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아버지를 통한 그분의 사랑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아버지가 있다. 물론 열 달 동안 나를 뱃속에 품었다가 세상에 내보내준 어머니가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자기의 부모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보니 이미 아버지가 그리고 어머니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유능하고 인품도 훌륭하고 아이들에게 자상하기까지 하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거기에 더해서 엄마를 알뜰하게 사랑해 주기까지 한다면 백점 아빠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백점 아빠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부모에 대해 무언지 모를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특히 어머니 쪽 보다는 아버지에 대해서 더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갖게 된다. 사실 나야말로 그런 부정적인 아버지상을 갖고 살던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이셨으나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지병으로 말미암아 학교를 사직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그때 불과 삼십대 초반이었다. 일찍 결혼하여 이미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 가장이 직업을 잃었으니 이후 우리 가족의 삶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할아버지가 논마지기라도 있어서 농사를 지어서 우리 가족의 식생활은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다섯 남매를 공부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연히 손주들의 학비도 조부모님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밀양 박씨인 우리 할머니는 무남독녀로 17세에 할아버지에게 시집와서 자수성가한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토지를 사들여서 시골 부자가 되셨다. 그리고 외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공부시키기 위해 시골의 땅을 팔아서 도시로 나와서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를 시킨 분이다.

그렇게 깨어 있던 할머니는 4명이나 되는 손자들을 중학교에 보내기 위한 입학금 마련을 위해서 새끼 돼지를 사다가 키웠다. 손자들이 중학교에 입학을 할 때 쯤에 돼지를 팔면 중학교 입학금을 낼만한 가격을 받고 팔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돼지를 키워서 손자들의 중학교 입학금을 대 주던 할머니는 손녀인 나를 위해서는 돼지를 키워서 팔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당시 충북에서는 가장 일류라고 하는 청주여자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지만 입학금이 없어서 입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교육은 할머니 몫이 아니었다. 내 부모의 몫이었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능력이 없으니 할머니가 대신 해 주고 있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남아선호 사상이 투철해서인지 손자들을 위해서 한 것처럼 손녀인 나를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돼지를 키워 팔지 않았다.

실직한 아버지는 여러가지 불만을 엄마에게 터뜨려 늘 엄마에게 주먹다짐을 했다. 평상시는 얌전한 성품인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횡포가 심했다. 매번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를 피해서 한밤중에 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 하룻밤 재워줄 친척집을 찾아 전전한 적이 여러번 이었다.

무엇 하나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 못하는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는 가장 싫고 미운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어린시절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부러운 친구가 있다면 아버지가 없이 엄마 하고만 사는 친구 집이 제일 부러웠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중학교 입학을 못하고 일 년이 지난 후 나는 엄마의 도움으로 야간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낮에는 집에서 할머니를 도와 온갖 가사일을 했다. 신데렐라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때 학교 교감 선생님의 추천으로 은행에 견습으로 들어갔다. 16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첫 월급을 타서 할아버지에게 금반지를 해 드렸다.

할아버지가 사랑방에서 만나는 다른 할아버지들이 끼고 있는 금반지를 몹시 부러워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 내가 다니던 은행에서는 나를 정식직원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은행원이라는 직업은 당시 꽤 인기있는 직업 중 하나였다. 월급도 다른 직장보다 많은 편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20대 초반에 친구의 전도로 나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매주 개척 교회에 나갔다. CCC 간사였던 친구를 따라 가서 성경공부도 하였다.

네비게이토에서 나온 기초신앙 암송구절 60구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늘 암송하고 다녔다. 성경말씀이 내 안에 들어가자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웠던 아버지가 점점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저런 부정적인 모습은 아버지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문제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괴롭히는 마귀의 장난으로 아버지는 오히려 피해자라는 깨달음이 오자 나는 아버지의 그동안의 모든 미운 행동들을 다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처한 입장이 딱하다고 느껴졌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씌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월급을 타면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십일조를 따로 떼어서 아버지에게 드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와 나를 낳아준 육신의 아버지 모두를 섭섭지 않게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아버지가 사고를 쳤다. 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던 우리집과 붙어 있던 땅을 사채업자에게 잡히고 돈을 빌린 것이다. 아버지는 그 돈을 가지고 다니면서 본인이 원하는 물건들도 사들이고 호텔에 투숙하는 등 여행을 다니면서 흥청망청 다 써버렸다.

두달 쯤 지난 후에 돈이 다 떨어지자 집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서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채 업자에게 땅을 담보로 비싼변리로 빌린 돈을 다 써버리고 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매월 5부이자를 내야 하는 현실만이 앞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아버지는 이자를 낼 능력이 없었으니 자기 땅을 곧 사채업자에게 빼앗기게 생겼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만 병이 난 것이다. 당시에 한참 신앙에 불이 붙어서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힘쓰던 나는 두말 없이 내가 직장생활하며 결혼자금으로 모아 두었던 몫돈인 적금을 깨트려서 아버지의 빚을 갚아 드렸다.

그런데 아버지의 빚갚기가 여기까지 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는 내가 돈을 갚아준 그 땅을 두 달 후에 또 사채업자에게 잡히고 몫돈을 받아서 집을 나가 버리셨다. 그리고 석 달 후 쯤에 또 돈을 다 쓰고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고서 땅을 잃게 되었다면서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 버렸다.

그런데 그동안 모아둔 적금을 다 해약해서 아버지의 빚을 갚아 드렸기 때문에 나도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모른척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생병이 난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또 고민이 되었다. 고민 고민 끝에 나는 다시 아버지의 빚을 갚아 드리자고 결단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출을 받아서 아버지가 진 빚을 갚아야만 했다. 나는 아버지가 만약 맹장염이라든가 큰 병이 걸려서 수술을 하신다면 내가 딸로서 대출이라도 받아서 안 도와 드리겠는가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대로 빚만 갚아 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친척 가운데 법조인이 있어서 상담했더니 그 땅을 질권설정을 해 두어 다시는 땅을 다른 사람에게 잡히지 못하게 하라고 권해 주었다. 나는 가명을 만들어 밭 값의 6배쯤 되는 큰 금액으로 설정을 해서 다시는 땅을 다른 사람이 담보잡지 못하도록 조처를 하면서 아버지가 진 빚을 갚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때는 내 나이 24살때였다. 그리고 나는 결혼하여 친정집을 떠났고 아버지의 밭 문제는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 후 24년이 흘러갔다. 내가 선교지에서 살고 있을 때 였다.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 명의로 된 밭으로 소방도로가 나게 되어 보상금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명으로 그 땅을 잡아 놓아서 그것을 풀지 않으면 시청에서 땅 보상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갱년기를 보내며 선교지에서 한참 힘들게 살 때였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선교지로 온 나였지만 갱년기가 되자 내가 고국으로 돌아간 후의 삶이 걱정되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여름 방학에 한국에 나가서 아버지에게 나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다. 아버지의 마음이 움직여 나에게 땅 보상금 중 일부를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한 달간 기도하면서 노트 하나를 사서 매일 아버지에게 사랑의 편지를 썼다.

노트 한권에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섬겼는지를 과거의 일들을 다시 아버지가 기억하도록 글을 썼다. 그리고 계속 공부해서 선교학 박사까지 되고 싶다는 나의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서도 아버지에게 글을 통하여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난청이셔서 말로 의사전달을 다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땅 보상금의 절반을 달라는 나의 요구에 처음엔 거절하던 아버지는 마음을 움직이셨다. 수십 년 전 잃어 버릴뻔한 땅을 내가 두 번이나 찾아 드린 바로 그 땅 보상금의 절반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신 것이다. 확실하게 공증까지 해 달라는 나의 요구를 수용해서 아버지는 나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까지 가셔서 공증을 해주셨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은 나에게 귀한 시드머니가 되었다. 내가 선교지에서 비자 제한을 당하고 우리 가족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미래를 위해서 아무 저축도 없던 우리 가족에게 김포에 따뜻한 보금자리와 작지만 교회 및 선교회 건물도 마련했다. 물론 대출도 받았고 후원도 받았지만 아버지가 십여 년 전에 주신 땅값이 중요한 주축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십년 전 내 나이 24살때 예수믿고 나서 예수님 때문에 미운 아버지를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공경하기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저지른 큰 실수를 두 번이나 덮어 드리며 빚에 넘어갈 땅을 찾아 드렸는데…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신 분이 있으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밭 찾아드린 일 후 나는 결혼했고 주님을 사랑해서 선교사가 되고 고국을 떠났는데… 나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저축해 놓은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나를 위해 미래를 위한 적금을 붓고 계셨나 보다. 그것도 아주 많은 이자가 붓는 하늘적금(하늘 적금은 최소 이윤이 30배이고 60배도 되고 100배도 된다)은 놀랍게도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땅 보상금의 절반의 돈은 바로 내 나이 24살때 내가 대출을 받아서 빚을 갚아 드린 아버지의 밭 값의 꼭 100배였다. 단순히 아버지가 불쌍하고 딱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한 효도가 24년이 지난 후에 100배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선교하기 위하여 스스로 빈손이 되어 선교지로 나갔지만 하나님은 나와 우리 가족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를 위해서 수십년 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가 아버지에게 행했던 ‘효도’라는 계정을 꺼내셔서 그것에 기름 붓고 축복하셨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버지를 통해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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