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2) 제9계명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 가족의 명예 보호

 

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2)

9계명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 가족의 명예 보호

출애굽기 20 : 1- 17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으로서, 인간의 생활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정과 생명, 물질뿐만 아니라 가족의 명예까지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로-타아네 베레아카 에드 솨케르> <로>는 “금지”(prohilbitions) 또는 부정명령(negative commands)을 나타내는 부정의 부사입니다. <타아네>는 “대답하다, 증거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나>의 칼형(Kal:기본형) 2인칭 남성 단수 미 완료형으로서 부정의 부사 <:로>와 결합하여 “금지 명령”을 나타내 줍니다. <베레아카>에서 <베>는 “…의 안에”(in), “…함께”(with)라는 뜻을 지닌 비분리 전치사이며 <레아카>는 “먹이다, 인도하다”라는 뜻을 지닌 <라아>에서 파생한 명사 <레아>에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사 <카>가 결합하여 “너의 이웃”이라는 뜻입니다. <에드>는 “다시 말하다, 증거하다”라는 뜻인 <우드>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증거”(testimony), “입증”(proof)이라는 뜻입니다. <솨케르>는 “거짓말하다, 나쁘게 행하다”라는 뜻인 <솨카르>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거짓말, 허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에드>는 증거를 의미하기 보다는 법적인 용어로서 어떤 사건을 맨 처음 보거나 그가 들은 내용에 대해서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고 <솨케르>는 사실적인 근거나 기초가 없이 거짓으로 하는 행위나 말의 사용, 즉 의식적으로 하는 거짓말입니다. 따라서 전체의 문자적 번역은 “너의 이웃에 대하여 거짓으로 말하는 증거를 하지 말라”입니다. 이 법은 위증이나 무고를 금하는 법이며 위증자가 받을 벌에 대하여 성경에 제시해 줍니다(신명기 19:16-19).

이 계명은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며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평등하게 대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임을 나타내 줍니다. 거짓 증거에는 두 가지 것이 있으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이웃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고, 사회적인 교제에 있어서도 사람들을 쉽게 비방의 대상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재판에서 거짓 증언하는 것을 표현 형태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비방도 제외되는 것은 아니며,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여 이웃에게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가장 악한 종류의 – 사실상 살인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다 – 행동일 것입니다. 또한 거짓 증언은 이웃의 재산과 인격에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아마 제일 먼저 다른 사람의 편견적인 보도로 낭설이 퍼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금하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형사법이 되었습니다.

본문 제9계명의 단순히 법관 앞에서 행하는 거짓 증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결혼 관계, 또는 이웃의 소유를 취하기 위한 모든 종류의 거짓 증언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서(출애굽기 23:1, 민수기 35:30, 신명기 17:6, 19:15, 22:13), 이러한 위증에 대해 신약 성경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단어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비아볼로스”(biabolos)라는 단어로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게 하기 위해서 거짓 선전을 하는 행위, 즉 “중상모략”을 뜻하며, 둘째로는 “브라스페미아”(Blasphemia)로써 “사람의 앞에서는 그를 칭찬하고 돌아서서는 헐뜯는다”는 뜻으로 이러한 의미 모두를 거짓 증거로 설명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본문의 “위증 금지 명령”을 “거짓 증거”라는 의미를 초월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거짓말”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말에는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속이려는 거짓말은 물론 전해 들은 거짓말을 그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그대로 전하는 것과 약속을 어기는 것까지도 모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제9계명은 신학자 “캘빈”(Calvin)이 표현한 대로 “조금이라도 과장됨이 없이 진리만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모든 “거짓”을 배격하고 “진리”만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줄거리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아홉째 계명이 주어진 것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선량한 사람의 평판을 보호하는 것이요, 둘째는 거짓 증언을 하려고 애쓰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범죄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평판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통치를 받으며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물의 본래 성격을 알고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수치란 죄의 수치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이 실패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한 가난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거나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 되거나 가난해지면 두려워하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상을 품고서 행하는 사람들은 비록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단계에 있는 것이 늘 영광스러운 정점을 향해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분 일 수도 있으며, 가난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부요해지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일은 죄이며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악한 행실로 더럽혀지지 않은 평판입니다. 실제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올바르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그 자신의 인격에 달렸으며 크 인격은 세평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사람이라는 존재에 또한 그 자신에 관한 참된 사실들 위에 새겨지는 조각입니다. 평판이란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매기는 평가입니다. 평판은 늘 인격에 의해 좌우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 들은 사람들이 성공과 위대함에 대한 가치 기준의 혼란으로 여러 가지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죄에 대한 일반 대중의 천박한 평가와 세상 사람들의 올바름에 대한 잘못된 경멸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흠이 없다는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완전하신 자 곧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사실에 대반 최상의 본보기라고 겸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순전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주님의 일생을 보면 그는 바로 아홉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죄 곧 거짓 증거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타인에게 무고하게 비방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다”는 말씀을 늘 기억하고 위로를 받으라. 또한 주께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평판을 결코 소홀히 여김 받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결국에 가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변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은 아주 엄격한 요구, 바로 아홉째 계명에 의해서 백성들의 평판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은 늘 이 말씀을 기억하고 누구에게 의해서든지 그 사람의 평판을 빼앗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 아홉째 계명을 주신것에는 또한 다른 취지도 있습니다. 그 취지란 악한 사람의 거짓 증언을 믿고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인정해 줌으로써 발생하는 악으로부터 의인들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스스로 나서서 비양심적인 사람을 인품이 훌륭하다고 속여 어떤 지위에 오르게 하는 사람은 그 비양심적인 사람과 함께 못된 일을 도모하는 악한 자이며 그 비양심적인 사람에게 속은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생각을 말로 표현했을 때 그 말이 미치는 교묘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일일이 고찰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사실과 관련해서 자연스럽게 야고보 사도의 말이 떠오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야고보서 3:6). 거짓 증거로 말미암아 인간사회에 발생해 온 해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홉째 계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명령의 단순한 의도를 알아보고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이 계명을 범하는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이 명령을 오늘날의 여러 가지 문제에 적용시켜 볼 것입니다. 이제 아홉 번째 계명을 검토함으로 나 자신이 진정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아홉째 계명의 이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직접 간접으로 사람이 타인에 대해 말할 때 진실만을 말할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십계명 가운데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을 금함으로써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실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아홉째 계명은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서도 바로 셋째 계명과 동일한 원칙에 의해 진실하게 행동하고 그 노선을 따라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언제나 피조물 인간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에 의거하여 사람을 다루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태도나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은 사람들의 외모나 이웃 사람들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가 시편 139:1에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기술한 것만큼 바르고 설득력 있는 말은 없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나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와 같이 깊고 절대적인 지식에 의거해서 사람들을 다루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의도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은 당연히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제한된 지식이라도 그 지식이 미치는 범위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 지식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만큼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은 형제인 사람에 대해서 말하거나 대할 때 진실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 상호 간의 교제는 그 사람의 인격과 행위와 역량에 대한 실제적인 사실들에 의해 좌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 전체 구조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증언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 구조가 진실과 의로 확립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증언이 진실되어야 합니다. 허위 진술에 의해서 도움을 받거나 해를 입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허위 증거를 해서는 안되며 정당한 것과 그른 것을 판결하는 법정에서 증언을 할 때는 판결을 바꿀지도 모르는 사실들을 빼 먹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태도에서,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의 특징인 정직의 법에 가까와지려면 다른 사람에게 제삼자에 대해 하는 말이 순전하며 정확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충실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충실함이 증거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계명을 범하게 됩니까?

아홉째 계명을 가장 간단하게 먼저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진실을 가리는 법정에서 제시되는 증거입니다.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은 법정 본래의 직무를 바로 행하기 위한 중요한 방편입니다. 법정은 정의를 실행하기 위해 재판을 시행하는 곳입니다. 정의는 진실에 기초합니다. 따라서 거짓 증거는 어떤 것이든지 진실을 위반하는 것이며 잘못된 재판을 낳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위증이 심각한 범죄가 되는데, 위증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처벌되어야 할 죄들이 처벌되지 않을 수 있고 무고한 사람이 고통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논의를 그친다면 그것은 아홉째 계명의 보다 깊은 뜻을 거의 잃어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생 동안 한번도 법정에서 증언하지 않을 수가 있지만 그럴지라도 매일 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거짓 증거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경우들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첫번째로 이러한 것에 해당하는 아주 노골적이며 뻔뻔스러운 형태의 죄는 타인에 대한 무고한 비방입니다.

즉 악의를 가지고 꾸며내어 퍼뜨리는 거짓말입니다. 아마도 사람이 사람에게 끼치는 해 가운데서 이것만큼 야비한 형태의 죄는 없을 것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비방을 하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차라리 노상 강도는 신사에 속하고 암살자는 친절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상 강도는 가졌다가도 되돌려 줄 수 있는 물건을 빼앗습니다. 암살자는 재빠르게 혹은 갑작스럽게 공격하여 거의 고통을 주지 않고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꾸며내어 퍼뜨리는 비방자는 상대로 하여금 평판을 잃게 해서 도저히 그것을 되찾을 수 없게 만드는 무기를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대부분의 경우 비방자 자신은 들키지 않고 처벌되지도 않은 채 지내는 반면에 종종 죄 없는 사람은 그 무기로 인한 치명적인 공격 때문에 오래도록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둘째, 어떤 소문을 자세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소문을 퍼뜨리는 과정에서 거짓 증거가 생겨납니다.

정당성의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명예 훼손에 관한 법이, 비록 사실일지라도 누구에겐가 해를 입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퍼뜨려서는 안된다고까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어떤 얘기가 누군가의 명예나 평판에 영향을 미친다면 철저하게 조사도 해보지 않고 그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은 이 계명을 위반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세히 조사해 보지 않고 소문을 퍼뜨립니다. 그래서 항상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본래 속이려는 뜻이 없었으며 다만 그 소문이 틀림없다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그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말한 내용이 확인된 바 사실 그대로의 진술이지 않는 한, 해를 끼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이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악한 일입니다. 자기가 퍼뜨린 얘기 때문에 일어나는 엄청난 파괴적인 결과를 보고 좋아하면서 이런 무법한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웃을 아프게 하는 범죄자로 정죄되어야 합니다.

셋째, 암시나 시사 혹은 교묘한 질문에 의해서 상대방에게 타인에 대해 그릇된 인상을 심어줄 때 이것 역시 일종의 거짓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씨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식의 질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의 훌륭한 명성이 실추되는 일들이 있어 왔습니다. 대답하는 사람이 부정적인 말을 하면, 질문한 사람은 “자, 말은 적을수록 좋지요”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말을 시키지 않아도 이미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만듭니다. 따라서 풍자하는 그 사람의 말은 결과적으로 거짓 증거의 속이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한 셈입니다.

넷째, 거짓 증거는 부당한 침묵에 의해서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할 때 듣고 있던 옆의 사람이 그 진술이 비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개인적인 어떤 이유나 말하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말했다가는 말썽이 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잠자코 있으면 그 사람은 부당하게 비방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흡째 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섯째, 동기에 대한 비방도 많은 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행위나 구제를 의심하는데, 이것은 그 일들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는 데에는 표면적인 이유 말고 다른 어떤 이유 즉 이기적이고 치사스러운 동기가 이면에 있었다는 암시를 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선량한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그 사람의 선행은 오히려 파렴치한 행동으로 매도당하고 맙니다. “아, 그래 그 사람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 “그까짓 선물은 한 밑천 잡으려는 미끼에 불과해.” “그는 제 잇속은 반드시 챙기는 사람이야.” 따라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직접적인 인격 침해는 아니다 할지라도 간접적으로라도 그 사람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 많은 주의를 기울려야 합니다.

여섯째, 아첨도 거짓 증거의 한 형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기할 때 순전히 그를 기쁘게 하며 그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실이 아닌 얘기들을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거짓 증거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결코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자격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전히 그와의 친분만을 생각하고 그에 대하여 부당한 칭찬을 한다거나 그 사람에 대한 증명서를 써준다거나 혹은 그를 추천하는 일 역시 그를 추천받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 증거의 한 유형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런 식의 거짓 증거가 지닌 위험은 아주 교묘하며, 이런 방법에 의해 다른 사람에 대한 잘못된 인상은 매우 쉽게 그리고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십계명 중 이 아홉째 계명만큼 자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범 하게 되는 계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시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아홉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거짓 증거하는 이 죄는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오후 다과회나 도르카스회(Dorcas meetings: 빈민에게 줄 옷을 만드는 모임) 또는 여자들이 모이는 모든 단체에서 나누는 대화를 전부 기록해서 볼 수 있다면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남자들도 역시 이런 식의 잘못을 많이 저지르나 특히 여자들이 이런 일을 더 자주 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 일과 관계없는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하는 버릇은 이야기하는 사람 자신이나 화제에 오른 사람 모두에게 아주 유해한 일입니다. 이런 일은 대개가 전념할 수 있는 건전한 일이 없고 정신적인 교양이 부족한 이유 때문에 생기게 되는데, 말을 많이 한다고 할 때는 거의가 이런 일이 부수적으로 따릅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무해한 악습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오직 악습은 악습인데 결코 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귓속말이 공중에 퍼지네.

부드럽고 경쾌하며 나즈막하지만

수치와 고통의 가시가 돋힌 말이,

그 말이 공중에서 사라지기만 한다면

더 멀리 퍼지지는 않으련만.

불행하게도 재빠른 귀가

그 하찮은 소리를 들었고,

또 다른 입이 그것을 퍼뜨려

귀에서 입으로 입에서 귀로

그 소리가 두루 두루 돌아다니네

온순한 마음에 이르러

그 마음을 깨뜨리기까지.

또한 오늘날에는 결과적으로 언제나 해를 더 많이 끼치는 그릇된 자선 행위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무능력한 사람이 당장 겪고 있는 딱한 사정을 보고 동정해서 그를 추천하여 그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 앉혀 놓으면 결국 그가 실패할 것은 틀림없고, 그가 맡은 일조차도 망치게 됩니다. 이런 일은 경제, 문화, 정치, 종교 활동에서 다 일어납니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나 사회도 거짓 증거의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거짓 증거는, 부정적인 일을 야기시키는 동기를 다른 나라에 뒤집어씌우는 보도 기관을 소유한 어떤 단체나 자기 정적에게 욕지거리와 모욕적인 언동을 마구 퍼붓는 정치인들이 항상 범하는 악한 습성인 것 같습니다. 유럽에 만연해 있는 불안의 절반은 보도 기관을 통한 국가간의 거짓 증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많은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이 삼십 분간만이라도 비판의 눈초리를 버리고 편견 없이 ‘자유 기고가'(The Free Lance)라는 책에 수록된 마리에 꼬렐리(Marie Corelli)의 “예절과 신사”라는 글을 읽어 본다면 좋을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투옥과 고문에 의한 옛날의 박해 방법은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거짓 증거라는 방법에 의해 여전히 희생자는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도 내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호통 소리는 울려 퍼지고 있으며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여전히 그러할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진리를 위반하는 것은 모두 다 십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사실과 다른 인상을 심어 주는 것만큼 비열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동료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습니다. 이 계명을 깨뜨리는 자는 곧 도둑이요 비겁자요 거짓말장이입니다. 거짓말장이라 함은 거짓 증거가 진리와 반대되기 때문이고, 비겁자라 함은 일단 거짓 말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거짓말을 밀고 나가며, 한 번도 상대방에게 사실을 바르게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둑이라고 함은 세익스피어가 말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내 돈지갑을 훔치는 자는 쓰레기를 훔치는 자일세.

………….

그러나 내 명성을 훔치는 자는

자신을 부유하게 하지도 못하면서 다만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훔치는 자라네.

아홉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개선책이란 진리와 사랑의 구현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곳에서는 사랑이 모든 행동의 동기이며 사랑은 언제나 진리 안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십계명의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사하고 있는 언어가 진실에 입각하여 바르게 사용되어지면 한없는 유익을 우리에게 가져오지만 진실이 배제된다면 그로 말미암은 해악은 한 나라를 능히 멸하고도 남을 만큼 큰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나오지만 마음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위력을 나타내는 독자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말이 우리의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말에 실수가 없도록 입에 재갈을 먹여 주의해야 합니다(야고보서 3:1-12).

  1. 진실과 거짓말

1) 진실

진실이라는 말은 사실에의 일치 즉 모든 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모든 사물 자체의 본성이며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의 본질적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 이외에 그 어떠한 존재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진실이란 우리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숭고한 위엄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홉 번째 계명인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 역시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꼭 지켜야할 중요한 율법인 것입니다.

2) 거짓말

이것은 남을 속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진실이 아닌 것을 고의로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거짓말은 우리 주위에서 몇 가지의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 우리는 남을 웃기기 위하여, 또는 순간의 기쁨을 위하여 농담조차 사용되는 거짓말을 우리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악의란 없습니다. 그러나 악의가 없다고 거짓이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②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상관없이 이웃이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히브리 산파들이 애굽 왕에게 한 거짓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금해야 할 거짓 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는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것은 본문의 거짓 증거와 너무도 쉽게 결탁되어 질 소지가 다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우리 이웃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결과는 어디까지나 거짓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③ 세 번째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사악하고 유해함을 가져다주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말은 자신의 조그마한 유익 때문에 이웃의 생명까지도 해하는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요컨대 거짓말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진실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실해야 할 본성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사실 그것은그 자체로서 이미 거짓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거짓 증거

시편 1편 1절에서 우리는 죄악의 발전 단계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거짓이 증거에도 그 발전 단계가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 단계: 거짓을 말하는 단계

잠언 12장 22절 말씀에서 지혜자는 말하기를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우리는 거짓을 말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도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왜냐하면 진실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이기에 더욱 진실하게 행하여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거짓을 지어내고 말한다는 것은 그보다 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없다는 결론을 우리는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면 어찌하여야 되느냐를 질문에 대하여 “진실을 말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진실을 말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두 번째 단계: 거짓된 것을 증거하는 단계

거짓을 증거한다는 것은 거짓을 지어내는 것과 그것의 사용에 대하여 시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위 속에는 혼자가 아닌 이중 혹은 삼중의 공모자가 결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거짓 증거는 단순한 나 자신에게서 끝나는 죄가 아니라 함께 공모하고 결탁한 사람들 전체에게까지 파급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유혹하여 함께 범죄의 자리로 빠져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3) 세 번째 단계: 거짓을 맹세하는 단계

이것은 거짓 증거의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죄악의 결과입니다.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은 거짓 증거를 함으로써 맹세의 못을 박아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확정짓는 것입니다. 진실은 항상 진실 그대로를 말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진실이 왜곡되어지고 거짓된 증거가 맹세로 나타난다면 그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동조자들에게도 그보다 큰 불행은 없습니다. 진실이 진실로 나타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가 믿을 수 있는 관계,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거짓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입술에 진실을 지키는 삶, 거짓 증거 하지 않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지켜 갈 수 있습니까? 왜 진실을 말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단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거짓말한 적 있으세요?” “물론 있지” 아빠가 대답했습니다. “엄마는요?” “엄마도 거짓말한 적이 있을 거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요?” “아마 목사님도 거짓말한 적이 있을 거다.” 소년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하나님과 죠지 워싱톤 밖에는 없겠네요.” 거짓말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단하기가 점차 힘들어지는 세상입니다. 이 같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아홉 번째 계명, “네 이웃에게 거짓증거 하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과 일깨움을 안겨줍니다.

  1. 아홉 번째 계명,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라는 이 명령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주신 중요한 이유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서 사회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직한 관계, 정의로운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이 명령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러분,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재판과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재판은 죄를 수사하는 사람, 수사관이나 검찰이 없었습니다. 또 죄인을 대변해주는 변호인도 없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그들은 대개 성문 입구에 나아가서 동네의 장로들 앞에서 결정을 내려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장로들은 양쪽의 주장 외에 증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한사람만의 증인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을 듣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은 바로 이 같은 재판의 정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의가 발을 붙일 수 없는 세상,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위해서 진실 된 증언은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후대에 이르면서 힘이 있는 사람들이 거짓 증인을 동원함으로, 진실을 가리우고 억울한 죽음을 초래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부끄러운 치부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구약성경 열왕기상 21장에서 발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왕인 야합은 나봇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포도원을 갖고 싶어 했는데 도저히 길이 없었습니다. 돈을 주고 사려고 했지만, 나봇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돈을 주고 팔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때 간교한 왕비 이세벨은 이 사실을 알고 불량배 두 사람을 써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거하게 함으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예언자 엘리야는 크게 왕을 꾸짖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예고합니다.

불의한 거짓 증거는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또 생명을 빼앗지는 않는다 해도, 상대방에게 많은 피해와 아픔을 안겨줌으로 불의가 판을 치고, 힘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당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위험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과의 신뢰를 무너뜨림으로 믿을 수 없는 세상으로 타락시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실이 사라져 버릴 때, 남는 것은 불신과 불안뿐입니다. 서로가 믿지 못하는 세상, 서로를 믿지 못하니 불안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이처럼 타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진실의 기초 위에서 서로 믿고 사는 세상, 진실과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

  1. 아홉 번째 계명은 재판정에서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배경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이 명령을 좀 더 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거짓말하지 말아라. 입술에 진실을 지키는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거짓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성서학자 영국의 William Barclay는 9가지 거짓말을 그 동기에 따라 구분한 적이 있습니다. 악의를 갖고 하는 모함이나 중상모략(slander), 두려움에서 하는 거짓말(lie of fear), 악의는 없지만 부주의함에서 하는 거짓말(lie of carelessness), 자랑하느라고 하는 거짓말(lie of boasting),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lie for profit), 침묵의 거짓말(lie of silence) –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 반쯤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lie of a half-truth), 자신에 대한 거짓말(lie to self)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lie to God). 또 Mark Twain 같은 사람은 거짓말이 800가지가 넘는다고 했다는데, 어떻게 나누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거짓말을 대체적으로 4가지로 구분합니다.

(1) 첫째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입니다.

상대방을 해하려고 없는 말을 만들어서 한다든지 혹은 그 말의 내용을 살짝 바꾸어서 말함으로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또는 “누가 이렇게 말하더라”는 식으로 자신은 빠지는 것처럼 하면서 험담을 하는 경우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2) 둘째는 유머의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거짓말인줄 알지만, 서로 웃고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경우입니다. 제9계명을 범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셋째는 의례적인 거짓말입니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본의와는 다른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Dear 아무개라고 할 때 정말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의상 그 말을 씁니다. 또 우리 한국 사람들, 손님을 대접할 때, 음식을 많이 준비하고도 차린 것이 별로 없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데, 이런 말은 의례적인 거짓말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넷째는 불가피한 거짓말입니다.

명을 살리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유태인들을 숨겨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독일군이 가택을 수색할 때, 유대인을 숨긴 사람들은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같은 경우의 거짓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같은 경우에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만, 이것은 너무 좁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숨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도 보면, 이 같은 거짓말을 긍정적으로 이해한 구절들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거짓말을 한 경우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머무를 때, 바로 왕이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에게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있는데, 산파들은 남자 아이들을 살렸습니다. 후에 바로 왕이 추궁하자,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강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 같은 경우를 성경에서는 믿음의 행위로 인정하고 칭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네 가지 종류의 거짓말 가운데 제9계명,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위반하는 것은 어떤 거짓말이겠습니까? 가장 심각한 것, 그것은 첫 번째 거짓말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남을 해하려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중상 모략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럴 것 같다”는 추측은 “그렇다”는 진실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습니다. 추측을 사실처럼 유포함으로 상처와 아픔을 주는 것 분명히 아홉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폭력으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언어폭력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실 언어폭력은 훨씬 더 깊은 상처와 아픔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이 죄를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잠언 6:16 이하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미워하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여기 일곱 가지 죄악 가운데 언어폭력과 관계된 것이 몇 가지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거짓된 혀, 망령된 증인, 그리고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특별히 구약에서는 거짓 증거의 죄를 엄격히 다루었습니다. 만일 거짓 증거가 드러날 때는 고소했고 그 죄목을 거짓 증인이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증인의 이야기에 근거해서 사람을 돌로 쳐 죽일 때는, 그 증인이 제일 먼저 돌을 들어 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거짓된 증인의 책임을 엄격히 물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거짓된 말의 책임을 물으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36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해서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엄숙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웃을 해하는 험담과 중상모략, 분명히 제 9계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이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인생들이 진실에 기초한 신뢰의 관계 속에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이 계명을 주셨습니다.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

  1. 이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진실 된 입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진실 된 입술의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거짓된 입술은 하나님 앞에서 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중상모략하는 것을 자신의 성격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거짓된 입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훗날 그 거짓된 입술, 아홉 번째 계명을 위반한 삶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 없는 내가 복음을 믿고 자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짓된 입술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2) 둘째로 거짓된 증인 앞에서 침묵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침묵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 증언으로 피해를 받는 사람을 외면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짓 증언하는 사람을 깨우칠 기회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침묵이 언제나 금은 아닙니다. 거짓된 입술이 기승을 부리면, 진실 된 입술은 침묵을 깨고 일어서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서, 특별히 거짓 증거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지적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선인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니라.” 그런데 이때 주의하실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진실 된 말이라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 된 말도 사랑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진실된 말이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공격으로 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제일입니다.

(3) 셋째로 진실 된 입술의 삶을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난번 도적질하지 말라 를 말씀드릴 때도 강조했었습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거짓과 손을 잡습니다. 지금 하는 이 말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입니까? 해도 좋은 말입니까? 한번만이라도 물을 수 있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진실하고, 조금 더 다스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숨을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4) 마지막으로 진실 된 입술의 삶을 위해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된 입술은 바로 진실된 마음에서만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2:34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귀한 말씀입니다. 진실된 입술을 원하십니까? 진실된 입술은 진실된 마음에서 옵니다. 입술의 관리는 마음의 관리에서 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스려지면, 우리의 입술도 그 사랑으로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성서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게 되면, 우리의 입술도 진실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웃을 해하고 상처 주는 거짓의 말이 아니라, 이웃을 세우고 격려해 주는 진실의 말,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음, 마음이 바로 서야 합니다. 마음을 바로 세울 때 입술도 바로 세우게 됩니다.이야기를 나누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마무리

Pierre Van Paassen이 쓴 우리의 날(The Day of Our Years)에 나오는 것으로 널리 인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Ugolin과 Solange이란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술주정뱅이였고 아버지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오빠가 병으로 고생하자 약값을 마련할 길 없는 누이동생은 결국 몸을 팔아서 오빠의 약값을 대었습니다. 이 사실은 알은 동네 사람들은 수군대며 험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해서 오빠는 물에 빠져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빠의 자살 소식을 들은 여동생은 결국은 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남매의 장례식이 있는 날 조그만 교회는 동네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목사님은 장례예배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생과 사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심판의 날 제게 양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제게 양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역 시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세 번째로 양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주님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늑대들이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양입니까? 늑대입니까? 오늘 우리는 양으로 살아갑니까? 늑대로 살아갑니까? 주님께서는 양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기에 아홉 번째 계명을 주셨습니다.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

거짓 증거를 행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당파심에 의한 편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남을 중상 모략함으로 자기가 추구하는 편의 이익을 도모하고 상대편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무조건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편협심을 자기가 믿는 종파만을 제일로 여기고 다른 교단이나 종파는 무조건 무시하고 헐뜯는 중상모략의 죄를 자신도 모르게 짓고 맙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으려 하는데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노아는 포도나무와 포도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포도라는 과일은 아주 달고,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어 사람의 마음을 아주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오.” 사탄은 그렇게 좋은 것에 자기도 거들겠다고 말한 후 양, 사자, 돼지, 원숭이를 끌고 와서 죽여 그 피를 포도나무의 거름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더니 처음에는 양처럼 약해지고, 좀 더 마시자 사자처럼 대담해지고, 좀 더 마시니 돼지처럼 더러워지고, 좀 더 마시자 원숭이처럼 떠들고 다녔다.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이러한 제9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먼저 우리는 거짓 증거, 거짓말, 거짓이 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교인들마저 슬쩍슬쩍 거짓말하는 일을 일상생활에 필요악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치 못할 사소한 일들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 거짓말이 분명 죄(罪)임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 (출애굽기 20:16)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에베소서 4:25) 우리는 이 거짓의 원조, 시조가 사탄(마귀)인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사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은 이 거짓의 앞잡이인 사탄의 계략에 넘어간 것입니다. 물론 타락의 인간적인 책임은 아담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44에서 이렇게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질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노니 이는 그(마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그러므로 거짓 증거, 거짓말하는 일은 곧 마귀를 추종하는 일이요, 마귀를 기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등 삶을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자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을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 도를 닦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져야 되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이 그런 자리에서부터 나오도록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깊은 삶을 나누는 것은 그들의 영향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조심해서 그런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늘 불평과 짜증으로만 섞여 사는 사람들, 아무런 창조적 대안 없이 파괴적인 비판만을 일삼는 사람들, 한가한 잡담과 가십(gossip)으로 일관하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사상을 논하고, 평범한 사람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졸렬한 사람은 고집만을 지껄인다” 누가 한 말인 줄 아십니까? 지금 제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잠언 20:19에서는 이런 경고문이 들어 있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여하튼 우리는 믿음의 사람, 신실한 사람을 우리의 친구 동료로서 가까이 두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25에서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불신 세계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해야 되겠으나 특별히 서로 지체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각별히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이 제9계명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명령같지만 사실은 적극적인 명령을 지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거짓 증거하지 않는 일을 거쳐, 이제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 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이웃의 이름,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을뿐더러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명령입니다.

거짓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참된 것을 말하십시오. 거짓을 은폐하기 위하여 참된 것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악입니다. 침묵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마땅히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진실을 말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일이 거짓을 버릴 뿐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대로 살아가십시오.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참되게 살아가십시오. 이와 같은 일을 위하여 영적으로 경건 생활에 힘쓰십시오. 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여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또 항상 기도에 힘쓰며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거짓을 버리고 진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적용을 위한 질문 *

  1. 오늘 이 시대의 심각한 거짓말의 현실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봅시다. 어떤 거짓말들이 우리의 주변에 있습니까? 어떤 거짓말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1. 거짓말을 하고 돌이켰던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1. 오늘 나는 진실 된 입술의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진실된 언어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이 강해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들을 정리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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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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