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세상에서 가장 정겨운 사진

어젯밤 금요 심야기도회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 가려고 하는데 큰시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낮에 내가 먼저 전화를 했지만 바빠서 못 받더니만 본인의 여유 시간에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아직도 미혼인 시누이는 나보다 한살 아래인데 남편의 바로 밑의 동생이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런 저런 일들을 30분 가까이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시누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지난번 가족단톡방에 언니가 올린 사진 있잖아요? 오빠가 엄마 손톱깎아 주는 사진 그거 아주 감동적이던데 어디 사진 콘테스트에 한번 보내봐요. 그 사진 보는데 나도 마음이 울컥 하더라구요.” 한다.

바로 며칠전 어머니가 대변실수를 하고나서 내가 목욕을 시켜 드렸을때의 일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날 나는 어머니를 씻겨 드리고나서 또 세탁물을 처리해야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어머니 손톱 발톱을 좀 깎아 드리라고 부탁을 했었다.

신문지를 펴놓고 열심히 어머니의 손톱을 깎고 있는 남편과 어머니의모습이 정겨워 보여서 나는 얼른 사진 한 장을 찍어 두었다. 이 사진을 어머니의 소식을 형제들에게 나누는 가족단톡방에 올렸더니 시누이가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몸이 참 신비하다. 다른 부분들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데도 손톱과 발톱 그리고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난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은 손톱과 발톱을 계속 깎아 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계속 자라나는 머리카락도 두달에 한번쯤은 잘라 주어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머리도 잘 자라는 편이어서 두달에 한번은 꼭 미장원에 모시고 가서 머리카락을 커트하고 파마를 해 드려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어머니의 미모가 돋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

여하튼 사람이 손톱을 깎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고즈넉한 저녁에 거실에 앉아서 90대의 어머니의 손톱을 깎아드리는 60대의 아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세월이 지나가면 어느때인가에는 남편은 어머니의 손톱을 깎아 드렸던 이런 평범한 순간마저 울컥 그리워질 때가 올것이다.

우리 시부모님은 서울에서 죽 사셨다. 우리는 20대에 결혼해서 30대 중반까지 직장생활 하느라고 청주에서 살았다. 그리고 40-50대는 선교지에서 살았다. 이제 60대가 되어서 노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우리의 삶을 디자인 했을까.

선교사였던 필파샬은 자신의 인생은 ‘화폭을 짜시는 거룩한 손’에 의해 짜여졌다고 고백한다. 곧 하나님의 손이 마치 화폭에 수를 놓듯이 인생길을 한걸음 한걸음 인도해 오셨다고 삶의 노년을 바라보면서 고백하고 있다.

내삶도 그랬다. 선교지에서 비자제한을 당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신대원에 입학을 하였다. 50대 초반의 젊지 않은 나이에 빡세다고 소문난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3년 과정에 도전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던 그때가 친정 아버지에게 내 일생 그 어느때 보다도 더 많이 효도할 수 있는 기회 였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컬 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 오랜시간 혼자 지내셨다.

주중엔 서울에서 공부하고 매주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아침이면 나는 청주에 혼자 살고 있던 아버지집으로 내려 갔다. 선교지에서 돌아오자 마자 어느 집사님이 무료로 준 낡은 중고차 세피아 2를 운전을 해서 매 주말에 아버지집으로 갔다.

내가 살고 있던 하남 선교관에서 꼭 12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청주에 사시던 아버지집에 운전하여 가면서 나는 늘 행복감에 젖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살아 계시니 매 주 뵈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늘 기쁜 마음 이었기에 피곤을 모르고 서울과 청주를 매 주 오고갔다.

한편 나는 아버지를 보러 매 주 운전을 하여 가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느날이 될 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버지를 매 주 뵈러 찾아가는 이런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왠지 문득 문득 들곤 했던 것이다.

사실 아버지는 건강 상태가 매우 좋으셨기에 그런 생각은 별 근거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뵈러 운전을 하여 청주로 내려가던 가을 어느날, 차창밖으로 내 시야에 들어오는 단풍으로 채색된 산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아버지를 보러 가는 이런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어왔다.

그런데 정말 우리 아버지는 내가 신대원 3학년을 다 마치지 못하여서 갑자기 소천 하셨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를 뵈러 매 주 내려가던 3년 가까운 청주행의 그 시간이 더욱 추억에 남아 있다. 이젠 그 추억들은 더없이 그립고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해외에서 살다가 돌아와서 자식의 도리를 그래도 어느정도 할 수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 했다.

참으로 건강 하셨던 친정 아버지 이셨기에 10년은 거뜬히 더 사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아버지는 더 오래 사실거야 하면서 바쁜 신대원 공부나 마치고 나서 자주 찾아뵈러 가야지 하고 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을 미루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맺혀 있게 되었을까?

그래서 인생에 기회는 유한한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섬김도 사랑도 효도도 언제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공부 하느라 바쁜것을 핑게 삼지 않았다.

힘들기도 했지만 매 주 청주 아버지에게 가서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집안청소며 세탁을 해 드렸다. 또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이면 그것이 전자기구든 운동기구든 이불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사 드렸다. 왜냐하면 좋은 것들을 해 드릴 기회가 다시 안 올수도 있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효도할 기회가 늘 오지 않는다고 깨닫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행할 수가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는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하시고 79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가 가장 바쁘게 살던 그 때가, 매 주 청주에 내려가서 아버지를 돌보아 드리고 아버지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던 그 시간이, 내가 아버지에게 드릴 수 있었던 마지막 효도의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주무시다가 갑자기 소천 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모님 봉양에 있어서는 내가 남편보다 먼저 경험했기에 나는 남편에게 지금도 넌지시 이르곤 한다. “여보, 어머니께 잘해 드려요. 이제 여생이 얼마나 남으셨겠어요? 어머니 건강이 점점 약해 지시는데…괜히 돌아가신 후에 마음 아파하지 말고 지금 살아계실때 친절하게 대하고 잘해 드리세요.”

물론 남편은 효자이다. 내가 결혼전 남편을 만났을때도 대화를 해보면 남편은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극진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내가 결혼할 사람에 대한 점수를 많이 주었고 드디어 결혼에 꼴인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나는 20대 중반이었지만 생각이 좀 성숙했던것 같다. 자신의 근본인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남자는 최소한 처자식에게 기본적으로 의무를 다 할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가족이 선교지에 있을때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었다. 어머니 나이도 그때 는 이미 70대 중반이어서 일을 하시기도 어려웠고 모아둔 돈은 없으시니 생활비가 필요했다.

어머니에게는 반지하라도 빌라 한채는 내집이 있었으니 다행이었지만 어머니에게 나오는 노령연금에 더해서 쓰실 생활비가 필요했다. 우리는 매월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40만원씩 보내 드렸다. 친정 아버지는 세명의 친정오빠들이 든든히 감당하고 있어서 나는 매달 10만원만 보탰다

당시 우리에게 들어오는 매월 선교후원금이 그리 많은 금액이 아니었다. 선교비가 1200-1300불 정도 오는데 부모님께 먼저 떼어 보내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우선순위를 부모님 봉양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교지에서는 물질로 봉양하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몸으로 공경을 한 셈이다. 친정 아버지에게 매주 찾아가 돌보아 드리고 서울에 올라오면 시어머니댁에 가서 하루를 자면서 밑반찬등을 만들어 드리고 신학교 기숙사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며 늦깎이로 시작한 신학대학원 3년을 마쳤다.

어머니의 손톱을 깎아주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그런 저런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있다면 바로 저 모습도 그 속에 포함 되리라 생각 하면서…

그나저나 노년의 어머니와 초로의 아들이 다정히 앉아서 어머니의 손톱을 깎아 드리는 세상에서 가장 푸근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저 정겨운 사진을 어디로 보내서 포토제닉 상을 타보나 하는 행복한 고민에 잠시 휩싸여 본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 5:4)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

편집국

시니어 타임즈 US는 미주 한인 최초 온라인 시니어 전문 매거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