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수(壽)

사람들은 누구나 장수하기를 원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뭐 하러 오래 살아 이 힘든 세상을…더 추한 꼴 보이기 전에 어서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그것이 진심인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어느덧 인생의 연륜이 쌓이다 보니 나와 직접 연관이 있는 가까운 사람부터 직접 연관은 없으나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일단 80세가 넘은 사람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살았으니까 하는 생각에 덜 섭섭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요즘 같은 장수시대에 80세가 되기 전에 죽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저 사람은 조금 더 살았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 말이다. 그런데 죽음은 참 냉정하다. 나이도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또 영향력 있는 일을 하고 살았던가 하고도 아무 관계가 없다.

오직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오늘 살아서 숨 쉬고 웃고 말하고 밥을 먹던 사람이 숨이 떨어지자 말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직 그 사람의 신체를 장사지내기도 전에 우리 눈에 그 모습이 보이고는 있지만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의 존재가 곧 썩어버려질 물질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둘러 오일장이니 삼일장이니 서둘러서 장례의 예를 치르고는 그 신체는 땅에 매장을 하거나 화장터에서 화장해 버린다.

가까운 나의 가족들을 보더라도 태어난 순서와 상관없이 돌아간 날이 다 다르다. 우선 나의 친정 할아버지는 딱 70세를 살고 돌아가셨다. 매우 건강하시고 낙천적인 분이었지만 뇌출혈이 사망의 원인이었다.

친정 할머니는 89세까지 살고 돌아가셔서 나의 가까운 가족으로는 최장수를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도 건강하게 살다가 자연사 하신 것은 아니다. 중풍에 걸려 3년 정도 왼편 몸을 못 쓰다가 돌아가셨다.

이런 할머니를 병인의 몸으로 끝까지 뒷바라지 하여 효도를 다하신 우리 친정어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꼭 6개월 만에 세상을 뜬 우리 어머니는 만60세 생일을 3개월 앞두고 소천 하셨다. 사망원인은 위암이었다.

친정아버지는 79세에 돌아 가셨는데 평소 건강 하셨기에 나는 아버지가 오래 사실 줄 알았다. 적어도 90세 가까이 장수하신 친정할머니 만큼은 사시겠구나 했는데 내 예상을 깨고 아버지는 주무시다가 뇌출혈로 그대로 소천 하였다.

내친정 큰고모는 74세에 뇌출혈이 원인이 되어서 돌아가셨다. 일찍이 청상과부가 되셔서 삯바느질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내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좀 더 오래 사시면서 잘 사는 자녀들의 효도를 더 받으셔야 했는데 너무 일찍 이 세상을 떠나셨다.

반면에 나의 작은 고모님은 현재 93세로 정정하게 살고 있다. 혼자 사시는 집에 날마다 동네 노인친구들이 고모네 집으로 마실을 온다. 친구들과 어울려 화투놀이도 하시고 함께 밥도 지어 먹으며 즐겁게 지내신다. 고모님은 아직도 건강하셔서 거뜬히 혼자 살고 있으신다.

나의 시아버님은 85세를 일기로 소천 하셨지만 넘어지면서 뇌출혈을 일으켜 돌아가셨다. 하지만 시어머님은 올해 91세로 정신적으로는 알츠하이머병(치매)을 앓고 있다. 하지만 날마다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실 만큼 신체는 건강하신 편이다.

며칠 전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78세의 나이로 소천 하였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생명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상급수준의 좋은 병원가운데 하나인 삼성서울병원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최고 수준의 그 병원도 그의 생명을 80까지도 연장시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사람에겐 각각 자신의 생명의 연한에 따라서 인생 데드라인인 수(壽)가 따로 있다는 것을…….

또 피조물인 우리는 그 수(壽)의 마지막을 알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어떤 이는 불치의 병에 걸려 곧 사망할 것 같으면서도 10년 혹은 20년 그 생명이 연장된다. 비록 아프긴 하지만 병원 신세를 오랫동안 지면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

어떤 이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건강하게 살다가 심장마비 같은 급작스러운 사유로 손을 쓸 틈도 주지 않고 돌연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또 물놀이 갔다가 익사하는 경우도 있고 교통사고 같은 사고사도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인사말에 집을 떠나는 가족에게 “잘 다녀오세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잘 갔다 와라”라고 하는 의미심장한 인사가 있다. 아침에 “잘 다녀올께요.” 하고 웃으며 떠난 가족이 그날 저녁에 여전히 “잘 다녀왔어요” 하면서 집으로 안전히 돌아오기를 기원 하면서 나온 의미가 깊은 인사법이다.

그런 인사를 하게 된 것은 아침에 웃으면서 집을 나간 가족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오는 일이 왕왕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황당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 것인가.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받는 가장 큰 충격 중 하나일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끊어지는 대형사고로 등교길에 있던 많은 시민과 학생들 3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특히 다리 건너편에 있던 학교에 가기 위해서 한강으로 추락한 버스에는 유난히 등교길의 여학생이 많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사고가 난 십 수년 후에 한 언론사에서 사고로 죽은 여학생들의 부모의 삶을 추적했다. 기자를 보내어 그 사고 이후의 사고로 죽은 여학생 가족의 삶을 취재했다.

그중에 한 여학생의 아버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참 아프게 했다. 그는 여고생 딸을 학교에 보냈는데 사고가 나서 어여쁜 꽃다운 딸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본 후, 십 수년이 지난 후에도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직장도 그만두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그 애타는 자식을 향한 사랑의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최근 며칠 전에는 필리핀에서 선교하던 여선교사가 심정지로 소천한 일이 있었다. 고인은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 남편 되는 선교사님은 내가 잘 아는 분이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선교보고와 간증을 나누기도 한 선교사님이었으니까…

그 선교사님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간병을 위해서 남편과 딸이 한국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선교사가 혼자 선교지를 지키며 남아 있다가 급작스러운 심정지로 사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역자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더욱 마음 아프게 하였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한 사람도 옆에 없는 가운데 홀로 죽음을 맞이한 여선교사님의 죽음에 대한 기막힌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이와 같이 누구나 맞이하는 이 땅에서의 개인적 종말인 최후의 시간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죽음이라는 관문 앞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평소 잘 생각해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보통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나에게 닥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죽음이야말로 각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 보다도 죽은 후에 과연 내 존재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심각하게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이며 문제이다.

내가 선교지에서 만났던 기업인이 있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해외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사업도 잘되고 있었다. 2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면서 매일 바쁜 일상을 보냈으며 여유가 있는 날은 골프를 즐기면서 사는 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식사하러 갔는데 식당주인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식당여주인이 말했다. “사장님, 지금 당장 예수 믿으셔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그러자 그 사장님은 “허허… 믿긴 믿어야지요. 우리 집사람이 교회에 나가니까…”

그러자 식당여주인은 “그렇다면 더욱이 당장 예수 믿기로 결단 하세요. 만약 사장님이 예수님을 안 믿고 미루다가 지금 밥 먹고 집에 가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칩시다. 그러면 곧장 지옥으로 가시거든요”

그러자 그 사장님은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매우 진지하게 받아 들였다. 그리고 심각해져서는 “그렇다면 믿읍시다. 지옥은 가면 안 되지요” 그렇게 그는 그날 아주 중요한 결단을 했다. 바로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 후 그 사장님은 그의 가족이 나오던 우리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던 사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후 몇 년이 못 되어서 사회주의 국가인 그 나라에 공장을 모두 빼앗기고 공장에 투자해 놓았던 비싸고 좋은 모든 기계들도 다 빼앗기게 되었다. 오직 자신이 살고 있던 집만을 팔아서 가지고 한국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사장님이 가장 잘한 것은 공장 운영을 성공적으로 한 것보다도 근처 식당주인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 믿기로 결단을 내린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부부가 선교지에 개척한 한인교회에서 그는 열심히 봉사하며 믿음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일군 모든 기업과 재산을 다 빼앗겨도 자신이 얻은 구원만은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신의 수(壽)는 언제까지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수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성경은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 누구나 가야할 곳을 미리 정하고 사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천국이 아니면 지옥이다. 적어도 지옥은 면해야 한다. 그곳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임을 안다면 말이다.

위의 예에 나온 사장님처럼 당신이 예수님을 아직 영접하지 않았다면 속히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해야 한다. 이미 예수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전도와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위에 나오는 사장님처럼 예수 믿는 것을 인생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 결단하게 되기를 나는 기도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사업이 망해도 병이 걸려도 사고를 당해도 이 세상을 이긴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당신은 믿음의 결국인 구원받은 천국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천국은 아무에게도 빼앗길 염려가 없다. 이 얼마나 다행하고도 기쁜 일인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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