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박사의 5.18 역사전쟁-42] 또 한 명의 완도시민군 김양래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4. 또 한 명의 완도시민군 김양래

김양래는 전남대 학생들 중에서 5월 21일 오전에 무기탈취조 혹은 무장시민군들과 더불어 광주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13개 시군으로 진출한 유일한 학생이었다는 점에서 광주사태 핵심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다.

김양래는 5·18의 어떤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무장 활동을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만약 그가 전혀 무장 활동을 한 적이 없다면 어떻게 5·18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5·18 유공자들 중 가장 큰 실권을 가진 5·18기념재단 상무이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인지 누구나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는 왜 완도 사람 김재평이 막 광주로 와서 적극적 시민군 활동을 시작하던 때 김양래는 완도로 내려갔는가 하는 질문에 있을 것이다.

김양래는 김재평처럼 본래 고향이 완도였고, 본적이 전남 완도군 완도읍 대신리 621이었다. 그는 1956년 3월 25일 완도에서 부친 김은갑과 모친 김종입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여, 1972년 광주 북상중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전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농대 1학년에 입학하여 1978년 6월 27일 육군에 입대한 지 1년 만에 의병제대하였다. 비록 그는 중학교 교육부터 광주에서 받았지만 그의 백부는 완도 유지였으며, 그가 완도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그 지역 수협 운동권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 광주운동권과 완도 운동권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인가?

김양래의 경력에서 한가지 특기할 점은 1980년 3월 2일 문재인이 경희대 4학년에 복학한 바로 그 해에 김양래도 전남대 3학년에 복학하였다는 사실이다. 복학 후 김양래는 전남대 내 김대중의 사조직 팀장 역할을 하였던 바, 광주사태를 사전 기획한 그 팀을 일명 ‘기획팀’이라고 불렀다. 전남대 농대 복학생 시절의 그의 주소는 전남 나주군 나주읍 남내동 86이었다.

지난 제37주년 5·18 기념식 때 김양래 당시 5·18 기념재단 상무이사는 김재평의 기일이 5월 18일이 아니라 22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5·18측에서 ‘슬픈 생일’이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낭독하는 김소형씨 부친 김재평의 사망일이 5월 18일이었던 것처럼 왜곡된 채로 5·18기념식이 진행되었으며, 언론에도 잘못 보도된 것에 대해 김양래 이사는 왜 침묵하였는가?

1987년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광주사태 사진전을 개최함과 동시에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광주의거자료집 2』라는 책명의 사진책자를 발간하였는데, 사진전 및 책 발간 실무자는 김양래였다. 그 가 하나하나 사진들을 골라 출간한 이 책은 북한자료센터에서 북한원전으로 분류되어 있다.

광주사태가 끝난 지 한 달 반도 훨씬 지나서야 자수한 김양래는 자신은 광주사태 때 아무것도 안했다는 간교한 거짓말로 수사관들을 속이고 특별사면을 받았다. 광주사태 때 아무것도 안 한 자가 무엇을 근거로 5·18 유공자가 되고, 어떻게 5·18기념재단 상무이사가 될 수 있었는지 이제는 물어야 한다.

만약 김양래에게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는 신념이 확고할진대 어째서 자신이 광주사태 때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베일에 가려두고 숨기는가? 힌츠페터의 ‘푸른눈의 목격자’ 영상에 보면 5월 20일 오후에 괴무장단체 차량들이 광주에 입성하기 위해 다리를 통과할 때에 김양래가 복면을 하고 총을 든 자세로 길 안내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듯 광주사태 사진전을 개최하였으며, 광주사태 사진책자를 발간한 김양래는 광주사태 때도 주도적 역할을 했었는데, 그것을 숨겨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김양래는 심지어 그가 5월 14일 분수대 위에서 가두시위를 선동하였을 때 찍힌 자기 사진을 심문자가 보여주어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거짓말하였다(김양래 2013, 674).

전남대 학생회 내에는 기획팀이란 비선조직이 있었는데, 이 조직이 비선실세로서 김대중의 사조직이었다. 학생이 아닌 광주운동권 윤한봉과 윤상원과 김상윤 등이 직접 관리하던 이 조직이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대학가에서 주도하였고, 전남대 총학생회는 이 비선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가두시위를 조직하였다. 김양래는 전남대 내에 정말로 그런 비밀 비선조직이 있었으며, 기획팀이라 불리는 그 비밀조직이 광주사태를 사전 준비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 당시에 제가 총학생회에서 따로 비밀리에 운영하는 기획팀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함께 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당시에는 요즘은 풍물패라고 하는데, 그때에는 농악반이라고 했는데 농악반이 없어져서 다시 그걸 농악반을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그래서 풍물 악기를 구입하고 연습도 하고 그런 역할들을 그 과정에서 제가 했지요. 광주항쟁이 나기 직전에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상당히 열심히 했고, 가두로 진출하기도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가 함께 만들었던 농악반이 그 시위대를 끌고 앞장을 서 다니고 그랬었지요.

저는 광주항쟁이 나기 전에 저희 내부에서 이런 계엄이 확대되면 일단은 일차로 활동했던 기획팀은, (학내이슈가 학외로 확대되면) 뭐랄까 (임무를 마치고) 도망가기로 되어 있었어요(김양래 2013, 671-672).

김양래의 위의 증언에서 “계엄이 확대되면”은 거짓말이다. 그때는 그 누구도 비상계엄이 전국계엄으로 확대될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비상계엄이 전국계엄으로 확대된 직접적인 계기는 5월 15일 문재인이 인솔한 경희대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한 후 전속력으로 경찰저지선을 들이받아 이성재 일경이 즉사하고, 여러 명이 중상 입게 한 사건이었다. 서울에서 경찰력으로는 더 이상 치안유지가 불가능한 그런 극한 상황이 닥치니까 김종환 내무장관이 계엄하 치안유지를 위한 책임을 군부에 떠넘기는 요청을 한 것인데, 그런 상황을 광주운동권이 미리 예측하였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사진 64 ▲ 광주사태 당시 전남대 농대 3학년이었던 김양래는 자신이 5월 21일이 완도로 도망갔다고 하지만, 왜 복면무장폭도들이 파출서를 습격하던 해남을 거쳐 갔는가? 사진에서 백색 상의를 입고 오른손에는 카메라를 왼손에는 총을 번쩍 든 채로 복면무장폭도들 옆에 서있는 안경 쓴 자가 김양래이다.

5월 21일 김양래가 완도로 도망갔다는 표현도 능글맞은 거짓말이다. 그 날 광주에서 도망간 쪽은 무장시민들이 아닌 경찰과 군인이었다. 김양래는 무장봉기를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킬 목적으로 괴무장단체 차를 타고 해남을 거쳐 완도로 진격하였던 것이지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

김양래를 태운 괴무장단체 차량들은 무기를 탈취하며 무장봉기를 전라도 전 지역으로 일시에 확산시킬 목적으로 (1) 화순—동명—송광, (2) 보성—벌교 방면, (3) 남평—나주—무안—목포, (4) 영암—강진—해남—완도 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86). 이것이 도망인가?

군납업체 아세아자동차가 있는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치밀한 준비는 해남과 목포에서 진행되었다. 해남에서는 자생간첩단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하부조직인 민주투쟁농민연맹이 제2의 동학난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으며, 완도시민군은 해남시민군의 일부로서 편성되었으며, 완도 수협 간부는 소대장급이었다:

오후 6시경, 해광여객 전무와 협의하여 차량 2대 지원받음. 광주고속 5대, 광천교통 버스 5대, 광원여객 버스3대, 화물트럭 5대 획득, 오후 7시부터 해남군 일원에서 시위하기로 결정하고 해남읍—삼산면—하산면—북평면—송지면 경유, 밤 10시경 완도읍에 도착 시가행진. 이들은 북령면에서 차량 5대 더 획득. 각 차량마다 소대장을 임명, 조직적인 통제 하에 시위 진행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94-95).

김양래가 완도로 간 이유는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면 5·18의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그가 어째서 진실 규명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이런 사실을 꽁꽁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김양래는 윤상원의 손발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윤상원의 사회주의 혁명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자였다. 그러면 윤상원이 그를 가장 필요로 하고 있었을 때에 비겁하게 도망간 것인가 아니면 무장봉기를 해남으로 확산시킨 후에 광주 오는 길이 막혀 완도로 간 것이었는가? 아마도 그 단서는 해남에서 휴학 기간을 보내던 중 광주무장단체를 만났던 여대생 손귀봉의 증언에 담겨있는 듯하다.

손귀봉의 증언에 따르면 영암—강진—해남—완도로 간 광주무장단체 1개조가 광주로 즉시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는 해남에서 모집한 무장시민 8명이 해남 경찰관들에게 붙잡혔기 때문이었다(손귀봉 1991, 230). 당시 완도는 해남군 행정 관할이었다는 사실이 손귀봉의 증언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5월 21일 해남으로 내려온 광주무장단체는 무장봉기에 동참할 인원을 완도에서 더 모집하여 광주로 복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해남 건달이 모은 사람들 중에 해남 사람이 경찰에 붙잡힌 후 일행 이름을 경찰에 전부 말했기 때문에 8명이 같이 체포되어 광주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진 65 ▲ 5월 21일의 상황을 표시한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상황지도에 괴무장단체가 남쪽 끝 완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전체 시군을 단 몇시간 만에 점령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손귀봉이 본 차가 김양래가 동승했던 차와 똑 같은 차라고 단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녀의 증언이 그가 광주사태가 끝나기 전에 윤상원 곁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황 파악에 도움이 된다. 안 간 것이 아니라, 예상보다 빨리 광주 외곽이 봉쇄되어 못 갔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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