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을 떠나 보내며…
지금까지 여러 칼럼을 쓴 가운데 돌아가신 분을 대상으로 글을 쓴 적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코로나에 감염되어 누명을 달리한 친구 정인영(60) 목사(남아공 대신 선교사)이고 또 하나는 아프리카 가나로 단기 선교를 하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맹견에게 봉변을 당한 이순영(29) 선교사(NGO)이다.
두 사람은 자기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못다한 일들을 남겨둔 채, 너무 일찍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 곁을 황망히 떠나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워 필을 들었었다.
이번 칼럼의 주제는 얼마 전에 작고한 필자의 바로 위, 형님 김성태(65) 목사님인데 이런 글을 한국에 들어와서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이 역시 그날이 너무 일찍 온 것 같아 마음 아프기 이루말 할 수 없다. 고인은 오래전 심장 스텐드 시술을 받았었는데 그 후로도 한국에 나올 때마다 만났고 동생에게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아서 건강히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부고 통보를 받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나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 는 진리 앞에 다시 한번 숙연해지며 흔히들 “품 안의 자식”이라 “클 때 형제”라고 하는데 인생의 황금기를 해외에서 보낸 선교사로서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6형제 중에 막내인 필자는 형과 보낸 시간이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아버님은 농사일을 하시면서도 매일같이 소전을 다니시며 소를 사 오셨기 때문에 집에는 늘 소들이 있었고 가끔 이웃집 외양간을 빌릴 때도 있었다. 특히 방학 때는 이 소들을 돌보는데 많은 정성을 쏟았다. 여름에는 소를 몰고 지게를 지고 나가서 풀이 많은 곳에 소를 메 놓고 뜯어 먹게 하고 소 풀을 베어 잔뜩 한 지게를 만들어야 집에 올 수 있었다.
한번은 낚시대를 지게 속에 숨기고 지렁이를 잡아 뒷산 넘어 연못으로 가서 낚시를 하다가 아버님에게 들켜서 야단을 맞기도 했고 어떨 땐 붕어 몇 마리 더 잡으려다가 늦어서 허겁지겁 풀을 뜯어 저물어서야 집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겨울 방학에는 어머님과 두 형제가 산에 나무하러 많이 다녔는데 그 시절에는 화석연료가 전부인 때라 거의 민둥산들이어서 달 볼지 산을 넘어 연화산 쪽으로 멀리 가서 나무를 해 오기도 하였다. 언젠가 고향에 가서 둘러 보았는데 조그만 동네가 나무와 숲이 우거져서 썩어가고 길이 없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인 것을 보고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은 동네 어른들이 형제가 지게에 잔뜩 나무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누가 했냐? 대견하다는 듯 물으시기도 하였는데 그분 눈에는 중고등 학생의 힘과 실력으로 이런 큰 나뭇짐을 꾸린다는 것이 믿기 지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고 하여 소가 많은 우리 집에는 나무가 많이 필요하여서 어머님도 나무하러 자주 산에 가셨는데 가끔 약 먹은 장끼(수꿩)를 주우셔서 성태야! 현태야! 흔들어 보이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생각이 나고 혼자서 들지도 못하는 그 무거운 나뭇단을 머리에 이시고 총총걸음으로 구절양장(九折羊腸) 험한 산을 내려 오시던 어머님의 뒷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기가 귀했던 그 시절에 어머님께서 끓여 주신 꿩 고깃국보다 더 맛있는 것은 아마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
나의 외할머니 이봉순 권사님…
소 얘기를 계속하면 외할머님(이봉순 권사)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외할머님은 윤씨 집안에 시집오셔서 남매(선균, 무균)를 나으신 후에 홀로 되셔서 청상과부로 사시며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일생을 기도하며 한 많은 인생을 신앙심 하나로 사신 분이시다. 헌금을 준비하실 때 구겨진 종이돈을 다리미로 깨끗이 펴서 헌금하셨던 일화를 설교시간에 간증하곤 했는데 그것을 기억하며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외할머님은 소에 매달리는 가족들이 안쓰러우셔서 작정하고 내려오셔서 한 손 거드시곤 하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풍로, 겨 불로 소죽을 끓이셨는데 지금은 골동품이 되었지만, 오른손으로 풍로를 돌리고 왼손으로 계속해서 겨를 뿌려 주어야만 불이 올라오는데 죽이 끓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두 손의 발란스가 잘 맞아야 하는데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을씨년스러운 날에도 아침마다 풍로 소리가 어김없이 들리고 늦게 일어나 밖에 나가 보면 외할머니 얼굴이 거의 벌겋게 익으실 정도인데도 힘든 기색도 없이 매일같이 그렇게 하시며 당신께서 딸네 집에 오셔서 힘이 되어 주시는 것을 그렇게 보람으로 여기셨다.
외할머님은 어린 우리 형제를 모아 놓고 예배를 자주 드리셨고 특히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종기와 부스럼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많아서 요즘 용어로 치유사역을 하셨다. 찬송가 찾아라!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하소서” 이것이 할머님의 18번이었는데 할머니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형이 곧바로 이 찬송을 부르곤 하여 셋이서 한바탕 웃기도 하였다.
이 찬송을 부른 다음에 할머니가 온 세계를 위해서 그리고 온 가족과 일가친척을 위해서 기도하신 다음에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머리나 종아리에 진물이 멎고 며칠 내로 감쪽같이 치료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였다. 철없던 적에는 할머니의 끝없이 긴 기도가 엄청나게 지루했었고 엎드려 잠이 들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외할머니 이봉순 권사님은 우리가 먼 거리의 교회를 다니는 것을 여간 안쓰러워 하지 않으셨는데 기도하실 때마다 “교회 가까이 살게 해 달라고“하는 기도를 빼놓지 않으셨고 진동의 은사를 받은 할머니께서 새벽마다 손을 얹으시고 흔들어가며 기도하시는 것을 다 느낄 수 있었으며 우리 형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신 것을 잊을 수 없다.
그 시절 우리의 놀이와 게임…
과거에는 요즘처럼 게임기나 핸드폰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집에서 모이면 그림이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사람 찾기 놀이도 하고 끝말 이어가기도 하였고 밤에는 손으로 동물 모양을 만들어서 그림자 놀이를 하였는데 호롱불 앞에서나 가능한 놀이였다. 특별히 형과는 웃기기 게임을 하며 이상한 표정과 소리를 내는데도 안 웃으려고 하다가 서로 폭소가 터지기도 하였다.
가수 이름, 목사님 이름 대기 놀이…
한번은 형과 가수 이름 대기를 하며 놀았는데… 김정구, 나훈아, 남진, 송창식, 조용필, 김부자, 이미자, 하춘하~ 옆에서 아버님께서 보시고 야! 이놈들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목사님 이름 대기를 해야지 가수 이름이 뭐냐?
엄하시고 고전적인 어버님께서 호통을 치시면 형과 그 자리에서 히히덕 거리며 목사님 이름대기 놀이를 하였었다. 김기수 목사님~ 신현균 목사님~ 허복부 목사님~ 허경필 목사님~ 남주석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 조영제 목사님~
그 당시에는 목사님도 많지 않았고 또 아는 목사님도 많지 않았다. 더구나 시골 문수교회는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시내에서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 인도를 하셨으며 목사님이 귀한 시절이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며 놀았던 형제가 커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다. 이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교회와 종들을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부모님의 헌신과 기도, 또한 가난했던 시절, 믿음의 눈이 먼저 떠져서 주의 종, 전도사의 길을 걸어가신 장녀 김수영 권사님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고 믿음의 시조, 안나 선지 같은 외할머니 이봉순 권사님의 사력을 다한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친 손들 중에는 공정거래 분야 세계 최고의 권위자이며 가문의 자랑인 형님, 윤세리 변호사가 나올 수 있었다. 이분들의 고마움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본향 교회를 개척하며…
고인과는 남다른 시간을 보냈는데 형님이 총각 전도사로 인천에서 개척 교회를 시작할 때 동생이 창립 멤버이자 첫 교인이었고 주경야독 신학을 하면서 전도사 사역을 이곳에서 하게 되었다.
장례 마지막 날 형을 보내면서 주일 예배시간에 형제가 목놓아 불렀던 찬송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를 눈물로 부르며 고인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추억하며 보내 드렸고 많은 분들이 눈물로 함께 부르셨다.
장례를 모신지 한 주가 지났는데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일찍 가시리라 생각지도 못했고 가끔 한국에 나오면 자주 만나지 못해도 그래도 한편으로 든든함이 있었는데 이젠 한쪽에서 허전함이 밀려온다.
필자를 더 슬프게 만드는 것은 가까이 계신 분들이 한분 두분 떠나가시고 만날 분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는 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누구나 이 세상에 왔으면 떠나야 하는 것을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필자가 선교지에서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말이 있는데 옮겨 적어보며 글을 맺고자 한다.
“여러분!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 만날 준비 되어 있습니까?”
형님의 장례를 모시면서 바쁘게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어서 한편으로 감사하게 된다. 이제는 우리가 선포한 말씀과 들은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 실천하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큰 과제와 사명으로 남아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남은 유가족분들을 위로해 주시고 이길 힘을 주셔서 아버지의 믿음과 못다한 사명을 자녀들이 이어받아 훌륭한 믿음의 가문을 계속해서 세워가기를 바라며 기도드린다.
2024년 08월 20일 남아공 김현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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