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선한이웃(2)

며칠전 3월25일 조선일보에 났던 기사이다. 통계청 사회지표에 “국민 10명중 3명 집안일 부탁 못하고 50%는 몫돈 급할때 손 벌릴 지인 없어”라고 통계청 조사 결과가 나왔다. 코로나 전보다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이 생겼을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감소 했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가 어려움을 당해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을때 사람들은 절망한다. 그리고 어떤 때는 아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자신의 문제에 대한 무게가 너무 무겁고 혼자서는 해결 할 수 없을때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얼마전 제주도 해안도로에서 아우디를 몰고 가던 40대 남성이 치매걸린 노모를 싣고 바다로 돌진해서 떨어져 노모는 사망하고 아들은 살아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치매 시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나에게는 그 기사가 예사롭게 보여 지지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침에 어머니를 깨우러 어머니방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안 일어나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하신다. 팔을 잡아서 일으켜 드리려는 나에게 발길질을 하신다.

겨우 겨우 달래서 일으켜서 안다시피 식탁으로 모시고 갔다. 앞바지를 해 드리고 식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밥을 수저로 빙빙 돌리면서 먹을 생각을 안하신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남편에게 “나 돈 없어요” 한다.

밥값을 낼 돈이 없다는 것이다. 남편이 “돈 안받아요.” 하고 대꾸한다. 남편이 수저로 밥을 떠서 먹여 드리는데 어머니가 손으로 확 뿌리쳐서 숟가락에 있던 밥이 날라갔다. 오늘 어머니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데 센터에 보내 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겨우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로 모시고 가서 양치를 해 드리고 내 손으로 따뜻한 물을 받아서 얼굴 세수를 씻겨 드리고 머리에 빗질까지 다 해 드렸다. 그리고 절대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면 안된다 그냥 누워 버리려고 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거실 소파로 모시고 가서 앉히고 옷을 가져다가 하나 하나 입혀 드렸다. 양말부터 바지 쉐터 코트 모자를 씌워 드리고 어머니를 꼭 안아 드렸다. “어머니 사랑해요.” 그러자 고집 스럽던 어머니 마음이 녹으면서 순해지신다. 치매환자에겐 그저 사랑밖에 없는것 같다.

남편과 내가 합동하여 어머니를 시중들고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어머니를 겨우 주간보호센터에 가실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마스크를 씌워 드리고 신발을 신겨 드리고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를 태워 드리면 그제서야 나와 남편은 휴~ 한숨을 쉬고 아침을 먹는다.

얼마전 나는 ‘푸쉬킨의 시(诗)와 장례비’라는 수필을 써서 발표 하였다. 맏며느리로서 어머니의 장례비로 상조회에 꼬박 꼬박 9년이상이나 넣었던 것을 해약해서 지난달 생활비가 없어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은 여목사님 한분이 택배를 보내왔다. 우리가 선교지에서 사역할 때 후원해 주던 교회 담임목사님의 동생인 그 여목사님은 집안 냉장고를 다 털었는지 잡곡 양파 우거지 호두 피넛 등등을 한박스 담아서 보내왔다.

또 선교지에서 돌아와서 청주에서 유학생 사역을 함께 했던 목사님이 오랫동안 연락을 안했었는데 밴드와 카카오 스토리 등에서 내 수필을 읽었다면서 20만원의 후원금을 보내왔다. 또 경북에서 복지 사역을 하시는 한 원장님은 쌀을 한포 보내 주셨다.

우리 세식구가 10킬로그램의 쌀로 한달을 살아 보려고 하는데 늘 조금씩 부족했는데 20킬로그램을 보내 주어서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가난했던 우리들의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쌀과 연탄 그리고 김장김치만 충분하면 그겨울은 아주 행복한 겨울 이었던 추억 말이다. 뭐니 뭐니해도 사람은 먹을것이 있어야 행복한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이팝(쌀밥)에 쇠고기국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이 정말 이해가 간다.

그런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것은 한 원로 목사님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내가 ‘선한이웃’ 에서 돈을 보냈으니 확인해 보세요.” 내 국민은행 계좌엔 L원로 목사님이 보낸 돈이 백만원이나 들어와 있었다.

아니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이 무슨 돈이 있으시다고… 목사님은 나와 같은 교단 목사님이긴 하지만 원래 내가 알고 지내던 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수년전 어디선가 내 수필을 읽으시고는 팬이 되어 주셨다.

목사님 또한 조기은퇴를 하시고는 날마다 ‘힐링편지’를 써서 국내외에 보내는 일을 하고 계신 글을 쓰는 분이었다. 수년간 그렇게 날마다 힐링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나누시더니 얼마전 책을 내셨다.

목사님의 힐링편지를 받아보던 많은 사람들이 책이 출판도 되기전에 미리 미리 예약신청을 했다. 나도 내 형편을 생각하면 1-2권이나 사면 될 것이었지만 70대에 첫 책을 출판하시는 목사님을 격려해 드리고 싶어서 열권을 신청했다.

L목사님은 은퇴를 하시고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앞장을 서신다. ‘선한이웃’이라는 후원통장도 군선교를 돕다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목사님의 삶은 많은 목회자들의 귀감이 되었고, 은퇴후 살아가야할 목회자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내 생애에 가장 활동적인 나이에 선교사로 헌신하여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가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고 비자제한을 당해 고국으로 돌아와서 사는 동안 내게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 즉 ‘선한이웃’들이 많았다.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 하나는 고등학교 교사였던 남편이 직장을 내놓고 신대원을 졸업하고 선교사 훈련을 받고 있던 시절의 추억이다. 한참 학교에 다니는 삼남매 아이들이 있었을 때여서 선교사로 나간다는 결단은 참으로 쉽지 않았다.

우선 아이들의 학용품이며 학교에 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주어야 했는데 전혀 수입이 없이 우리 가족은 GMTC(한국해외선교사훈련원)에 입주해서 선교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후원을 시작했다.

‘하종선’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50만원씩 우리 통장으로 후원이 들어 왔다. 아무리 알아 내려해도 도무지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름이었다. 선교훈련을 받는 내내 후원을 해 주던 그 ‘선한이웃’은 우리를 후원할 후원교회가 정해지자 후원을 멈췄다.

우리 부부가 선교사가 된 것은 천국가서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때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해서 후회하면서”걸…걸…걸…(순종했을걸…)” 하고 싶지 않아서 모든 것을 내려 놓기로 결단했었다. 결혼생활 16년차로 엄청나게 많았던 모든 살림도 전부 남에게 주고 선교지로 떠났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었던것은 하나님께서 붙여 주셨던 이모양 저모양의 ‘선한이웃’이 있어서 가능했었다. 지난 주에도 남편이 청주에 있는 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당시의 제자가 적지 않은 십일조를 보내와서 바짝 말랐던 교회통장을 채워 주었다.

사실 우리 부부는 그동안 수년간 죽어라 기도했던 기도제목에 응답을 받아서 무얼해도 신이 나는 요즘이다. 남편과 나는 함께 길을 가다가도 마주 바라보며 씩~ 웃곤 한다. 비록 생활비가 떨어져가도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기도해왔던 기도 제목이 응답되지 않았으면 생각만해도 아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엄연한 현실이기에 생활비가 떨어지면 마음 한켠이 시려올 수 밖에 없다. 이때 나에게 손 내밀어 준 ‘선한이웃’들 때문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오늘은 유난히 아름다운 봄밤이다. 곧 목련이 필것이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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