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6)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4간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우리의 양식을 위한 기도

 

주기도문(6)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4간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양식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6 : 9 – 13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들어가는 말

4간구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 우리의 양식을 위한 기도

연속되는 두 개의 간구, “뜻이 이루어지이다”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옵고”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전자는 지극히 넓고 후자는 좁습니다. 전자는 순종적인 세계에 대한 큰 기대에 차 있고 후자는 개인적인 필수품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전체 구조 속에서 이 폭이 좁은 지상적 간구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또 이 간구가 서 있는 위치도 그에 못지않은 교훈을 줍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최우선 순위를 점유해야 할 욕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행해야 하는 것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들입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전반부는 인간 영혼과 삶의 성화 과정의 법칙처럼 내부에서 시작해 외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출발하여 땅이 하늘처럼 될 수 있도록 그 하늘을 땅으로 끌어 내립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은 상호 일치하여 하나의 음악을 만듭니다. 이어 주기도문의 후반부에서는 개인적인 요망 사항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요망 사항들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정당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한 경외와 명상만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기도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자아 몰입적 명상의 표현만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도는 어떤 본성적 욕구와 의존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주적 욕망의 발언, 자아를 정복한 어떤 존재의 표현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의 완전성은 욕망을 전혀 가지지 않는데 있거나 의지와 소원이 없는 어떤 상태로 몰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소유하여 전혀 결핍이 없는 상태, 여기에 인간의 완전성이 있는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심 없는 사랑, 즉 다른 사물이나 일에는 전혀 관심 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상태(이러한 감정은 불가능하다)가 완전한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의존을 인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여러가지 소원에 대한 표현입니다. 기도는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복종 내지 순응시킨 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솔직하게 아뢰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경배입니다. 기도는 또한 요구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 아버지여”를 외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간청에는, 인간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선물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전 후반부 양편이 어떤 식의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고 있는지도 주목해볼만합니다. 전반부는 하늘 아버지의 위대성에 대한 명상에서 출발하였으나, 후반부는 양식을 위한 부르짖음에서 출발하여 생의 온갖 재난을 통과하면서 서서히 올라갑니다. 결핍으로부터 시작하여 침해, 인간의 무자비와 증오로 건너가 다시 인격적 연약성과 세상의 유혹, 죄악의 재난과 슬픔의 재난으로 나아가고 울부짖음과 눈물이 지난 후에는 원점에 이르러 하늘과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마지막 송영은 한 바퀴 원을 그리면서 서두의 부름, “우리 아버지여”로 되돌아옵니다.

주기도문 전체는 인간의 온갖 슬픔과 궁핍으로 범람하는 홍수를 통과하면서 지친 길을 비행하다가 노아의 비둘기처럼 그 비상 속에서 탄생한 평화를 물고 하나님 안의 본향으로 되돌아와 처음의 출발지점에서 멈춥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의 삶을 시작하는 자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확신과 찬양으로 마칠 것입니다.

줄거리

  1. 먼저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일용할 양식”이란 문구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나머지는 해당 항목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와 누가복음 11:3에 나오며, 그 밖의 유일한 예는 파피루스에 1회 나올 뿐입니다.

이 용어는

(1) 에피에나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면, ‘정규적인, 매일의, 적절한’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헤 에피우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면 ‘다음 날을 위한’이나 ‘다가오는 날을 위한’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오리겐은 이 단어를 에피 텐 우시안(생존을 위해 필요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오리겐의 모국어가 헬라어였으므로, 그의 해석이 지니고 있는 언어학적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잠언 30:8의 말씀으로 확증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날에 필요한 분량만큼의 만나만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삶에 필요한 양식을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4) 이 단어는 아마도 레요마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졌으며, 이 이중적인 의미를 헬라어로 나타낼 경우 두 개의 용어, 즉 에피우시오스(그날 필요한)와 세메론(오늘을 위한)을 결합시켜야만 표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 날에 필요한 양식을 위한 매일의 기도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언젠가는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는 새 시대에 사는 제자들에게 장기간의 양식을 위한 기도는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이 견해도 그럴 듯합니다.

“양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토스(헬740)는 ‘빵’이나 ‘빵 덩어리’를 뜻하며, 빵은 분말 가루로 구운 것으로 여러 종류가 있으며, 신약 시대의 성경상의 지역들에서 주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한글 개역판에서 이 단어는 ‘떡, 양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일용할 양식”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면,

(l) 성만찬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주기도은 처음부터 성만찬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성만찬 때 영적 양식을 받기를 구한 기도라고 해석하였습니다.

(2) 영적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한복음 6:35, 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유대인의 해석을 따라 천국의 양식(떡)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4:15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의 택한 백성을 모아 놓고 큰 잔치를 베풀 것이며, 이 간구는 이 메시아 잔치에 참여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5) 육신의 필요한 양식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칼빈과 루터는 육적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루터는 이 일용할 양식을 광범위하게 육신 생활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란 말의 의미를 (5)번의 의미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께서 주로 육신에 필요한 것을 생각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것을 지지하는 한 파피루스 단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파피루스 단편은 부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메모지였는데, 어떤 물품에는 이 “에피우시오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날에 필요한 식료품을 사기 위해 그 품목을 적어 두는 메모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간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 특별히 그 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시오’ 하는 아주 솔직한 기도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뒤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가 뒤따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자신의 먹는 양식이었던 주님을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영적 양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양식에 대한 간구가 뒤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맨 처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존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생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존해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을 취급하고 있으며, 우리 주님은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으니까? 영혼을 중요시 여기며, 육적 생명이 있으니까? 영적 생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육적 생명을 무시해버린다면 영적 생명이나 신령한 것을 염려할 소지가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적 존재(생명)는 이 세상에서 영적 임무 수행과 행복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육신에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양식이 오로지 영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양식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필요한 것들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주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주기도문의 여러 간구들 중에서 이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의 영적 필요와 관련이 있습니다.

  1. 이 간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에 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1) 이 간구는 첫째로 정당한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세상적인 요망 사항을 무시하고 인간의 물질적 본성에 뿌리를 둔 욕망을 죄로 간주하는 환상적인 신령주의를 배격합니다. 이 기도는 일상적인 선물들의 가치에 관하여 우리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놀라운 증언입니다.

– 여기에 일용품에 대한 요구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자 하는

– 그 위대한 욕망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 여기에 현실의 삶을 평가 절하하는 잘못된 금욕주의는 없습니다.

– 여기에 현실의 복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정당하게 누리는 것을 죄악적인 것으로 여겨서 경멸하는 병적인 어조는 없습니다.

물질적 요구와 세상적 이득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은 이교도적이고 비기독교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위한 간구가 천국에 관한 기도 뒤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요구와 세상적 이득을 경멸하고 거기에 무관심하는 것도 역시 이교도적이요 비기독교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위한 기도가 이 여러 기도 제목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면, 육체 속에 있는 영을 망각하는 잘못된 감각주의와 영을 감싸고 있는 육체를 망각하는 잘못된 영성주의, 이 두 가지가 가져오는 해악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속에서 진리를 갈망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도 갈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자를 모두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되 오로지 그것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먼저 구할 뿐입니다.

(2) 더 나아가 이 간구는 건전한 자연적 행위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지상적 사물들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당연히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결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응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말속에도 역시 큰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 요망 사항보다 영혼의 건강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금생의 온갖 일들에 대한 욕구에 ‘만일 주의 뜻이라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보다 낮은 복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요구는 기도로 전환될 수 있는 그런 욕구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구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러한 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을 위해 듣기 좋은 소리로 입술만을 가지고 유창하게 기도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온갖 소원을 기도로 아뢰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히 기도로 옮기지 못하는 욕망의 소유와 실제적 소원이 아닌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우리가 간구에 포함시키도록 합시다. 우리 자신의 영혼에 진실합시다. 누구든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더 나아가서 이 기도는 하나님을 일용한 양식을 주시는 자로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련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시편 104:27-28).

하나님께서 어린 까마귀가 울부짖을 때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산 위에 풀잎을 자라게 하십니다. 만물의 눈이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시편 104편의 한 아름다운 구절에서는 밤중에 숲속에서 먹이를 찾아 헤메는 사자의 포효 소리조차도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여겼습니다 –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따라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하찮은 참새를 먹이기 위해서 돈이 많은 재벌의 수입 금액으로 살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지출하십니다’. 이 우주적 선물은 그의 운명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자들에게 참으로 적용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도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시편 111:5).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때 하나님의 손길(제 1원인)은 제 2원인 아래 감추어져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2 원인이 우리 눈앞에서 그 진실을 가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의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자연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우리는 그 힘의 질서 정연한 작용을 자연법칙이라고 부릅니다. 그 힘은 하나님의 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대로 각 씨앗에 몸을 주지 않으신다면 성장도 수확도 없을 것입니다. 양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은 루가오니야의 거친 농부들에게 “하나님이…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양식의 분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 자신의 노력과 기타 수단 등의 제2 원인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기계의 작동은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동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상에 나타나는 결과는 하나님이 그 원인입니다.

양식에 의한 양육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어떤 자연적 실체든지 그 고유한 속성들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탱하고 유지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때, 우리의 건강, 우리의 생존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상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자주 상기할수록 그만큼 더 좋습니다.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은 그로부터 옵니다.

창세기 28:20을 보면 야곱은 하나님을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죠지 물러는 2,000명이 넘는 고아원과 성경 연구회를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사람에게 빌린다거나 구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고 ‘날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93세를 살면서 5만 번 이상 크고 작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이 간구는 실제로 배고픈 현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박하게 느껴지는 기도가 되지만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없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니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밤 네 영혼을 내가 취하겠다. 그러면 네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창고에 식료품이 가득 쌓여 있을지라도, 당신이 은행에 수천 수억을 저축해 놓았을지라도, 여러분의 재산이 전국에 산재해 있을지라도 그것이 여러분의 일용할 양식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분배해 주셔야 여러분은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으로 철저히 신뢰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는 이상과 같은 모든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가능한 한 일상생활로부터 멀리 떼어 놓으려는 현대인들의 경향과는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룹니다.

(4) 이 기도는 양식을 얻기 위한 우리들의 노동을 신성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간접적 방법 곧 노동은 크나 큰 복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노동의 책임을 느끼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노동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공중에 새를 보라 백합화와 들풀을 보라 아무도 먹여주지 아니하고 아무도 입혀주지 아니해도 먹으며 입지 않는가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합니다. 그래서 노동의 책임과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새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들풀과 백합화도 땅에 뿌리를 박고 부지런히 영양분을 취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솔로몬(잠언 6:6)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하였습니다.

노동은 기도입니다. 가끔 이 말은 땀이 기도를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지만, 이 표현이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문구는 활동적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성별 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빵을 얻기 위한 우리의 온갖 노력이 기도처럼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고귀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 다음, 밖에 나가서는 기도 할 때에 감히 말하지 못한 떳떳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해 그 양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재물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 나의 속임수에 복을 주시옵소서!

– 나의 교활한 행위에 복을 주시옵소서,

– 야곱이 그 아비를 속여서 복을 가로챈 것 같이 복을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는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계비를 벌기 위해 행하는 일을 놓고 감히 기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5) 더 나아가서 이 기도는 우리가 받은 복에 대해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시편 136:26).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이 점에서 전혀 잘못이 없습니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망각하는 행위야말로 얼마나 이교도적입니까? 온갖 기쁨 가운데서 늘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가짐, 매일 매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자세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자동차를 처음 사서 운전할 때는 하나님 오늘도 무사히…하며, 간절히 기도하지만 몇 달이 지나면 운전대를 잡자 말자 기도 없이 차를 몹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먼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비를 얻는다면 날마다 찬양의 노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사랑이 우리를 깨웁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온종일 우리를 따라다니며 은혜를 베풉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식탁을 펼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훈 또는 기쁨을 주실 때마다 그 사랑이 매일 새롭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사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도 그의 주시는 선물처럼 끊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1. 이 간구는 나만의 양식이 아닌 우리 모두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형제들과의 연합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옵고”라는 말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웃에게도 주시기를 구하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인간 삶의 법칙으로 묘사합니다. 빵을 위한 투쟁은 동료들에 대한 형제애적 관심의 큰 적이라는 것입니다. 장사나 상업은 전쟁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소득은 다른 사람의 손실이라는 관념에서 출발하여 재산은 약탈물이라고 까지 선언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시옵고” 이 한 절의 기도문은 확실히 우리에게 보다 훌륭한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의 한구석에 맺혀 있은 염기 어린 물방울을 위해 서로 싸우는 완악한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족함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식탁에 둘러앉아 위대하신 아버지 앞에 함께 무릎 꿇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식탁 아래 누운 개까지도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양식을 위한 간구에서 남과 일체감을 가지고 공동전선을 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하는 일체성을 깨닫는 자는 자기의 소유물이 남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먹고 사는 양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삶에 필요한 양식을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자라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한 공동체의 일원인 자가 양손에 자기 몫을 가득히 움켜쥐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홀로 야금야금 먹는다는 것이 과연 바른 일이겠습니까? 그러한 행위는 좀 과한 말 같지만 늑대들의 잔치에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한발로 먹이를 밟고 눈을 이리 저리 굴리면서 도적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한 형제인 인간들이 할 짓이 못됩니다. 단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 간구는 각자가 자신을 위하는 원칙보다 더 나은 생활양식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칼라하리 사막지방의 사람들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러한 환대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규범이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사막에서는 누구든지 나누어야만 합니다. 사막에서는 어떤 사람도 자기를 위해서만 음식을 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공동의 재산으로 간주됩니다. 그들에게는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 양식은 저장해 두는 것도 아니고 절약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내 일의 필요는 공급을 신뢰함으로써 오늘 지금 먹고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삶의 태도는 분별이 없고 사려 깊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삶의 태도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핵심적인 기도에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단지 ‘나’와 ‘나의 것’만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것을 저장하기 보다는 함께 앉아 그것을 나누어 먹는 그러한 생활 규칙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세계는 어떤 사람은 풍요를 누리고 어떤 사람은 굶어 죽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이 사막의 사람들과 같이 자기의 가진 것, 심지어 송아지까지 남과 나눌 수 있다면 식품은 남아돌아 갈 것입니다. 누가 우리와 함께 먹어야 할 것을, 나누어야 할 것을 숨기고 있습니까? 유숩(Yussouf)는 나그네를 환대하여 ‘이 장막은 나의 것이야 그러나 그보다 하나님의 것이지, 들어와 평안하게 있으라. 그대여 자유로이 내 모든 저장품에 참여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좌우지간 전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소유물에 대한 점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각자는 자신의 소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재산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할만한 힘이 있으며, 법적으로 그러한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당신은 소유주가 아닙니다. 단지 청지기일 뿐입니다.

– 당신이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탁받아 보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 당신은 한 가족, 한 커다란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그 재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당신은 남에게 베풀기 위해서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 당신은 상호의 애정의 끈을 공고히 하고 위대한 수여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끈을 굳게 하기 위해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간구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는 공동체적 유대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 우리는 자선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공의를 원할 뿐입니다.

–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 그들의 외침이 주님의 귓전에 울리고 있습니다.

– 그들에게서 떠난 그것이 부정한 수단에 의해 감추어지고 있습니다.

– 성경은 언제나 자비와 베풂의 자세를 가난한 자와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모든 부유한 자들이여, 당신은 가난한 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 빚을 갚지 않고 떼먹을 작정입니까? 그들로부터 입은 은혜를 갚지 않으시렵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고운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하던 부자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음식을 삼았던 나사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대조적 현상은 무수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빈부와 격차가 기독교 문명, 상업의 원래 목적과 상치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저 적색 공산주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소유물을 하나님께 귀속시키는 진정한 공동체의 삶을 체득하여 실천에 옮기고 자신의 소유물이 공동체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는 깊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로버트 번즈는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있으나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먹을 것도 주시고 먹을 수 있게도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기도보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그들도 저에게와 같이 먹을 것을 주시고 또 먹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벌에게서 교훈을 받습니다. 벌은 6개월이라는 짧은 생명을 가지고도 열심히 일합니다. 벌통에 있는 잘 먹지 못하는 유충이 있으면 동료 벌이 꿀을 먹었다가 다시 토해서 이 유충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먹이가 한정되어 있고 먹이를 더 구해 오지 못하면, 지금 남아있는 먹이를 똑같이 나누어 먹다가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또한 벌통 안에 적이 침입하면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적에게 침을 쏘고 자신은 죽는 것입니다. 어느 면에서 벌은 인간보다 더 훌륭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진 것을 함께 나눕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한 한 가족입니다. 형은 잘 번다고 하여 호화호식하고 아우는 못 번다고 하여 먹을 것도 얻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 회개합시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이 간구는 오늘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오늘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론”은 ‘오늘, 이날’을 뜻하며, 또는 ‘지금 시대를 나타내는 오늘날’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오늘날”이라고 번역할지라도 “오늘날”보다 ‘오늘’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3의 주기도문에는 “날마다”(토 카드 헤메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불평, 원망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매일 매일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날에 필요한 양의 만나를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들이 내일 몫을 걷어 놓았더니 썩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매일 내리고 매일 거두어 먹은 것이 만나입니다. 만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매일 만나를 주셔야만, 그리고 사람들이 거두어야만 먹고 살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물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매일 아침마다 새로이 만나를 거두어들였듯이 현재의 긴급사태에 따라서 전달됩니다.

(1)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우리의 궁핍을 채우시는 이 방법의 아름다움과 복됨입니다.

– 그 방법은 매 순간마다 그 특별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 그것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선물이 그 안에서 가지는 영광을 보여줍니다.

– 그것은 매 순간마다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와 매순간마다 출현하는 하나님의 빛나는 임재의 표식이 모두 합쳐서 무수한 점들로 밝고도 선명한 긴 선을 만들어 줍니다.

–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활에 매우 가까이 접근함을 실감하게 하여 줍니다.

– 그것은 매 순간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느낄 필요와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고, 매번 우리의 궁핍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우리를 나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줍니다.

매 순간처럼 매일 그 새로운 의무와 새로운 요망 사항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어제의 음식은 오늘 우리를 부양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힘은 오늘 하나님과 그의 새로운 공급으로 말미암아 임해야 합니다. 따라서 삶의 단조로움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매일 신선한 활기와 새로운 소망이 우리에게로 찾아듭니다. 밤의 잠이라는 고마운 벽이 어제의 임무와 피곤을 감싼 채 어제와 오늘 사이에 서 있습니다. 신선한 소망이 하나님을 새로이 의지하는 마음과 더불어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고 우리는 일어나 미지의 시간들을 바라보며,”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2) 그 다음 우리가 배우는 것은 미리 앞질러 미래사를 걱정함으로써 이 지혜로운 하나님의 법을 파기하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사전에 미래사를 계획하고 고려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개미나 꿀벌보다 못한 피조물이라 할 것입니다.

– 자신의 인생에 어떤 확실성이 없는 사람,

– 변화무쌍한 현 상태와 조화될 수 있는 어떤 지속성에 대한 합리적 예견이 없는 사람은 지성적 혹은 도덕적 성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빠지기 쉬운 앞일을 걱정하며, 염려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것입니다. 이러한 걱정은 무익하고 해로운 것으로써 우리로부터 힘을 빼앗고 우리의 지혜나 우리의 안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걱정은 하나님의 공급법칙에 반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필요할 때 자신 정량만 받습니다. 이를 더 일찍 받지 않습니다.

– 우리가 그 지점에 올 때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그때까지는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빌딩의 자동문을 보십시오.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서면 자동적으로 열립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행로를 알고 계십니다.

– 그리고 매일 아침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물자 배급소를 돌보고 계시며, 우리가 물자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의 수고를 덜어 주십니다.

–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법칙입니다.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불확실한 어떤 재난을 미리 그려보거나 혼자 멋대로 상상하여 걱정을 만들어 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염려는 오늘에 국한시키고 내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맙시다.

– 우리의 하나님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내일도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 각 장소마다 무지개가 있듯이 매일 매일 밝은 빛이 있을 것입니다.

– 우리가 메마른 땅으로 인도받는다면(그렇다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거기서도 샘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주리기 전에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실 것입니다. 빵이 주어지고 물이 확실히 공급될 것입니다.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5).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만이 자기 몫을 거두어 먹고서 오늘 자기를 먹이셨던 분이 내일도 먹이실 것을 믿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밤 잠자리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일은 그대로 놓아두시오. 손으로 그것을 걷어 올려 앞일을 들여다 보려고 하지 마시오. 지상적 수단에 의해 미래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오.

– 오직 현재의 복을 밝은 소망의 모체로 삼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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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임을 명심하시오.

– 그리고 자비로운 한계가 있는 하나님의 공급법칙을 수용하시오.

– 당신의 욕망에도 그러한 한계를 두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형통하실 것입니다.

  1. 이 간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양식을 구해야 합니까?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우리가 앞에서 이 간구의 의미를 살펴본바 ‘오늘’이라는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간구는 우리의 욕망을 생활에 필요한 것에 국한시켜야 할 것을 지적하여 줍니다. 우리가 가지기를 바라야 할 것,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뿐입니다. 더도 안되고 덜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구는 우리 모든 사람을 하나의 평등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그에게 내어 맡기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왕의 입에서 나올 경우와, 거지의 입에서 나올 경우, 양자는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그러나 확실히 이 기도는 무절제한 욕망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후하게 주시며 삶이 아름답게 장식되기를 원하십니다.

빵 이외의 것은 대개가 삶을 우아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줍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호화로운 생활양식과 이 기도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치스러운 생활이 우아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시적인 소비 지출이 문화생활의 증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허영심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구하는 것, 즉 우리의 욕구가 실제적 요망 사항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이 기도를 올바르게 시행한다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나타나는 죄악적인 사치 행위는 종말을 고할 것이며 부를 축적하는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수단들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 검소한 생활과 드높은 사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 나의 부요는 소유물의 풍부에 있지 않고 나의 요구의 근소에 있습니다.

– 사람이 원하는 것이 적을수록 신에게 더 가까워집니다.

이러한 말들이 진리 외에 매우 필요로 하는 것을 한 기준을 삼는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이 되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의 범위를 실상 이상으로 매우 크게 잡기가 쉽습니다. 당신이 젊든 늙든, 필요하다면 가난한 편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오.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참으로 필요한 것에 국한시킬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굴은 잠언 30:8에서 “오직 필요한 양식을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6 이하에서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는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말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3:5에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고”(누가복음 12:15),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보다 승한” 것입니다(시편 37:16).

우리는 만나의 교훈에서 내일을 위해 더 많이 가지려고 남겨둔 부분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것을 압니다. 얼마나 자주 재물이 사라지며, 그것을 얻기보다 지키는데 더욱 힘이 들며, 때문에 그것은 소유자를 괴롭히고 그의 성품을 부패시키거나 자녀를 파멸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9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윤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간구를, 앞의 더욱 고상한 기도들 뒤에 놓으셨다는 것과 이 간구를 잠깐 언급하고 곧 바로 보다 고상한 영혼의 요구사항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합시다. 우리는 과연 제반 욕구 가운데서 물질적 욕망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매일 매일은 복된 나날이 될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선물로 풍성할것이며,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된 양식이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여 도와 주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장엄한 선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곧 기독교의 뿌리이며, 근원인 것입니다. 이것은 참 신비로운 사실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만물이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이 생기고, 하늘이 생기고, 그 하늘을 수놓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하나님의 한 마디로 생겨납니다. 말씀이 허공에 메아리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조성됩니다. 우리는 생각하지도 못할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가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그런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름대로의 원리와 질서를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물이 순환하고, 대기가 흘러 다니고, 큰 짐승부터 작은 곤충까지 나름대로 생명을 이어가는 기술과 능력을 소유하도록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녀석은 세포 하나가 그 생명의 전부이고, 어떤 것은 수 천 억의 세포가 생성과 사멸을 반복하며 생명을 이어갑니다. 어떤 것은 햇빛과 물만으로 천 년을 버티고, 어떤 것은 사흘이 멀다 하고 다른 녀석을 잡아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도록, 그리고 질서 있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조된 것은 또한 그 오랜 세월동안 창조의 질서를 따라 유지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는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수 천 억의 별들 중에서 은하계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태양계의 지구, 그리고 그 지구상의 76억의 인구 중에서 한반도 작은 땅의 서울, 혹은 부산이라는 한 지역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중에 이름 없이 살아가는 “나”…, 또한 미국 인구 3억 중에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나”, 그런 내가 때로는 10명 중에서 혹은 100명 중에서 성적이 앞서고, 기술이 뛰어나다고 잘난 척 하며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벌레보다 못한 인생인지…

우리는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 앞에 자신을 구원하거나, 보살펴 달라는 말조차 함부로 꺼내기 힘든 위축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나”를 온 우주보다 더 귀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한 번 효도한 적도 없고, 일평생을 살아도 별로 유익된 일 하나 하지도 못하는 나를 이유도 없이, 조건도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적은 뒤떨어져 서울대는 바라보지도 못했고, 하버드대는 꿈속에서나 보았고, 돈 버는 기술도 없어 매일 소비적인 인생을 살아왔으며, 육신의 부모조차 마음 편하게 순종하며 모시지 못하고 욱하는 성질에 속상하게 만드는 동물적인 우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이 오늘, 하늘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로 내려와서 마치 갓 태어난 자식에게 엄마와 아빠라는 말을 가르쳐 주시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기도의 시작과 내용을 가르쳐 주시는 지극한 사랑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마다 고백하는 주기도문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기도에 있어서 첫 번째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기본적인 지식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본문의 양식

“알톤”이라는 헬라어를 해석한 것인데 이는 유대인의 주식이었던 빵을 나타낼 뿐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일련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양식”은 단지 우리 말로 “쌀”을 구하는 것뿐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는 기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이라는 말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에서 “날마다”라는 말이 쓰인 것처럼 하루에 적당한, 최소한의 것을 구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우리가 결코 세상에 많은 것을 욕심내는 인생을 살아서는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가질 수 없으며 최소한의 것이 있을 때 만족한 것으로 여기고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잠언 30:8, 9절의 말씀에는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또한, 셋째로 주기도문은 통시(通時)적인 관점에서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려 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과거를 위한 기도이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현재를 위한 기도라면, 다만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는 우리의 미래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 안에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드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본문의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짧은 기도 속에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이해와 쉽게 자만하거나 망각하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본문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우리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부분입니다. 주기도문의 여러 내용 중 본문만이 유일하게 육신의 필요와 관계되는 물질적 공급을 요청하는 성도의 간구입니다.

  1. 우리는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내세의 복은 물론이거니와 현세에서도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양식’이란 물론 육체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지만 영적인 양식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4)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 육신의 양식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움직이고 기계는 동력이 있어야 작동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양식을 먹어야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모든 음식을 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햇볕과 비를 주시고 일정한 계절의 변화와 적당한 기온을 주심으로 곡식은 무르익으며, 각종 실과와 열매는 우리의 식탁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를 아시고 그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할 모든 내용을 미리 아시고 응답해 주실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8).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영혼의 양식

사람은 육체의 양식만으로는 살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양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7). 때문에 우리는 육의 양식을 필요로 하는 만큼 영혼의 양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양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마태복음 4:4). 인간의 영혼을 가장 살찌우게 하는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양식만을 섭취하는 영적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풍족하게 섭취하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써 풍성하고도 강건한 생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날그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태복음 7:34).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성도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주어지는 신비로운 날이 됩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살아 있음은 하나님께서 사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이 욕심으로 출발한 내일의 기대를 삼가라는 말씀입니다. 내일을 위해 기대하며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내일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근심과 걱정만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성도는 하루하루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하겠습니다.

  1.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양식의 공급을 위해서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성도들에게 이웃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들을 향한 사랑의 표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나 불쌍한 고아들을 향하여 특별한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어떠한 사람들을 위해 시도해야 하는가를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범이 되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기도는 성도의 식탁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요소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의 기도는 모든 만물이 주관자인 하나님과 그로부터 필요한 만큼 공급받아 사용하는 인간의 관계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소유한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도문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우리 개인들의 독자적인 노력에 의해서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생활부터 책임을 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무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밥상에 앉아서 반찬의 가지 수를 가지고 불평하는 사람은 그 밥상이 자기 앞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땀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밥 콕이라는 사람이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떡의 배후에는 방앗간이 있고, 방앗간의 배후에는 농부의 수고가 있고, 그 배후에는 미풍과 비와 해가 있고 그 배후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양식의 주권자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밥을 먹으면서 밥만 생각하지 말고 밥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오히려 밥보다 중요한 영적인 양식에 눈떠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게 될 때에, 우리의 모든 양식이 줄 수 없는 마음의 평강과 쉼을, 그리고 기쁨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이 “양식”을 세 가지 의미의 떡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육체를 위한 양식과 정신을 위한 양식과 영혼을 위한 양식이 그것입니다. 하루의 힘을 노동으로 소모하고 나면 우리는 육체의 건강함을 위하여 좋은 음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좋은 인간관계와 책과 음악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찾아드는 우울과 갈등, 왠지 모를 불안과 초조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영적인 가치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기도는 이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나”만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향한 세 가지 청원에서 모두 “우리”라는 말씀을 반복하셔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독단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함께 화목하며 서로 같이하는 “우리”의 삶인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하나님과 나와의 개별적인 것이라고 단언한 나머지 산속의 기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기도만 하면서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앙인에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우리”를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양식이 그득하다고 만족하며 웃을 것이 아니라, 우리 중에 누군가의 양식이 핍절하지 않았는지 살피는 겸손과 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8은 우리가 돈을 벌어야 하는 목적에 대하여 “너희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각기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차를 바꾸고, 더 넓은 집으로 옮기고, 해외여행을 가고, 쇼핑과 레포츠로 여가를 즐깁니다. 그리고도 남으면 자기 자손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곰팡이가 피도록 쌓아둡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긴장된 삶의 자세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먹을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을까요? 일생에 한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인데, 이왕이면 제자들과 그 이후에 믿어 이 기도문을 대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평생을 보장하는 기도를 해주시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감당할 우리의 그릇에 있습니다. 우리가 먹어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을 망각하고 점차적으로 옳은 길을 벗어나 타락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체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에 피를 타고 흘러온 죄의 유전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저의 주위에서 보아도, 돈을 벌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계와 가정을 망가뜨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하루하루 긴장된 노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복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허황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하루 땀 흘려 일해서 가족을 부양할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는 태도로 살아가면 그 하나님이 결코 굶주리거나 망하게 하시지 않고 일생을 보장하실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양식 때문에 다소 긴장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에 양약이 되어서 영적인 믿음과 겸손함을 배우게 하는 기회가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넷째, 이 기도 안에는 한없는 복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한정된 얼마의 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살아가기 때문에 1공기의 쌀이면 하루가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100사람을 책임지기 때문에 1가마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수만 사람을 책임져서 수천 가마의 쌀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기도에는 한계점이 없습니다. 자기만을 위할 때에는 궁색한 지경이지만, “우리”의 범주를 넓혀 가면 넓혀갈수록 이 기도 안에 있는 복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스위스에서 수천명의 고아들을 길러낸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기도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일생 동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5만 번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고아들이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고아원은 2차 대전 이후의 어려운 여건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그런 한계점에 도달할 때가 무척 많았습니다. 그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모든 원생들을 식당으로 모았습니다. 빈 접시를 식탁에 차려놓고, 포크와 수저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과 함께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이 기도가 끝났을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마을의 빵 장사가 빵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침부터 빵을 굽는데, 자꾸만 고아들에게 한번쯤은 빵을 가지고 가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견딜 수 없어 그 아침에 구운 빵을 모두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우유 배달부가 들어왔습니다. 우유를 가득 싣고 이웃 마을로 배달을 가다가 마침 고아원 앞에서 차가 고장이 났는데, 쉽게 차를 고치지는 못하겠고 시간을 더 허비하면 우유가 다 상해서 못 먹을 것 같아서 이왕이면 고아원에 기부나 하려고 들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아들은 감사의 기도대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도하는 풍성함은 결코 자기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고 풍성하기를 구한다면 얼마든지 풍성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풍성함이 세상적인 풍성함과 다른 것은 바로 보람이 있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사랑이 있고, “우리”를 향한 기도 속에서 풍성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경을 넓혀 가십시오. 손을 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을 의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그 많은 “우리”를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하십시오. 밀린 인건비와 가정을 꾸릴 생활비를 하나님께 청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이번 시간은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기도가 성도님의 생활 가운데서도 그대로 이루어져서 항상 주님께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은 성도의 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인 실생활의 교훈과 함께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에 대한 가르침이 있고, 자녀와 부모, 부모와 자녀에 대한 가르침이 있고, 고용인과 고용주, 고용주와 고용인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읽어보시고 이해하기 위하여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천국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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