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역사전쟁-39] 문재인 쇼가 벗긴 총기난사범의 가면 – 문재인의 5·18 유공자 자격의 근거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6장 ∙ 문재인 쇼가 벗긴 총기난사범의 가면

2017년 5월 18일 문재인 ‘보궐’대통령이 광주사태 37주년 기념공연을 하였을 때 5∙18을 왜곡하는 거짓말이 급조되었다. 김소형씨가 먼저 “슬픈 생일”이란 제목의 추도사를 낭독하자 문재인이 김소형씨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대서특필되었으며, 언론은 앞다투어 1980년 5월 18일 오전 김소형씨가 태어나던 날 그녀 부친 김재평씨가 금남로 산부인과로 가던 중 국군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가짜 뉴스를 보도하였다. 그러나 그 날 5월 18일 정오 무렵 금남로에는 군인 그림자도 없었으며, 완도시민군 김재평을 군용트럭에 태운 괴무장단체 차량 행렬이 광주 어귀에서 힌츠페터 일행과 조우하여 광주로 침투한 날짜는 5월 20일 늦은 오후였다. 무장시민군들이 광주통합병원과 인근 도로와 주택가를 향해 총기난사하는 순간 김재평 씨가 사망한 날짜도 5월 18일이 아닌 22일 저녁이었다.

사실관계를 왜곡한 문재인의 5∙18 눈물 쇼가 부메랑이 되어 이제 양파 껍질 벗겨지듯이 5∙18의 진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5∙18의 거짓의 아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다.

1. 문재인의 5·18 유공자 자격의 근거

국민들은 어째서 문재인 보궐대통령이 2017년에 6∙25 전쟁 67주년 추모식에는 참석치 아니하고, 5∙18기념식에만 참석한 것인지 궁금해하였다. 문재인은 평소 자기에게 5∙18 유공자 자격이 있다는 말을 종종 하였으며, 이 날의 기념사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민주화운동이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5·18때 구속된 일이 있었지만 제가 겪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큰 부채감이었습니다. 그 부채감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준 힘이 됐습니다(문재인, 김성우 2017).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 순서를 크게 왜곡하는 문재인의 이런 거짓말조차 지적하는 언론 매체가 단 하나도 없는 문재인 정부 시절의 한국 언론은 죽은 언론이다. 문재인의 연설문 문맥은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5∙18 때 구속되어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의 역사 시계는 거꾸로 흘러가는가? 광주사태는 1980년에 발생하였고, 문재인이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때는 1982년이므로 문재인의 연설은 사건 발생 연도가 맞지 않는다. 문재인은 이렇게 연설한 후에 5∙18 재조사 지시를 하였지만, 사실은 문재인의 5∙18 어록부터 재조사하는 것이 5∙18 진실규명의 순서일 것이다.

1980년 5월 당시 한국을 강타한 석유 위기 해결을 위해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하고 있는 틈을 노려 윤상원을 위시한 김대중 세력과 이태복의 전민노련은 5월 15일에 청와대와 중앙청과 서울 시내 각 방송국들을 점거할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다(김대령 2015, 217-228).

그 목표를 위해 김대중의 사조직 민청협이 조직하고, 서울대 심재철 총학생회장을 얼굴마담으로 세운 시위가 바로 5월 15일의 대규모 시위이다. 당시 중앙대 총학생회 부회장이었던 백남기도 4,000명을 동원하였고, 경희대 복학생 문재인도 한 떼거리를 인솔하고 있었다.

예정된 청와대 기습 이전의 시위대 행진 코스는 중앙청-남대문-서울역이었다. 그 날 경찰은 남대문 앞에만 저지선을 설치하였다. 경찰 저지선으로 인해 시위행진이 막혔을 때 갑자기 문재인이 인솔하는 경희대 시위대 몇 명이 인근 시민버스를 탈취한 후 그 버스를 빠르게 몰며 경찰 대열을 뒤쪽에서 들이받고 경찰관들의 몸을 잔인하게 버스로 짓뭉개며 달리는 테러를 하였다. 경향신문은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한다:

15일 오후 6시 8분 남대문 시위대열 속의 청년 한 명이 시내버스를 탈취, 저지선을 펴고 있는 기동경찰 등 뒤로 돌진해 한병일 이경(21) 등 전경대원 6명이 중상을 입고 경찰병원에 옮겨졌으나 이성재 일경(23)이 16일 새벽 0시 반 숨졌다(경향신문 1980년 5월 16일자).

동 기사에 따르면, 이 청년은 남대문과 서울역 시위행렬 사이에 끼여 있던 48번 상진운수 시내버스를 탈취, 학생들의 함성을 받으며 남대문 우측에서 저지 중인 경찰을 뚫고 남대문을 한 바퀴 돌아 남대문시장 입구에서 남산 쪽을 바라보며 대치중인 경찰을 뒤쪽에서 덮쳐 미처 피하지 못한 전경대원 5 명을 치어 쓰러뜨리고 남산 쪽으로 올라갔다. 버스에 치여 쓰러진 전경대원들은 동료들에게 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차를 뺏긴 상진운수 시내버스 운전사 박용화 씨(42)는 “20대 청년 3명이 올라와 승객들을 내리게 한 뒤 멱살을 잡아 끌어내리고 차를 몰고 갔다”고 말했다(경향신문 1980년 5월 16일자).

당시 서울대 복학생으로서 심재철과 유시민을 배후조종하던 이해찬은 문재인의 경희대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경찰을 대상으로 차량 테러를 한 사건의 현장 목격자였고, 심재철도 그 버스가 경찰을 죽인 뒤 곡예에 가까운 급커브를 하며 경찰차 추적을 따돌리고 남산 쪽으로 사라진 사실의 현장 목격자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운전사 박용화 씨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 운전기사들 중에는 그렇게 능란하게 급커브를 하면서 경찰차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는 운전실력을 가진 기사가 없었다.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e) 기자가 훗날 이태복에게 들은 바로는 “이태복과 윤상원의 조직들은 광주사태로 치닫는 주요 사건들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Martin 2000, 98).

“80년 봄 주역들 이젠 정치판의 核” 제하의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문재인이 5∙18 기념식 연설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그가 광주사태 때 구속된 적도 없었고, 구속되어 많은 고통을 당한 적도 없었다:

경희대 복학생이었던 문재인 씨는 이날 청량리 경찰서로 연행된다. 경찰 저지선을 뚫으려 돌진한 버스에 치어 전투경찰 한 명이 숨졌고, 버스를 몰았던 사람을 놓친 경찰은 현장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文씨를 연행한 것이다. 그리고 며칠 만에 文씨는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2차 합격소식을 들었다. 경찰서장은 소주 파티를 열어줬고 경희대 재단이사장의 신원보증으로 文씨는 석방됐다 (중앙일보 2003년 2월 14일자).

사진 58 ▲ 폭력시위대가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군경을 살해하는 테러 무기로 사용한 것은 광주사태 때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위의 동아일보 1980년 5월 16일자 기사 사진은 이미 5월 15일에 문재인이 인솔한 경희대 폭력시위대가 탈취한 버스로 경찰을 덮쳐 살해한 사실을 보여준다. A scene of violent demonstration of May 15 that killed police. Moon Jae-in who was the leader of the violent group.

폭력시위대가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경찰관들에게 돌진하여 여러 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을 때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닷새 후 광주에서 똑 같은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나중에나마 광주경찰은 경찰관 4명을 치어 죽게 한 버스의 기사 배용주 씨를 연행하여 재판에 넘겼다. 서울에서 문재인이 경찰 살해 사건 주동자였을 때는 주동자를 검거해서는 안 된다는 불공평법이 1980년에 있었는가?

그래서 문재인이 그 날 5월 15일 사건 현장에서 바로 청량리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나 전혀 수사를 받지도 않았고, 구치소에 수감되거나 교도소로 이감된 적도 없다. 문재인이 유치장으로 연행된 지 며칠 만에 6월 5일 사법고시 2차 합격소식을 들었고, 경찰서장은 축하 소주 파티를 열어준 뒤 바로 석방하였다. 이것이 문재인이 그의 5·18 기념식 연설에서 그가 광주사태 당시 겪었다는 고통의 전부였다.

지금 문재인의 폭정 하에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2018년 10월 현재 벌써 1년 반이 넘게 구치소에 갇혀 계신다. 아무런 죄도 없이 박 대통령이 당하시는 이런 고초에 비하면 문재인은 경찰관 살해 사건 주동자였으면서도 단 하루도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없었다.

변호사라도 살인혐의가 있을 때는 면허 취소 등 중징계를 받을 사안일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법대생에게 운전 과실치사 혐의가 있으면 그 법대생은 졸업 후 영영 법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다. 그런데 문재인이 연루된 사건의 경우 고의적 경찰관 살해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청량리 경찰서장이 문재인을 즉시 석방해 준 것은 이상한 일이었음을 이제는 말해야 한다.

문재인은 베트콩을 모방한 인민혁명당을 옹호하는 시위를 선동하다가 1975년 4월 15일에 경희대학교에서 제적당하였었다. 그 무렵의 그의 반미 친공 이념 성향이 그의 회고록 『문재인의 운명』 132쪽에 이렇게 암시되어 있다: “미국의 패배와 월남의 공산화를 보고 희열을 느꼈다”(문재인 1987, 132).

문재인이 1980년 3월 2일 경희대학교 법대 4학년에 복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해 2월 29일 최규하 대통령이 정치인 22명 등 687명을 사면복권 시킨 덕분이다. 최 대통령의 사면 복권 대상자들 중 학생도 373명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문재인 이름은 복학이 허용된 373명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복학이 된 경희대 학사행정에 의구의 여지가 있다. 이 경우 그런 학사비리는 정유라가 2015년에 국제 승마대회 금메달 보유자로서 정당하게 이화여대 체육대 특기생으로 입학한 것과 비교된다.

시국사범 전과자인 문재인이 최규하 대통령 정부 시절 누린 가장 큰 특혜는 사법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유라가 정당하게 이화여대 체대에 입학하였으면서도 이화여대 입학이 취소되고, 고등학교 졸업도 취소되고, 승마 선수 자격이 박탈되는 등 문재인 정부로부터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있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1980년 5월 15일의 시위는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이란 호메이니 방식으로 헌정질서를 중단시키고 김대중 스스로 집권자가 되게 하기 위한 시위였다. 최 대통령의 선정의 특혜를 누구보다도 크게 입은 문재인이 최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시위에 앞장서 경희대 시위대를 인솔하였고, 그 시위대가 차량 테러로 경찰을 죽였다.

만약 이 사건 수사가 시작되고, 문재인이 구치소에 수감되었더라면 문재인이 사법고시 2차에 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경희대 재단 관계자들이 편지를 가지고 청량리 경찰서장을 찾아오고, 수사의 시작이 마냥 지연되더니 6월 3일 사법고시 2차 합격소식이 전해지자 경찰서장이 축하파티 열어주고 즉시 석방하였다.

사진 59 ▲ 경향신문 5월 16일자 7면에서 경희대 시위대의 차량 테러 희생자 이성재 일경의 사진이 보인다. 이 사건 직후 김종환 내무장관이 신현확 국무총리와 주영흠 국방장관에게 계엄 하에서는 군부에 치안 유지 책임이 있음을 건의하였고, 그 보고를 받은 최규하 대통령이 5월 17일 심야에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였다. 이것이 5월 18일 0시를 기해 최 대통령이 지역 계엄을 전국계엄으로 전환하게 된 시대 배경이다. The man on the photo is Policeman Lee Seong-jae killed by a group of violent demonstrators led by Moon Jae-in on May 15, 1980.

경희대 시위대가 시민버스를 탈취한 후 그 버스를 경찰저지선으로 돌진시켜 이성재 일경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여러 명이 중상을 입게 한 이 폭력사건 수사를 누가 막았는가? 설사 청량리경찰서장에게 이 사건 현장 주동자가 교사에 의한 공범 혐의를 쓰지 않도록 선처할 의향이 있었더라도 하더라도 범인이 누구였으며, 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최소한 참고인으로서의 진술서는 받아두었어야 했다. 청량리 경찰서장이 그런 최소한의 조치 없이 문재인을 그냥 석방한 것은 단순한 월권이나 직무유기가 아니라, 범죄 은닉이었다. 그리고 경희대 시위대의 범죄 은닉에 경희대 재단측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다.

법관 후보는 일반인보다 더욱 준법정신이 강해야 한다. 사람 여러 명이 죽거나 다쳤으면 광주 단체들이 학살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런 엄청난 살인 폭력 사건의 주동자가 사법고시에 합격되면 무조건 무죄가 되고 참고인 진술조차 받지 않고 유치장에서 즉시 석방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정유라의 경우 결코 그녀가 1980년 5월 중순의 문재인처럼 경찰 살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가 삼성전자 로고를 달고 국제승마대회에 출전하였을 때 탄 그 말의 소유주가 누구였느냐에 관한 문제였을 뿐이다. 그 말이 삼성전자 소유라는 것은 처음부터 아주 명백한 사실이었고, 다만 마녀 사냥을 목적으로 여론 공작을 하는 언론이 삼성전자가 정유라에게 말을 사주었다고 가짜 뉴스를 보도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다. 정유라가 한국에서 가져온 말들을 삼성전자가 자기네 선수 훈련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유라가 삼성 로고를 달고 국제승마대회에 출전할 때만 삼성이 승마대회용 말을 임시로 구입하여 잠시 빌려 주었을 뿐이다. 어느 기업이나 자기 회사 로고 달고 승마대회에 출전하는 선수에게 좋은 말을 빌려주는 것은 상식의 문제이다. 여기에 손톱만큼도 중거 인멸의 여지가 없었음에도 문재인 정부 검찰은 도주 우려 혹은 증거 인멸 여지가 있다며 몇 번이고 구속 영장을 신청했었다.

정유라가 문재인처럼 경찰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도 문재인 정부 검찰은 철저히 수사하겠다며 2016년 10월 이전에 정유라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까지 1년간 구속했었다. 그렇다면 그런 철저한 수사 원칙이 문재인 본인에게도 적용되었어야 하지 않았는가?

경희대 시위대의 차량 테러에 의한 경찰 살인 사건은 경희대 법대를 포함한 경희대 재단이 발 벗고 나서 개입하여 은폐한 사건이었다. 백주에 차량 테러에 의한 경찰관 살인 사건은 이렇게 미스터리로 영영 묻혔지만, 경찰 저지선에서 경찰관들이 폭력시위대 버스에 깔려 처참하게 죽거나 증상을 입은 사건이 내무부장관에 준 충격으로 김종환 내무장관이 신현확 국무총리와 주영흠 국방장관에게 군 개입을 호소하게 되었다.

사진 60 ▲ 문재인이 인솔한 경희대 시위대가 탈취하여 차량 테러로 이성재 일경을 살해하는데 사용한 문제의 시내버스. Three violent demonstrators from Moon Jae-in’s group seized this bus and ran over policemen, killing one and injuring many. Mr. Moon was released from the jail immediately, yet this incident was followed by a series of key events of Korean history.

문재인은 여태까지 마치 자기가 1980년 5월 18일의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계엄사에 체포되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해왔으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사건 전개 순서상 경희대 시위대의 차량 테러에 의한 경찰 살인 사건이 사흘 먼저이다. 김 내무장관의 건의는 신 총리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그 결과로 5·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실시되고, 계엄사 포고령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정국이 어수선하며 최규하 과도정부가 약체인 것을 노려 김대중이 민중봉기로 정권을 찬탈하려는 세 번의 시도를 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11월 24일 미수로 그친 민중봉기 시도였으며 (일명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 그 두 번째가 5월 15일의 대규모 시위였으며 (일명 서울역회군), 세 번째 시도가 광주사태 형태로 전개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었다.

5월 15일 서울 시내 각 대학교 재학생들이 결코 어떤 의식이 있어서 가두시위하러 모였던 것이 아니었다. 복학생 조직이 각 대학교 총학생회에 그 날 전교생이 모두 수업을 빠지고 서울 어디어디로 모이라고 지령을 내렸으며, 재학생들은 그것이 시위인 줄 모르고 각 학교 별로 세종로 일대에 모였다. 모이자마자 주동자들이 선창하고, 재학생들이 후창한 구호는 “직선제 개헌반대” “최규하 하야” “신현확 퇴진”이었다. 시위를 왜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은커녕 시위구호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이 북한식으로 (혹은 김대중식으로) 구호를 외치게 하였다.

김대중이 제일 먼저 “직선제 개헌반대”를 외치게 한 이유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여, 제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려고 하였는데 선거법이 직선제로 개정되면 야당후보 단일화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게 패배한 김대중은 출마 자격이 없으니까 선거판을 깨뜨리기 위함이었다. “최규하 하야”와 “신현확 퇴진”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가 함께 퇴진하면 국가가 전복되고 헌정질서가 중단되어 김대중 스스로 집권할 기회가 생기는 것을 노린 구호였다.

그 날의 시위는 각 학교 별로 학생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가두시위였다. 문재인이 인솔하는 경희대 시위대는 남대문에서 도뀨호텔 방향으로 설치된 경찰저지선 바로 가까이까지 와 있었으며, 거기서 행진이 잠시 멈춰졌다. 지금은 경찰저지선이 차벽으로 설치되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차벽이 없이 경찰이 한 줄로 사람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 문재인이 인솔하는 경희대 시위대 중에서 세 명이 뛰쳐나와 남대문 인근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승객들을 내리게 하고, 운전사와 안내양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린 후 운전대를 잡고 버스를 빠른 속력으로 몰며 남대문을 한바퀴 돌아 경찰저지선 뒤쪽에서 돌진하여 경찰관들을 들이받았다. 한 줄 횡렬로 늘어선 경찰관들과 대치하고 있던 경희대 시위대가 자기네를 보라고 손짓하며 경찰관들의 시선을 유도하는 바로 그 순간 반대쪽에서 버스가 달려와 경찰관들의 등을 덮쳤기 때문에 아무도 피하지 못했다. 경찰관 살인범들은 범행 후 그 버스를 몰고 도주하였으므로 범인을 놓친 경찰은 사건 현장 주동자만 연행하였는데, 그가 바로 경희대 복학생 문재인이었다.[24]

경희대 학생들은 전경 뒤편에서 전경들을 향해 버스가 질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전경들에게 피하라고 하지 않고 모두가 일심동체로 전경들의 시선을 자기네 쪽으로 유도하였다. 누군가가 학생들에게 그렇게 시켰다. 사건 성격상 집단 범죄였으며, 사건 발생 후 집단으로 은폐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아무리 아들이 내일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는데 오늘 저지른 교통사고 때문에 밝은 장래를 망치게 되었다 하더라도 부모가 사고를 숨기지 않으려는 법 상식과 윤리가 있다. 그런데 문재인의 경우 그가 연행된 직후 경희대 학생처장과 경희대 법대 동창회장 등이 우르르 찾아왔으며, 경희대 조영식 총장도 신원보증을 해 주었다.

경희대 법대 동창회장 등이 우르르 찾아왔다는 것은 법조계의 경희대 인맥이 총동원되어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말이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법조인들이었다는 말인가? 사법 공권력과 법 지식을 사건 은폐와 범인 감추기에 악용한다면 이것은 특정 대학 출신 법조인들의 조직적인 ‘범죄 은닉’이다.

하나 물어보자. 살인 사건도 아니고 정유라가 국가대표선수로서 이화여대 체육특기생이 된 것 가지고 최순실과 정유라 모녀가 가혹한 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했다면 경찰관을 살해한 폭력 사건 주동자 역시 조사를 받아야 법에 형평성이 있는 것 아닌가?

이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지 경희대에서 누가 문재인 신원보증을 해준다고 경찰서장이 풀어줄 수 있는 성격의 사건이 아니었다. 경희대 학생들이 경찰을 죽였으므로 경희대가 사건 당사자였는데 어떻게 그 학교 총장에게 그 사건에 연루된 학생 신원보증을 해 줄 자격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문재인은 정유라 건은 비교도 안 되는 학사행정 비리에 연루되어 있어 보인다. 만약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정유라가 체육특기자로서 이화여대에 입학한 것이 정유라의 학부형이 몇 년 징역살이를 하여야 할 만한 법 위반이라면 1980년 6월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박원순과 문재인의 학사비리는 그보다 훨씬 더 심한 것이었다. 문재인이 1980년 3월 2일 편법으로 4학년에 복학한 것은 눈감아줄 수 있다고 해도 그가 5월 15일 이후에는 전혀 학교에 간 적이 없으므로 최종학력은 경희대 법대 3학년 중퇴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박원순의 건국대 졸업 학위는 엉터리였다. 박원순은 1979년에 경상도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 강원도 정선군 등기사무소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서울에서 건국대 국사학과 수강을 하였다. 즉, 박원순은 경상도에서 군 복무를 하는 동시에 강원도 춘천 법원에서 근무하였으며, 경상도 군 복무와 강원도 법원 출근을 한꺼번에 하는 동시에 서울에서 대학생이었다. 쉽게 말해 박원순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며, 그의 건국대 졸업은 엄청난 학사비리에 의한 엉터리 가짜 졸업이었다. 그러면 체육 특기자 정유라와 관련된 학사행정에 대해서는 그토록 집요하게 추적하며 보도하는 언론이 어째서 문재인과 박원순이 관련된 학사 비리 의혹에 대해서는 일체 보도하지 않는 것인가?

도대체 문재인이 자신의 학력을 어떻게 속여 왔기에 위키백과 등에는 “1980년에 경희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후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등의 상투적인 문장으로 그의 졸업년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이 역사를 엄청 왜곡하는 잘못된 기록들인데, 문재인은 왜 빨리 바로잡지 않는가? 문재인이 경희대 법대 4년에 복학한 날짜가 1980년 3월 2일인데, 어떻게 1980년에 경희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1980년 5월은 아직 대부분의 국민이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던 최규하 과도정부 시절이었는데, 도대체 문재인이 그때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였다는 거짓말을 왜 하는가?

1980년 3월 2일에 복학한 문재인은 5월 15일 경찰관이 사망케 한 폭력 사건 주동자로서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 지내다가 박원순과 함께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으며, 사법 연수를 마친 후에는 부산으로 내려가 1982년 노무현과 더불어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였을 뿐, 등교하여 4학년 과목들을 이수한 적이 없다.

문재인이 2016년 4월 12일 광주에서 총선을 하루 앞두고 “저는 5∙17계엄 포고령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날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다 광주특별법에 의해서 유공자 자격이 있다”고 한 말은 아주 능글맞은 거짓말이다. 문재인은 5·17계엄 포고령위반으로 구속된 적도 없을뿐더러 그날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다 유공자 자격이 있다고 명시한 광주특별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가 5월 15일 경희대 시위대가 차량 테러로 경찰관을 살해한 사건 주동자였기에 며칠간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가 금방 풀려났을 뿐 5∙17계엄 포고령위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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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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