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필자가 겪어본 운동권(종북·좌파·주사파)의 실체(원조)

80년대 학생운동야사[펌] 2편 캡처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20년 7월부터 최익주 선생의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가제)> – 국민의 반성과 국가적 전환점(부제)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글이 출판되기 이전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회차별로 매주 한편씩 실리게 되며, 글의 배포는 무방하나 무단전재는 금한다. 글의 소유는 전적으로 저자 최익주 선생에게 있음을 알리며,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무방하다.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는 저자가 20년여 전부터 대한민국이 인간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 한계에 봉착했고, 또다시 혼란과 위기와 망국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을 연구했다. 이에 저자는 대한민국이 부디 새롭게 출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산업화 이후의 시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련의 최근 사건들을 통해 그 문제점 되짚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바르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편집자주>

10. 필자가 겪어본 운동권(종북·좌파·주사파)의 실체(원조)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대해서 잘못된 필자의 인식

필자는 불과 20-30년여 전만 해도 대한민국을 ‘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으로 단순하게 양분했다.
우리 국민에 대해서는 어용(특권와 기득권와 꼭두각시 보수)세력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순수 애국(개혁, 진보) 세력으로 양분하는 오류에 빠져있었다.
심지어 재야세력과 운동권·노동자·종교(성직자)·농민·시민단체를 대표적인 애국세력으로 착각했고, 역시 이들을 독재(북한독재와 남한독재)를 혐오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으로 착각했다.
왜냐면 우리 국민 중에서 최악으로 악랄하고 망가진 북한의 봉건왕조 세습독재 정권을 추종(찬양, 두둔 비호)하는 정신병자들과 사기꾼들과 저능아들과 머저리들이 이토록 많고, 설쳐댈 것이고, 교활하고, 집요하고, 저돌적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나는 대한민국의 극소수 독재자와 추종세력(인연관계, 이해관계자)들을 제외한 절대다수 국민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것으로 착각했고, 단지 표현과 방법과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국민 간에 존재하는 차이들도 마치 지역감정처럼 “독재세력이 민주화 세력과 대한민국의 국민을 갈가리 분열시키기 위해서 날조해낸 교활한 와해 공작”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 역시도 세습독재를 추종하는 재야와 운동권의 논리에 영향받을 정도로 나 자신이 무지하고 답답하고 어리석었다.

사실 나는 학창시절에 대한민국의 국민은 누구든지 기회만 주어지면 ‘박정희를 쏴 죽여야 한다.’고 간절하게 생각할 정도로 이승만과 박정희를 혐오하고 증오했다.
이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머지 대통령들과 정치인들과 언론인들과 시민단체들과 지식인들과 전문가들과 일반국민들과 심지어 성직자들을 두루 지켜보면서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사실은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했었고, ‘선진국’과 ‘선진화’도 구분하지 못했었다. 다시 말해서 ‘민주화’가 진행되면 ‘자유민주주의’가 당연히 정착될 것으로 기대했었고, ‘선진화’가 시도되면 당연히 ‘선진복지국가가 실현’될 것으로 착각했었다.

필자가 대한민국을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처럼 필자는 자유민주주의를 너무나 쉽게 생각했고, 우리 문화와 민족성을 우수하고 위대하다고 착각했다. 그 이유(무지)는

첫째, 박정희가 자본주의(경제개발계획)를 획기적으로 성공했고, 자유민주주의도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는 우수한 민족’, ‘이승만과 박정희만 없으면 자유민주주의도 당연히 가능하다.’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래서 필자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처럼 극단적인 생각도 양반상놈이라는 잔악했던 역사에서 물려받은 단순한 흑백논리와 양비론과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서(반항·부정·공격) 중 하나였다.
이는 필자가 우리(민족, 문화, 역사, 관습 등)의 주제와 분수와 실상과 실체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다.
필자는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필자(우리)는 ‘김일성만 없어지고, 죽어버리면 북한의 인민이 해방되고, 곧바로 통일된다.’라고 쉽게 생각했고, 어둡고 무지한 인민들과 민족성과 열등한 문화(굽실거림, 아부아첨 등)에 무지했다.

둘째, 필자는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월등한 밑바탕(인류애)과 합리적인 사회의식을 필요로 하는지 몰랐다.
역시 우리의 민족성과 역사와 문화와 사회와 관행과 민족성과 근대사와 인간관계와 교육(목적, 제도, 방법, 효과 등)이 자유민주주의에 얼마나 역행되었는지 인식조차 없었다.
특히 필자는 엉망이었던 우리(조상, 민족성, 역사, 문화, 관행, 인간관계 등)의 후진성과 그에 대한 반성은 상상에도 없었고, 청나라와 러시아와 중공과 일본과 미국과 봉건왕조와 탐관오리와 상놈들에게 떠넘겨버릴 정도로 무지하고 열등하고 배타적이고 의존적이었다.

셋째, 필자는 서양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생겨나기까지 얼마나 많고 다양한 변화 과정(시대사조)들을 거쳤는지 몰랐다.
역시 필자는 우리가 선진국들에 비해서 얼마나 단순하고, 획일적이고, 차별적이고, 폐쇄적이고, 감정적인지 몰랐다.
우리는 지금도 비난과 분열과 반목과 적개심과 적대감으로 가득하고, 민주주의에서 기초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자질들(포괄적인 인류애, 인간의 존엄성, 자율적인 자유의 구현, 자기가치관의 확립 등)은 안중에 없다.
(※ 이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도 엮어놓았다.)

우리사회에서 겪었던 사건들과 인식변화의 계기

필자는 젊은 청·중년기 내내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한 미움과 저주와 원망으로 가득했다.
그러던 중 우리 역사에서 후진적이었던 조상들의 비인간적인 습성들과 합리화 근성이 필자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필자가 곧 역사적·민족적 비극(후진성, 혼란)의 화신(주범, 원인)이고, 차이가 있더라도 백지장 몇 장 차이뿐임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필자는 여전히 이승만과 박정희를 좋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대통령들(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의 장점·업적과 단점·과오를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주화 시대(세력)를 직접 겪어보면서 생각이 깊어지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왜냐면 인간과 사회와 국가가 변화·향상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통감하고 절감했고, 나라와 국민을 획기적인 변화와 개혁과 도약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이후에야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미움들이 사라졌고, 그간에 두 대통령은 혐오하고 질시했던 점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죄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들 모두가 거의 똑같거나, 흡사한 수준(역사, 문화, 환경, 민족성)이었으며, 특권과 기득권과 지식인과 일반 국민들과 성직자들과 농어촌이라는 지역과 입장이 다를 뿐이고, 오랜 세월과 갖가지 기회들이 주어졌음에도 피차 근본적으로도 결과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는 기존에 무지하고 답답하고 어리석었던 필자 자신과 우리(모두)에 대해서 과거 경험담으로 소개한다.

첫째, 대학축제 때 ‘주제발표회’와 ‘시국토론회’

대학축제 행사에서 운동권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토론회가 진행되었다. 당시는 독재시대 막바지였고, 자유화 물결의 초·중반기여서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
나는 당시에 운동권의 활약이 민주화(민주주의 전 단계)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토론회에서 누군가가 반대 질문하거나, 이견을 내놓으면 운동권 학생들이 야유하기 일쑤였다. 진지한 태도로 오랜 시간 함께 한 학생들에게 “어용 아니냐?”고 따졌으며, “어용은 물러가라”라고 소리쳤고, 진지한 분위기를 망쳐버렸다.
질문하고 이견을 제시했던 학생들은 당황하고 무참해졌고, 일반 학생들은 황당해하면서도 위세에 눌려서 지켜만 봤다. 물론 나도 운동권 학생들의 거의 막돼먹은 언행(횡포)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독재자를 끌어내리려면 운동권이 적극적으로 역할 해줘야 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위안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져서 석연치 않았고, 실제로도 불길할 정도로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냐면 운동권 학생들의 태도와 수준이 민주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학생답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선배회사에 운동권출신 후배를 소개해줬는데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했고, 제대 후에 안정적인 직장을 잡지 못하고 엉뚱한 일들에 소모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학교(모임) 선배가 “자기회사에 직원을 채용하는데 한 명 소개해주라.”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당시는 유가파동과 불경기로 취업이 힘든 시기였고, 선배는 후배(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부탁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입사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선배는 중견기업의 전남북 지사장이었는데 “지사장인 내가 입사추천을 해주면 본사에서 승락할 것.”이라고 확답까지 줬었다.
하지만 선배의 호의에도 나와는 무관한 척 해버렸다. 그래도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기 아까워서 운동권에서 열심히 투쟁하던 졸업반 후배를 소개해주고 싶었다. 사실 후배는 소개해주기 곤란한 조건과 입장이었다. 하지만 취업은 후배의 인생과 미래에 중요했고, 선배에게 미친 척 소개하기로 했으며, 다행히 선배는 후배를 받아줬다.
그런데 후배는 입사해서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넘어도 나에게 전화도 한 통 없었다. 후배는 나에게 식사는 아니더라도, 차라도 한 잔 마시자고 연락하거나, 최소한 “고맙다.”는 인사 겸 안부 전화는 했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사람)이 생기면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것으로 여기고 존중해주려고 노력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 후배가 입사과정에서 차마 나에게 말 못 할 일(선배가 금품을 요구하거나)을 당했던 것은 아닌지 오히려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모를 이유와 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묻어버렸고, 모임 할 때면 선배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의미로 “xx는 근무 잘 하는가요?”라고 안부를 물어봤고, 선배도 “잘 하고 있다.”라는 답변을 해줬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후배가 나에게 “xx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서 s사에 취업시켜줬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누가 그러디?”라고 물었다. 후배는 “xx가(본인이) 그러던데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라고 다시 확인해줬다. 나는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랬어?”라고 넘겨버렸다.
하지만 나는 머리가 번쩍했고, 후배를 포함해서 그간에 내가 불안해하고 의심했던 운동권에 대한 불신감이 살아 올랐다.
후배는 자기 열등감(피지배)의 반작용에 의한 출세욕과 과시욕에 불이 붙어서 선후배의 인연도, 기본 인간미와 양심과 상식도, 나(선배)에 대한 감사도 모두 팽개쳐버린 채 거짓으로 자신을 과장한 것이었다.
운동권에서는 나름대로 활약했지만 학창(젊은) 시절 내내 ‘민주화’로 위장했고, 최고 권력기관(국가안전기획부)에서 취업시켜줬다고 거짓을 꾸며내서 주변에 자랑까지 했을 정도로 무의식이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례식장에서 나와 후배가 우연히 마주쳤다. 후배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깜짝 놀라고 당황했고, 나는 무표정으로 악수만 해주고 일행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후배가 겸연쩍은 얼굴로 내 옆으로 다가왔고, 바로 옆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제가 형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뭔 말이냐? 가서 너 일을 봐라.”라고 외마디로 돌려보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우리의 독재자, 운동권, 잔혹했던 우리 조상들과 후진적인 역사와 문화와 민족성과 조부모와 부모들과 우리 국민 모두가 적극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다르지 않으며, 자유민주주의에 합당한 밑바탕과 자질과는 무관하고 정반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운동권 학생들은 소중한 젊음과 진지해야 할 학창시절에 자기 존엄성도 인식·확보하지 못했고, 더구나 반정부 투쟁과 시위로 허비해버렸다. 재야세력 역시 후진적인 역사와 문화와 관행과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과 분석과 대안은 안중에 없었고, 오직 비난과 공격과 투쟁으로 일관해버렸다.

결국 이들(우리들)은 과거를 극복하지 못했고, 오히려 태생적·환경적인 열등감에 기인한 욕망 겸 야망을 숨기고 살았으며, ‘민족주의’를 빙자해서 반민족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짓들을 저질렀고, 기어코 자신들을 합리화했으며, 더욱더 야비하고 교활한 짓들을 당연하게 저질렀고, 거짓과 위선과 선전선동과 조작과 위조를 가리지 않았으며, 이러한 짓들을 서로 묵인해주면서 스크럼세력을 형성·확장할 정도로 몰상식해지고 무자비해졌다.
이처럼 재야세력과 학생운동권은 ‘민주화’로, ‘선진화’로, ‘인권’으로, ‘진보’로, ‘개혁’으로 위장했고, 심지어 대통령들이 되고서도 안하무인의 교만과 이념으로 망가졌으며, 문재인은 독선과 독재와 역적 짓들로 전락했다.

셋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반미운동가

한때 반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다.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인물(반미운동가)을 알게 되어서 한동안 관계하게 되었다. 그는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단둘이 마주 앉았다. 그는 자신의 반미운동경력을 자랑하면서 윤이상(독일교포, 작곡가, 공산주의자, 김일성의 하수인)과의 인연을 자랑했다.
그리고는 “조만간 남북이 교류해서 금강산이 개발되면 김일성이 금강산 개발권을 남한의 누구에게 주겠니? 당연히 나 아니겠니?”라고 말했다. 이 말은 만일 내가 그(자기)와 함께 해주면 앞으로 괜찮을 것이라는 언질이었다.
나는 또다시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을 가눠야 했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었으며, 그날 이후로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다짐하고 적극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그도 역시 세상을, 인간을, 인생을, 현실을, 사회를, 정치를, 역사를, 국제사회를, 인류의 흐름과 방향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기 때문에 착각과 망상에 붙들려 있었다.

(※ 박근혜대통령 시절 대통령 직속으로 ‘국민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미문화원에 방화했던 그가 위원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청와대 직제를 살펴보다가 그의 이름을 발견했고, 이미 청와대 일부와 박근혜 대통령 측근들까지 이념과 사상에 오염되지 않았는지 심히 우려하고 걱정되었다.)

넷째, 택시회사에 기사로 취업했다가 노조위원장에게 당한 이야기

나는 극한의 어려움에 내몰린 상황에서 택시기사로 입사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혼자 열심히 일하면 되는 직업으로 택시기사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조에서 교통사고 보험을 취급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교통사고 시에 보험 혜택을 받으려면 노조에 가입해야 한다.”라고 가입을 요구했다. 나는 노조가입을 위해서 몇 차례 노조사무실을 찾았지만 가입하지 못했다. 노조사무실 직원은 “노조 부위원장을 만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후 얼마 지나서 부위원장을 만났는데 그는 “위원장을 만나야 한다.”라고 했다.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날 무렵 노조 간부회의 날(교대시간)에 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위원장은 노조가입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교대시간이 1시간 빠르다는 이유로 폭언을 쏟아냈다. 노조위원장은 나를 마치 동네 양아치의 하수인 정도로 취급했다. 나는 당하고 참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순간에 고성이 오갔고, 서로 배를 내밀면서 충돌 직전까지 갔다. 그러자 노조간부들이 달려들어서 말렸고, 간부 한 사람이 내 앞을 가로막고 “택시회사가 많으니까 다른 데로 가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노조간부들(20여 명)이 모두 노조사무실로 들어 가버렸다.
나는 150명의 기사들 중에서 첫 달 실적(수입금)이 2-3등을 했을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잘했다. 그런데 노조에서 그것도 위원장에게 무참하게 당했고, 회사를 나가라는 말까지 들었고, 그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회의가 시작되길 기다렸고, 회의가 시작되자 회의장으로 쳐들어갔다. 나를 만류하는 직원을 제치고 회의장으로 들어가서 노조위원장을 향해 큰소리로 강력하게 항의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택시라도 해보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노조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위로와 격려는커녕 이유도 설명도 없이 몰상식한 고자세로 고함을 지르다니…. 노조간부들까지 끼어들어서 회사를 내쫓는 경우가 대한민국을 다 털어서 어디에서 가능한 일인가? 사고 날 것에 대비해서 보험에 가입하려고 하는데 벌써 두 달째 가입을 시켜주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사고 나면 노조에서 책임질 건가요? 그러고 보니 위원장이 멋대로 독재하는 것을 보면 노조 운영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노조에 가입을 못하게 하면서 몰상식하게 쫓아내겠는가. 당장 노조에 가입해서 꼼꼼하게 살펴보고 따져봐야겠다. 더구나 동료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노조간부라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위원장을 만류하지 않았고,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도대체 노조간부들이 감투만 차지하고 뭣들 하는 겁니까? 내가 당신들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원한 관계가 있었는지 설명해보든지, 아니면 당장 사과하고 노조에 가입시키세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노조위원장이 단호한 표정과 행동으로 간부들을 회의실에서 “일단 나가 있으라.”며 쫓아내다시피 몰아냈다.
그리고는 나와 위원장 두 사람만 남겨지자 180도 아니 360도 태도를 바꿔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제가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라고 꼬리를 내렸다. 나는 불과 15분 만에 그의 건방짐과 도도함과 거만함과 비겁함과 초라함과 위선과 황당함까지 보게 되었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서 참고 “더는 나를 건들지 말라…….”.라고 경고했으며, 노조에서는 나를 보험에 가입시켜줬고, 회사에서는 노조의 간섭을 받지 않도록 지입제?(당시는 불법)를 권유했고 2년을 일하다 다른 회사로 옮겨서 기사로 6개월을 더 일했다.

​이후 나를 몰아내려고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몰상식한 노조위원장은 ‘복수노조’가 허용될 경우 복수노조 위원장 후보로 회사에서 지목하는 사람이 나와 교대하는 파트너였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나와 교대했던 파트너가 노조위원장으로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노조위원장은 내가 당연히 그쪽 사람(상대세력)일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고, 나를 노조에 가입시켜주지 않고 쫓아내려고 미루다가, 맞닥뜨리자 건수(교대시간)를 잡아서 몰상식하게 내쫓으려 했고, 뜻대로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 나에게 몰상식하게 퍼부었던 노조위원장은 동시에 광주광역시 민주노총 택시노조 위원장이었다. 민노총의 수준이 어떤지 짐작해보기 바란다.)
당시 사건으로 나는 재야세력과 학생 운동권에 이어서 노조(민주노총)도, 노조위원장도, 노조 간부들도 과연 어떤 수준과 자질들인지 적나라하게 실체와 실상을 확인했고,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최하부터 최상까지 짐작하고 예측하고 확신도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장차 염두에 두거나, 고려해야 할 일과 마음의 부담이 계속 늘어나고 많아졌다.

다섯째, 학생들이 총장실을 때려 부수고 태극기를 불태운 이야기

1979년(필자 2학년) 이야기다. 당시는 대학마다 일명 ‘재단비리’,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했다. 특히 독재에 대한 ‘민주화운동’(저항, 투쟁, 시위)이 주류였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운동권(주동자)들의 배후에는 북한의 대남전략이 숨겨져 있었으며, 순진한 학생들과 국민 다수는 그들이 주도하는 ‘민주화’라는 반민주주의적인 분위기(저항, 투쟁, 타도, 시위)에 당연히 응원해주고 동조해줬다.
만일 당시에 운동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우리의 후진적인 실체(역사, 문화, 민족성 등)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냉철한 원인분석과 적극적인 방안마련에 집중했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이미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에 진입했을 것이고, 적어도 ‘민주화’는 성공했을 것이며, 아니더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밑바탕이라도 튼튼하게 닦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항과 투쟁과 시위와 타도로 일관한 채 우리내부에 대한 부정적이고 적대적이고 비인간적인 분위기들로 가득했다. 이는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는 재야세력과 운동권세력이 당시 상황을 악의적인 목적으로 유도하고 주도했다는 반증 겸 증거다.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도 당연히 운동권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다수의 학생들이 건물 2층 총장실 앞에서 농성 중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총장실을 박살내자.”라고 외쳤고, 학생들이 순식간에 함성을 지르면서 몰려들었다.
그러자 총장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교직원 7-8명이 외짝 출입문을 가로막았고, 일부 교직원들은 학생들이 휘두르는 주먹에 얻어터지기도 했다. 당시에 시위대 맨 앞쪽에 있었던 나도 시위대를 향해서 돌아섰고, 교직원들과 힘을 합쳐서 문을 가로막고 버텼으며, 시위대를 향해 “폭력은 절대 안 돼”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물론 시위대를 막아선 학생은 나 한 명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버티다가 교직원들도 나도 너무나 지쳐서 힘이 빠졌고, 결국은 뚫렸다. 시위대는 총장실의 책장과 유리창을 모두 깨버렸고, 책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기물들을 부쉈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건물 앞쪽 창문을 열고 국기게양대로 나가서 태극기를 불태워버렸다.
다음 날 언론들에는 불타버린 태극기와 함께 ‘불순세력 개입’이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상황은 학생들에게 불리하게 바뀌었다. (※ 이후부터 나는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행동도 동작도 생각도 신중해지기로 했다.)

여섯째, 뇌진탕으로 병원에 누워버린 운동권 친구

어느 날 지역 일간지에 ‘운동권 학생이 교수에게 맞아서 뇌진탕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운동권 학생은 나와 꽤 친한 사이였다. 먼저 그 친구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이런 내용을 공개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당시에 나는 친구에게 문병을 갔다. 친구가 입원한 병실은 온돌방이었는데 방문 바깥까지 신발이 가득 차서 방문이 열려 있었다. 방안에는 운동권 학생들로 가득해서 발을 들이밀 수가 없었고, 친구는 앉아서 담소하고 있었다. 나는 들어갈 통로를 두리번거리면서 망설이다가 친구와 눈이 마주쳤고, 들어오라는 손짓에 어렵사리 친구에게 다가갔다.
“괜찮냐?”라는 나의 물음에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아”라고 답했다. “나는 다치지 않았어?”라고 재차 물었고, 친구는 “응. 살짝 부딪쳤는데 그냥 입원한 것”이라고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잠시 있다가 “가야겠다.”라고 나왔고,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는 5.18 수배명단에 있었고, 우연히 버스에서 만났다. 나는 친구에게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건네주면서 “내가 도와줄 일이나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해라.”라고 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네줬다. 친구는 “만일 내가 잡혀서 전화번호가 있으면 너도 붙들려서 고생할 거니 그냥 머리로만 기억하겠다. 고맙다.”라고 헤어졌다.
그 친구는 시골이 집이었고,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정의감에 불 타던 나이였고,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쯤은 자신의 학창시절을 반성하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졸업 후에 정말 열심히 사회생활 했다. 어떻든 우리의 안타까운 과거와 현실이라는 점에서 친구가 충분히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일곱째, 극렬한 운동권이었던 후배의 술집 줄행랑

이는 너무 추잡해서 고민하다가 정리하기로 했다. 당시에 학생운동권은 활동 자금이 없었고, 굶거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야학했다. 그들 중에는 술집이나 식당에 가서 주문한 술과 음식을 먹고 도망치는 경우들이 꽤 있었다.
내가 잘 아는 지인도 식당에서 술과 음식을 먹고 도망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에게 자랑하곤 했다. 또 한 명은 함께 간 친구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에 항상 맨 마지막에 도망치는 것을 영웅담처럼 들려주곤 했다. 특히 그는 업소 주인이 의심할 것에 대해서 위기 상황마다 빠져나가는 방법들을 나름대로 잘 준비해놓고 있었고, 완전범죄 겸 다중범죄를 마치 장난처럼 여기면서 자랑할 정도였다.
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짓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것도 누군가에 자랑까지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요지경인 곳이 세상과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여덟째, 신문기자를 폭행한 이야기

역시 1979년 이야기다. 그날도 본관의 2층 복도 중앙계단(총장실과 이사장실 사이)에서 꽤 많은 학생들이 시위했다. 그때 2층과 3층 중간(계단)에서 카메라 후레쉬가 ‘번쩍’ 터졌다. 모신문사 출입기자가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그러자 누군가가 “짭새다.”라고 소리쳤고, 순식간에 학생들이 쫓아 올라가서 기자를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우르르 달려들어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시작했다.
나는 “안 돼 기자다.”라고 소리치면서 20-30명을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바닥에 꼬부라져 있는 기자를 감싸 안고 일으켰고, 기자는 혼비백산한 채 얼굴이 긁혀 있었다. 그런데도 한 손에는 카메라를 꽉 쥐고 있었다. 나는 기자를 안아 일으키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시위대들을 밀어내고 떨쳐냈고, 시위대는 나의 손짓으로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기자의 손에 쥐어진 카메라에는 렌즈가 빠져있었고, ‘니콘 FM’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나는 한 손으로 기자를 감싸서 보호한 채 학생들을 향해 비키라고 손짓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렌즈가 빠져버린 카메라를 허공에 휘두르면서 돌려달라고 제스처를 취하하면서 ‘비키라’고 외쳤다. 하지만 렌즈는 돌아오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기자를 보호해서 1층 경리처로 데려가서 안정을 시켰다. 기자의 얼굴은 여기저기 씻기고 부어 있었고, 여전히 창백한 채 넋이 나간 상태였다.
나는 “죄송합니다.”고 반복해서 사죄했으며, “기자님이 기자 안장을 착용해야 하는데 이해해주시라.”고 변명하고 사정했다. (물론 나는 운동권이 아니고, 가입한 동호회도 하나 없었다. 당시에 나는 나와 함께 하는 학생들과 교수들과 관계자들과 학교와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 모두를 소중하게 여겼고,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던 순수한 학생과 시민과 국민이었다.)

다음 날 신문의 사회면에는 “학생 시위대 기자폭행”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학교에 정보과 형사들과 기관원들이 조사하러 다녔으며, 전세는 학생들에게 불리해졌고, 나는 그런 수준의 대학생들과 대학생활이 지겨워졌다.
이런 수준의 ‘민주화’와 ‘운동권’의 연장선에서 등장한 인간들이 지금의 종북좌파와 김일성 주사파 세력이다.
이들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월등한 법과 제도와 자질이 자유민주주의다. 이러한 ‘인간 존엄성’과 ‘합리적인 국민(사회) 의식’과 ‘포괄적인 인류애’와 ‘자율적인 자기 가치의 구현’ 등 최고수준의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똑바로 이해하고 수행하고 실현해낼 것으로 기대하는 국민은 없어야 한다.

아홉째, 오래전에 겪고 당했던 모습들이 최근에 그대로 재현되어

– 우리 모두 아시다시피 불법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임수경이라는 여학생이 있었고,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독재와 굶주림에 지쳐서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에게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그녀도 역시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학생운동권과 주사파였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에 실패한 증거와 주범들이며, 김일성 일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북한인민들과 똑같이 무지하고 답답한 수준임을 의미해준다.

– 국회에 출석한 장관들과 기관장들을 마치 파렴치한 범죄자 다루듯이 고자세로 인신공격과 비난을 쏟아내던 여자 국회의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국회의원이 대리기사 폭행 사건에 연루되었고, ‘나는 때리지 않았다.’라고 발뺌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만일 그녀가 주사파운동권 패거리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비민주적이고 부정적이고 비인간적인 수준으로 절대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없었다. 역시 그런 수준인 그녀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사람들도 우리 국민들이다. 이는 우리가 도토리 키 재기 차이에 불과하다는 증거다.

– 어떤 국회의원은 보좌관의 월급에서 후원금을 상납받았고, 온 가족을 끌어들여서 집안 잔치를 벌였다.
이러한 국회의원들이 모두 학생운동권 출신들이다. 그런 지경에도 그런 만행을 변명해주거나, 두둔해주거나,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했던 동료 국회의원들과 정당도 있다.
이런 수준과 지경인데도 과연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국민이 맞는가? 선진복지 국가가 가능할 것인가? 나라가 망하지 않고 버텨낼 수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열째, 운동권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보수(국민)들도 수두룩하게 많아

특권층에 속하는 재벌들과 자녀들이 부하직원과 시민들을 상대로 갖가지 추태들을 연출해냈다. 자기 자식이 누군가에게 맞았다고 조폭들을 동원한 재벌도 있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언론에서는 갑과 을에서의 ‘갑질’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갑과 을의 부당한 관계가 아니라 왕과 신하의 주종관계이거나, 동네 양아치와 순진한 겁쟁이 관계이거나, 주인과 머슴(노예)관계다. 이러한 모든 것이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극치다. 이는 역사에서 나라를 망해먹었던 탐관오리들과 다를 바 없고, 자기 일가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김일성 악당들과 결국에 다를 바 없다.
나는 이러한 모습들을 보고 겪으면서 무엇보다 운동권 출신들이 떠오른다. 이들의 의식구조와 의식수준이 곧 왕권주의 체제에서의 조상(탐관오리)들과 독재자들의 복사판이며, 이제는 국회와 정치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핵심 세력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수준의 사람들은 차라리 독재자 밑에서 눈치를 살피면서 몸을 사리고 살아야 할 수준들일 수도 있다. 만일 국민들이 이들을 계속 방치·방조한다면 머잖아서 그들에게 끝없이 비굴해질 것이고,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과 나라 장래는 참담한 지경으로 전락할 것이며, 대한민국은 5천 년 역사에서 겨우 30-40년의 번영기로 내리막으로 치달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한민국이 역사에 이어서 현대사에서도 독재(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와 막연하고 무능한 민족주의자(노태우, 김영삼) 시대와 좌경화된 민주화(김대중)시대와 좌경화에 도도해진 진보(노무현, 386) 시대와 무능한 보수(이명박, 박근혜) 시대에 이어서 ‘앞으로 좀 더 망해 먹을 종북·좌파·주사파·친중·반미 세력과 아직도 주제와 분수와 반성조차 모르는 ’잔챙이 보수우파 세력까지 모두 몰락해야 하고,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역시 그간에 우리들 모두가 서로 도토리 키 재기 차이뿐이었고, 지금부터는 대한민국의 과거와 문화와 관행들과 인간관계(방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끌어안아서 총체적인 점검과 반성과 포용과 용서와 단호한 조치와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저자 최익주 선생은 전남 목포 출생으로 목포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로 이사해서 북성중학교, 동신고등학교, 조선대학교 경영학과(78학번)를 졸업했다.

군생활을 오산비행장 방공포부대에서 병장 만기 제대, 3년간의 개인 사업을 했으며, 관세사무소에서 16년 동안 사무장으로 지내다가 광주세관과 관세청과 부정비리 문제로 싸움(형사소송)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실체와 실상을 깨닫고 인생을 180도 선회. 이후 밑바닥부터 다시 터득하고 통달해야 한다는 각오로 시민단체(2-3년), 택시기사(2년 6월), 생산공장과 건물경비(10년여)를 전전하면서 노동자 생활을 해왔다.

저서로는 <이제는 바꿔봅시다(1997.7.30.)> <대화로 여는 새아침(1999.9.20.)> <사랑하는 선·순·아에게 제1-4권(2018.7.13.)>이 있다.

 

다음은 “11. 필자가 광주 5.18 때 학교에서 겪은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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