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물위를 걷는 선교사의 삶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얼마 전 택배로 책을 한권 받았다. 40년 동안 이집트에서 선교한 L선교사님의 ‘애굽 선교 40년 회고’로서 책의 제목은 <나의영광 애굽이여>이다. 장장 431페이지의 꽤 두꺼운 책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쓴 머리말의 맨 처음 글이 참 인상적이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한 번 선교사는 영원한 선교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선교사이기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누구나 장기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로 출발할 때는 그런 결심을 한다. 끝까지 선교지에서 살리라. 아니면 고국에 돌아오더라도 적어도 자신이 속한 선교단체인 교단이나 선교부가 정한 정년까지는 선교지에서 살겠다는 각오로 출발한다.

그러나 선교지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아서 종종 비자 제한 등의 이유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온 선교사는 비록 몸은 여러가지 정황상 국내에 있게 될지라도 마음은 늘 선교지에 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 선교사로 헌신하여 한번 파송받아 나갔던 선교사는 여러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국내에 머문 다고 할지라도 국내에서도 대개 선교 관련된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선교사가 자기의 선교소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위로부터 선교의 소명을 받고 평생 선교지에서 살겠다고 선교사 후보자가 결단한 순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선교사훈련은 결코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물위를 걸어갈’준비가 되어야만 선교사는 선교지로 출발하게 된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결혼 16년 동안 손때 묻은 살림살이를 모두 다 흩어서 이곳저곳 다 나누어 주고 식구수대로 달랑 캐리어만 끌고서 선교지로 들어갔었다.

선교지에 들어가서 얻은 집은 벽은 하얀 회벽만 칠해져 있고 바닥은 시멘트 바닥인 엉성한 집이었다. 그나마 선교지에 들어간 바로 그 날 이 집을 구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교수비자를 내준 대학 게스트룸에서 하룻밤을 자고서 이튿날 비닐장판을 사다가 깔고서 선교지에서의 삶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언어를 준비하느라고 하고 들어갔으나 현지사람들과의 소통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곳은 당시만 해도 많이 열악했다. 그런 선교지에서의 삶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가라고 하신 곳(선교지)에 내가 와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남편과 나는 날마다 감격하곤 했다.

선교지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가족이 받은 훈련, 그리고 선교사로 가기 위해 지불한 댓가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사춘기의 세아이를 키우며 받아야 했던 선교사로 가기 위한 훈련은 우리 가족이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러한 모든 훈련, 교육, 시험을 마치고 드디어 들어온 선교지였기 때문에 그만큼 감사도 컸던 것 같다. 아무튼 선교지에서의 우여곡절한 삶들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나갔고 아이들도 자라서 선교지를 떠나서 한국의 대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이제 우리 부부만 남아서 선교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막내까지 한국으로 대학을 보내놓고 만 삼년간을 사역에만 집중 하였다. 그런데 사역의 열매들이 이곳저곳 맺혀갈 즈음에 나는 선교지의 공권력에 의해 추방을 당했다.

하지만 나는 선교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비자제한이 풀리면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하자고 결단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장신대에서 빡센 M.Div 과정을 3년 동안 마쳤다. 그리고 박사과정으로 미국의 그레이스 신학교에서 D.miss(선교학 박사)과정도 마쳤다.

그런데 공부를 다 마치고 났는데 다시 선교지로 들어갈 길이 열리지 않았다. 앞으로는 열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남편 K선교사와 나는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선교지에 들어갈 다짐을 지금도 하며 살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를 세워서 문서선교와 ‘선교사 힐링센터’사역을 시작했다. K선교사는 지구촌한국어교육선교회를 세우고 한국으로 유학온 유학생들에게 논문을 지도해 주는 교육사역을 시작 하였다.

요즘 우리 부부는 평상시 거의 가지 않는 유명 커피숍을 종종 갈 때가 있다. K선교사에게 논문지도를 무료로 받은 유학생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스타벅스 커피와 케잌 쿠폰을 보내오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우리 동네에는 없는 ‘커피빈’ 케잌과 커피 두잔 쿠폰을 보내와서 일부러 자동차를 타고 고촌까지 다녀왔다. 그런데 이런 것도 일종의 선교사역의 재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직은 국내에 있으라고 하신다면 이곳에서 맡겨주신 사역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버텨나갈 수 있는 선교후원이 채워져야 한다.

남편 K선교사가 어려운 중에도 총회연금을 해약하지 않고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노후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 하지만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는 앞으로도 만 3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 선교 사역할 수 있는 재정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두손 모은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 분이 있기에 그런 믿음을 갖을 수 있는 것이다. 물위를 걷는 듯 한 선교사의 삶을 지금까지 잘달려 왔다. 자~이제 또 3년만 잘 버텨 보자. 내겐 희망의 고지가 보인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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