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37] – 학살 누명 쓴 구조 활동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5장 ∙ 문재인이 바로잡아야 할 5·18 기록

9. 학살 누명 쓴 구조 활동

사진 33 ▲ 5월 27일 아침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후 보병 20사단 61연대 1대대의 주 역할은 무장시민들과의 전투가 아니라, 도청광장과 그 주변 시가지 청소 및 쌀 배급 등 대민봉사였다.

무장한 시민 사망자들을 발견한 계엄군이 병원으로 후송해 주면 학살 누명을 쓰게 되어 있는 것이 광주사태였다. 주남마을 사건이 양민학살이라는 주장과 함께 지난 30여 년간 따라다닌 허위주장이 암매장설이었다. 암매장설 역시 지금 문재인과 전두환 간의 5·18 역사전쟁의 핵심 쟁점 중 하나이다. 그런데 사망자들과 중상자들과 부상자들을 발견한 군인들이 즉시 소지품으로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에게 알려준 후 전남대 병원으로 후송한 것이 어째서 암매장이란 말인가?

5·18 측에서 ‘주남마을 양민학살 사건’이라고 이름 붙인 사건은 실제로는 공비 및 그 부역자들 점령지역인 지원동에서 발생하였다. 조인호는 지원동에는 5월 21일 정오 무렵에 이미 공비 무기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도청의 총성이 그친 직후에 화순 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군용 트럭 3대에 30-40명의 시민군들이 트럭 양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이 몰려들자 차를 멈추었다. 지원동 탄약고에서 무기를 가져왔다고 하면서 모여든 시민들에게 총을 나눠주었다(조인호 1988).

지원동 버스 사고 현장에서 문병소 중사 일행은 7~8명뿐이었으며, 그 일대에 무장시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으나, 무장시민들은 홍금숙 일행을 전혀 구조하려 하지 않았고, 문중사 일행이 버스 안 무장시민들을 구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구조 활동 장소가 안전한 곳이 아니라, 안성옥 등 매복한 무장단체 총탄이 언제 빗발처럼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한 구조 활동이었다.

전남의대 부속병원은 지원동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우선은 무장시민 부상자들을 수레에 실어 지원동 무장단체 총 사정거리 바깥으로 후송하여야 했다. 문병소 중사는 통신병이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전으로 헬기 지원 요청을 한 것이었다. 중상자 두 명은 후송 도중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후송이 늦어진 것에 대해 공수대원들만 탓할 수가 있는가? 무장시민 차량들이 전남대 병원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고 있었으며, 멀리서 계엄군이 보여도 사격하였기에 차 한 대 없는 문중사 일행이 홍금숙 일행을 직접 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의 2017년판 저서에서 황석영은 주남마을 고등학생 임희주가 6월 3일경 2구의 시신을 보았다는 주장을 근거로 미니버스 시민군 희생자 암매장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임희주의 날짜 기억이 정확치 않거나 그가 보았다는 시신은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 홍금숙이 언급한 방송통신고 학생 황호걸은 전대병원에 안치되어 있다가 5월 29일 부검이 실시된 병원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5.18기념재단이 지난 2년간 아무리 그 일대 땅을 파보아도 암매장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홍금숙은 사건 발생 당일 자신만 병원으로 후송되었던 것처럼 증언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어떤 방법으로 후송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사건 발생 직후 일신방직 여공 고영자도 전대병원으로 후송되었으며, 이것은 그녀 부친 고재련 씨와 그녀 직장 동료 김정순 등이 아주 분명하게 증언하는 사실이다. 군인들은 그녀 시신을 수습하여 전대병원으로 후송하기에 앞서서 일신방직에 그녀 사망소식을 알렸고(김정순 1991, 164), 화순의 가족에게도 알려 그녀 아버지 고재련 씨와 누이 고은순 씨가 그녀 시신을 찾으러 화순에서 달려왔다(고영자, 고재련 2006, 99-100).

광주단체들은 이것을 암매장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지원동에 주둔한 괴무장단체가 전대병원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인들은 부상자 및 사망자 후송에 최선을 다하였고, 신속하게 가족과 친지들에게도 사고 소식을 통보하여 주었는데 어째서 그것이 암매장인가?

미니버스 안 무장시민들의 사망원인에 대하여 고영자 양 아버지의 관찰도 문병소 중사의 관찰과 일치한다. 그 버스 창은 타이어로 방탄 장치가 되어 있어 버스 바깥 멀리서 날아온 총탄은 버스 안 깊숙이 들어올 수 없었으며, “아버지가 본 영자의 시신은 멀리서 쏜 모습 같지 않았다.” 이렇듯 고재련 씨에게는 복면무장단체가 왜 자기 딸을 미니버스에 태우고 다닌 것인지 등에 대해 5·18측 설명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고영자, 고재련 2006, 100).

고영자 등 방직공장 여공들이 화순에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려 가는 길이었다는 사기꾼들의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직장동료들과 가족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양인화는 5월 21일 오전에 고영자와 김춘례 등이 여공 복장으로 시민군 차를 타고 다니는는 것을 목격하였음을증언한다:

그러는 중에 서방삼거리에서 파란 가운을 입은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들이 시위버스를 타고 ‘전두환이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다니는 것을 보았다. 저런 나이 어린 여자들도 시위를 하는데 나라고 못 하겠느냐 하는 생각에 무척 감동을 받았다 (양인화 1990, 143).

양인화가 사용한 시위라는 단어는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경찰이 모두 도망가고, 군인들도 철수하고 괴무장단체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시민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선동한 것은 시위라기보다 ‘봉기’였다.

고영자와 김춘례의 직장 동료 김정순은 홍금숙이 타고 다니던 103번 차가 5월 21일 오전에 일신방직으로 여공들을 실으러 왔으며, 그 봉고차를 타고 그 날 화순과 해남과 강진까지 갔다 왔음을 증언한다:

나, 영심이, 이점덕, 김달님이 함께 있는데 시위하는 봉고차, 트럭 등이 왔다. 거기 서있던 여공원들에게 함께 참여하자고 했다. 그러자 대부분이 차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넷도 시위하는 봉고차에 탔다. 일반인, 학생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차 안에 타고 있었다.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누렸는데 대개 이런 구호였다. ‘전두환을 때려 잡자’‘ ‘계엄령을 해제하라” 그리고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는 노래도 불렀다. 우리가 탄 차는 회사에서 도청을 지나 화순읍으로 갔다. 그 당시엔 군인들이 도로에 없었고 시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계속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달렸는데 화순읍을 지나 해남, 강진까지 갔다가 저녁놀이 질 무렵 광주로 되돌아왔다 (김정순 1991, 162).

김정순의 증언으로 홍금숙이 광주청문회 때 위증한 사실이 다시 한번 명확히 입증된다. 홍금숙은 오빠를 찾으러 5월 23일 주월동 집에서 처음 외출한 것처럼 말했으나, 5월 21일 이른 아침 홍금숙을 태운 미니버스는 힌츠페터가 광주역전으로 오는 시각에 맞추어 광주역으로 갔다가 일신방직으로 가서 여공들을 태우고 화순과 해남 등으로 가서 가두방송으로 무장 봉기를 선동했었었다.

그러면 어떤 경위로 고영자와 김춘례가5월 23일 103번 차를 타게 되었는가? 5·18측에서 하는 거짓말처럼 그녀들이 도청에 찾아와 도청 불법 점거자들에게 화순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고 사정하였는가? 아니다. 그녀들은 그 날 아침 멀리 신안동 직장 동료 자취방까지 찾아와 하루만 더 무장시위대 차를 같이 타자고 조른 사실을 김정순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날도 저녁때가 되어서 점덕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주로 빵, 음료, 딸기 등으로 배를 채우고 연3일을 지낸 탓인지 그날 밤은 몸이 몹시 지쳐 있었다.

23일 아침 10시경 눈올 떴는데 기숙사 216호실에 있는 고영자, 김춘례가 점덕이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그러고는 “언니! 오늘 딱 하루만 더하세“ 하며 점덕이, 영심이 모두 나가자고 했다 (김정순 1991, 163).

103호 차는 창문이 타이어로 방탄장치가 되어 있었고, 의자 밑에 엎드려 있으면 안전하고, 의자는 멀쩡한데 버스 바닥에 엎드려 있었던 사람들이 어째서 앞쪽이 아닌 뒤쪽에서 쏘는 총에 하반신을 맞았을까? 이것은 아마 영원히 베일에 쌓인 불가사의이겠지만, 한가지 유력한 가설은 15명의 인솔자는 공비였고, 공비가 그들의 수칙대로 자폭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강도에게 맞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받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오히려 모르는 체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이 정성을 다해 구해 주었다. 5∙18 논리의 위험성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에 학살 누명을 씌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억울한 누명이 한국에서 실제로 있었다. 만약 문병소 중사에게 학살 의도가 있었다면 왜 부상자들을 발견하는 순간 생명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는가? 문병소 중사 일행이 도착하기 전까지 두 시간 동안 그 주변에 이른바 시민군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원동 시민군 측에서는 아무도 구조하지 않았던 부상자들을 문중사와 몇 명의 그의 부하들이 구조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사실 문 중사 일행의 구조 활동은 그 어느 구조활동보다도 어려웠다. 미니버스 문을 열어보니 십여구의 시신들이 있어 모두 기겁을 하였다. 부하들도 겁내고 뒷걸음쳐서 문 중사 직접 시신 한 구 한 구를 확인하면서 아직 구조가 가능한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생존자가 있으면 자기 옷을 찢어 붕대를 만들어 지혈을 해주고 병원으로 후송하기 위한 최선을 다했다. 문재인 인권변호사가 만일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렇다면 그런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단지 사고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학살 누명을 써야 하는가? 대한민국 군인들 중 다수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처럼 착하다. 왜 그들에게 광주학살 누명을, 살인기계 누명을 씌우려 하는가?

자고로 학살 의도가 있거나 학살을 한 군대는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만약 문병소 중사 일행이 가해자였다면 왜 세 명의 생존자를 찾아내어 악조건 하에서도 후송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무전기를 최대 활용하여 타 부대에 시민군 부상자 후송을 위한 헬기 지원 요청을 하여 홍금숙 양이 치료시기를 놓치지 않게 해 주었는가?(문 중사는 세 명 후송을 의뢰하였는데, 실제로 몇 명이 후송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매복하고 군인 그림자만 보여도 총을 쏘는 공비 및 그 부역자들이 우글거리는 지역 한가운데서 군인들이 후송자 구조 활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무장난동자들의 차량들이 전남대학병원 길목을 막고 있는 상황에서 부상자 후송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러나2017년 12월 21일의 제천 화재 때 문재인 재난 컨트롤타워가 29명의 병원 후송 기회를 놓친 것과는 달리 문병소 중사의 정찰조는 아직 구할 수 있는 시민 생명을 신속하게 구하였다. 그들은 군의관도 위생병도 구조대도 아니요, 시민군 구조를 공약한 정치인도 아니요, 또 그럴 의무가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순발적으로 자발적인 선의의 봉사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생명의 은인으로서의 보답을 맏은 것도, 표창장이나 상을 받은 것도 아닌데 선의의 구조 봉사 댓가가 양민 학살 누명이라면 너무나 억울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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