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수 칼럼] 10.26에 되돌아 보는 박정희 대통령과 앞으로의 사상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난지도 벌써 43년이 흘러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갈망했던 대망의 80년대도 이제 기억에서 살아지고 있는데, 그동안 43년이 흐르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염원했던 민족중흥과 조국의 근대화는 이제 이루어지고 바야흐로 한국은 또다른 새로운 역사를 갈망하며 현재에 와 있다.

현재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중흥과 조국의 근대화 사명을 이어받는 어떠한 중심적 사고체계는 아직 안나와 있으며 김영삼 대통령때 세계화가 주창되었는데 이 이념이 현재로서는 제대로 계속 고취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세계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의 근대화를 통한 민족 중흥을 이어받아 한국이 세계로 나아간다는 표어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때에는 약간 시기상조라는 느낌도 들을 수 있었는데 현재의 상황으로는 매우 맞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한국의 지도세력은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중흥을 이을 어떠한 새로운 표어와 철학을 내놓을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과거의 회상을 통한 결집적 생각의 추론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과거, 즉 박정희 1961년 후부터의 역사와 함께 근 최소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완전히 이해함으로서 완전한 결론이 나올 수 있겠다 하겠다.

어쩌면 이러한 너무 큰 구도로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너무 결론을 추론시키지 못하는 방법론이랄 수도 있겠으나, 어느 형태로든 과거의 완전한 이해 없이는 어떠한 미래로의 전진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수개월, 수년, 오히려 10년을 넘을 수도 있고, 오래 생각하고 또 그 결론의 도달을 위한 작업의 노력정도가 그 작업완수의 기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작업은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주제가 너무 벅차 어느 정도 그 주변 정도에만 도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너무 지나치게 원형의 둘레에서 계속 맴돌지 말고 중심적으로 차근차근 구체적 역사 안건의 중점사안을 들여다 본다면, 박정희 시대의 역사는 어느 면으로 보나 국가 건설이라고 요약될 수 있고, 이것이 충분히 자신만의 자구적인 과거의 자아탈피에서 벗어난 미래를 향하는 자구적 행동 고취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즉, 지난 100년간을 보면, 다시 말해 일제시대의 시작부터 본다면, 조선 말기 정약용 등의 실학이외에는 어떠한 자구적인 철학적 사고개조의 시도가 없었다고 할 수 있고, 일제시대때 무장항일운동이 이러한 면에서 자구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근본적 이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 중흥, 조국의 근대화야말로 지난 100년간 동안의 유일한 자구적 자아변화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군사혁명을 하기 전에 어떻게 이러한 사고를 갖게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육사시절에 일본 공업지대를 돌아보며 그때부터 이러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것도 사실일 수 있으며, 그렇지만 더욱 뚜렷하게는 1953년 육이오가 끝나고 어느 정도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후의 재건설을 하면서 어떠한 근대적 공업발전정책을 필 것이라고 박정희 당시 육군 장교를 포함하여 한국의 지도층 세력이 기대했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후 폐허속에서 재건설을 하였으나 어떠한 체계적인 광범위한 공업화 정책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궐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어느 정도 공업화의 필요성을 느꼈었겠으나, 즉 미국측에서 당시 냉전으로 들어가면서 일본의 공업 상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여기서 주변 국가들의 참여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한국의 연이은 공업화가 거론되기 시작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한 원한감정이 사묻혀 있어서 끝까지 일본과의 공업화 협조를 거부했다는 것이 지금 정설로 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개인적 원한을 묻고 미국의 제안으로 일본과의 공업화 길에 나섰다면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의 군이 궐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도 추론할 수 있겠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요한 미국의 공업화 시행 요구에 끝까지 거부하였고 1960년 4.19 의거로 하야하고 만다.

여기에서 본다면 반드시 미국의 공업화 제안이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혁명으로 이어졌다고만도 볼 수 없다.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 이하 여러 장교들이 한국의 한국만의 자체적 공업화 노력을 염원하였을 것이고, 계속하여 아무런 공업정책없이 분단국가에서 북한의 위협속에 농업국가로 남느냐는 갈림길에서 서서시 한국의 지도층은 공업화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반대하면서 하야하고 이에 등장한 장면 정권도 제대로 추진 능력을 보이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의 확고한 실천 능력이 있는 군이 궐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한국 당시의 역사를 보는 중심 역사관이 있고, 박정희 개인의 개인사를 떠나 구체적인 더 넓은 국가적 시관으로 역사의 당위성을 추론할 수 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 당시 40대 초중반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에 또한 군이라는 가장 능력있고 추진력있는 세력이 똘똘 뭉쳐 사회 지도계급으로 나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5.16 혁명의 원인과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여기에서 시작하여 20년이 흘러 10.26으로 박정희 시대가 마감하고 이를 이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마지막 민족중흥, 조국의 근대화 작업이 완수되가면서 현재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통상적 한국 현대사 흐름의 이해이다.

그렇다면 현재에 이르러서 앞을 내다보면서 민족중흥, 조국의 근대화를 잇는 새로운 이념을 발굴해야 한다는 곡점에 이르게 되는데, 만약 민족중흥, 조국의 근대화도 당시의 시대적 필요를 따르는 커다랗게 현묘한 이상적 사상이 아니더라도 다분히 통상적으로 전체적으로 흡사 보편화된 이념을 찾는 것도 그리 커다랗게 탈이적 사고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중흥, 조국의 근대화를 이을 수 있는 사상으로, 이전에 발표되었던 세계화와 유사한, 지속적인 세계로의 성장, 세계와 함께 하는 중견 국가, 세계 7위권 진입, 그리고 더욱 성찰적인 자아육성과 한국사상의 개발이라고 그 결론 지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민족중흥, 조국의 근대화를 이을 수 있는 사고이다.

물질적으로는 세계 7위 국가가 되는 것, 경제적인 면에서 이를 달성하는 물질적 이외에도 정신적으로도 당위성이 다분하고 다음 단계에 완전히 부합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지속적인 성장으로 세계의 중견국가가 되는 것은 경제 목표 달성을 이루면서 함께 동반 성취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는 성찰적인 자아육성과 한국사상의 개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신적 발전이야말로 진정한 중견국가의 도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 유교의 재발견과 조선의 성리학 발전의 재고찰이 될 수 있고 이러한 문화적 부흥이야말로 진정한 새로운 사고체계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체계적 사고의 진전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중흥, 조국의 근대화를 잇는 비로소 그 대업의 완수와 승계에 있어서 이에 부합하는 한국적 사고발전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김태수 국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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