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4)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2간구, 나라가 임하시오며 : 나라를 위한 기도

 

주기도문(4)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2간구, 나라가 임하시오며 : 나라를 위한 기도

마태복음 6 : 9 – 13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들어가는 말

2간구 : 나라가 임하시오며 : 나라를 위한 기도

엘리 위젤의 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 왕좌에 앉은 하나님 앞에 가서 물었습니다. “사람 노릇과 하나님 노릇 중에 어느 편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노릇이 더 힘들지.”라고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온 우주, 은하계와 별들을 신경 써야 한다. 인간인 너희는 식구들과 직장밖에 신경 쓸게 더 있느냐?” “그건 그렇죠.”라고 사람이 되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한정한 시간과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일을 해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한정된 능력과 짧은 인생살이 동안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도대체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구나. 하나님 노릇은 상상할 수 없이 힘든 일이야.”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 노릇을 해보신 일이 없고 저는 하나님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요? 그러면 우리 딱 1초만 그렇게 한 뒤 다시 바꾸면 되지요.” 하나님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 사람이 워낙 졸라대자 마지못해 동의했고,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그 사람은 다시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았고, 그때부터 인간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고 하나님은 멀리 내쫓기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왕권을 찬탈한 인간의 삐뚤어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박차고 앉았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보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의 운명조차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질병과 사고와 죽음 앞에서 무능한 모습으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청원에 대해 살펴보면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학자들은 하나님의 청원을 세 가지로 대부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여러 간구에는 논리적 순서가 있습니다. 각 간구는 일종의 불가피한 신적 필연으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이며 그 지식과 경외심의 확신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 나라의 기초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만이 홀로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을 통하여 확립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이해를 통하여 인간에게 역사하는 통치로서, 무지한 복종은 요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줄거리

  1.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와 성격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문구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입니다. “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1) 왕권, 왕의 통치 (2) 나라, 즉 왕의 통치에 예속하는 영토로서의 왕국을 뜻합니다. 그 나라는 한 나라의 왕이나 통치자가 다스리는 영역입니다. “임하옵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데토는 ‘가다, 오다, 나타나다’를 뜻하는 “엘코마이”의 명령, 과거, 능동태로 ‘오소서, 임하소서’란 의미를 지닙니다. 부정 과거가 사용된 것은 그 나라의 완전한 실행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나 통치가 행사되는 영역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심으로 임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은 인간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이 전파되면서 확장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그 최종적 완전한 실현이 이루어집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대부분 천국(하늘나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좀 더 상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도래의 약속과 더불어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국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약속과 예언.

① 하나님은 하나님(혹은 하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약속과 예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와 통치자십니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또 한 나라가 있는데 하나님을 반역하여 일어난 사탄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과 그의 영광과 영예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일관해서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의 도래에 대한 약속과 예언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 땅 위에 계셨을 때 세계 역사의 그 특정한, 결정적인 시점에서 이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②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하였음을 외쳤습니다(마태복음 3:2 이하). 세례 요한은 이 타락한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는 앞에서 지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 과거.

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셨습니다(마태복음 4:17). 우리 주님이 전도를 시작하셨을 때 정확히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에는 이제 천국의 왕이 백성들 앞에 아주 가까이 왔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하늘나라가 오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②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상의 사람들 중에 임하였습니다(누가복음 17:2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 곧 사람들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이 나라의 능력과 주권과 위엄과 통치를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임했다는 뜻입니다.

③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를 믿는 자들 안에(마음에) 임하여 다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3) 현재

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이 순간에도 사람들 중에 임하여 있으며 사람에 대하여 역사하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7:20).

②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임하여 다스리며, 아직 진보, 성장의 단계를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로마서 14:17). 그 나라는 마음과 영혼에 대한 통치이며, 내적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적 제도에보다는 내부적 체험 속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나라는 누룩처럼 숨겨져 있으나 계속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이 나라는 씨앗이 깊이 묻혀있으나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처럼 성장합니다. 이 나라는 볼 수있게 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편재성을 띤 채 땅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모든 곳을 동시에 비추는 번개와 같습니다. 천국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나라이면서도 확실히 온갖 외적 행위를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땅의 모든 왕들이 그 나라 앞에 꿇어 엎드릴 것입니다.

(4) 미래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을 넘어 완전한 형태로 나타날 미래가 또 있습니다. 그 미래는 우리가 죽음을 통해 천국에 들어갈 때 입니다(마태복음 25:34).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이미 나타난 나라임과 동시에 모든 비밀의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죽음 이후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나라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와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씀은 이 세상이 지난 후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하늘나라인데 이는 그 나라의 왕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통해 지상을 벗어나 천국 문을 통과하여 하늘 도성으로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그 나라에 완전하게 들어갈 수 있거나 혹은 그 나라가 우리 속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그 나라는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된 나라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국면을 가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친 그때나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임하여 진행되고 있는데도, 이 기도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간구는 그 나라를 다시 미래 속으로 내던져, 저 멀리 예언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게 합니다.

우리는 이 간구에서 지상 위에 있는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미래의 어느 날을 소리쳐 부르는 외침들이 흑암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듣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기도에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천국의 도래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속에서는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에 대한 개념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면서도 시간 속에 나타나며,

– 여기 지상에 생존하면서도 장차 오게 되며,

– 장차 오게 되면서도 결국 지상에 오지 않으며,

– 우리가 다음 세상으로 갈 때 들어가게 되는 나라,

–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 그 나라는 내적, 영적, 보이지 않는 나라이지만 또한 나라들과 기관들을 형성할 가시적, 외적 나라, 온 땅에 가득 찰 나라입니다.

이 간구는 그 나라의 최후 완성 시간까지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이 다양성이 모순은 아니며 기자의 환상에 따라 이런 것 저런 것을 의미하는 모호하고 불완전한 개념의 영향도 아닙니다. 이 개념은 아주 분명하며 한계가 뚜렷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의 조직된 공동체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에는 종속관계와 대등 관계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에는 통치자(하나님)와 백성(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간구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천국에 대한 다양한 의미 가운데 어느 것도 생각에서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제시된 여러 가지 개념들이 이 간구,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성경적 의미를 표현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여러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 이 간구가 시사하는 바를 확인하도록 합시다.

  1.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지만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에 대하여 그 창조주로서 절대적 권능과 통치권을 행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땅이여 즐거워하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백성은 떨지어다”가 유대 시인들과 선지자들의 시종 일관된 논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반역, 세상의 온갖 고난과 재난 등 어떠한 여건과 환경도 “여호와가 지금부터 영원토록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그들의 확신을 뒤흔들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편 103:19)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 기도에서 사람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하나님이 만유의 주(主)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최고의 주님과 종속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여 그것으로 족한 것은 아닙니다. 시편 기자가 찬양하는 바다와 그 안에 충만한 것들이 하나님의 통치(즉 모든 만물의 존재 질서의 통제, 지탱, 지휘)를 받는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통치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전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들의 동식물이 공히 받는 그 통치가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러한 통치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하늘에 앉아 계신 자가 왕들과 통치자들의 계획을 비웃으시며 독재 군주를 자기의 진노의 막대기로, 사람을 그의 손안의 막대기와 도끼로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그 장비를 불 속에 던져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실로 인간은 무의식적인 도구로 전락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다스림이 인간 사회에 이룩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우러난 삶의 자발적 복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인간이 짐승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짐승이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먹을것을 주십니다. 짐승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짐승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만 어떻게 돌보심을 받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먹을 것을 얻지만 누구에게서 얻는지 알지 못합니다. 살아가지만 왜 사는지 알지 못합니다. 행동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죽지만 언제 죽는지 알지 못합니다. 짐승들에게는 이 정도로 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각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각에 호소하는 굴레로 다스리지 않고 마음속에 말씀하시는 그의 눈빛으로 지도하십니다.

–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는 것,

–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할 수 있는 것,

– 거기에 공감할 수 있는 것,

– 공감하여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한 맹목적 복종과 인간의 참 목표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해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와는 다른 것이며 그보다 한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와 같이 복종하고 섬길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 기도는 보다 차원 높고 보다 훌륭한 형태의 이러한 순종과 섬김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고백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하나님과 그의 계명에서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그러한 이탈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표적들을 보지 못하는 불신자들과 우리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입장은 세상의 현재 상태가 인간들의 자연적 상태이며, 인간이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질서이며, 하나님이 목적하신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입장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득 찬 온갖 악과 쓰라린 슬픔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인류가 하나님께 반역하였다는 타락의 교리를 믿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신조가 있습니다. 한 그릇된 신조의 말을 들어 봅시다. 그들은

– 짐승 같은 죄악 속에 살면서 무지몽매하게 죽어가는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 살인, 강탈, 거짓, 싸움터, 상처받은 심령들, 열매를 맺어보지도 못하고 꽃망울 질 무렵에 사라지는 희망을 보십시오.

– 강같이 흐르는 슬픈 탄식, 비참한 저주, 가장 슬픈 떠들썩한 환락을 보십시오.

– 이 모든 것들이 이 아름다운 지구 위, 황혼의 장관 가운데, 가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속에, 차가운 별빛 아래 일어나는 것을 보십시오.

–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 가장 비참한 피조물로 전락해버린 이 세계를 보십시오.

– 이것이야 말로 피조물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길임을 인정하십시오.

– 이 모든 것이 다 어쩔 수 없는 신의 섭리임을 인정하십시오.

– 이것이 신이 애당초 계획하신 그 세계임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신조, 진정한 기독교의 신조는 말하기를

– 이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 어떤 원수가 이를 행한 것입니다.

– 원수 사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죽음이 왔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여 일어난 사탄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사탄은 이 세상의 신, 이 세상의 임금(요한복음 14:30),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에베소서 2:2) 불러집니다. 그는 악의 나라, 흑암의 왕으로서 광범한 지배권과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온갖 죄악과 재난과 불행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세력을 멸하고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바로 이런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간구는 사탄의 세력(왕국)이 파괴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데 있어서 큰 적대와 방해 세력입니다. 동시에 지상으로부터 모든 가증한 것들 – 우상 숭배, 미신, 망상, 미혹, 무지, 신성모독, 불경 등을 뿌리 뽑아 주시기를 기도하고, 그릇된 철학과 사상, 그릇된 신조와 교리를 버리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에 임하는데 방해가됩니다. 그리고 이 간구는 참된 기독교의 신조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파멸에서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1. 이 간구는 그 나라가 임하였지만 이 나라의 성장과 확장과 완성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지상 모든 왕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들의 의지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세우시고 이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하나의 영원한 사실과 역사적 사실, 이 양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영원한 사실이란 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태초부터 세상의 주와 임금이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그 영원하신 말씀이 지상에 육체로 강림하여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을 맛보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과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를 심어 놓으셨으며 이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창설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자기 보좌에 앉는 왕과 제사장으로서 사람들을 영원토록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는 그가 영원 전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역사 속에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 죽은 자로부터 처음 사신 자 되셨고 영원히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토대가 놓아지고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인 그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그 영적 나라의 성장 확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사람들 중에 임하여 있으며(누가복음 17:20), 이 순간에도 여기 주님께 복종하는 모든 마음과 생활에,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으며,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로마서 14:17)입니다. 이 나라는 교회에 나타나 있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성장하며, 세상 속에서 서서히 확산합니다.

이 영적 나라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습니까? 우리는

– 이 나라가 순전히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

– 그리고 개개인에 대한 그 나라의 지배 권능은 대중에 대한 지배 권능을 실질적으로 보장해 준다는 것,

– 그러한 개개인 통치가 전 세계적 통치 방법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인간은 한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내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행사할 수 있고 또 행사해온 권능은 모든 인류에게 일률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상이 주는 두어 가지 교훈을 명심합시다. 교훈은 세상의 질병인 악을 치료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외적 조치, 보다 나은 법률, 교육, 기술의 진보, 상업 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들을 사용하면 일시적 효과가 나타나지만 뿌리 깊은 악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지진을 없애기 위해 알약을 사용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훨씬 깊은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병에 걸려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 개개인의 의지입니다. 세상의 악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마음을 다한 충성스러운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이 나라를 성급히 이루기 위하여, 신정 정치, 국가 교회, 신앙촌 등등을 계획, 추진, 실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천국”? 무엇이 생각납니까? 황금보석 꾸민 집, 열두 진주 문, 황금길,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열두 가지 실과가 달마다 맺히는 생명 나무를 기대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기대하십시오. 그러나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보석 집이 아닙니다. 황금 길이 아닙니다. 열두 진주 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처럼 천국의 왕이신 우리 주님의 다스림입니다. 천국은 주님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시면 내 마음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를 다스려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주여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생각을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지혜를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판단을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의지를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경험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주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을 다스리시면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남편이 믿지 않으면 주여 제 남편이 예수님을 믿고 그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식이 잘못되어 가고 있으면 주여 우리 아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주님께서 가정을 다스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그렇게 노력하면 멀지 않아 그 가정은 천국으로 화합니다.

우리 주님이 교회를 다스리시면 교회가 천국이 됩니다. 교회가 왜 시끄럽습니까? 왜 싸웁니까? 사람이 다스리거나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 목사가 교회를 다스리면 안됩니다.

– 장로나 집사가 교회를 다스리면 안됩니다.

– 우리 천국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다스리도록 모든 권리를 다 내어 주어야 합니다.

– 그리고 주님 우리 교회를 다스리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 이렇게 기도해 놓고 예수님을 제쳐두고 제멋대로 살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정이나 교회를 제멋대로 이끌어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다스림과 함께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뜨거운 시련의 풀무 속에 있었지만 주님의 다스림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박해의 감옥에 갇혀 그 발이 착고에 채워져 있었지만 주님의 다스림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천국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 실패의 그곳이라도 천국이 됩니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천국이 됩니다.

– 고통과 시련의 장소가 천국이 됩니다.

– 가난과 초막에 살아도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이 주님의 다스리심이 함께하기를 기도합시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이 천국 복음을 말로 전하고 행위와 생활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열 사람이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가 그만큼 확장되는 것이며, 수백 수천 명…이 예수님을 믿고 그의 다스리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만큼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확장되어간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책임의 중대성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그 나라의 외적 성장과 확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영이 있으면 그 다음 몸이 있습니다. 개개인들이 있으면 공동체(사회)가 형성됩니다. 이 나라는 포괄적, 범세계적 통치입니다. – 제도, 기술, 과학 등,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은 성화될 수 있으며, 또 성화될 것입니다. 한 선지자는 대제사장의 관(冠)에 새겨 붙인 문구처럼(출애굽기 28:6) 말방울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새겨지고, 예루살렘 집 부엌의 솥과 냄비마다 성전의 그릇처럼 거룩해질 날을 환상 중에 바라보았습니다(스가랴14:20, 21).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에는

–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확신,

–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바로 잡을 유일한 수단이라는 확신,

–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확신,

–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을 바로 잡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 외에 세상의 구원 수단으로 어떤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위대한 새로운 수단에 의해, 어떤 새로운 사회개혁 방법에 의해 부정부패를 없애고 보다 정의롭고 보다 좋은 세상을 기대하여 왔습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은 이러한 희망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세상의 갱생을 위한 멋진 계획이 (입안자의 귓가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이런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사람마다 맹신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시대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일을 발견하였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라질 줄 모르는 이 고질적인 기대야말로, 과거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언젠가는 더 나아지고 좋아지리라는 굳은 신념이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그 기대가 번번이 무너지면서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뜻깊은 면을 시사해 줍니다. 이러한 기대를 얕볼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기대가 하나님께로부터 발원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이 비록 잘못된 방향으로 그 기대감을 피력하고 그 기대를 입밖에 내면서도 그 실질적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희망이 저급하거나 참되지 못한 것이라고 일축할 수 없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상의 이러한 온갖 희망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공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 그러한 희망은 옳다. 우리는 그 희망이 어떻게 현실로 나타날 것인가를 알고 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어떤 새로운 것의 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천국이 임하고 그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확장됨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주권, 곧 주님의 다스리심이 내 마음에, 내 가정에, 내 교회에 행사됨으로 말미암아 보다 정의롭고 보다 좋은 내 자신, 내 가정, 내 교회로 성장 발전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사회와 국가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보다 새로운 세상이 될 수 없습니까? 분명히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통하여,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함으로 말미암아 보다 새로운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를 위하여 희망을 버리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합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할 때에 이 간구는

‘의와 평강과 기쁨’의 완전한 실현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로마서 14:17)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무의식적인 울부짖음들, 슬픔과 궁핍과 불의에 대한 원한의 부르짖음들을 생각해 보시오. 그 울부짖음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귓전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탄식하며 큰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로마서 8:21). 모든 인간이 눈물을 흘리고 무엇인가 희망을 피력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반역적 외고집에 대해 슬퍼할 때, 이 무질서한 세계의 온갖 압박을 느낄 때, 이 세상을 본래의 임금에게 되돌리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거의 수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애태울 때 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이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요한계시록 6:10)라고 외치는 가운데 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더불어 의와 평화와 기쁨이 완전히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슬프고 겸손한 부르짖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각자 자신의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행위를 통회하며 이 기도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할 때에 이 간구는

주님의 재림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인사말은 마라나타였습니다(고린도전서 16:22). “주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에 대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확실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 호나티우스 보나르는 아침에 해가 뜨면 창문을 열고 커튼을 젖히면서, ‘주여 이 한 낮에 오시겠습니까?’ 해가 지면 커튼을 닫으면서 ‘주여 이 밤에 오시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그처럼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릴 수 있습니까? 가난하고 고생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은 이 좋은 천국을 그리워하며 이 기도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은 이 기도를 올리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역경에서나 순경에서나 그리스도인들은 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그 날을 고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완성되고 거기서 우리는 의와 평강과 영원한 기쁨의 완전한 실행으로 말미암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4) 이 간구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하고 잘 대표하겠다는 서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청원은 주기도문의 두 번째 청원입니다. 성경이 번역될 당시에는 “이”가 주격조사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바꾸면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하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라는 state나 country가 아닌 kingdom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의지와 협력을 통하여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의미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30살의 나이 처음 전도를 시작하셨을 때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신 많은 설교들이 천국을 비유로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설교하셨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나오는 마태복음 6장의 후반부 결론에 해당하는 33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가 기도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많은 개념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입니다.

국가의 3요소를 국민, 영토, 주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도 이 3가지는 존재합니다. 국민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고, 영토는 바로 천국이며,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주권이 가장 중요한 까닭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권리는 그 국민 된 우리를 지으신 권리이며, 또한 천국과 모든 현실계도 지으신 권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왔습니다. 이 주권이 나라에서 통용될때에는 다스림 혹은 정치가 됩니다. 우리는 정치가 무슨 말장난이나 가장 저질스러운 행태, 곧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배반과 불신의 대상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정치는 곧 그 국민을 유익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가장 좋은 계획과 가장 좋은 방법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정치의 목적이며, 그 결과는 곧 자애로우신 하나님께 우리의 입을 열어 찬양과 감사를 돌리게 하는 영광인 것입니다.

나라가 아무리 부요해도 왕이 무능하면 금방 거덜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황금으로 되어졌다느니, 놀고먹을 수 있는 곳이며, 거기다 영원히 아픔과 고통이 없이 살 수 있는 장소라 하더라도 거기 좋은 통치자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을 퇴색시키고 망가뜨리는 것은 한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십니다. 지옥 같은 곳일지라도 일순간에 그 불을 끄고 천국과 같은 곳으로 바꾸시는 능력이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또한 그분은 가장 행복한 나라를 이루는 지혜와 경륜이 계십니다. 온 세상이 운영되는 것을 보십시오! 계절마다 풀이 자라고, 개미와 같은 작은 곤충들이 그 대를 이어가는 것을 보십시오. 별자리와 해와 달이 계절을 따라 한결같은 운행을 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천국만이 아니라, 현실도 포함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가정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그 뜻대로 운영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키우는 방법을 가르치시고, 부부가 함께 화목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고 섬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성경의 말씀과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깨닫게 됩니다.

18세기 종교개혁이 한참 일어나던 시기에 종교개혁자 존 캘빈은 스위스 제네바의 시장(市長)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였고, 시민 위원회를 통하여 청렴한 법령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그것들을 실천했습니다. 1년여가 지난 다음에 그 도시에서는 부랑자와 술주정뱅이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궁핍하여 굶는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추방해서가 아니라, 바로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신앙적인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사회가 성적인 문란을 즐기고 방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끔찍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상적인 가정과 도덕적인 모럴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반갑고 소망스러운 세상입니까?

또한 영국의 대부흥 운동은 이러한 예를 더 잘 보여줍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는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탄광촌에서 대규모 파업과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는데, 그곳에 부흥회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갔고 눈물로 새사람이 되겠다는 결심과 돌이킴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용주는 근로자를 불신했고, 근로자는 고용주를 착취하는 사람으로 미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흥,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깊은 감동과 말씀으로 임한 이후에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근로자들은 고용주 몰래 빼돌렸던 물건들을 가지고 고용주를 찾아가 뉘우쳤고, 고용주는 근로자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주지 않았던 것을 눈물로 뉘우쳤습니다. 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술집이 장사가 안돼서 곳곳에서 문을 닫았고, 더러는 술집의 주인이 새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가게를 부랑자들에게 전도하는 장소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이라면 정말 살맛나는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하시면 그곳이 어떠한 환경과 여건이라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세상에 완전한 천국은 없지만, 적어도 천국의 사촌쯤으로는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과 초조와 걱정과 근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 마음의 왕권이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인생을 경영할 힘도, 능력도, 지혜도 없는데 막막한 세상에서 내 힘으로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찌 근심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이 많이 기대하고 의지하면 할수록 이 근심과 번민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그러나 마음의 왕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달라집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밥을 먹든지, 죽을 먹든지 믿고 따르겠다는 결심을 하면 마음에 평강이 임합니다. 날마다 그분의 뜻대로 판단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기를 결심하면 놀라운 인생의 소망과 비전이 생겨납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 하늘나라의 평화가 마음에 임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하여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우리의 입술로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삶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내 가정과 직장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내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면 가장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주권을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하면 내가 살아가는 삶에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종말론적인 기도입니다.

종말이란 세상에 마지막이 있고, 모든 악과 선의 결말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앙과 죄에 대하여 영원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또한 신앙과 선에 대하여는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예고하십니다. 이 종말이 언제 있느냐면 바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기적적인 일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마지막 종말의 날에 그렇게 다시 살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Sample 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살아나셔서 하늘에, 곧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까지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고 정하신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까지 기다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시간이 이르면 예수님은 놀라운 영광과 능력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죄와 악에 대하여 심판을 하셔서 그 행위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서 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죄로 인하여 떨면서 믿을 것이고, 더러는 기다림과 믿음 속에서 기뻐하며 믿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이런 종말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완성된 나라, 다시는 죄의 유혹을 받지 않고 두려움과 고통과 사망이 없는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받으려고 하여도 때때로 찾아오는 욕심과 이기심의 목소리에 져서 옳고 곧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 모든 갈등이 끝이 나고 우리는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가 가지는 두 가지 의미, 그러니까 현실적인 의미와 종말론적인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간결하고 쉽게 설명을 한다고 하는데도 혹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24장은 종말에 관하여 현실적으로 말씀해 주셨고, 25장은 그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신앙적인 삶의 자세에 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주님 안에서 오늘도 평강과 기쁨이 넘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샬롬!

마무리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그것은 간결하고 짧은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매우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입술로만 주문을 외우듯 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중언부언 기도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내용의 기도를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합당하게 사용하도록 주기도문을 바로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본문은 “나라가 임하시오며”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내용은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5).

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흔히 말하는 천국으로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속해 있는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는'(시편 103:19)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과 보존하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천국의 중요성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은 거의 천국을 설명하는 말씀으로서 그의 메시지(Message) 가운데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가장 비참하고 참담한 처지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5:12, 13). 천국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릴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시적인 나라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받아 위로부터 거듭난 생명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즉 새로운 피조물로서 마음속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느니라'(요한복음 3:3)고 하신 바로 그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우리의 마음에 임한다면 바로 우리의 마음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며 찬송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격적인 삶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내 마음속에 소유한 감격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곧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를 의미합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요, 최후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를 전 제자들에게 선교를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대 위임령인 것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문화와 언어와 종교까지라도 극복하여 그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말씀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야 합니다(마태복음 28:19, 20). 복음이 전해지는 영역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합시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1.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곧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도래를 의미합니다.

성도의 우렁찬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날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날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손을 만지며, 위로해 주실 뿐만 아니라 행한 대로 상급을 주시는 그날입니다. 이날에는 모든 죄와 고통과 눈물은 영원히 사라지고 악한 사탄은 우리 앞에서 그 모습을 감추는 날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한 모든 성도들의 가슴에는 터질 듯한 감격이 휘몰아칠 것이며,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불신자들은 가슴을 쥐어짜며, 후회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날을 사무치게 고대하였습니다. 그들의 인사는 “마라나타” 즉 “주여 오시옵소서”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이처럼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우리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그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복음 증거의 노력을 경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고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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