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매우 특별한 소원을 이루다

2022년 임인년 (壬寅年)새해 첫날이 밝았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어머니방으로 달려 갔다. 어머니의 기저귀를 갈아 드리기 위해서이다. 어제밤 송구영신예배를 다녀와서 늦게 잤더니 벌써 날이 훤히 밝았다.

그런데 새해 첫날부터 어머니는 배변을 잔뜩 본채로 잘도 주무신다. 몸에 변이 잔뜩 묻어서 아무래도 느낌이 척척하고 불편 하실텐데도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저렇게도 곤히 평화로운 표정을 지으며 주무시고 있다니 치매는 확실히 대책이 없는 몹쓸 병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어머니를 깨워 기저귀를 빼 드리고 욕실로 모시고 갔다. 씻겨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다. 이렇게 새해 첫날 아침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어머니의 대변 기저귀를 갈아내고 어머니를 씻기는 일 즉 간병하는 일로 시작이 되었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는 “감사합니다.”가 튀어 나왔다. 왜냐하면 지난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나는 결심을 단단히 하였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마치 ‘감사’라는 단어 하나만 알고 있는 사람모양으로 무조건 감사만 하면서 살기로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를 간병할 때 이제 몸이 자꾸 늙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요즘 들어서 어머니의 엉덩이살이 더욱 훌쩍하게 빠져 있어서 걱정스러워진다.

엉덩이 근육은 사람에게 있어서 장수의 열쇠라고 한다. 그래서 나이들어 노인이 되었을때 엉덩이근육과 살이 빠지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이처럼 정교하게 만드셨다. 사람의 엉덩이가 통통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내나이 25살때이다. 어머니는 그때 50세셨다. 청주에서 은행에 근무하고 있던 나를 보기 위해 어머니는 서울에서 일부러 내려 오셨다. 아들이 사귀고 있는 아가씨인 나를 며느리감인지 보러 오신 것이다.

167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하이얀 피부를 가진 어머니는 첫 눈에도 멋쟁이셨다. 나는 점심을 대접해 드리려고 모시고서 식당엘 갔다. 식당에서 어머니는 좀 더우셨는지 입고 있던 꽃무늬 상의를 벗으셨다.

자켓을 벗자 어머니는 민소매 원피스 차림이었다. 흰색 바탕에 화사한 프린트꽃 무늬 원피스를 입은 어머니는 하얀팔을 드러내고 내 앞에 앉으셨다. 당시 흔하게 보던 아주머니 스타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한눈에도 세련되고 멋스러운 도시여성의 모습이었다.

당시 남편은 청주 운호고등학교 국어교사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학교 교사는 월급이 적은데 그래도 괜찮겠어요?”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나는 미리 준비라도 해 두었다는 듯이 씩씩하게 “네에~” 하고 대답했다.

평소 나는 맏며느리로 시집가서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싶다는 소원을 가졌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바보같은 생각을 다한다고 퉁박을 주었지만 나는 오히려 “둘째 아들부터 낳는 사람도 있니? 큰아들이 있어야 둘째 아들도 있는거지.” 라고 받아치곤 했다.

심지어 내가 나가던 교회의 사모님조차도 큰아들에게 시집가서 맏며느리가 되고 싶다는 나에게 “나 선생님은 귀엽게 생겨서 맏며느리보다는 막내 며느리가 어울려요.” 하며 내가 맏며느리감이 못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하긴 사모님도 맏며느리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조카까지 떠맡아 키우고 있었으니 맏며느리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나를 말렸을 것이다. 순전히 나를 생각하고 위해서 그런 말을 해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소원대로 4남매의 장남인 남편을 만났고 나는 맏며느리가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나는 맏며느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시부모님 생신을 챙겨 드리러 청주에서 서울로 매년 꼭 올라갔다. 내 손으로 직접 생신상을 차려 드리기 위해서였다.

설날과 추석에도 맏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을 다했다. 녹두빈대떡을 부치고 송편을 빚고 잡채며 전이며 여러가지 음식을 해냈다. 힘든 일이었지만 당연하게 생각했고 나의 수고로 가족들이 맛있는 음식을 즐겁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께 청년시절 선교사로 헌신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40대에 들어선 나와 남편은 세아이를 데리고 선교지로 떠났다. 선교지에서 십여년 후에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돌아 가셨고 80이 넘은 어머니는 늙었고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치매)까지 걸렸다. 비자 제한만 풀리면 다시 선교지로 들어가려고 공부하며 준비하고 있던 우리 부부에게 제동이 걸렸다. 어머니를 돌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선교는 우리가 아니라도 하러 갈 사람이 있지만 우리 어머니는 자식인 우리가 안돌보면 돌보아 줄 사람이 없어요. 어머니가 내 기저귀를 갈아주며 키워 주셨는데 이제는 어머니가 약해지고 아기처럼 되었으니 내가 모셔야 하지 않겠소?”

나는 어머니를 모시자는 남편의 뜻에 당연히 동의하였다. 하지만 선교지를 향하는 마음 또한 여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수년 동안 일년에 두번 정도는 혼자라도 선교지에 들어가곤 했다. 코로나19로 최근에는 가지 못하지만 말이다.

최근에 본 뉴스에 주간보호센터에서 일어난 부정적인 사건을 보았다. 치매에 걸린 80대 할머니를 센터 직원 세사람이 구타하여 상해를 입혔다는 뉴스였다. 요양원에서는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주간보호센터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놀라웠다.

그 할머니는 몸무게가 42킬로그램이라고 한다. 그 약한 몸을 힘이센 장년들이 때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모든 것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노인의 몸을 구타하다니… 자기 부모라면 그랬을까 싶다.

할머니는 갈비뼈 3개가 부러지고 전치6주의 상해를 입었다고 한다. 자기 방어가 안되는 힘이 없는 노인에게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다. 요양원이나 주간보호소에 입소한 노인들의 인권보호가 정말 절실하다.

그러려면 환자들을 돌보는 요양보호사나 직원들의 소양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 심지어 자기 분풀이로 노인들을 때리는 요양보호사도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래서 집안 어르신을 피치 못하게 요양원이나 주간보호센터에 맡겨야 한다면 맡기기 전에 사전 답사를 통해 잘 알아보아야 한다.

나도 김포로 이사와서 어머니를 낮에만 보호해 주는 주간보호센터에 보내 드리기로 했을 때 김포시에 있는 주간보호센터를 6군데나 찾아갔고 시설을 둘러 보았고 센터장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에서 현재 보내 드리는 주간보호센터가 가장 적합하다고 여겨 보내드리게 되었다. 시설장의 센터운영 철학은 모든 노인들은 인생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사시다가 소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노인돌봄에 대한 철학이 좋아서 4년째 그 주간보호센터에 어머니를 보내 드리고 있다.

지난 주일아침 교회에 모시고 가려고 옷을 입혀 드리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누구예요?” 어머니는 혹 틀릴 것 같아서인지 얼른 대답을 안하신다. 그러다가 내가 재차 물었더니 우물쭈물 하면서 “나 데리고 다니는 언니지 뭐” 하신다.

내가 웃으며 대답한다. “내가 언니예요? “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신다. 내가 짓궂게 또 이야기를 건넨다. “그럼 나에게 언니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어머니는 “언니~ “ 하고 나를 부른다. 오늘 만큼은 어머니가 내 동생이 된 것이다.

우리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의 역할은 참 다양하다 오늘처럼 어머니에게 언니가 될 때도 있고 기저귀를 갈거나 몸을 씻겨 드릴 땐 어머니는 나를 또 ‘엄마’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이런 저런 지침을 해 드릴 땐 어머니는 나를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나는 매일 어머니의 상대역을 맡아 역할극을 하는 연극배우가 된다. 올해는 어머니에게 있어서 나의 역할이 또 무엇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모든 역할을 한바퀴 돌아서 이젠 “제가 누구예요?” 하고 질문하면 어머니는 “그야 사랑하는 내 맏며느리지” 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병원 전문의가 말하기를 병중에서 치매처럼 독특한 병은 없다고 한다. 모든 병은 병든 본인이 아프고 괴롭지만 치매는 본인은 아무 걱정없이 행복하고 돌보는사람만 힘들다는 것이다. 정말 꼭 맞는 말이다. 아무튼 현재의 나에게 어떤 도움도 안되는 어머니이다.

그러나 사람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것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나와 남편이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포기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의 마음에 한량 없이 부어 주시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긍휼한 마음이 감사하다. 어머니는 어제 저녁에도 주간보호센터에서 돌아와서 지치셨는지 바로 침대에 누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더니 남편 K선교사는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다가 방으로 가져갔다. 어머니를 침대에 걸터앉게 하고는 따뜻한 물로 발을 담그게 하고는 닦아드린다. 족욕은 피로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아이구~ 우리 어머니 배아파 큰아들 낳기를 정말 잘하셨다. 나야 원래 결혼 전 소원이 맏며느리가 되어 시부모님 모시면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으니 그 ‘특별한 소원’을 이룬셈이다. 어머니가 며느리인 나 없이는 못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에게도 건강한 어머니가 아닌 치매환자가 된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변장 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에 달려 있음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감사로 새해의 하루를 시작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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