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어머니가 남기고간 신발

어머니가 한달여전에 요양원에 들어 가셨다. 그때 어머니가 신고 갔던 신발은 가볍고 편안한 구두 모양의 운동화이다. 조카가 문병 왔다가 사 드리고 간 신발인데 어머니는 주간보호센터를 다니시는 내내 그 신발을 신으셨다. 구두나 다른 신보다 가볍고 편안해서 즐겨 신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오미크론에 걸리신 후 병원에 입원했다가 돌아오신 후에 문제가 발생했다. 집에서 두 주간 동안 내가 병간호를 했지만 음식을 씹지도 못하시고 배변도 못하시는 상황이 되었다. 남편과 나는 이제는 어머니가 천국으로 가시려나보다 하고 장례준비를 하였다.

그런 절박한 상황이라서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요양원에 가시는 것이 남편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십분도 채 안걸리는 곳에 있는 가정 요양원을 알아 보았다 마침 할머니 한분이 돌아 가셔서 자리가 났다고 한다.

전부터 내가 잘알고 지내는 전직 수간호사님이 운영하고 있는 가정요양원이라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 드리는 것이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사실 내 소망은 어머니를 내가 모시다가 내 품에서 천국으로 보내 드리는 거였지만 말이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소시켜 드리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서 건강검진을 먼저 받아야 했다. 검진을 받고 휠체어에 어머니를 태워 요양원으로 갔다. 어머니를 영접하러 온 요양보호사가 어머니가 신발을 신고 오신 것을 보더니 신발을 벗긴다.

그러면서 “이젠 어르신 신발은 필요 없어요. “ 하며 어머니의 신발을 벗겨서 나에게 주었다. 어머니는 이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오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70여평의 요양원이 이제 어머니가 먹고 자고 쉬며 거처하실 안식처이다.

먹고 입고 씻고 배변하는 모든 시중을 요양 보호사와 간호사로 부터 받으면서 이젠 안식을 갖게 되신 것이다. 그동안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어머니와 들은 정 때문에 어머니와 헤어지는 그때 나는 심정이 울컥했다. 남편도 마음이 허전해 진다고 했다.

어머니를 ‘행복요양원’에 맡기고 돌아오면서 혹시나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건강이 많이 좋아 지실수도 있지 않을까…그래서 어머니가 걸으실 수 있게 된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미국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나에게 문자를 보내 왔다. “목사님 상노인 돌보다가 초노인 골병듭니다 부디 몸조심 하세요.” 처음에 나는 그말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런데 곰곰이 곱씹어 생각해 볼수록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들었던 말은 90세, 백세된 노 부모님을 모시다가 70대의 몸이 약한 며느리가 골병이 들어 먼저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며느리가 70이 넘으면 자신도 누군가에게 서서히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가 아니던가?

그런데 상노인인 시부모님을 모시다가 초로의 노인인 며느리가 지치고 골병이 들어 먼저 저 세상으로 소풍을 떠나 버리고, 늙고 병든 시부모님을 남겨 둔다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예는 차치하고 당장 나의 친정 에서 일어났던 일이니까 말이다.

우리 친정 어머니는 60세가 되던 해에 천국여행을 떠나셨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인것은 당시 89세 였던 우리 어머니의 시어머님 곧 나의 할머니가 먼저 돌아 가시고 나서 꼭 6개월만에 우리 어머니는 소천 하셨다.

위암말기의 중증 환자인 어머니는 해골처럼 바짝 말랐었다. 그런 몸을 가지고 어머니는 중풍에 걸려 모든 시중을 들어 주어야 하는 시어머니를 돌봐 드려야 했고 아버지에게 밥을 해 주어야 했다. 지금 같으면 언감생심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각각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계시면서 돌봄을 받다가 편안하게 이세상을 떠나시게 해 드렸어야 했다. 하지만 30여년전 그때는 장기의료보험도 되지 않던 때였으니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무조건 가족이 돌보아야 했다.

암병환자 내 친정어머니가 중풍병자 할머니를 3년간 돌보아 드리다가 할머니를 먼저 천국에 보내 드린 후 어머니도 몇개월 후 이 땅을 떠나셨다. 그런 우리 어머니는 효부중에 효부 이셨다. 나의 어머니는 그처럼 일생을 지극한 희생으로 사셨던 분이다

다시 내 이야기를 해 보자.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돌보며 간병할때는 늘 긴장하고 살아선지 아파도 아픈줄 모르고 스트레스가 쌓여도 쌓인줄 모르고 살았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 가신후 내가 그동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머니를 모시는 짧지 않은 십년여의 세월에 나에게 ‘사랑의마음’이라는 큰 은혜를 주셨다. 특히 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시기전 최근 몇달은 더욱 간절히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에게 부어 주셨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병간호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먹여 드리고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켜 드려야 하는 매일 계속되는 그런 간병하는 힘든 일이 마냥 즐거울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웃으면서 마음을 다하며 친절하게 어머니를 돌보아 드릴 수 있었다.

나는 미래를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예지하는 은사를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지난 몇달 동안 나는 어머니와 이렇게 함께 살 날이 길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종종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더욱 잘 해 드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긍정적인 나의 마음 가짐 덕분에 어머니도 나도 행복했고 그런 고부지간을 지켜 보는 남편도 고마워 하고 마음 편안해 했다.

아들로서 자신의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시종 웃으며 잘 돌보아 드리는것처럼 고마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남편은 종종 나에게 “나는 당신처럼 못해 어머니가 저렇게 바보처럼 있는것이
화가나서 어머니께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워 지는데…”라고 했다.

아무튼 이제 어머니는 내 보살핌에서는 떠나셨다. 국가의 복지혜택의 도움으로 우리 어머니는 웬만한 시설좋은 실버타운 입소하신 것 만큼 들어가는 매달 200만원 이상의 비용을 쓰면서 마지막 인생의 시간들을 편안하게 보살핌 받으면서 보내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 가시고 난 후 나는 멍하게 며칠을 쉬었다. 며칠 후부터 정신을 차리고 나는 어머니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요양원에 들어 가시면서 남기고 간 어머니의 신발을 빨았다. 솔로 비누를 묻혀 깨끗하게 빨아서 햇빛에 말리면서 우리 어머니가 이 신발을 다시 신으실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어릴적에 봤던 일이다. 동네 어른들이 어느집에 마실을 가면 그집 며느리는 놀러온 동네 할머니들의 신발(대개 하얀고무신)을 걷어다가 짚수세미에 비누를 묻혀서 하얗게 닦아서 댓돌에 나란히 세워 물을 빼고 말려 둔다.

마실을 와서 놀고 나오는 시어머니의 친구분들은 그집 며느리가 깨끗하게 닦아놓은 하이얀고무신을 신으면서 기분이 좋아 입이 헤벌어진다. 그러면서 왁자지껄 그집 며느리 잘들어 왔다고 칭찬을 해 댄다.

나는 어머니의 신발인 운동화를 솔로 닦으면서 어렸을때 보았던 그 장면을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가 만약에 이 신발을 다시 신으실 수 있게 된다면 깨끗이 빨아서 말려논 신발을 신으시면서 꼭 한마디 하실것만 같다. “그 뉘집 며느리인지 며느리 한번 잘 들어왔네” 라고 말이다.

오늘도 내가 깨끗이 빨아서 말려논 어머니의 그레이색상의 편안한 신발은 댓돌 위가 아니라 신발장 안에서 자기 주인을 그리워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신어줄 주인을 기다리면서 어머니의 회색빛 운동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것만 같다.

“할머니 나를 이 컴컴하고 답답한 신발장에서 어서 꺼내 주세요. 밝은 햇빛과 신선한 공기, 그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초록의 나무들과 꽃이 피어 있는 공원을 다시 자유로이 걷고 싶어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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