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훈 칼럼] 인종차별과 복음

여승훈 목사(남가주 보배로운교회)

지난 3월 16일에 아틀란타의 어느 스파에서 로버트 애런 롱이라는 21세의 백인 청년이 아시아인 혐오 발언을 하며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해서 8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한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인들에게는 이번 사건이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에 기인한 증오 범죄는 매년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증오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와 각 단체들이 여러가지 대책들을 제시 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것 같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인종차별의 문제 해소를 요구하는 흑인 민권운동이 시작 되었지만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의 문제는 여전히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관계로 인종차별에 대한 목소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한가지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소리 입니다. 오늘은 인종차별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을때 북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B.C 722년에 이방나라 앗수르에 의해 함락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 군대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을 추방 하였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사람들을 북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게 해서 살게 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에 들어온 앗수르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혼을 하는 케이스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앗수르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half는 앗수르 사람이고 half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남 유다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을 혼합시켰다는 이유로 그들을 경멸하였습니다. 남 유다 사람들은 순수한 유대인의 혈통을 지킨 자신들이 진짜 유대인이고 북 이스라엘은 진짜 유대인이 아니라고 조롱 하였습니다. 남 유다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하는 말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 하였습니다.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남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표현할때는 유대인의 혈통을 혼합시킨 북  이스라엘 출신이라고 조롱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 1세기때 유대인과 사람리아 사람간에는 깊은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 입니다.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대답을 주는 대신에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 되어 있느냐고 역으로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을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Luke)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And he answered,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율법사의 대답은 십계명의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즉 율법사는 율법이 요구하는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사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Luke)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And He sai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율법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있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율법사에 대해 무엇을 알수 있습니까? 율법사는 율법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율법을 실천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했던 내용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Luke)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And a lawyer stood up and put Him to the test, saying, “Teach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율법사는 유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 지도자 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공식적인 직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러 갔었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올바른 것인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역 질문에 율법사는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율법이 무엇인지를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대답을 들으시고 ‘이를 행하라’고 말씀 하신것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인가 행하여야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 진리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일관되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신것은 어떤 의미 입니까? 영생을 얻는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데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신것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행함을 요구하는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행함을 요구하신것은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영생을 얻은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 하신 것입니다. 즉 율법은 잘 알면서 행함이 없는 율법사의 위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간접적으로 포인트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신것은 율법사가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모든 인종 사람들에게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입니다.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사랑 하듯이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진지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관대하게 사랑 하듯이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관대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편견없이 사랑 하듯이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편견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은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 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번 인종차별의 사태를 바라 보면서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태도는 어떠 하였는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사가 마음의 무거움을 느꼈습니다. 29절 말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Luke)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But wishing to justify himself, he said to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율법사가 이를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를 방어하는 모습 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 받을때 본능적으로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한 방어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가깝게는 우리의 이웃으로 부터 멀리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편견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도 한인 커뮤니티 안의 사람이든지 아니면 다른 인종의 사람이든지 조금의 차별과 편견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율법사가 자기를 정당화 하기위하여 흥미로운 질문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Luke)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But wishing to justify himself, he said to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율법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웃의 개념으로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사가 생각하고 있던 이웃의 개념속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이웃의 개념을 설명 하신 것입니다. 즉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사의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개념을 깨뜨리는 도구로 사용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맞아서 쓰러졌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에 위치해 있었고 여리고는 해저 400미터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험준한 산골길로 강도들이 종종 나타나곤 했었습니다. 

강도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 앞을 세 종류의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해서 다른 길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정성껏 간호해 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역 질문을 하였습니다.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Luke)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proved to be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robbers’ hands?”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정답은 사마리아 사람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질문 하시는 포인트를 잘 캐치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신 포인트는 단순히 세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인가가 아니라 율법사 너가 어떻게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어줄수 있겠는가 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포인트에는 강도 맞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돌보아 주어야 된다는 도덕적 선행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이 비유의 말씀을 도덕적 선행에 초점을 맞춘다면 성경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하신것은 도덕적 선행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강도 맞은 사람이 유대인이었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서로 상종을 하지 않는 관계였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 바운더리를 깨뜨리고 강도맞은 유대인을 도와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종의 바운더리를 깨뜨리고 모든 인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종차별을 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인종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줄수 있습니까? 인종의 바운더리를 깨뜨리고 그들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므로 그들의 이웃이 되어줄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다 같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한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한 형제들이라는 인식을 하면 틀림없이 차별은 없어질 것입니다. 총격으로 8명을 숨지게 한 로버트 애런 롱은 목사 아들 입니다. 

만약 로버트 애런 롱이 총격을 가한 사람들을 같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한 형제라는 인식을 가졌다면 결코 그는 총격을 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흑인이라는 인종 이전에, 히스패닉이라는 인종 이전에, 동양인이라는 인종 이전에, 백인이라는 인종 이전에 그들 모두를 같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형제로 바라볼수 있다면 차별 대신에 긍휼과 겸손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버트 애런 롱에게 분노와 비판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번 사건으로 로버트 애런 롱을 향한 분노와 비판의 말을 쏟아내는것에 그친다면 같은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나는 로버트 애런 롱과 다르다고 생각 한다면 우리는 이번 사건을 잘못 대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이면서 작가인 잭 밀러 목사님이 복음을 두 문장으로 요약을 하였습니다. 

You are worse than you think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것 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드러지게 인종 차별을 하지 않아서 인종차별 문제에 있어서는 의롭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 보는것은 마치 안경을 벗고 물체를 보는것과 같습니다. 안경을 벗고 물체를 보면 물체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물체를 정확하게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때는 우리의 실체를 정확히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괜챦은 사람인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의 실체를 정확히 볼수 있습니다. 그 실체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상태보다 훨씬 나쁩니다. 이 말을 들으면 낙심 되죠? 예, 낙심 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God’s grace in Jesus is better than you think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것 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의 실제 점수는 형편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참회할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점수가 우리에게 더해 집니다. 그러므로 인종이든 신분이든 그 무엇이든 사람들에 대해서 차별과 편견을 가졌던것에 대해서 솔직해지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요. 솔직하게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안에 진정으로 녹아질수만 있다면 모든 차별과 편견은 사라지고 화목한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화목한 복이 우리 주변의 커뮤니티와 이 사회 가운데 충만히 임하게 되기를 소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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