써 전 세계로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했고, 오히려 대한민국에 치명적인 역적 짓들(종북, 반미)로 빗나갔으며, 6차의 행운(미국)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반미로 배은·배신했다.

대통령 김대중이 반드시 해결했어야 할 과제와 의무와 책임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열악했던 역사와 문화와 민족성과 국민성과 인간관계 등을 최대한 끌어안아야 했다.

첫째, 김대중은 독재와 민주화에서 움츠러든 국민의 존엄성과 사기와 자긍심을 고취해야 했고, 국민의식의 향상을 위해서 사회·문화·정치 등 총체적인 개혁을 시도했어야 했다.

이는 독재의 뿌리(하나회)와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금융실명제를 과감하게 단행했던 김영삼의 개혁정책에 이어서 김대중에게도 그러한 책임과 의무와 권리가 동시에 있었고, 민주화 대통령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과제였으며, 이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았어야 했다.

둘째, 하지만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어서 북한정권에 코가 꿰어버린 치명적인 실수와 마주했고, 당선과 동시에 대북 퍼주기와 개인적인 영웅심리에 혹한 과도한 명예(노벨상)로 삐뚤어졌다.

이는 김대중의 출생환경과 성장과정과 출세과정이 극도로 불안정했고, 자유민주주의에 필수적인 휴머니즘과 존엄성(진지하고 충실한 자기과정)과 리더십에도 무관하고 역행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와 대가였다.

그래서 집권 1년 만에 레임덕에 빠져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고, 자신의 무능과 역적 짓을 은폐·만회하기 위해서 국민의 관심사와 정서와 분위기를 반미(효순·미순 사건)로 유도해버렸다.

김대중에 대한 기대감과 실망감

필자는 30대까지만 해도 김대중에 대해서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이끌어줄 ‘난세의 영웅’과 ‘백마 탄 왕자’로 여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종북과 반미’로 삐뚤어졌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필자는 김대중이 일본에서 조총련으로부터 받은 25,000달러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다. 당시에 필자는 군사독재정권에서 조작해낸 마타도어(흑색선전)로 여겼다.

그런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보고 들은 이후 사실인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왜냐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증거들을 제시한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탈북한 인사들이 “북한에서는 ‘김대중은 김일성이 길러낸 성공적인 간첩’이라고 자랑한다.”라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필자는 김대중이 도피 중에 김일성(조총련)의 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면 김대중이 목숨을 걸고 반독재 투쟁했고, 장기간 도피 생활했지만 국민들로부터는 도움을 받지 못했고, 극도로 궁핍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계비와 활동비가 필요했을 것이고, 유혹의 마수를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며, 사실은 내심 반가웠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김대중의 사례는 우리 국민이 평소에 ‘난세의 영웅’이나, ‘백마 탄 왕자’를 기대하고 염원하면서도 실제로는 도와주지 않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역시 국민들이 자기 주변에서 옳고 바른 사람들을 훤히 보고 듣고 알면서도 불이익이 무서워서 외면해버리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대중 역시 힘겨운 상황에서 북한정권(김일성)의 유혹에 빠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김대중은 나라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 역적 중에서도 원흉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왜냐면 나라와 국민과 후손에게 역적 행위(대북 불법 송금)를 극비리에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미국의 감시망을 속이기 위해서 다수의 차명계좌를 도용해서 소액으로 쪼개기 송금을 해줬고, 다 망해버린 북한을 살려주고 핵무장까지 시켜놓았으며, 오늘날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주범이다.

우리 국민이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점

우리 국민은 현대사 내내 자기(성적, 입시, 취업, 성공, 출세, 부자, 기득권, 특권, 뇌물, 향응, 접대)에 급급했으며, 유능한 인재들과 참신한 인물들과 순수한 세력을 육성하지도 밀어주지도 찾아내지도 않았고, 자유민주주의에 무관하거나, 역행했다.

그로 인해서 월등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녔던 김대중은 열등한 민족성과 역사와 문화와 국민성과 인간성을 극복해내지 못한 채 역적 짓으로 끝났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대한민국은 독재에 이어서 민주화에서도 실패와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국민의 좌절과 불신이 당연해졌고, 분노와 적개심과 적대감이 고착되어가고 있다.

국민의식의 향상이 모든 문제와 해결의 정답

지금부터는 국민이 각자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자기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려는 인물들과 인재들을 찾아내고, 존중하고, 밀어주고, 키워줘야 한다. 이는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모두 함께 좋아질 수 있는 정답과 지름길이다.

* 김대중 납치 사건과 이후락의 총상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은 김대중을 납치하면서 호텔방에 북한제 로프와 담뱃갑을 떨쳐놓는 등 북한의 범행으로 조작해 놓았다. 하지만 현해탄에 수장시키기 직전에 미국(헬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이후에 박정희는 이후락에게 “네가 누구 마음대로 그런 짓을 꾸몄냐?”라고 호통쳤고, 이후락은 “당신이 누구 때문에 대통령을 해먹는데 큰 소리냐?”라고 대들었으며, 옆에서 지켜보던 박종규(경호실장)가 이후락의 허벅지에 권총을 발사했다. 이후락은 응급조치만 받고 극비리에 영국의 병원에 입원했고,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에 일본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안보에 구멍이 뚫렸고, 국내외적으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후락이 총상을 입고 영국의 병원에 입원하자 “이후락 영국 망명”이라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고, 김종필이 즉각 일본으로 건너가서 입막음 로비를 시도했으며,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그런데 또다시 차지철에게 놀아났으며, 결국 김재규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우리 민족성과 역사와 문화와 국민성과 인간관계와 관행들로는 수준 높은 사회의식이 필수인 자유민주주의가 너무나 과분했고, 현대사 내내 자유민주주의에 무관하고 역행될 수밖에 없었다.』

저자 최익주 선생은 전남 목포 출생으로 목포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로 이사해서 북성중학교, 동신고등학교, 조선대학교 경영학과(78학번)를 졸업했다.

군생활을 오산비행장 방공포부대에서 병장 만기 제대, 3년간의 개인 사업을 했으며, 관세사무소에서 16년 동안 사무장으로 지내다가 광주세관과 관세청과 부정비리 문제로 싸움(형사소송)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실체와 실상을 깨닫고 인생을 180도 선회. 이후 밑바닥부터 다시 터득하고 통달해야 한다는 각오로 시민단체(2-3년), 택시기사(2년 6월), 생산공장과 건물경비(10년여)를 전전하면서 노동자 생활을 해왔다.

저서로는 <이제는 바꿔봅시다(1997.7.30.)> <대화로 여는 새아침(1999.9.20.)> <사랑하는 선·순·아에게 제1-4권(2018.7.13.)>이 있다.

 

다음은 “6. 박정희와 김대중의 당선 순서를 바꿔보면”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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