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천국, 천국, 천국을 향하여 (17)-달란트 비유, 반드시 결산의 날이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 반드시 결산의 날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 – 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종들에게 돈을 맡겨 장사하게 하던 유대 사회의 관습을 비유로 하여 천국을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인에게 충성한 두 사람의 종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받은 달란트를 성실하게 관리함으로 주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신실한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영적 감화를 끼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잘 아시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큰손 투자자가 세 사람에게 투자를 한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달란트라는 화폐 단위는 굉장히 큰 단위입니다. 드라크마 단위를 아시지요? 누가복음 15장 말씀에 보면 열 드라크마 비유가 나오는데, 한 드라크마는 한 가족의 3개월 양식을 구매할 수 있는 돈입니다. 적지 않은 돈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6만 드라크마입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한 달란트는 금 33kg이니까 다섯 달란트면 160kg이 넘습니다. 요즘 시세로도 수십억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큰돈을 투자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당장에 가서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남겼다고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는 두 달란트의 이익을 창출했습니다. 자기 능력에 걸맞은 이익을 낸 사실입니다. 이 두 종은 주인의 기대에 100% 부응한 것입니다.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업을 하는 대신에 땅을 파고 묻었다는 것입니다. 은행 비밀금고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 것입니다. 18절 말씀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주인은 열심히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내라고 투자한 건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줄거리

달란트의 의미, 달란트(Talent)라는 말은 지금은 “재능”이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특별히 연예인들을 “Talen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원을 찾아보면 달란트는 구약 성경에서 무게를 측정하는 가장 큰 단위(34kg)였고(출애굽기 25장 39절), 신약시대에는 헬라계통의 달란트가 사용되었는데, 이때에는 중량(20kg)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요한계시록 16장 21절), 화폐단위(6,000데나리온)로도 사용되었습니다(마태복음 18장 24절, 25장 15-28절). 이 비유의 줄거리는 다 잘 아시는 줄 믿습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예수께서는 종말과 재림에 대한 교훈을 하시는 중에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시고 그 이후에는 반드시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과 주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다시 오신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비유 중에 열 처녀 비유와, 종의 달란트 비유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말이 있으니 그 종말을 대비하여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갑절을 남겨서 칭찬을 받았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원금을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의 책망을 받고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기 맡은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14절).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주인의 달란트를 받지 못한 종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즉 그들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일해야 할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재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14절). 우리는 성도가 소유하는 성령의 은사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갖고 있는 재능, 즉 선천적인 소질이나 기술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재능은 각각 다릅니다(15절). 사람마다 각각 지능적인 면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자도 있고, 운동 신경이 발달하여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는 자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통해 받는 은사도 역시 각양각색입니다(로마서 12장 6-7절). 그러나 그 모든 재능과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 주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재능은 주인을 위한 것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목적은 주인의 재산을 유용하게 관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종들이 맡은 재산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 재물을 잘 관리하여 재산을 보호하고 증식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달란트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나누어주신 성령의 은사와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받은 각양 선한 은사들을 사용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의 교회를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에베소서 4장 12절).

맡긴 달란트는 반드시 계산할 때가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19절). 오랜 후에 주인은 돌아오고 재산 맡은 종들과 회계를 하게 됩니다. 그들이 주인 앞에서 각각 일한 것에 대한 결산 보고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결산의 근거는 주인의 원금입니다.(20절). 첫 번째로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의 회계 보고를 들어봅시다. 그는 주인이 맡긴 돈 때문에 그가 장사를 할 수 있었고, 돈을 더 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장 10절)고 고백했듯이 이같이 보고는 충성스런 하나님의 일꾼들의 자세를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바로 이러한 성도들의 직임을 다한 신앙 고백을 근거로 행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성실성 유무에 따라 주었습니다(21, 23절). 주인은 자기의 재산에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끼친 종이나 단지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종이나 차등 없이 상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상급이 성취한 일이 양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성실도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일을 배당받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에 얼마만큼 성실하게 임했는가가 문제될 뿐입니다. 주인은 충성된 모든 종들에게 동일한 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적은 일에 충성한 자는 주인의 신용을 얻습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맡기리니”(21, 23절). 맡겨진 일을 잘 해낸 종들은 칭찬과 상급은 물론 주인의 신용을 얻었습니다. 특별히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의 태도는 우리에게 신중한 고려를 요합니다. 비록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자보다는 보잘것없는 일을 맡았으나 그것을 경이 여기거나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것은 그로 하여금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는 신임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인은 충성을 다한 두 종에게 더 많은 일을 주리라 약속했던 것입니다.

종이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21, 23절). 주인은 종을 칭찬하며 자신이 기쁨에 동참하게 하였습니다. 참으로 충성된 종을 위해 마련된 주인의 기쁨은 그 동안의 수고와 고난과는 족히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영광입니다. 주인의 인정을 받아 주인과 함께 보좌에 앉아 음식을 나누며 귀한 손님으로 대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봉사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기쁨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기쁨은 종들의 성실함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친히 그 기쁨 속에 참여하시는 교제이기에 모든 복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귀한 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19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종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주인이 상당히 더디게 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재림이 많이 늦다는 뜻입니다. 벌써 주님이 승천하신지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종들이 긴장을 풀고 재림 불감증에 걸려 아무 위기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에 내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주인이 왔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19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그들과 결산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종말은 단순히 시간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아니라, 결산입니다. 주인의 심판입니다. 이 사실이 정말 무서운 사실입니다. 이래서 종말은 우리에게 심각한 것입니다. 그동안의 내 삶의 진상이 낱낱이 까발려집니다. 호리도 남김없이 드러나 선악간의 심판을 받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아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그동안의 수고와 희생만큼 영광을 받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인의 치하입니다.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23절 말씀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같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마지막 30절 말씀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왜 주인이 이렇게까지 진노하고 저주하며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고 했습니까? 주인이 맡긴 한 달란트마저 허비한 게 아니고 최소한 본전은 지켰는데도 왜 주인이 진노했을까요? 25절 말씀을 보면 한 달란트 받았던 종도 바로 그 점을 주인에게 주지시킵니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당신이 내게 한 달란트 주었으니 내가 한 달란트 되갚았습니다는 것입니다. 손해를 볼 수도 있었는데 원금은 되돌려 받지 않았습니까?하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이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며 진노합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 아니라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주제는 충성, 헌신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칭찬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주제가 충성입니다. 손해보다는 충성의 여부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충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받은 달란트로 사업을 하다가 그마저도 손해를 보았다고 하면 주인이 무엇이라 했을까요? 아마 주인은 책망보다는 칭찬했을 것입니다. 잘 하려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주인은 책임을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를 남기고 손해를 봤느냐는 결과가 아니라,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하며 충성했느냐는 과정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는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망과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늘 이렇게 하십니다. 과정과 중심을 보십니다. 그것으로 심판하시지 절대 결과만을 놓고 복을 주시거나 저주하시지는 않습니다. 장사하다보면 열심히 해도 이익을 못 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주님은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다음에 잘 하라며 격려하시고, 수고했다며 치하하시지, 이렇게 잔혹하게 어두움에 내쫓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런 과정이 없었기에 가차 없이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받은 돈을 땅에 묻어두었을까요? 우선 주인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누구는 다섯 달란트, 누구는 두 달란트 주는데, 자기에게는 한 달란트만 준 것입니다. 인간차별이라고 느낀 것입니다. 주인이 인간 차별한 것입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개인의 능력차를 인정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재능에 따라”라고 합니다(15). 사람은 능력이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개인차를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다섯 달란트씩 맡겼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이고 비능률적이며 역차별입니다. 능력도 안 되는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고 책임을 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역차별입니다. 따라서 능력에 따라 배분한 것은 종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주인이 결산한 장면을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남긴 사람 사이의 산술상의 차이가 있음에도 똑같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아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했을 때 주님은 똑같이 칭찬한 것입니다. 

다음은 한 달란트라는 것, 다시 말해 작은 일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하찮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한 달란트로는 생색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로는 아무리 뛰어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한 달란트로는 이 종의 성에 안 찼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들이 현실에는 많습니다.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과소평가하며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올해 연 초만 해도 주님께 각자의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땅에 묻어 둔 것입니다. 그것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라면 시시하게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주인은 항상 작은 일을 통해 곧 한 달란트를 통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왜냐면 작은 일에 충성해야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을 칭찬한 장면을 보십시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기에 많은 것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불성실하면 큰일도 못합니다. 큰일이 주어지면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공허한 소리일 뿐입니다. 큰일을 하려면 작은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작은 교회에서 제대로 신앙생활하기가 어렵다며 큰 교회로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한 달란트에 대해 이런 저런 핑계가 많으면 다섯 달란트라 해서 핑계가 없을 것 같습니까? 한 달란트에 성공하셔야 다섯 달란트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 항상 함정이요 시금석입니다. 부디 작은 일에 충성하시고 한 달란트를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주님은 올해도 우리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가 아니라 한 달란트를 맡기신 다음에 예의 주시하고 계십니다. 한 달란트에 어떻게 임하는가가 우리의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 때문일 수 있습니다. 24절 말씀 이하를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변명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조폭 두목쯤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굳은 사람이란 말은 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악질이라는 뜻입니다. 이토록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터무니없이 잘못 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변명을 통해 주인의 기대를 저버린 악하고 게으른 종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주인의 혹독한 책망과 저주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귀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의 특징은,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앞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와는 반대로 주인의 과분한 칭찬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왜 주인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을 이처럼 꾸짖을까요?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죄를 전가했기 때문입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24절).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과 계산할 날이 이르렀을 때 가장 늦게 나타났으며 자신의 근무 태만과 관리 소홀을 변명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즉 자신의 게으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익을 남기지 못했노라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는커녕 주인의 성격이 지나치게 완고할 뿐 아니라 이기주의적이라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시켰다고 핑계했습니다. 이처럼 게으르고 태만한 자일수록 자기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많은 변명을 하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25절). 그가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는 주인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과다한 이익이나 재물의 증식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은 단지 종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의무와 노력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인의 진심을 알았더라면 그는 다른 종들처럼 땀 흘려 수고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평가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종과 같이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렵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오해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는 자가 아니며, 그 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자입니다(요일 4장 18절).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25절).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이 부여받은 일을 과소평가하여 그 일을 제대로 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대충 시간만 채우다가 나중에 주인이 와서 회계할 때 자기가 맡은 그것만 돌려주면 모든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세상에는 귀하고 천한 일이란 없습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그 일에는 최선의 노력과 성실이 필요합니다. 작은 일은 일대로, 큰일은 큰일대로 이러한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도 각자 다른 달란트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달란트를 힘써 잘 사용하고 관리하여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한 주인의 심판, 종의 사악한 거짓말을 책망하셨습니다(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 주인은 일언지하에 종의 악함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게을러 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인의 명을 좇지도 않았으며, 자기 합리화를 위한 갖가지 핑계를 늘어놓았고, 게다가 주인을 속이며 헐뜯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만일 그가 그토록 주인을 두려워했다면 억지로라도 종의 의무를 다했을 것이며, 또 경제적 손실의 우려 때문이라 한다면 그가 맡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안전하게 이자라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이러한 종의 사특한 거짓말을 아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종의 교만을 지적하셨습니다(25절). 종은 다른 종에 비해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작다고 해서 주인의 처사에 반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의 명을 어기고 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달란트를 그냥 땅에다 묻어 두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의 교만함을 잘 드러내 줍니다. 주인은 누구보다 자기 수하의 종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능력과 자질에 합당한 달란트를 맡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종은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여 주인의 뜻을 무시하였습니다.

달란트를 빼앗으셨습니다(28절). 어떻게 보면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라는 말씀은 지나친 처사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묵혀 두는 자에게 더 이상 그것을 보관하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의 일거리를 빼앗아 충성된 종에게 넘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각양 은사는 충성스럽게 일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명을 영영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인은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배분하고, 그 능력에 상응하는 것을 찾았습니다. 심은 만큼 거둔 사람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열 달란트를 벌어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불한당으로 알았습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실제 이런 종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 생각대로 하고, 성경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합니다. 마침내 주님의 추상같은 심판이 선고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30). 이것이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의 최후입니다. 

우리는 다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 능력에 따라 그 차이가 있을 뿐이지 받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과 결산해야 합니다. 가까이는 올 연말결산이 있습니다. 올해도 떳떳이 주님과의 결산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까? 올 연말결산과 내 인생 최후의 결산이 다를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연말결산의 연장이 최후결산입니다. 연말결산의 결과가 좋아야 우리 인생의 최후 정산도 좋습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는 칭찬을 받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받은 달란트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실한 종들로 주님께 칭찬을 받는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후회 없이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에게는 재능의 차이가 있다는 것과, 둘째로 깨달음의 차이가 있다는 것과, 셋째로 노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결과의 차이가 크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재능의 차이에 대한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같은 종류라 할지라도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수십억이 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살고 있지만 개인차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천하 만민 중에 “나”라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으며,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한 사람에게는 120여 가지 재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재능이 몇 가지가 있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찾아 개발해야만 합니다. 꽃밭에는 여러 가지 꽃이 있고 저마다 모양과 색깔과 향기가 다른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깨달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깊은 마음과 의도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자신에 대한 깊은 배려를 깨닫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과 불공평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돈이 한 달란트라고 해서 적다고 생각했다면 큰 잘못입니다. 한 달란트가 5,000데나리온 정도 되는데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인건비입니다. 지금으로 계산하면 2억 5,000만원(1일 임금 50,000원×5,000일=2억5,000만원)인데, 약 15년간 일한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사랑과 배려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주인을 사모하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주인의 뜻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두려움과 나태와 불만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노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뜻과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바로 깨닫고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깨닫는 대로 올바른 가치관과 적극적인 태도로 최선의 노력을 하면, 갑절의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사이에 능력의 차이는 2.5배 났지만 두 사람의 노력은 똑같은 100%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열 달란트를 구하시지 않으시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자신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심지도 않고 거두게 된다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마지막으로는 결과의 차이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둔다(갈라디아서 6장 7절)”,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린도후서 9장 6절)”는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마무리

주인은 달란트들을 남긴 종들에게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과 달란트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수고하고 애씀으로써 많은 역사를 이루었다고 해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 일들은 작은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자세를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의 자세를 잊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는 다섯 달란트 및 두 달란트 받은 자들에 대한 평가와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인의 평가에서 “게으르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악하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맡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말씀을 그와 같이 피상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이익을 남기지 않고 한 달란트만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준 것은 그 중심이 완악하여 그 주인의 선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과 반항심이 그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악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악하고 게으르다 평가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맡았던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소유한 자에게 주게 했습니다. 이는 주인이 한 달란트를 맡은 자를 더 이상 자신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대 사회에서 주인이 종을 자신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곳으로 팔리게 될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그 종의 파멸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지 아니하고 불충성하는 자들에게 임할 비극적인 상황을 예시해 줍니다. 하여튼 한 달란트 맡은 자는 그것마저 빼앗겼고,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가 남긴 다섯 달란트 외에 또 한 달란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의 복음 사역을 위해 주신 은사로 이를 사용할수록 더욱 커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되고 결국은 없어지고 말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에게 있는 건강, 지혜, 물질, 재능 등을 하나라도 소홀히 다루거나 묻어두지 말고 항상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하게 선용하는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각자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해 줍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재능과 은사가 다르며, 또한 맡겨진 사명이 다르다 할지라도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충성뿐입니다(고린도전서 4장 2절). 만일 주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해서 하늘만 쳐다보며 허송세월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마치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땅속에 파묻어 두었던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무익한 종이라 일컬음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여김을 받아 영광된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는 비극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을 깨달아 충성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천국 잔치에 참예하는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문헌을 인용하여 올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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