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령 박사의 5.18 역사전쟁 43] 무장시민들의 총기난사 기념 눈물 공연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5. 무장시민들의 총기난사 기념 눈물 공연

문재인 보궐대통령의 5∙18 기념사와 눈물 공연 메시지의 초점은 ‘슬픈 생일’이란 추모사를 낭독한 김소형씨 부친 김재평 씨 사망사건 가해자에 대한 정죄였다. 그래서 문재인의 5∙18 연설 중에 “5∙18은 불의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 이었습니다” 등의 표현이 있다. 그러나 그런 독선적인 표현들이야말로 광주사태를 심히 왜곡한다.

광주사태는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정부 시절 발생하였고,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 법정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처벌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정의로운 정부로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김영삼 정부 시절의 5∙18 재판 판결문과 최 대통령 정부를 불의한 국가권력으로 매도하는 문재인의 연설문 표현 중 어느 쪽이 옳은 것인가?

각 방송사와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눈물 쇼를 하기 바로 직전에 이런 문장으로 연설하였을 때 던지는 메시지는 불의한 국가권력이 김소형 씨 부친 생명을 유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김소형 씨 부친 김재평 씨는 5월 22일 오후 6시경 무장시민들이 광주통합병원을 향해 총기난사하고 있었을 때 그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가옥에서 유숙하고 있다가 무장시민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가 되었다.

김재평 씨는 불법으로 무기를 소지한 괴무장단체의 총기난사 희생자였다. 민간인들이 무기를 소지하면 이런 사고가 발생하니까 최규하 대통령이 무장시민들에게 무기 반납을 호소하신 것이었는데, 문재인의 논리에서는 최 대통령이 민간인들이 불법으로 군 무기를 소지하고 있으면 안된다고 광주시민 들에게 호소한 것이 불의하다는 것인가?

2017년 집권 초기에 문재인 ‘보궐’대통령이 5·18 재조사를 지시하였다. 물론 5·18 재조사를 하여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채동욱을 위시한 5·18 정치검사들이 1996년에 작성한 다음의 ‘내란목적살인 피해자 및 피해상황 일람표’에 황당한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 66 ▲ 김영삼 정부 시절 1996년의 5·18 재판은 그 목적이 진실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두환을 내란죄로 엮어 처벌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검사들은 무장시민 총기난사사고 희생자들까지 전두환의 내란목적살인 피해자들로 간주하고 위의 도표를 만들었다. Most of the victims on the list for the 5·18 trial in 1996 were the victims of the gun shooting of Gwangju militia.

위의 표에 명시된 총상 사건의 가해자 대부분이 무장시민들이었고, 1995년의 검찰 수사보고서에도 칼빈 총상임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정치 검사들이 일람표를 작성하였을 때는 사기꾼들처럼 작성하여 ‘칼빈 총상’표시를 없앴다. 이쯤 되면 이것은 단순한 편파적 재판이 아니다. 가해자가 무장시민이었으냐 아니면 계엄군이었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어째서 검찰의 광주사태 수사보고서와 법원의 판결문에 첨부된 일람표가 전혀 딴판인가? 검찰보고서도 다분히 편파적이었지만 그래도 기본 팩트는 있었던 데 비해, 판결문 일람표는 날조된 엉터리이다.

채동욱을 위시한 5∙18 재판 담당검사들은 아무런 증거 제시 없이 위의 ‘내란목적살인 피해자 및 피해상황 일람표’를 공소사실에 첨부하여 판결문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위의 일람표에서 제2항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만 공수부대와 관련이 있었는데, 총기무장한 광주시민들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하다가 발생한 전투로 인해 사망한 것에 내란 목적살인죄를 적용한 제2항은 무장시민의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1997년 4월에 대법원은 사상범, 정치법, 강력범 등 재소자들의 수가 2천 명이 넘는 광주교도소를 민간 무장단체가 습격한 행위는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고, 교도소가 무장단체의 습격을 받았을 때 선량한 정부가 이를 방어하는 것은 내란목적의 살인으로 볼 수 없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그렇다면 무장시민들의 광주교도소 습격에 의해 발생한 무장시민측 피해는’내란목적살인 피해자 및 피해상황 일람표’에 제외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그렇게 하지 않은 오류를 범하였다. 더구나 광주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을 입은 무장시민들 중 다수는 광주시민들만 보유한 총기였던 카빈소총 총상을 입은 자들이었다.

위의 일람표 제1항과 제3항에서 광주-목포간 도로 효천역 부근은 무장시민군들이 우글거리던 곳이었다. 이 사건은 공수부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법정기록에도 이 사건은 괴무장단체가 군용차량과 버스 등을 타고 목포 쪽에서 광주로 침투하려다가 20사단 61연대 2대대 병력과 충돌하여 발생한 사고였음이 적시되어 있다:

같은 달 21. 22:10 경 광주 남구 송암동 소재 효천역 부근에 배치되어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20사단 61연대 2대대가 짚차의 선도하에 트럭, 버스 등 차량 6,7대에 탑승하고 목포쪽에서 오던 시위대와 교전하여 시위대 버스 2대를 전복시키고 (서울지방법원 1996).

위의 일람표 제5항은 광주시민들이 아닌 해남의 민간 무장단체가 군 무기고를 습격하다가 향토사단인 31사단 병력과 충돌한 사건으로서 이 역시 공수부대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다. 정체불명의 괴무장단체가 군무기고를 습격하였을 때 군인이 무기고를 방어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국군의 첫번째 의무일 것이다. 동 판결문은 해남에서 발생한 이 사건을 이렇게 적시한다: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부근 우슬재와 복평리에 매복 중 같은 달 23. 05:30 경과 같은 날 10:00 경 두 차례에 걸쳐 시위대와 총격전을 벌여(서울지방법원 1996).

만약에 대한민국의 군 무기고가 전부 정체불명의 괴무장단체에 털리면 그때는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해남의 소수의 향토사단 병력이 결사적으로 군 무기고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두 명의 피해자가 생긴 것이 어떻게 국군의 내란목적살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문재인 ‘보궐’대통령이 지난 37주년 5·18기념식장에서 한 눈물 공연은 위 일람표 중 제4항의 피해자들 중 김재평과 관계되는 것이다. 광주통합병원 부근에서 발생한 이 사고 날짜는 5월 22일이므로 절대로 5·18기념식에서 그 날짜를 5월 18일로 바꾸는 왜곡이나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고 자체가 공수부대와는 하등의 관계가 있을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공수부대원 그림자도 광주통합병원 근처로 간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수부대는 이미 전날 21일에 전원 광주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김재평 등 위의 일람표에 명시된 여섯 명 모두 쌍촌동에 주둔한 민간 무장단체가 상무대 방향으로 사격하였을 때, 그리고 광천동과 농성동과 화정동에 주둔한 무장시민들이 광주통합병원을 향해 총기난사하였을 때 그 총탄에 맞은 통합병원 인근 주택가 주민들이었다. 김재평은 그때 광주통합병원 바로 옆 주택가에서 유숙하고 있었다.

광주통합병원 인근에서의 무장시민 총기난사 희생자들 중에는 계엄군도 두 명 있었다. 그러면 채동욱 검사의 법리는 무슨 법리이기에 광주시민 총에 맞아 사망하 계엄군 희생자까지도 전두환의 내란목적살인 피해자로 간주하였는가? 더구나 광주통합병원 경비병들은20사단 병력이었으며, 5∙18 재판 법관들은 박준병 20사단 사단장을 신군부가 아닌 인물로 분류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대대가 광주통합병원을 경비한 것을 내란목적살인으로 간주하는 법리가 성립될 수 있는가?

만약 김재평 씨가 총상을 입은 사건 가해자들이 군인들이었다면 그의 부인 고선희 씨가 남편을 국군광주통합병원에 입원시키려 하였을 리가 있었겠는가? 무장시민들이 총을 쏘고 있어 자신들의 생명도 위험한 상황에서도 군인들은 김재평의 얼굴에 붕대를 감아주고 병원 앰블런스를 불러 후송을 돕는 대민 봉사를 하였다. 분명 고선희 씨가 본 군인들은 국민 편인 선량한 군인들이었다.

사진 67 ▲ 2017년의 5·18 기념공연은 추모사를 낭독한 김소형씨 부친 김재평 추모를 위한 공연이었는데, 공연 스토리에서 가해자가 뒤바뀌어 있다. 김재평이 총상을 입은 장소는 국군광주통합병원 옆이었는데, 유네스코에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5·18기록물에는 광주통합병원을 향해 총을 쏜 무장세력은 시민군뿐이었다는 사실이 그 현장에 있었던 무장시민 증언으로 명시되어 있다.

김재평도 치료 시기를 놓쳤는데, 그 이유는 그 때 무장시민들이 광주통합병원 주변에 다이너마이트 지뢰를 매설해 놓고 계속 병원 쪽을 향해 총을 쏘고 있어서 병원에서 환자를 받는 것이 불가능해 총상 환자들을 일단 상무대로 후송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재평을 군의관들이 상무대로 후송한 후 누군가가 고선희씨에게 “폭도들 때문에 당신 남편이 죽었다”고 알려준 것이 그녀가 사건 당일 듣고 아는 전부였다.

5월 22일 오후 4시경부터 쌍촌동 및 화정동 매복 무장시민들이 상무대 방향으로 발포하고, 광천동과 농성동 바리케이드를 친 무장시민들이 광주통합병원을 향하여 총기난사하여 상무대와 통합병원 사이에 거주하는 주민들 및 병원 옆 주택가 주민들이 사망한 사건이 1995년도 검찰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6:00경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동일 17:00까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장갑차 3대를 선두로 하여 통합병원 쪽으로 이동하던 중 저지하는 무장시위대와 民家地域에서 交戰이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서 인근 화정동, 쌍촌동, 내방동 등에 거주하는 이매실(여, 68세), 김영선(남, 20세, 칼빈총상), 양회남(남, 30세, 칼빈총상), 임정식(남, 18세, 칼빈총상),조규영(남, 38세, 총기불상), 함광수(남, 17세 ), 김재평(남, 29세), 손광식(남, 20세, 방위병, 경비대 출근)과 계엄군 1명이 銃傷으로 사망하였고, 17:50경 戒嚴軍이 광주통합병원을 장악하였음 (서울 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117).

위의 검찰보고서 내용 중 “교전이 벌어졌다”는 표현은 과장되었다. 광주통합병원을 경비하러 상무대에서 출발한 2개 중대는 도로에서 공비 및 그 부역자들과 교전을 한 것이 아니라, 기습을 받았다. 공비로 추정되는 괴무장단체는 민가 2층 등 고층건물과 도로 양옆 숲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 사격을 하였으며, 그래서 총탄이 날아오는 쪽으로 잠깐 응사를 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26]

오후 5시까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은 2개 중대는 탱크 2대를 앞세우고 상무대를 출발하여 탱크의 뒤를 따라 도로 한 편에 1개 중대씩 도로 양편에 늘어서서 동쪽 방향인 광주통합병원(쌍촌동 동쪽 끝과 화정동 서쪽 끝이 맞닿는 지점)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미 전 날 상무대를 제외한 광주 전역을 완전 정복한 무장시민군들은 이때 쌍촌동 소재 대건신학대학[27] 근처 고층 건물 및 숲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20사단 대대 병력의 이동을 저지하는 사격을 하였다. 함장남 등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도로로 걸어 가는 군인들은 총을 쏘지 않고” 행진을 계속하였다.

화정동 잿등에 소재한 광주통합병원은 국군병원이었지만 전날부터 화정동과 쌍촌동을 완전 점령한 무장난동자들이 병원 주변에서 병원을 감시하고 있었고, 통합병원과 상무대 사이 대건신학대학 인근 숲 및 고층 건물에 무장시민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오후 4시가 좀 넘어서 20사단 중대 병력 길 안내를 하는 탱크 한 대가 도로에 출현하자 공비로 추정되는 무장시민 한 명이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 탱크를 따라 길 양편으로 20사단 62연대 2대대 2개 중대 병력이 통합병원을 향해 행진을 하자 무장시민들이 정원수를 엄폐물 삼으며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Cf. 오월여성연구회 1991, 238). 공비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장시민들은 주로 2층 혹은 고층 건물에 매복하고 총을 쏘았기 때문에 민가 2층을 향해 날아가는 유탄도 있었다.

이것은 보병 2개 중대가 광주시민들 총에 맞아 전멸할 뻔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공수부대가 아니었는데 왜 총을 쏘았는가? 광주 시민들은 상무대 군인들을 광주시민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2개 중대는 상무대에서 출발하였다. 쌍촌동 주민들에게 상무대 군인들은 한 지역공동체요, 이웃이었다. 그 지역 군인아파트에 거주하던 광주 시민들은 경찰 가족과 똑같이 지역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쌍촌동 주민들이 상무대나 광주통합병원 방향으로 사격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아니다. 쌍촌동 주민들은 공비들로부터 무기를 분배 받은 적이 없었다. 그 동네에서 공비들의 부역을 하던 무장시민들 대부분은 동네 주민들이 아닌 외지인들이었다.

5월 22일 잿등 통합병원 주변에 배치된 공비 및 그 부역자들은 그 전날에도 광천동 교통요지(톨게이트에서 송천동으로 가는 길목)에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20사단 인솔대를 습격하여 지휘차량 14대 등 40여대의 군용차량을 탈취했었다.

5월 22일에 20사단 62연대 대대병력은 최소한의 자위권을 위한 응사 외에는 전혀 사격이나 발포를 한 적이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돌발적인 아세아자동차 경비 포기이다. 아세아자동차는 군납업체였으므로 5월 22일 당연히 공장장이 상무대에 공장을 경비할 경비병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62연대 연대장은 일개 중대 병력을 보내 주려다가 공장 가까이 무장시민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부대 이동명령을 갑자기 취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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