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인생에서 미루지 말아야 할 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갔다. 남편과 큰시누이와 함께 갔다. 요양원이 있는 아파트 입구에는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녹색 나뭇잎의 가로수들이 여름을 맞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계신 행복요양원은 가정같은 요양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큰길 건너 마주 보이는 곳에 있는 아파트안에 있다. 70여평의 아파트에 토탈 9분의 할머니 어르신들이 5분의 직원들의 케어를 받으며 평안한 노후를 보내시고 있다.

나는 이제 날씨가 더워지면 어머니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어머니의 얇은 잠옷과 여름내의, 속옷, 양말등을 챙겨서 가지고 갔다. 요양원 원장님이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서 아파트 현관으로 모시고 나왔다.

짧은 커트머리의 어머니는 얼굴은 수척 하긴 하셨으나 얼굴표정은 아주 평안해 보이셨다. 코로나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 하신후 두 주 동안 내가 집에서 돌보아 드렸을때보다 어머니는 훨씬 건강해 보이셔서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인지 능력은 이젠 자녀들인 우리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셨다. 10년이나 어머니를 모시고 한집에서 살았던 내남편인 큰아들도 큰며느리인 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자 어머니는 낯선 사람을 보듯이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숙이신다.

오히려 이제 겨우 며칠간 어머니를 모신 원장님이 더 친숙한듯 어머니는 얼굴을 원장님에게 돌려 대시며 빨리 자신의 침대로 데리고 들어가 달라는 듯한 의사 표현을 하시는 것이다. 아… 이제 어머니는 자녀들조차 전혀 알아보지 못하시는 상황이 왔구나

우리를 알아 보지도 못하는 어머니와 면회가 길어질 수가 없었다. 그저 원장님에게 어머니의 현상태와 변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는 것으로 면회를 마쳐야 했다. 원장님은 “무소식이 희소식 이예요. 어머니는 저희가 잘 모실테니 안심하세요”한다.

이어서 원장님은 “한 주에 한번씩 어르신의 상태를 동영상으로 촬영해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 모신 어머니에 대한 애정으로 어머니를 만나면 반가움의 표시를 어머니가 하실 줄 알고 기대하며 가슴이 설레기조차 했었는데…전혀 아니었다.

이제 어머니는 전문 요양보호사와 간호사인 분들에게 맡기고 그야말로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해 드리는것만이 최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서 이 세상에 사시는 날까지 평안하게 사실 수 있도록, 식사 잘하시고, 배변 잘 하실 수 있도록 기도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의 첫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 나는 어머니가 쓰시던 방으로 들어 갔다. 어머니의 체취를 느껴보고 싶어서 어머니가 누우셨던 침대에 누워 보았다. 아주 편안했다. 어머니의 침대 위에 수 개월전에 깔아드린 두툼한 토퍼가 누워 있는 내몸을 감싸주어서 포근했다.

전에 어머니는 원래 방바닥에 요를 깔고 생활을 하셨었다. 그런데 내가 모시면서부터 침대생활을 하시도록 침대를 준비해 드렸다. 노인이 되어 나이가 들면 앉고 일어서는 것도 다리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침대 생활이 훨씬 편리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 개월전에 나는 두툼한 토퍼를 구해서 어머니의 침대위에 깔아 드렸다. 매트리스 자체도 푹신하기는 하지만 마른 몸의 어머니가 누우셨을때 좀더 편안하게 수면을 취하시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께 12센티미터나 되는 두툼한 토퍼를 침대 매트리스위에 깔아드리고 난 후에 나는 “어머니 어떠세요? 푹신하세요? 편안하세요?”하고 여쭤 보면 어머니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시며 고개를 끄덕 끄덕 하곤 하셨었다.

그런데 그렇게 푹신한 토퍼를 새로 구입해 깔아 드린 지 채 반년도 안되었는데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셔서 사용하지 못하게 되신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어머니가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계시던 생각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그래 참 잘했어. 그때(수개월전) 어머니 침대에 푹신한 토퍼를 깔아 드려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을때, 차일 피일 미루지 않고 즉시 실행해서 깔아 드리길 정말 잘했어. 만약 이런 저런 핑개를 대고 미루었으면 지금 나는 얼마나 후회했을까”나는 어머니 침대에 누워 이렇게 중얼거렸다.

전에 친정 아버지를 돌보아 드렸던 때도 그랬다. 청주에 사시는 아버지 집에 서울에서 매 주 운전을 해서 내려가 돌보아 드리던 때가 있었다. 친정아버지에게 무언가가 필요 하다고 생각되면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것을 구해드리거나 사드렸다.

옷이든 새 침구이든 가전제품이든 스포츠마사지의자든 무조건 우리 아버지가 좀더 편리하게 생활 하실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당시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우선순위로 사다 드리곤했다. 그때도 왠지 효도는 다 때가 있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봐 드렸는데 아버지는 그후 3년정도 더 사시다가 돌아 가셨다. 건강 하시던 친정 아버지가 뇌출혈이 일어나서 주무시다가 갑자기 소천 하신 것이다. 뜻밖의 아버지의 소천에 나는 무척 슬퍼하며 내몸에 수분이 다 빠져 나간다고 생각할만큼 많이 울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잃고 그렇게 슬퍼하던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체하지 않고 해 드렸던 나의 순발력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칭찬해 주고 싶다. “나은혜 너 그때 참 잘했어. 아주 아주 잘했어”라고 말이다.

시어머님을 모시면서도 나는 그런 자세로 모셔왔다.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지체하지 않고 구입해 드리는 습관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부모님은 천년 만년 살지 못하신다. 반드시 이땅을 자식인 우리보다는 먼저 떠나신다.

어버이날을 맞으며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한다. 네분 부모님 가운데 세분이 내 곁을 떠나가고 시어머님 한분이 살아 계셔서 남편과 나를 아직은 고아가 되지 않게 하셨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는 이제 모든 기억도 추억도 다 잊어 버리셨다.

즐거웠던 일뿐 아니라 슬펐던 일도 다 잊어 버리시고 참으로 아무생각 없이 평안하기만한 모습이다. 여러분도 부모님이 살아계시다면 오직 효도는 부모님 살아계실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마시라 전해 드리고 싶다.

부모님이 한 살 이라도 나이가 덜 들으셨을때 좋은 음식도 해 드리고 좋은 옷도 사 드리고 부모님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 드리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우리 어머니처럼 틀니조차 필요 없어지실때가 오기전에 말이다.

꼭 명심하면 좋을 것이다. 부모님이 언제나 내 곁에 살아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아직 60~70대로 비교적 젊으시다면 젊어서 자녀 키우느라 못해 보신 여행을 시켜 드리는것도 좋을 것이다.

80~90대로 연세가 많으신 부모님이라면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르시겠지만 여행 하시기도 만만치는 않으실 것이다. 무리가 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가까운 곳 나들이를 시켜 드리거나 맛난 음식을 드시도록 해 드리면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 어머니가 87세 였던 5년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비교적 긴 제주 여행을 했던 기억이 난다. 42일간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부부는 제주를 갔다. 좀 긴 시간 이기에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로 떠난 여행이었다.

완도까지 차를 몰고 가서 완도에서 자동차와 사람이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한림공원을 어머니 다리로 걸어서 두시간여 동안이나 관광하실 정도로 건강 하셨다. 아마 어머니 일생에 가장 긴 여행을 하신 시간 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제주 산방산 탄산온천욕도 하고 바다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우리나라의 해외땅인 제주도를 마음껏 누렸었다.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날로 부르다가 어버이날로 1973년에 제정 공포된 ‘어버이날’을 맞으며 우리 인생에서 절대 미루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것, 그것은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 대한 자녀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한번 더 생각해 보는 일이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세션 내 연관 기사 보기

The following two tabs change content below.

편집국

시니어 타임즈 US는 미주 한인 최초 온라인 시니어 전문 매거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