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살아 있다면 감사하자

참 이상한 일이었다. 시찰회 가기 전날 밤에 왠일인지 서재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옛날 앨범이었다. C국에서 사역할 때 찍었던 사진을 모아둔 사진첩이 들쳐보고 싶어서 한장씩 넘겨 보았다.

C국에서 사역할 때 현지 언어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던 초창기 사진들이었다. 나는 당시 한국에서 유학 온 불교신자였던 여대생을 전도하여 제자 삼은적이 있었다. 전도한 후에 일대일 제자양육을 했었다.

사진첩에 바로 그 제자 삼았던 자매가 찍힌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나와의 만남이 불과 일 년도 안 되어 그녀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위암 말기인 것을 모르고 유학을 왔다가 그녀는 죽기 한 달 전에야 정확한 진단을 받았다. 그때 의사는 3개월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의사의 선고가 무색 하게도 그녀는 선고 받은 지 꼭 한 달 만에 죽었다.

나는 선교지에서 첫제자 삼았던 그녀를 잃고 큰 슬픔에 빠졌었다. 시간이 지나고 마음을 추스른 후 그녀를 기리기 위해서 그녀에 관한 글을 썼었다. 나중에 한국에 나와서 그 글은 다시 소설로 각색되었다.

‘회귀(回归)’라는 제목의 소설로 쓰여져서 나는 그 소설로 ‘창조문학’에 소설가로 등단하게 되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죽은 그녀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며 아픈 옛감정이 되살아 났다. 죽은 그녀가 되살아날리도 없는데 말이다.

또 이튿날 아침엔 우연히 동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다. 이것역시 지금은 고인이 된 고 최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다큐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24살쯤 되었을 때 찍은 것이니 그녀가 스타가 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그 영상에서 고 최진실은 24살 젊은 나이에도 벌써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 속도 안 좋아서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일약 대스타가 되어서 모든 것이 좋아졌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달동네에 살다가 좋은 빌라를 사서 이사했고 매일 바쁜 촬영 일정에 시달렸다. 그림을 잘 그렸던 그녀의 원래 꿈은 미술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해서 미대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스타가 되어서도 김칫국물에 수제비를 떠 넣어 끓인 음식을 좋아했다. 친구들이 오면 그것을 끓여 주었다는 그녀는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음식이 김칫국에 밀가루를 넣어 끓인 수제비 였다.

우리나라에서 ‘수제비’는 가난의 상징이다. 요즘 식당에서 파는 온갖 해물을 집어넣어 끓인 호화로운 기호 음식이 아니었다. 고 최진실이 가난할 때 먹었던 벌건 김칫국물을 풀어 밀가루를 개어 뚝뚝 떼어 넣어 끓인 생명연장용 음식이 바로 수제비였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가난을 벗어났는데 끝까지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도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매우 좋아했다. 특히 선교지에서 있을 때 한국의 한 교회가 매월 보내주는 책 중에 ‘편지’를 받아서 읽은 적이 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있다. 재미있었던 것은 우리집에 드나들며 나를 ‘코리아마마’라고 부르던 미국에서 온 재미교포 유학생이 그 책을 빌려다가 읽은 후 바람처럼 사라진 일이다.

알고 보니 그 학생은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하는 목사님의 따님으로 한 유학생과 연애를 시작했는데 부모님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여학생의 어머니는 반대하던 그 남자와 떼어놓기 위해서 딸을 중국어나 배우고 오라면서 우리가 사역하던 곳으로 보내었다.

열심히 중국어를 배우고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렸던 그 학생이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은 ‘편지’를 빌려다가 읽은 후 당장 짐을 싸서 미국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부모의 반대하는 결혼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흐른 후 결국 부모가 반대했던 남자와 결혼을 강행했고, 세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오랜 후에 듣게 되었다. 한 여학생의 인생에 그런 영향을 줄만큼 ‘편지’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후에 한국에 나왔을 때 나는 그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영화관에 가서 ‘편지’를 보았다. 그녀의 연기는 실로 놀라웠다.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수목원을 무대로 한 그 영화 ‘편지’는 슬프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렇게 이틀 동안 연속해서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죽은 사람을 생각하게 된 것이 무슨 불행한 사건의 전조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바로 시찰회가 있어서 방배동으로 가기 위해서 계양역으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빨리 가기 위해서 남편에게 계양역까지 자동차로 좀 데려다 달라고 했다.

운전석 옆 조수석에 앉은 나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앉았다. 국도로 달리고 있는데 내가 있는 쪽 골목에서 한 차량이 국도로 진입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통 머리가 백발인 그여성 운전자는 우리차가 지나는 것을 못 보았는지 그냥 밀고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조처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는 부딪히는구나 이제는 사고가 나는구나 하는 순간 나는 눈을 꼭 감고 앞으로 상체를 숙이며 비명을 질렀다. 남편이 놀라서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우리자동차는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나는 못 보았지만 남편이 보니 그 백발의 여성 운전자가 고개를 까딱하며 미안함을 표시 하더라고 했다. 사실 남편은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 운전자를 만나서 따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시찰회에 가는 길이 늦어질 터라 나는 부딪히진 않았으니 그냥 가자고 하였다. 문제는 그 백발의 여성 운전자는 순로를 따라 운전하지 않고 골목길을 나오면서 바로 유턴을 하려고 했기에 시선을 반대로 두어 우리차를 미처 못 본 것이다.

십년감수를 하고 계양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홍대입구에서 또 2호선으로 바꾸어 타고 시찰회가 열리는 교회로 들어섰다. 예배가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되었다. 주변에 있던 두어 명의 목사님과 방금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한 목사님은 “저런~ 큰일 날 뻔 했네요.”라고 내 감정에 공감해 주었다. 그런데 다른 한 목사님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뭘 걱정해요 죽으면 곧장 천국가는건데…….”하고 웃는다.

말인즉슨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히 그것은 천국 백성이 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확신에 찬 말이니까…….문제는 내가 아직 더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어젯밤 사진첩을 보며 회상했던 나의 제자가 27살에 이 세상을 떠났고 이튿날 아침 동영상 속에서 보았던 최진실은 40대 초반에 죽었다. 그 외에도 내 주변에 제 명대로(자연사)하지 못한 사람은 아주 많다.

질병 아니면 사고사로 이 땅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현대는 백세 장수 시대니 90세 장수 시대니 하는 말은 일면 맞기도 하지만 통계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이다.

90세 장수를 하는 사람은 사실 95%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5%인 것이다. 내가 모시고 살고 있는 시어머님이 딱 90세시니 어머니의 동년배들은 거의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런데 교통사고는 죽든지 크게 다치든지 둘 중에 하나다. 나는 시찰회를 참석하러 가던 그날, 죽을 수도 다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전적인 은혜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의 하루는 은총의 하루이고 감사의 하루이고 새 생명을 얻은 하루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우리의 삶에 무슨 일이 하루 동안 일어나든지 살아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자.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나은혜 선교사(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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