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3) 제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 탐욕이라는 욕심을 버려라

 

 

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3)

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 탐욕이라는 욕심을 버려라

출애굽기 20 : 1- 17

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들어가는 말

본문의 말씀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으로서 지금까지의 아홉 가지 계명이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었던 반면에 본문의 말씀은 제10계명은 행동이 아닌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로 타흐모드 뻬트 레에카> <;로>는 부정의 부사로서 ‘금지 명령’을 나타내며 <타흐모드>는 ‘바라다, 욕구하다(desire), 몹시 탐내다’라는 뜻인 <하마드>의 칼형(Kal:기본형) 남성단수 2인칭 미 완료형으로서 부정의 부사와 함께 쓰여서 ‘금지 명령’의 뜻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 18절에서는 <;타흐모드> 대신에 <아와>에서 유래한 <티트아웨>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자신, 영혼, 욕망’이라는 뜻을 가진 <네페쉬>와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타흐모드>와 <아와>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뻬트>는 ‘집'(house), ‘천막'(tent)이라는 뜻이고, <레에카>는 ‘친하게 지내다, 인도하다, 먹이를 주다’라는 뜻인 <[레아>에서 파생한 명사에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사 <카>가 결합하여 ‘너의 이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너의 이웃 사람의 집을 탐내지 말라’입니다. 다른 계명들은 근본적으로 행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나 이 계명은 악한 사고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죄는 보통 잘못된 욕망에서 생겨납니다(야고보서 1:13-15). 동시에 이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한 만족을 결합시키며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공정하심을 나타냅니다.

도둑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웃의 아내, 그의 남종, 여종, 소, 나귀, 기타 소유 등입니다. 신명기의 십계에서는 ‘아내’를 ‘집’보다 앞세우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신명기 5:21).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은 다른 어떤 고대의 법전보다도 훨씬 앞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개의 법전들은 행위에 대한 규제로 그치고 몇몇은 말에 대한 규제까지 발전하고 있으나 생각을 규제하려고 시도하는 법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 말은 인간들에게 마음을 관찰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 외적인 행위보다는 내적인 생각이나 또는 행위가 유래된 그 동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겠는가? 본문은 우리 인간들이 단순히 우리의 욕심이나 욕망의 노예가 아니요 우리 안에는 우리를 조종하는 능력이 뿌리박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욕망을 억누르고 욕심을 억제하며 충동을 참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주인이며 그의 자의대로 행할 수 있으며 감정을 도야하고 정열을 강하게도 약하게도 하며 그의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인간의 내적인 진실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사건의 동기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탐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각각 <하마드>와 <에피두메오>인데 그 뜻은 ‘바라다’, ‘마음을 두다’입니다. 이 말은 ‘물질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를 뜻하는 말로서 ‘세상적인 욕망이나 남의 소유에 대한 부당한 탐욕’을 뜻합니다(갈 5:16, 17). ‘탐심의 금지’란 첫째, 물질로 향하는 탐심에 경고를 주는 말씀입니다(디모데전서 6:10). 둘째, 신분에 대한 탐심을 금하는 말입니다. 셋째는 사람에 대한 탐심, 즉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에 대한 탐심을 금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탐심을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여인에 대한 음욕이 간음이라 정의하셨듯이 사람에 대한 탐심은 다윗과 밧세바의 경우와 같이 남녀의 불륜, 그리고 이혼,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낳게 됩니다. 네 번째로 본문의 명령은 우상 숭배의 죄악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망만을 제일로 여기고 숭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경배드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 사도 역시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골로새서 3:5). 결국 탐욕을 금지하는 열 번째 계명은 나머지 아홉 계명의 근거가 되는 동시에 모든 계명을 마무리 짓는 계명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하늘의 뜬구름을 잡을 수 없습니다. 여기 본문 말씀에 나타나 있는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에서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률은 사람들에게 법률에 저촉되는 죄를 가르쳐 주고 이 죄를 범했을 때는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밖에는 가르쳐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법률로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며 그 행동의 결과만을 통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법률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탐욕을 통제한다는 것은 바로 하늘의 뜬구름을 잡겠다는 생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십계명의 말씀들 중에서도 열 번째 계명인 본문의 말씀은 외적인 행위만을 제한하고 진실로 깊은 심중에 있는 것을 깊이 통회하지 못하는 법률의 차원을 넘어선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외적인 행동을 제한하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 양육 받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기에 성도의 나라는 한없이 정결하고 고결한 나라인 것입니다.

줄거리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 중 마지막에 있는 이 열 번째 계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계명이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의 마지막 요구이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장 명백하게 언급하는 말씀이란 특징을 지닙니다. 앞의 계명들은 모두가 다 공공연히 보여질 수 있는 행위들을 금하였습니다. 즉 그 계명들은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조만간에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계명은 마음으로 짓는 숨겨진 죄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은 아직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모르게 범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는 조만간에 어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 이 계명의 중성이 있으며 이와 같이 아직 행해지지 않은 위험에 대해 경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엄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영국법에서 구체적인 반역 행위는 실행되지 않은 반역 모의와는 구별됩니다. 그러나 반역 모의가 없다면 반역 행위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독특한 특성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넘어서 마음속으로 은밀하게 행하는 일들까지 포함하여 인간 생활의 기이하고 은밀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세운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열째 계명은 사람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그 관계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바른 관계 안에서 정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처음에는 명령 자체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신약의 교훈에 비추어 그 명령을 살펴보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오늘날의 여러 가지 조건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열째 계명의 이해

열 번째 계명 자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계명 가운데서 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본래 “탐내다”라는 말에는 어떤 대상에 대해 기뻐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대해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탐내다”라는 말은 욕망을 자극하는 기쁨보다는 소유하는 욕망 자체를 나타내는 데 더 많이 쓰였습니다. 신명기에 그 계명을 다시 쓸 때는 출애굽기 20:17에서 두 번 사용된 “탐내다”란 말이 두 가지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신명기 5:21). 영어 개역 성경에서 “탐내다”(covet)라고 번역된 첫 번째 단어는 이미 출애굽기에서 언급된 것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 다음에 영어 개역 성경에서 “바라다”(desire) 라고 번역된 두 번째 단어는 단순히 원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7에서 이 계명을 인용하면서 헬라말을 쓰는데, 그 말은 신약에서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나며 그 중에서도 “갈망하다”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이 단어는 종종 “바라다”라고 번역되며 때로는 “탐내다”로 어떤 때는 “육욕”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근본적인 뜻은 “탐내다”이며 문자적인 의미는 “갈망하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나타내는 죄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려는 욕망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 자체가 암시하고 있는 의미를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은 항상 아주 감탄할 만한 대상을 향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갖고 싶게 만드는 것에 쏠립니다. 그런 대상물을 가지고 싶어하는 그것이 바로 탐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 가운데에는 미지수의 상황이 있습니다. 즉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로 말미암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빈곤 즉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합법적인 수단에 의하여 얻을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에서 발생합니다.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이 곧 탐내는 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친구집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감탄하며 그것이 갖고 싶어서 그와 같은 것을 구입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그 욕망은 탐내는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욕망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감탄하는 자가 어떠한 이유로든지 그 대상물을 얻을 수 없는 경우 감탄하던 마음이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바뀔 때 이 열 번째 계명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는 이 열째 계명은 앞의 다른 어떤 계명들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도덕심을 요구합니다. 즉 이 계명은 하나님의 권리를 인간의 욕망보다 위에 둡니다.

이 계명의 전체 뜻은 이 계명에서 뽑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통해서 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네 이웃의…그의…그의…그의…그의…네 이웃의…” 이와 같은 반복이 일곱 번이나 계속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무릇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바라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만 어떠한 이유로든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째 계명 자체를 조사해 본 결과는 사람으로서는 감탄에 뒤따라 일어나는 강력 한 욕망을 저지할 수 없다고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이 사실은 타락한 인간성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이 죄에 대한 율법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논증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가르치려고 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생활의 모든 면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얻을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바로 이 욕망을 보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욕망의 죄는 이 열 번째 계명에 의해서 비추어질 때에만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탐조등과 같은 이 하나님의 명령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아무도 조사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속을 홀로 다루실 수 있는 분에게로 이끌어 그들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몽학 선생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계명의 가치와 중요성은 그것의 광범위한 적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이 계명은 개인 생활에 적용됩니다.

탐심은 매우 고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저해하고 마침내는 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여러 가지 고상한 생활들이 나타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나 탐심은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내는 꽃을 꺾으며 모든 꽃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킬 것입니다. 탐심이 있으면, 사랑 대신에 의심과 미움이 있을 것이고, 희락 대신에 슬픔과 번민이, 화평 대신에 심한 불안이, 오래 참음 대신에 성급함이, 자비 대신에 잔인함이, 양선 대신에 인색함이, 충성 대신에 불성실함이, 온유 대신에 오만함이, 그리고 절제 대신에 자만심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쓴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란 말은 그가 어쩌다가 정반대 되는 말을 한데 묶어서 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 중 열 번째 말씀이 지닌 엄위는 하나님의 인자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엄위가 불처럼 엄중할지라도 그것은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불의 역할을 넘어서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나도록”이라는 말과 같이 낙원의 푸르름과 결실을 가져오기 위만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계명은 모든 사회생활에 적용됩니다.

이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십계명의 두번째 돌판에 기록된 모든 법을 깨뜨리는 시발점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를 봉양하는데 사용해야 할 재물을 보고 “고르반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탐욕 때문입니다. 범죄 기록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살인할 마음을 품게 된 것은 부정한 욕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간음을 행하기에 앞서 언제나 육욕이 가득한 얼굴 표정이 먼저 나타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모든 종류의 도둑질은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얻을 수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거짓 증거를 하게 되는 악한 마음은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탐욕스러운 야망에 의해 자극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영역에서의 인간 상호 관계는 이 열째 계명을 어김으로써 혼란해지고 파손됩니다.

세 번째로, 이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 조건이 되는 명령입니다.

탐욕의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사이가 틀어져 있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결국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네 계명들을 범하는 결과가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인 다른 신들을 만들어 온 것은 비뚤어진 인간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게다가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양심을 위로할 목적으로 결국 하나님을 대신하는 어떤 형상을 만듭니다. 모든 종류의 불경과 신성 모독은 이렇게 해서 세운 거짓 신들에게서도 전혀 만족을 얻지 못하는 목마름에서 생겨납니다. 피처럼 모든 신성 모독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정욕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땅히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안식일을 어기게 되는 것은 인간적인 부정한 욕망에서 생겨난 들떠 있는 마음 상태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검토해 볼 때 도덕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결론 짓는 열 번째 계명의 말씀이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며 대단히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는 첫 번째 계명과 마지막 계명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계명은 두 계명 안에서 결정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정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모시고 있다면 그는 그의 하나님이 두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탐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탐낸다면 그것은 탐욕 그 자체에서 나온 갈망 때문이라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갈망 즉 참되신 한 분 하나님께 대한 갈망의 결여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교훈

이제는 신약으로 눈을 돌려 보시시오. 신약만큼 이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의 중요 원칙들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반복하며 강조한 곳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명백하여 오해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주님께 자기 형에게 유산을 자기와 함께 나누도록 명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워달라고 부탁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말씀하신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이 사실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강조하셨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였으나 결국 이 세상에서 참 안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여전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함으로써 영적인 생명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재물”로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계승한 초대 교회에서도 동일한 교훈들이 선포되었습니다. 바울도 역시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로 간주하며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와 같이 취급하여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에베소서 5:4, 5).

야고보는 부자들은 재물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만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오로지 돈 벌려는 욕심만을 따라 행동해 온 사람들을 풍자하는 가운데 이 죄의 가증함과 더불어 결국은 이 죄가 어떻게 사회의 이상을 깨뜨리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야고보서 5:1-6).

베드로 사도는 그의 불 같은 다음의 말씀 속에서 간음의 원인 역시 탐심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베드로후서 2:14).

요한은 포괄적인 뜻을 지닌 문장에서 탐욕으로 얼룩진 죄악된 생활의 일시적인 성격과 이유를 밝히면서 그것을 거룩한 생활의 영속성과 그 이유에 직접 대조시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7).

히브리서 기자는 서신의 결론 부분에 가서 자기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탐욕의 죄에 대해 경고한다. 즉 그는 탐욕과 만족을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교제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탐욕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족만이 합당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브리서 13:5, 6).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는 말씀에 이 원칙에 대한 뚜렷하고 설득력 있는 진술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경고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이어서 제자들에게 먹거나 마시거나 혹은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오히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했습니다. 이 말씀 자체는 사람들이 섬기는 두 영역 즉 하나님과 재물을 대비시키는 것으로써 암시하는 바가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에서 봉사를 하게 하는 힘과 동기는 안식과 만족에서 나오며 재물의 영역에서든 욕망과 탐욕이라는 것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과 동기를 부여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라는 조용한 힘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을 갖고자 하는 욕망의 끊임없는 에너지에 의해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탐욕의 무서운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눈이 음흉한 빛으로 번뜩이며, 뺨이 붉게 상기되고 몸이 부자연스럽게 떨리고 또한 신경이 끊임없는 욕망으로 고동치는 것은 바로 이 탐욕이라는 열병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사망을 삯으로 받는 악한 행위입니다. 사람이, 크든 작든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이건 도중에 그치지 않는 한 결국 그를 파멸시키고 말 열병에 그만큼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 적용

일찍이 오늘날만큼 인간의 탐욕을 규제하는 이 중대한 원칙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세상을 특히 소위 문명화되었다고 하는 나라들을 어둡게 만드는 모든 악의 근원이 바로 탐욕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이야기일까요? 약소국들에 대한 압박, 한 국가의 명예를 높여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의에 대한 무관심, 국민의 미덕을 약화시키는 거대한 악들에 대한 묵인, 이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해 보면, 이미 소유했을지라도 또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의 들뜬 마음과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중요한 말들이 만족할 줄 모르는 신 곧 탐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재물(Mammon)에 대해 묘사한 와츠(Watts)의 유명한 그림(그것은 무서운 고발장이다)에서 와츠는 그 괴물을 더러운 욕심을 한껏 뽐내면서 즐기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그림의 의미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만일 내가 그림을 그린다면 괴물의 모습을 그렇게 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나는, 엎드려서 한 팔은 많은 국가들을 끌어안고 있으며 다른 한 팔은 앞으로 내뻗고 있는데 더 이상 움켜쥘 것이 없어서 화를 내고있는 깡마르고 눈이 사악한 모습과, 굶주리고 사나운 모습을 한 형상을 그릴 것입니다.

이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탐욕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도 불만족이라는 똑같은 탐욕의 벌레가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자본가의 탐욕, 대기업의 야만적 행위, 사람들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온갖 잔인한 행위 이 모든 것이 소유하려는 정욕에서 생겨납니다. 젊은 남녀를 유린하고 있는 개인적인 모든 악행들 즉 음주, 섹스, 도박 등도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의 갈망 즉 탐욕으로부터 생겨나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엘리바스의 맨 마지막 말, 그것을 욥에게 적용한 것은 비록 잘못이지만 원칙 자체로는 틀린 것이 없는 그의 말이 보다 널리 퍼져서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데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만일 네가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욥기 22:21-28)

확실히, 십계명의 이 마지막 말씀은 정직하게 이 말씀을 대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전적으로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앞의 모든 계명을 자신의 행위와 대조해 보고서도 자신들이 크게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어느 정도의 자존심을 지닌 채 남아 있는 이들이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엄중하며 강력한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 감히 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삼십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 난 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옛 생활을 평가할 때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탐내지 말라”는 이 마지막 말씀을 대하고서는 죄가 그 안에서 “각양 탐심을” 이룬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그는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그에게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외형적인 생활을 규제하는 앞의 아흡 가지 계명에 비추어 볼 때에라도 “흠이 없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에 기록된 것에 대하여 자기는 금지된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기에 너무나 무능력한 자기 자신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에서 생명의 법은 발견할 수 있으나 생명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끝났습니다. 사람들이 살면서 인간의 눈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향해 은밀하고 조용하게 “탐내지 말라”는 양심을 구속하는 말씀을 하실 때 또한 예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는 해석을 덧붙이실 때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리를 땅에 파묻고 “우리가 범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계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도덕의 빛을 비춰 주어 스스로 지은 죄를 고백하게 만들고 따라서 구원자를 기다리게 만듭니다. 즉 구원의 십자가 없는 십계명은 죽음을 선고할 뿐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1. 탐욕이란 무엇입니까?

탐욕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소유하고 싶은 강한 충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러한 소유의 강한 욕구는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것이 의로운 욕구이냐, 아니면 죄악의 탐욕이냐로 분류되어집니다. 즉 욕구의 대상에 따라서 우리에게 유익할 수도 있고 또한 반대로 해로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본 계명의 말씀에서 규정하고 있는 탐욕의 대상은 특정한 일부 대상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1) 물질적인 관계의 대상

이러한 대상 중에서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물질적인 관계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앞서 제5계명이나 제8계명에서 언급하신 본질적인 문제를 실제적으로 구체화시킨 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살인의 동기나 도적질의 동기가 물질적 욕구의 충동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를 생각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집이나 소나 나귀나 무릇 이웃이 소유에 대하여 부질없는 탐욕은 곧 죄라는 사실에서 밝혀 주고 계신 것은 오직 스스로의 노력만이 참된 노동의 보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율법의 오묘하심인 것입니다.

2) 인간관계의 대상

‘이웃이 아내와 그 남종이나 여종’을 탐낸다는 것은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충분히 있을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여자나 종의 위치는 주위 환경 조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주인의 재산의 일부로 간주되어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한 사람의 아내가 된 여인이라 할지라도 여자는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서 정복자의 임의대로 처리되어졌습니다.

  1. 마지막 계명의 교훈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파도를 보면서 바닷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 조각의 널빤지에 의지하여 바다를 표류하여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바닷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감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 앞에서나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지키고 있는가를 또한 생각하여 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속에서 나는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넘치는 은혜의 소중함을 별로 느끼지 못하듯이 타락한 곳에서의 삶은 타락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타락인가를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10계명은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10계명은 이렇게 우리에게 도덕의 바른 마음가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계명은 우리의 의로움에 대한 본질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도덕적 타락의 기준을 밝혔다는 것은 곧 다시 말해서 의의 기준을 밝혀서 강화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우리가 평생에 심사숙고해야 할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의 계명들이 행위에 준한 계명이라면 본 계명은 행위 이전의 마음속에서부터 관리되어져야 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마지막 계명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이끄는 가장 귀한 계명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장 걸맞은 계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십계명 중에서 이 열 번째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서는 결코 다 지켰다고 할 수 없으며 이 계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장의 마음이 없는 한 지켜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계명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지켜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버스 대합실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커피와 과자를 사 들고 빈 테이블에 가서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누군가가 와서 부스럭대기 시작했습니다. 신문 넘어보니 말쑥하게 차린 젊은 신사가 자기의 과자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싸우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않고 손을 뻗어 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습니다. 잠시 뒤 또 부스럭 소리를 내며 그 남자는 과자를 집어 먹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과자를 다 먹고 마지막 남은 과자 하나를 집더니 반으로 쪼개어 그의 친구와 나누어 먹고는 그대로 가 버렸습니다. 그녀는 차에 오르기 전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차표를 꺼내기 위해 핸드백을 열어 보니 그 속에 자기의 과자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녀는 아찔했습니다. 누구나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무엇이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까? 탐욕은 불만족과 갈등을 낳습니다. 탐욕은 다스려져야 합니다. 어떻게 탐욕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오늘은 감사한 날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서 주님께 감사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새롭게 깨닫고 고백하면서 사람 노릇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라는 명령이 맨 마지막, 열 번째 계명으로 주어진 것은 참으로 적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탐내지 않는 것, 탐심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첫 번째 계명에서부터 아홉 번째 계명에 이르는 모든 명령들을 지킬 수 있는 근거요,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가 어디서 옵니까? 탐심에서입니다. 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못합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왜 부모를 공경하지 못합니까? 탐심 때문입니다. 탐심 때문에 살인하게 되고, 도둑질하게 되고, 간음하게 됩니다. 탐심 때문에 거짓 증거하게 됩니다. 행동은 바로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탐심, 욕망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이 마지막 계명이야말로 모든 다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근거요, 동기가 됩니다.

  1.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 계명 속에는 우리의 인생이 행복하게, 감사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탐심에 사로잡히면, 결코 행복도 감사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십시다. “탐낸다”는 것은 사람이 갖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 이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갖고 싶다는 욕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욕망의 포로가 되는 것, 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탐심은 다스려지지 않으면, 우리 삶에서 만족함을 빼앗아 갑니다. 탐심은 채우고 채워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큰 수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게 될 때, 만족은 잠깐입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우리는 또 새것을 갖고 싶은 욕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히는 한 우리의 삶에는 만족도, 행복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탐심은 허무를 낳습니다. 가져보아도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새로운 것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 탐욕을 다스리지 않는 한 인간은 허무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가져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이 허무함을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동안은 기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 그 기쁨은 무디어져 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있으면 좋겠구나 하는 욕망을 벗어버릴 수 없게 됩니다. 소유로, 더 많이 가짐으로, 이 공허함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이 공허함은 결코 소유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탐욕은 허무를 낳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탐심은 또한 갈등을 낳습니다. 더 많이 갖고자 서두르다가 보면,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기가 힘듭니다. 더 많이 끌어 모으려고 애쓰다가 보면, 더 많이 갖고자 하는 탐심에 사로잡히고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해 질 리가 없습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해서 상대방을 짓밟거나 이용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탐심은 갈등을 낳게 되고, 또한 고독에 빠져들게 합니다. 탐심은 다스려져야 합니다. 탐심의 포로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도, 감사도 찾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 정신과 의사인 Alex Comfort 박사가 자신의 환자 한 사람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환자는 1980년에 $15,000를 벌었는데, $30,000만 벌면 세상 걱정거리는 다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Comfort 박사는 “당신의 수입과 행복은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가짐이 문제입니다.”라고 경고해 주었습니다.이 환자의 작은 사업은 점차 번창하여 7년 뒤에는 $100,000의 수입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적 상태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더 큰 집에서,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더 좋은 사립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게 되었지만, 불만은 쌓여가고, 짜증도, 싸움도 점점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더 욕심꾸러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벼운 심장마비를 일으켰는데, 이때를 계기로 해서 자신의 인생관을 돌이켜 보며 반성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탐심이, 더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탐심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 탐내는 인생에는 행복도, 감사도 깃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탐심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이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1) 무엇보다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과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삽니까?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사람이 인생의 목적과 길을 모르는 한, 탐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습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기에 갖는 것이 제일인 줄 압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기에 돈만 있으면 최고인것으로 착각합니다.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면, 소유는 소유의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진정한 인생의 목적을 깨닫게 되면, 더 많이 갖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왜 삽니까? 돈 벌기 위해서 삽니까?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삽니까? 분명한 인생의 목적과 길을 모르니까 탐욕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적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탐욕이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탐욕을 다스리시기를 원하십니까? 행복도, 감사도 삼켜버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십니까? 인생의 목적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왜 사는지를 알아야 탐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2) 둘째로, 탐욕으로부터 자유하려면 내가 가진 것, 나의 소유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탐욕으로부터 자유하기 힘듭니다. 내가 가진 것을 소유함에서가 아니라, 나누어 줌에서 갖는 행복을 찾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것입니까? 영원히 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내가 갖고 쓸 수 있습니다.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샀기에 내 것이라고 주장하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내가 번 것입니까? 일할 수 있는 건강은 누가 주었습니까? 벌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왔습니까? 벌 수 있는 기회는 누가 주었습니까? 내가 구해서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입니까? 내 것이라면 영원히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언젠가는 두고 가야하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에게 주고 가는 것 아닙니까?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쓰고 있으니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고 웃으실 것입니다. 불쌍히 보실 것입니다.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이 쌓아 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맡겨주신 분의 뜻대로 쓰는 것이 바로 사는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탐욕은 자꾸 쌓아 놓게 합니다. 그러나 재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바로 쓰는 것이 기쁨임을 배우게 됩니다. 탐욕의 사슬에서 벗어나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새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3) 셋째로, 탐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또한 행복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임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더 아름다운 아내를 맞으면,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유명해지면,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의 현실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 자족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바로 자족하는 마음에서 행복은, 감사는 솟아납니다. 여러분, 조건이 충족되면, 더 많이 소유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탐욕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막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립보서 4:11-12, 표준 새 번역).”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복은, 기쁨은, 자족하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천하에 유명한 의사들을 불러 치료를 받아보았지만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점성술사가 왔는데, 그의 처방이 특이했습니다. 그는 임금님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내의를 가져다 입으면, 우울증으로부터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명을 내려서 행복한 사람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고생 끝에 군사들이 행복한 할아버지를 찾아내어 왕궁으로 데려왔습니다. 임금은 즉시 내의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할아버지는 몹시도 주저했습니다. 다그쳐 명했더니 할아버지는 대답했습니다. “왕이시여 제게는 갈아입을 내의 한 벌이 없습니다.” 행복은 탐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깨달아야 탐심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탐욕의 사슬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4) 네 번째로 탐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공을 영원의 빛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공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성공이란 어떤 것입니까?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성공인지에 대해서는 뜻밖에도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인생 성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탐욕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쌓아 놓는 것이 성공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관 뚜껑이 닫힐 때 판단됩니다. 한때 성공했던 사람이 인생 실패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은 정상에 올랐을 때가 아닙니다. 그의 인생이 마치는 때입니다. 그의 관 뚜껑이 닫혀지는 때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믿음의 고백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가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때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해 주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해 주시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성공자입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시면, 우리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영원히 실패한 것입니다. 이 같은 성공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욕심을 부려서 많이 쌓아 놓는 것이 제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진정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탐욕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성공에의 길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탐욕을 다스리며 살 수 있습니다. 탐내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감사하는 인생의 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은 탐심입니다. 욕심입니다. 이기적인 욕망, 탐심을 다스릴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철학 교수로 있는 John Clay pool 박사의 간증입니다. 그는 대학교에 다닐 때 철학도로서 이론에 강하고 아는 것이 많아 모든 사람이 인정해 주는 수재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 집에 가서 친구의 여동생을 보았습니다. 19세의 소녀는 모든 것이 완벽했는데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출생 시부터 기형아였습니다. 소녀는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정서가 발달하여 음악, 미술, 문학 등을 좋아했습니다. 클레이 풀은 그녀에게 참고 있던 질문을 쏟아버렸습니다. “내가 당신의 처지였다면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은데 무엇이 당신을 미소 짓게 하고, 신나게 하고, 명랑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누구나 가지지 못한 것이 있죠. 나의 경우는 팔과 다리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요. 맛볼 수 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세계 명작을 읽을 수도 있으며, 친구들과 가족의 사랑이 있고, 무엇보다도 나는 예수님을 알게 되어 천국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만큼 보물들을 가졌는데 내가 왜 슬퍼해야 합니까?” 클레이 풀 교수는 그날 하루의 체험이 철학과 2년의 공부보다 더 귀중한 진리를 배우게 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기형아 소녀는 22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의 진리, 평화의 복음을 깨닫고 그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행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참으로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열 번째 계명을 주셨습니다. 네 이웃의 소유, 네 이웃이 가진 것을 탐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탐심은 다스려져야 합니다. 더 많이 갖는 것이 행복의 길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 되는 것, 인생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감사하면서, 영원한 성공을 추구해 갈 때, 우리는 탐심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정한 감사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마무리

탐심의 죄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탐심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더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0)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방에서 혼자 놀다가 갑자기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부모가 급히 가보니 병 속에 손이 들어갔는데 빠지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몇 번 시도했지만 아이의 손이 빠지질 않기에 병을 깨뜨릴까 하다가 다칠 위험이 있어서 119에 신고를 했습니다. 대원이 와서는 자세히 살피더니 아이에게 병 속에서 손을 펴면 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손안에 사탕 두 개를 꼭 쥐고 손을 펴지 않은 채 자꾸 빼려고만 했던 겁니다. 손을 펴서 사탕 두 개를 놓았더니 손이 쏙 빠졌습니다. 우리 인생이 꼭 그렇습니다. 탐심을 버리면 편해지는데 그걸 붙잡고 놓지를 못합니다.

“뭐 그렇게 해도 괜찮을 거야!”, “남들 다 그렇게 사는 데 뭘?.” 대수롭지 않아 보이고, 보이지 않게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데 그걸 경계해야 합니다. 머릿속에 슬쩍 스쳐 지나갈 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장차 엄청난 결과를, 무서운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예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탐심이 죄인 줄 알고 스쳐 지나갈 때 아예 둥지를 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탐심은 죄의 근본이요 동기요, 죄의 쌍둥이입니다.

2)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2-13)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6-8)

사디 시인은 가난하여 구두가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을 비관하며 집을 나갔다가 두 발이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구두가 없고 두 발이 있는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자기의 관 양쪽에 두 구멍을 뚫어놓아서 자신의 팔을 밖으로 내놓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보는 사람들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족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3) 드리는 것을 배우십시오.

우리가 진정 베풀고 나눠주기 전까지는 탐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의인의 삶은 주는 살입니다. 경품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경품을 내시면 됩니다. 한 농부가 꽤나 인색한 이웃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돼지 100만 마리가 있다면 나에게 절반을 줄 수 있겠소?” “물론이죠. 절반 50만 마리를 당신에게 주겠소.” “좋소, 그렇다면 당신이 돼지 2마리를 갖고 있다면 내게 한 마리를 줄 수 있겠소?” “No! 그건 못하겠소. 당신은 내가 돼지 두 마리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죠?” 그러더랍니다. 말로는 쉽게 하지만 진짜 줄 때는 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은 남에게 주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렇게 나눠주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세리장 삭개오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도둑질한 것은 4배나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그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 만난다면 탐욕이 아니라 거룩한 욕망의 사람이 됩니다. 위엣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망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이런 탐심으로부터 자유하게 만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더욱 부지런해집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애씁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돈을 벌고 모읍니다. 탐심을 애초에 마음의 생각에서부터 분별하여 싹을 자르시고 자족의 정신과 나눔의 실천을 통해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주님을 위해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강해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들을 정리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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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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