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도록 창조 되었다. 자신의 삶에 일어날 오분 앞의 일 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아무 문제 없이 숨을 쉬며 살고 있다면 이게 바로 오늘의 기적이다.

오래전 청평에 있는 한얼산 기도원 집회에서 내가 들었던 이야기이다. 강사가 그런 간증을 하였다. 미국의 한 상원의원을 위해 기도해 주라는 부담을 가지고 중보기도 하던 한 장로님이 있었다. 어느날 그 장로님이 늘 기도하던 그 상원의원을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다.

그 감동은 “너는 빨리 그 상원의원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상원의원이 근무하는 국회의사당 건물로 찾아갔다. 마침 그 상원의원이 자동차에서 내려서 국회의사당 건물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장로님은 얼른 뛰어나가서 상원의원에게 말을 건넸다. “저 상원의원님 저에게 5분간만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상원의원님께 전하라는 말씀이 있으셔서요.” 그러자 그 상원의원은 “여보시오! 내가 당신에게 5분의 시간을 내줄 만큼 한가하다면 나도 좋겠소.”라고 대답하며 장로님 앞을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 상원의원이 불과 열 댓 발자욱을 걸어 갔을까 했는데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그 상원의원은 광장에 푹 고꾸러졌다. 국회의사당 기둥 뒤에 숨어서 상원의원이 출근할 때 저격하려고 기다리던 괴한이 쏜 총에 의해서 그 상원의원은 허무하게도 현장에서 죽고 말았다.

복음을 전하려고 갔던 장로님은 가슴을 치며 슬퍼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린 상원의원이 너무도 안타까워서였다. 만약 그 상원의원이 오분 앞의 자기 미래를 알았더라면… 장로님이 전해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오늘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을 내게 주고 이 땅을 떠나간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12월 성탄절을 한 주 앞두고 선교 사랑방 모임을 마치고 나서 Y집사님이 선교회 사무실을 노크했다. 그리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선교사님 약소하지만 성탄 선물입니다.”

Y집사님이 내게 준 것은 신세계 상품권이었다. 당시 Y집사님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줄 모르는 심정이 되었다. “집사님 수입도 없는데 왠 선물을… 받기가 참 죄송하네요.”그러자 Y 집사님은 “아유~ 너무 작은 거예요.”한다.

나는 매주 목요일 마다 ‘선교 사랑방’이라는 선교사들을 위한 중보기도회 및 선교사 디브리핑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도회가 시작하도록 도운 집사님이 있었다. 바로 Y집사님 이었다. Y집사님은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분이었다.

페북에 진실한 글을 늘 올리는 Y집사님을 오프라인으로 한번 만나기로 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날 나는 강남의 한 카페에서 Y집사님을 만났다. 당시 나는 강남에 사무실을 둔 한 선교단체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어서 강남에서 만났던 것이다.

50대 초반의 Y집사님은 작은 영어교습원을 운영하며 노모를 모시고 사는 싱글이었다. Y집사님은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Y집사님에게 나는 초면에 중국 선교를 위한 중보기도모임에 매 주 한번씩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흔쾌하게 허락을 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넘게 Y집사님은 신실하게 함께 중보기도 모임에 참석해 주었다. 내가 ‘지구촌선교문학선교회’사무실을 내기 전에 한 일 년은 기도회로 모일 장소가 없어서 이곳 저곳을 전전하면서 중보기도 모임을 했다. 도심에서 중보기도 모임 장소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내가 ‘지구촌선교문학선교회’를 설립하고 신월동에 30평쯤 되는 건물을 임대해서 선교회 사무실 겸 ‘지구촌은혜나눔의교회’를 창립했다. 이젠 마음 놓고 기도할 공간이 생긴 것이다. Y집사님은 여전히 열심히 참석해 주었다. 그 외에도 몇몇 중보기도 회원들이 늘어났지만 Y집사님은 가장 성실한 중보기도회 멤버였다.

미국에서 유학하며 신학도 2년정도 공부했다는 Y집사님은 영어를 잘했고 성경 지식도 많이 알고 있었고 무엇 보다도 성품이 너무도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Y집사님이 선교사역자의 길로 하나님이 혹 부르시지는 않을까 하면서 예의 주시하며 그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31일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면서 마침 선교사랑방 모임이 있는 목요일 날이었다. 예배 드리고 기도회를 마친 후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윷놀이라도 한번 하면서 중보기도회 회원들과 함께 즐거운 연말의 시간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서 예배를 시작 하였다. Y집사님은 아직 오지 않았다. 조금 늦게 오는 것이겠지 생각하고 나는 먼저 온 회원들과 함께 예배를 시작했다. 그런데 중보기도회에 참석한 권사님이 누구에게 무슨 연락이 왔는지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오더니 황급하게 나에게 말을 건넸다.

“선교사님, 우리 아들에게 연락이 왔는데요 .Y집사가 새벽에 쓰러져서 지금 병원에 입원을 했답니다. 중태라고 합니다. ”권사님의 아들은 바로 Y집사의 친구였다. 연말이니 오랫만에 친구인 Y집사를 만나서 식사라도 할까 하고 전화를 했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선교사랑방에 모인 회원들은 그 자리에서 Y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간절하게 기도한 후 자동차를 타고 Y집사님이 입원한 병원을 향해서 달려갔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도 내내 기도하며 갔다. 즐거운 연말 모임을 기대했던 중보기도회원들 모두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Y집사님은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소천하였다. 건강했던 Y집사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다니… 그것도 5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나는 아직 미혼인 그를 중매 해서 결혼하게 해 주려고 한참 사람을 소개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리고 신학교를 보내서 사역자의 길을 갔으면 하고 그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었는데…

모든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는 Y집사님의 장례의 모든 절차가 진행되는 3일동안을 Y집사님의 가족들과 함께 했다. 장례는 화장을 해서 그의 선친의 묘소에 뿌리는 수목장을 했다. 가까운 가족들이 그의 뼈가루를 유골함에서 한움큼씩 꺼내어 산소에 뿌렸다.

나에게도 흰장갑을 주었다. 나는 유골함에 손을 넣었다. 아직도 따뜻한 뼈가루가 내 손을 통해 전달되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불과 며칠 전에 성탄선물을 내게 건네 주던 Y집사님이 죽어서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내가 그것을 뿌리게 되다니… 누가 이것을 상상이나 했던 일이었을까.

Y집사님이 죽은 후 수개월 나는 살고 있으나 사는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럴 수는 없는데… 이럴 수는 없는데… 가난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선교사인 나를 존중하고 존경하고 중보기도 사역에 동참해 주었던 나의 선교 중보기도 사역의 일등공신 이었던 Y집사님…

선교사랑방 모임을 마치고 갖는 코이노니아 시간엔 내가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한 오찬을 중보 회원들과 늘 나누곤 했다. 십여명이 식사를 하고 나면 설겆이할 그릇들이 상당했다. 그럴 때마다 여성도들을 제치고 설겆이를 남자인 자신이 담당 하던 겸손하고 신실한 Y집사님…’지구촌선교문학선교회’ 가 건물을 임대해서 세워지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Y집사님…

중보기도회와 선교사랑방을 인도하며 Y집사님과 함께 했던 3년이란 시간이 나에겐 얼마나 의미 깊은 시간들이었는지 모른다. 선교지에서 추방되어 돌아와서 가장 춥고 배고프던 시간들이었기에 더욱이 Y집사님의 헌신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본인도 넉넉지 않으면서도 종종 나에게 비싼 고급음식을 사 주며 격려해 주던 Y집사님… Y집사님은 내가 평생을 살면서 만나본 사람 가운데 가장 진실하고 순전한 몇 안되는 사람 가운데 한사람 이었다.

나에겐 너무도 소중한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던 형제였는데… 그는 종종 노모를 모시고 선교사랑방 모임에 나타났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선교사랑방 모임을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그만큼 ‘선교 사랑방’ 모임을 좋아하고 사랑했었다.

Y집사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는 Y집사님의 노모를 방문했다. 권사님인 그의 어머니는 나와 남편에게 그가 생전에 우리 선교회에 와서 빌려갔던 두 권의 책을 돌려 주었다. 그리고 노모는 우리에게 Y집사님이 늘 들고 다니던 가방 안에서 포장한 채 그대로 나온 쿠키를 보여 주었다.

마침 연말에 모이게 된 선교사랑방 모임에서 윷놀이를 한다고 하여 노모인 권사님이 친히 구운 쿠키를 비닐팩에 담아 주었는데 Y집사님이 메고 다니던 가방에 고스란히 쿠키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연말에 선교사랑방 모임을 하며 저 쿠키를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아…진정 우리는 오분 앞의 미래를 모르는 존재들이다. Y집사님이 우리 곁을 떠나고 내 마음은 한없이 슬프고 아팠지만 위로가 되었던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Y집사님이 이 땅을 떠나기 두어달 전인가 은혜를 받은 일이다.

선교사랑방 모임에 미국에서 다문화 목회를 하는 은사가 강한 목사님을 초청해서 집회를 한 일이 있었다. 그날 집회에서 Y집사님은 성령충만함을 강하게 경험했다. 집회 가운에 Y집사님은 방언을 받았다. 성령에 취해서 한동안 쓰러져 누워서 방언으로 기도 하였다.

성령에 한참 동안을 취해 있다가 일어났는데 그때 바라본 Y집사님의 눈은 그동안 내가 보았던 그 어느 때의 Y집사님의 눈보다도 맑고 기쁨에 차 있었다. 성령충만하여 얼굴이 붉게 빛나던 집사님의 모습이 아직도 내 뇌리속에는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가 선교사랑방 모임에 와서 그때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내겐 위로라면 큰 위로였다. 누가 알았을까 불과 두어달 후 그가 이세상을 떠나게 될줄을… 하나님께서 Y집사님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신 후 천국으로 데려 가신 일은 진정 감사할 일이었다.

Y집사님의 노모가 들려 주었던 이야기도 내 마음에 남는다. “글쎄 아들 Y가 떠나기 전 거의 한달여간은 제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아들 Y가 하루 세끼 아침 점심 저녁을 정성껏 밥상을 나에게 차려 주었지요. 아들에게 효도를 받으면서 얼마나 좋았던지 몰라요.”

신앙 좋은 Y집사님의 제수씨가 나에게 들려준 말도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시아주버님이 선교사님을 무척 의지 했었어요. 늘 선교사랑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우리 가족들에게도 들려 주곤 했었지요.” 선교사를 돕는 일을 큰 즐거움으로 알던 Y집사님…매년 성탄절이 되면 다시는 받을 수 없는 그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이 떠올라서 가슴이 시려오곤 한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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