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감사라는 치료제

연일 머리가 띵하다. 꼬집어 아픈데는 없는데 뭔지 모르게 머리가 맑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 답답하게 느껴진다. 외부의 소리도 깨끗하게 들어오지 않고 약간의 공명 상태에서 들린다.

위의 증상들은 총선이후 나에게 나타난 징후 들이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나라 걱정이 많았으며 또 간절한 마음으로 이번 총선에서 자유우파가 승리하기를 소망했었는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총선에서 보수가 승리해야 나라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화 된다는것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현정권을 지지하는 혹자는 나에게 말한다. “이나라 공산주의 안되요. 걱정마세요. “

그런데 그렇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고 믿고 싶은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역사를 알고 공산주의를 체험해 본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는다.

얼마전 천주교인 이셨던 85세의 강남수 베드로님께서 나라를 위해 금식하던중 24일만에 소천하였다. 그 소식을 접하고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분은 일생 경찰공무원으로 살았고 공의와 정의가 무엇인지 아는 분이었다.

이 정권의 실정으로 나라의 안보와 경제가 그대로 무너져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기가 그분은 매우 괴로웠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평생 신앙생활을 해 왔던 천주교의 특히 신부들의 지나친 좌경화에 가슴 아파 하다가 노구의 몸을 구국제단에 바치기로 결심을 한것이었다.

자녀들 다 키우셨을 것이고 이제 손주 손녀들 커나가는 재미를 느끼면서 남은 여생 평안히 사시다가 수를 다하고 가실 수 있는 여건이었다. 그런데 강베드로형제님은 자신을 버려 후손들이 복되게 살아갈 자유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을 택하신 것이다.

강베드로 형제님의 행동은 신앙이 없다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결단이다. 살고자 하는 생명에의 욕구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욕망인데 그것을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천국을 믿는 신앙심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90세가 넘으신 나의 시어머님은 손톱 하나를 깎아 드릴때도 얼마나 겁이 많으신지 다칠까봐 순식간에 손을 잡아빼곤 하신다. 그래서 오히려 날카로운 손톱깎이 날에 손톱밑을 찢어 피가 나거나 할때도 있다.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나는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어서 많은 기억을 잃고 살아도 인간 본연의 생존에 대한 욕구는 그대로 생생하시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인 우리가 죽을때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 아마도 살고자 하는 생존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생명은 생명자체를 잃어서 없어지는 것도 있겠지만 생명의 정도가 건강한가 아닌가로도 구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아파서 입원을 한 후 병은 낫지 않고 세월만 보내는 아픈 생명도 있으니 말이다.

의료사고후 수년간을 식물인간으로 지내다가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은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꽤 여러사람을 보아 왔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아픈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럴경우 돌보는 사람이 더 힘들다.

어떻게 보면 아픈 사람은 병원 침상에서 아픈일 밖에 할일이 없지만 환자를 돌보는 가족은 일상 사회생활을 해 나가면서 병든 가족을 돌봐야 하니 훨씬 더 고통스럽고 힘든것이다.

내 주변에 목회자 지인 가운데도 병든 노모를 돌보느라고 아예 목회도 접고 병원에서만 보내는 목회자들이 몇명이 있다. 나를 비롯해서 많은 60-70대 자손들이 80-100세의 부모님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사람 따라서 아예 처음부터 여건이 안되는 상황에서는 요양원에 부모님을 입원시켜 놓고 가끔씩 면회하면서 지켜 봐도 될 것이다. 그런데 노인들 가운데는 자신이 요양원에 가길 원하지 않는 분이 의외로 많다.

나라를 위해 걱정하고 몸으로 투쟁하는 분들의 평균 연령은 아마 60대 중후반 아니면 70대일 것이다. 태극기 집회가 매주 토요일마다 열렸던 광화문에 나가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젊은시절 나는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가장 큰 가치를 두었다. 그래서 선교사가 되었다. 한참 사춘기인 세아이를 데리고 97년 당시만 해도 많이 낙후되어 있던 C국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어 들어갔다.

정치엔 관심이 없었을뿐 아니라 대선에만 참석했고 총선은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나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복음 전하는 일만 잘하면 우리 나라는 정치의 은사를 가진 이들이 잘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선교지에서 가끔 고국에 들어오면 우리나라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이 선교사로 나가기 전보다 훨씬 더 피부로 느껴졌다. 공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면 우리나라 영업용 택시가 얼마나 좋던지 아~ 하고 감탄이 튀어나왔다.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도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나라 구석구석을 보며 우리나라가 참 자랑스럽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아마도 낙후된 선교지에 살다가 오니 더 극명하게 대비되어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우리나라가 헬조선 이라는 것이다. 누가 퍼뜨린 말인지 이제는 알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처럼 살기 좋은 우리나라가 헬조선 이라니…

시간이 지나면서 대한민국을 헐어내려는 여우들이 여러가지 그럴듯한 너울을 뒤집어 쓰고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정체는 정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아마도 3년전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내마음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투쟁적인 마음이 되어간것은… 수도 없이 금식하고 기도했다. 아마도 우리 부부가 일생 살면서 가장 많이 금식 기도 하느라고 밥을 안먹은 때가 있다면 바로 지난 3년 동안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문학적 감성으로 수필이나 소설같은 글을 쓰던 내 마음이 많이 메말라져서 문학적인 글을 쓰기가 힘들었다. 글을 써도 정치에 관련한 시사적인 글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수개월간 차라리 글을 쓰지 않고 지냈다.

그러다가 우한발 코로나 19 사태를 맞이했다. 대구에 사는 큰딸네 집에 어린이 집에 못가고 집에서만 지내는 외손녀 로아를 위해서 택배를 보내기 시작했다. 매 주 하나씩 택배를 보냈다. 소소한 것들이지만 로아도 딸도 무척 기뻐했다.

그때부터 다시 문학적 감성이 살아나면서 나는 “택배를 기다리는 아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썼다. 물론 내가 보낸 택배를 받고서 기뻐하는 외손녀 로아의 모습을 담은 글이다.

그런데 그 글을 읽은 큰딸이 카톡을 보내왔다. “나다르크에서 이제 선교문학작가로 돌아오신 엄마 반가워요 그리고 축하드려요.” 그 카톡을 받고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래 이제 3년간이나 조국을 위해 살았으니 이제 다시 목회와 선교회활동에 집중하자. 내 본연의 길을 가야지. 젊었을때는 나라 귀한줄 모르고 모든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선교지에서 돌아와보니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지 얼마나 귀한지를 더욱 깨닫게 되었다.

나를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선교문학의 글을 좋아하고 지원하던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진심을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크리스천이면서도 주사파정부를 지지하는 이들은 나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복음을 믿는다면 그럴 수는 없는데…

하지만 나는 비록 후원이 다 끊어져서 빚을 내어 살면서도 내나라를 위해 죽어라 기도하고 애국운동에 동참하고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올바른 정보들을 보내 주며 애국운동을 했던 시간들이 자랑 스럽다.

젊은시절 정치에 너무 문외한이었던 나를 대신해 다른 사람들이 대신 싸워 주었기 때문에 내가 자유대한민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이런 나라사랑 열정에 대해 말없는 내 자녀들에 대해서도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애들 나이때엔 그랬으니까 말이다. 하루 하루 어린 아이들 치닥꺼리 하기 바쁘고 관심사가 나라 돌아가는 일에 있기 보다 친구관계며 개인적인 이상과 비전을 성취 하는 것에 있을 나이니까 이해한다.

우리세대가 가고 지금의 자녀들이 기성세대가 되었을때 그때 자녀들은 자신들의 후손이 살아갈 나라를 걱정하면서 애국운동에 올인하게 되겠지. 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매우 느긋한 마음으로 젊은 세대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나의 건강의 적신호는 무언가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우선 생각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호락 호락하지만은 않을것이라는 믿음을 갖기로 했다.

기도의 사람들이 많은 한국교회가 있는 대한민국이 결코 월남처럼 되거나 베네수웰라 처럼 되거나 그리스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더 눈을 크게 뜨고 정세를 살피며 기도해야 한다.

건강을 잃고 일찍 죽으면 내가 이처럼 사랑하는 자유대한민국이 선진대국이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한국교회가 선교대국을 이루는 것도 보지 못할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나의 삶에 큰 기쁨을 선사해준 우리 로아가 장성해서 결혼하는 것은 꼭 보고 싶다.

딸은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곤 “엄마 걱정마세요. 로아 대학만 졸업하면 바로 결혼시키지 뭐” 한다. 그래 그래주렴 우리 로아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또 얼마나 이쁠까 내겐 증손주가 될텐데…

아… 그러려면 내 건강 이제부터라도 잘 지켜야겠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라고 하지 않던가. 심기일전 새로운 마음으로 현실을 바라보자. 내가 잘하는 일을 하고 마음에 평안을 회복하자

그렇게 결심하고 새벽기도를 나선 날 나는 남편에게 한마디 건넸다. “여보! 참 감사하지 않아요? 내가 짓지 않은 집에 살고 있고, 내가 심지 않은 저 소나무, 저 꽃들… 내가 깔지 않은 보도블럭을 매일 걸어다닐 수 있고… 내가 한게 아무것도 없는데 난 억수로 누리고 사네요”

감사를 회복한 그날 새벽부터 나의 건강도 서서히 좋아지고 있다. 두 주간이나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먹었어도 없어지지 않던 증세도 점차 완화 되어져 가고 있다. 요즘 나의 삶의 모토는 무조건 ‘감사’이다. 감사는 모든 연약함의 치료제이니까 말이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6)”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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