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천국, 천국, 천국을 향하여 (13)-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삶은? 어리석은 한 부자 청년

천국을 소유한 사람의 삶은? 어리석은 한 부자 청년        

마태복음 19장 16 – 30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들어가는 말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미국의 유명한 무디가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날 신문에 D.L.Moody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좋은 곳에 가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생을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영생을 얻고, 어떤 사람은 영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당시의 엘리트로서 관원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교양이 있고, 지식과, 명예와, 권세가 있고, 재물이 많은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종교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율법을 알고 그 율법대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온하지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깊은 세계와 자신의 영원한 미래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마다 그는 몹시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문제를 질문 한 것입니다. 이 청년의 고민이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의 고민 일 수 있습니다.

줄거리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얻고자 질문했던 부자 청년은 오늘날 부와 명예를 얻고도 영생을 얻지 못한 불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부자 청년의 신앙

영생을 얻기 위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슨 선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 이 청년에게는 영생을 얻으려는 불타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세상적인 행복의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었으나 무엇인가 그 내면에는 강한 불만이 있었고 공허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에 대한 문제를 누구에게서도 보장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 청년뿐 아니라 영생의 문제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가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전도서 3장 11절 말씀에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이 땅에는 많은 종교가 성행합니다. 그러나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영생을 행위에서 얻는 줄 알았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라고 청년을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러한 청년의 질문은 그가 믿음에 의한 구원의 도를 분명히 깨닫지 못한 데서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무지를 드러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그는 선이란 외적 행위의 규율에 부합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 무엇을 행함에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바리새적인 규율을 준수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실패한 것은(22절) 단순히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처음에 가지고 있던 행위적 구원론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만 돌려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17절 말씀에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든지 주어지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만 돌려 드리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선하다”고 부른다면 그 모든 선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옴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변함없이 선하지 않습니다. 그의 선하심은 그 자신에게서 또한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며, 피조물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17절). 그는 선의 기준이시오, 가장 위대한 선의 전형이요, 본보기이십니다. 그에 의해서 모든 선이 측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로써 영생의 길을 선포하셨습니다. 17절 말씀에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특별히 이 말씀은 계명을 지킴으로 생명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간 자, 즉 구원받은 자는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실생활에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지내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4장 21절).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십계명 중 둘째 돌비에 새겨진 제6, 7, 8, 9계명을 차례로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제5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은 생략하고 대신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장 18절)는 말씀을 첨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제10계명과 함께 이웃 사랑이라는 새 계명(요한복음 13장 34절)을 말씀하신 것은 청년이 가지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또 신약의 새 계명을 통해서 현대인의 자만심을 허물어뜨리시고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서도 둘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들을 나열하시면서 이웃 사랑의 귀중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첫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에 비해 이 계명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만연해 있던 바리새적인 신앙 태도(마태복음 2장 23절)를 일소시키고자 하신 의도였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수평적 관계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극히 중히 여기셔서 이를 행하도록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 때 그 사랑은 비로소 온전한 사랑으로 승화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사람의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에,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 “영생”은 “끝이 없는 삶”, “중단을 모르는 생명” 즉 천국을 의미합니다. 즉 영원히 계속되는 내세의 생명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생에 대한 관심은 사람만이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생 문제를 지니고 있는 피조물입니다. 영생에 대한 추구는 오직 사람만이 가지는 특유의 것입니다. 그 어떤 다른 피조물들이 영생 문제로 고심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영생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생만이 가지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영광이요, 절정입니다. 사람만이 본래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소멸되지 않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아담과의 행위 언약 관계에서 아담이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무서운 죄의 결과가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음으로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여자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해졌고, 남자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철저한 범죄로 인하여 인생은 영생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므로 죄 아래 있는 모든 인생은 자신의 힘으로는 영생에 이르는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사람의 전적 무능력이요, 전적 타락입니다.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복음을 믿거나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도 없습니다. 타락한 본성으로는 자신을 구원에로 변화시킬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이요, 죽음이요, 슬픔뿐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말씀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라고 하면서 영적 사망 선고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 사망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모든 복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상실된 영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자요, 관원인 청년이 고민하며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문제가 혹시 여러분의 문제는 아닙니까?

내가 무슨 선한 일울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이 없음을 알려주는 질문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에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는 청년으로서 젊을 때 가지기 어려운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세보다는 현실의 쾌락 추구에 자신의 혈기와, 정열을 쏟을 수 있는 청년임에도 그는 영생에 대한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상당히 빗나간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도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여”라고 한 것도, 예수님께서도 선한 일을 함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 착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함으로 영생을 얻으려는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소개하셨습니다. 이 때 이 청년은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자신 있게 답변했습니다. 그의 고민이, 근심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어려서부터 그토록 다 지켰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에게는 영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에만 충실했을 뿐, 율법이 지향하는 사랑의 실천에는 무지한 자였습니다. 율법이 사람의 전적 무능을 깨우쳐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도록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도 습관화되고, 형식에 치우친 신앙생활의 연륜이나, 주일 성수, 헌금 생활, 교회 봉사 활동이 그의 믿음의 궁극적인 척도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가 많은 율법과, 계명과, 규례들을 다 지키었으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의 진정한 정신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가능합니다. 결코 율법 자체를 지킨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어려서부터 지켰던 율법의 행위로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선한 행실도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얻게 됩니다. 본문 21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끝내는 가슴 가득 근심을 안고 예수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 말씀을 대하면서 예수님보다 세상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의 영적 상태

계명에 대한 오해와 영적 자만,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20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율법 준수를 오해하고 단지 외형적 계명 몇 가지로만 자기가 다 된 줄 알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진정 이 세상에서 율법 전부를 다 지켰노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께서 기대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수준에서 자기의 공적을 은근히 드러내면서 이같이 대답했던 것입니다.

올바른 신지식과 믿음의 결여, 이어서 청년은 자신의 외적 선행을 과시하려는 듯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모르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자아 공로에 의해 얻는다는 것으로 대치시키고 있었던 오해였습니다(에베소서 2장 8절). 이처럼 세상에는 학문적 지식과 삶의 다양한 경험으로 인해 높은 수준에 오른 자들이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지식과 그에 따른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소유하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하며(고린도전서 2장 12절), 신앙의 유일한 기초가 됩니다.

재물을 가장 사랑한 사람

부자 청년의 치명적인 약점, 안타깝게도 이 청년에게 있어서 문제는 바로 재물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그에게 부귀와 영화를 가져다준 재물의 위력은 그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재물은 그가 영생을 얻는 데 있어 방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 권력, 명예 등일 것입니다. 이러한 세속적 우상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청년의 소극적 선행, 청년은 많은 재물을 가진 자로서 소극적으로 계명을 지킨다는 데에 급급했지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자기의 재물을 사용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많은 재물에 집착하고 있었고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는 어리석은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6장 24절).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어 그와 함께 영생의 길을 가려는 자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집착해 있는 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하는 길인 것입니다.

주님의 지도와 다스림에 온전히 맡기는 성도의 삶, “와서 나를 따르라”(21절). 예수님께서 이렇게 요청하신 것은 언제나 곁에서 주님을 수종들며 따르라는 의미였습니다. 마치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소유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처럼 그도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보다 주님의 일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준다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바친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것 역시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골로새서 3장 17절).

청년의 고민

재산을 지나치게 사랑한 부자 청년, 재물을 사랑하는 부자들의 공통된 점은 재물의 궁극적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그들의 부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청년도 예외 없이 이러한 생각으로 인하여 영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근심을 가져다준 선택, 하나님과 재물 중 재물을 선택한 이 청년에게 남은 것이라곤 마음의 근심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재물은 계속해서 소유할지는 모르지만 평생 근심과 걱정, 불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재물은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복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제시하셨으나, 이 청년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왔으나, 결국은 영생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든 것은 바로 재물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돌아가는 이유를 공관복음에서는 “재물이 많은 고로”, “재물이 많음으로”, “큰 부자이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청년의 자만심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 그 정곡을 찌르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기에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도, 재물을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하는 그의 고백은 순간에 위선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재물의 문제는 이 청년의 우상이요,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영생이냐? 재물이냐? 하는 이 문제에 있어서 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부자들은 모든 재물을 다 팔아, 무조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결코 아닙니다. 부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하는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있으나, 가난한 자라고 할지라도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연연하여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은 영생과 거리가 멀어진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가진 사람은 대개 그 부를 믿는 까닭에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이라고 하는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항상 이 세상에다 묶어 놓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생은 율법을 지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죽음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인생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자 하는 절규입니다. 인생은 영생하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본래 인생을 영생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범죄로 인해 그 영생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인생에게는 영원한 진노(지옥)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영생을 상실한 인생들은 그 본래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이나, 어떤 의지도 영생하고자 하는 욕망을 채워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믿음을 통해 영생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죽어도 사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영생은 사람의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도 지켜 왔던 율법의 행위가 부자 청년에게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아무런 공로 없이 영생을 선물로 받은 복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천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의 감격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가 돌아간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시는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물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 재물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사랑함보다 더 크고 탐욕이 가득해지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욕심이 그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도,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그 문으로 들어서는 대신에, 세상의 것을 추구하다가 스스로 망하게 됨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이냐 재물이냐를 놓고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재물을 택한 부자 청년을 두고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재물에만 집착하는 부자들의 비 신앙적인 행위를 경고하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재물과 신앙, 그리고 부자와 구원의 관계를 알아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세속적인 재물의 부정적 영향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는 말씀은 부자도 천국에 들어 갈 수는 있으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별한 노력과 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세속적인 재물이 신앙생활의 방해가 되는 점은 무엇입니까?

재물은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듭니다. 인간은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는 자기희생적인 자세를 가지다가도 부자가 되면 즉시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부자의 이러한 이기적인 특성은 그의 신앙을 방해하거나 반대합니다. 신앙은 철저히 이타적인 자기희생에 의해서만 몰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킵니다. 물질은 일단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가져다줍니다. 부자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재물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자의 불행입니다. 그들의 육체는 부족함이 없으므로 정신과 영혼조차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착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고 스스로 자고하여 범죄하게 하는 것입니다.

재물은 사람끼리 차별하게 합니다. 물질의 소유로 인해 사람은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집니다. 재물을 많이 소유한 즉 소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우월한 부를 내세워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고,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앙생활도 자신의 신분에 맞게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시며, 또 재물을 중히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부자는 재물에 대해 과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부자라는 말을 지식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 등에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대체로 무엇이든지 많이 소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도 무형의 재산보다 유형의 재산에 집착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소유가 많은 사람일수록 욕심 또한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욕심은 결국 온전한 신앙을 방해하는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가난한 자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부자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윗이나 솔로몬, 그리고 삭개오나 아리마대 요셉 등 성경에 나오는 부자들은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부자는 영생을 얻기가 쉽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부자들이 소유한 재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부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는 외형적으로 소유가 많은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탐욕을 가진 부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와 구원

천국 가는 길이 바늘귀에 비교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바늘귀는 찾기도 힘들고 실을 꿰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낙타로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흡사 재물을 많이 소유한 부자의 모습이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사막에 짐을 등에 가득 싣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낙타와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리는 주인의 짐을 내 것인 양 등에 지고 허덕이는 낙타는 결국 이 세상에서 주어진 재물의 한계성을 알지 못하고 영원히 자기의 소유가 되는 것처럼 집요하게 재물에만 집착하는 부자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을 바늘귀처럼 좁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이런 내용의 부자는 구원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구원론의 대강령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근거가 사람의 선행이나 수양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에베소서 2장 8-10절).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보기에 전혀 구원받기에 적합하지 않는 자라도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유유히 통과하는 것처럼 기적적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누가복음 23장 43절).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는 첩경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장17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와 다른 제자가 어떻게 했는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본문 27절 말씀에,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갈릴리 바닷가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실 때에 이들이 배와, 그물을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후 삼 년여 세월을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보면서, 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을 보면서 은근히 욕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전하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서 그들의 출신 신분으로는 누릴 생각조차 못했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이 눈앞에 다가왔어도 이에 대하여 생각하기보다는 자리에 대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다,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 버려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화 가운데 우리가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동문서답 식의 엉뚱한 말씀이십니다. 이는 그만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다는 반증입니다. 그 당시의 제자들만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기대를 한 것이 아니라, 요즘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도 예수님의 생각에 한참 미치지 못함을 예수님께서는 아십니다. 본문 28절에서 29절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인데, 그러나 그 목적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예수님의 어부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이유가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이들은 바른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우리의 소유나, 관계를 버리는 것도 나의 이해관계보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앞에 제자들과의 대화 내용이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이 보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기 보다는 교회에서 주장하고 목소리를 내려하고,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을 드러냄이 그 목적이라고 한다면, 제자들 간에 다툼이 있었듯이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도 다툼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버릴 것을 말씀하시는데,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매우 귀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고자 할 때, 나는 비로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나를 따르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자신의 소유를 부인하는 것이요, 세상에서의 나의 관계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아브라함의 순종의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에게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하시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사탄의 미혹에 그들이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이 세상에서의 그들 자신의 유익을 더 생각한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를 바치기로 작정한 것은, 이삭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더 중한 일임을 그가 안 까닭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믿음의 좋은 본을 신약 백성들에게까지 증거하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귀한 것을 버리는 결단을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는데, 내세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번제 할 수양을 허락하시고 이삭을 그의 믿음의 아들로 돌려주셨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에는 재산이나, 부모, 형제, 자매, 자식의 가치를 깨달아 알지 못하였는데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이를 포기하고 나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됩니다. 전에는 부모, 자식과 형제, 자매가 육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이들도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영적으로도 나의 귀한 혈육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나에게 박해가 함께 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박해를 이길 힘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작정한 사람 가운데 “내세에 영생을 상속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당할 박해가 너무나 커서 일시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기쁨이 영원히 넘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 이를 능히 견딜 수 있습니다. 본문 30절 말씀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 지 오랜 사람 가운데서도 이 말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가운데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 가운데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목사이고, 장로이고, 집사이고, 직분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사 가운데도 잘못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직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영생을 소유한 성도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의지로는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의 결심만으로는 그리스도와, 복음만을 위하여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면서도 교회에서 하나님보다도 나와 나의 주장들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베드로가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주님께 말씀드리지만, 자연인 베드로의 모습은 여전히 부족하고, 자신의 주장이 강한 결점 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오히려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시고, 그를 충만히 채우실 때, 비로소 그는 온전히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계십니까? 성령님의 충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여러분의 삶의 전부를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뜻이며 어느 시대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레위기 18장 5절,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신명기 5장 32-33절,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을 얻어서 너희가 치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계명들을 순종해야합니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순종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계명들을 순종치 못한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서 3장 21-24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셋째로, 우리가 참으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자라면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끊어 버려야만 합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복음 6장 24절). 우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고(마태복음 10장 24-26절), 모든 소유를 버려야 주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4장 33절). 주의 말씀대로, 재물의 욕심은 영생의 길을 방해하는 가시떨기와 같습니다(마태복음 13장 22절).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성도의 바른 삶입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올린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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