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사명 – 누워서도 피는 꽃

C국에서의 일이다. 아침 산책을 나섰다. 한참을 걷다가 신기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내게 그 장면은 매우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쓰러져 있는 한 나무의 모습 이었다. 내가 그 아침에 본 그 나무는 비록 완전히 누워있었지만 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지역은 바다가 있어선지 태풍이 심하게 불 때는 정말 대단하다.

작년에는 태풍이 아파트의 유리창을 강타해서 유리창이 깨진 집도 여러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가의 쇠로 만들어 세운 전봇대가 거의 전부 뽑혀져 일렬로 드러누워 있기도 했다.

그런 지역이다 보니 올해도 태풍이 왔다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거친 태풍과 비바람에 견디지 못했나 보다. 나무가 뿌리를 아직 깊게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급기야 쓰러지고 말았나 보다.

그런데 신기했다. 그 나무는 그렇게 누운채로 꽃을 환하게 피우고 있었다. 꽃나무가 누워서 꽃을 피웠다고 꽃이 부실하거나 약한 것도 아니었다. 완벽하게 튼실하고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워내고 있었다.

나는 산책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그 나무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 나무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나의 관심어린 시선을 받자 그 나무는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꽃을 피운 나무는 별 수 없이 누워서 말했다. “저 좀 보세요. 저는 사명을 다하고 있는 중이예요. 비록 나의 근원인 나무가 비바람에 쓰러져 누워 버렸지만 저는 포기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내게 그 꽃나무가 그렇게 속삭였다. 나는 그의 속삭임을 듣고 곧바로 수긍해 주었다. “그렇고말고… 정말 대단한 일이야. 내 생전에 누워서 꽃을 피운 나무를 본 것은 네가 처음이야. 정말 훌륭해. 아주 멋있어. 내가 너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줄게”

내말을 듣자 체리 빨강의 예쁜 꽃잎이 더욱 흥분한 듯 빨개졌다. 나는 산책을 하던 중이었으므로 그 나무와 작별을 고하였다. 마지막으로 그 나무가 말했다. “내일도 와 주시는 거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저 평범할 수도 있는 이 광경이 왜 나에게 이런 큰 감동을 준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금 내 주변에 누워 있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힘으로 설 수 없는 많은 사람들 말이다.

사법정변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고사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내 기억 속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태풍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진정 원치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태풍에 쓰러져 누운 나무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바로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나무는 태풍을 탓하지 않았다.

자신을 일으켜 줄 사람이 빨리 나타나지 않는 것을 원망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대신 나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었다. 비록 누웠으나 아직은 흙속에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을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는 눕혀 있는 뿌리로 힘껏 수액을 빨아 들였다. 그러자 꽃을 피울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 나무는 예쁜 꽃을 피워 내었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피워낸 꽃은 나무가 서서 꽃을 피운 것 보다 더 예쁘고 더 고왔다.

나에게 감동을 선사해 준 누워서도 꽃을 피운 나무는 분명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서서 다닐 자유를 박탈당하고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준비된 나무가 아니었을까..

누워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꽃을 피운 나무를 사진에 담아 놓고 돌아오는 내 발걸음이 산책을 시작할 때 보다 더 가벼워져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희망’ 이었다. 영어의 몸이 된 사람들에게 전해 줄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한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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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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