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36] – 홍금숙의 위증과 황석영의 억측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5장 ∙ 문재인이 바로잡아야 할 5·18 기록

8. 홍금숙의 위증과 황석영의 억측

문병소 중사와 홍금숙의 증언 중에서 일치하는 내용도 있고, 상반되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홍금숙이 탔던 바로 그 미니버스를 하루 전에 탔었던 나주의 무장시민 김오진의 증언은 문 중사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사진 54 ▲ 5월 23일 홍금숙이 주남마을을 통과할 때 탔던 바로 그 미니버스를 그 전 날 22일 나주에서 타고 광주로 온 나주 농민 김오진(당시 21세)은 무장시민군들로 꽉 찬 그 24인승 미니버스 안에는 방직공장 여공 등 아가씨들도 3명 있었다고 증언한다.

5∙18 왜곡세력의 주장은 5월 21일 광주에서 퇴각한 공수부대가 그 이후 주남마을에서 주둔하다가 검문에 불응하는 시민군 차에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는 것이고, 문병소 중사 증언은 11공수여단 병력이 그 날 처음으로 실탄 지급을 받기 전까지는 시민군들의 추격과 총격을 피해 빈 총 들고 삼삼오오 산 속에서 도망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공수부대가 거기 주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쪽 말이 사실인지는 바로 전 날이 5월 22일 무장ㅡ난동자들이 주남마을 도로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 나주 농민 김오진(당시 21세)의 증언에서 그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진다.

김오진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나주 농민이었는데, 그가 5월 22일 갑자기 광주로 와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왔는가? 그 날도 괴무장 단체가 나주에 와서 유언비어로 선동하며 나주 주민들을 버스에 태워서 광주로 싣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오진을 나주에서 광주로 싣고 온 그 24인승 미니버스가 바로 그 다음 날 홍금숙 일행이 타고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주남마을 방향으로 주행하던 그 버스였다 (김오진, 양인화 2013; 채정희 2011). 이로써 22일에는 주남마을 도로상에 공수대원이 없었다는 문병소 중사의 증언이 사실로 확증된다.

사진 55 ▲ 1989년 1월 27일의 광주청문회에서는 홍금숙은 자기가 5월 23일 오전에 시민군 103호차를 타게 된 경위를 오빠를 찾으러 나왔다가 도청에서 그 차를 탔다고 했었다: “처음에 오빠를 찾기 위해서 걸어나왔다가 가다보니까 도청(道廳)까지 가게 되었거든요.”

김오진은 그 24인승 미니버스 안에는 방직공장 여공 등 아가씨들도 3명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세 명은 여공 두 명과 홍금숙이었다.

홍금숙은 1989년 1월 27일의 광주청문회에서는 분명히 시민군 차를 탄 장소가 도청이라고 증언했다:

그래 가지고 오빠가 안 보이니까 오빠를 찾아 나섰어요 처음에 오빠를 찾기 위해서 걸어나왔다가 가다보니까 도청(道廳)까지 가게 되었거든요. 그래가지고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워가지고 그냥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생각이 들어가지고 집에 가는 도중에 그 버스를 만났어요(제144회 국회 청문회 1989, 26:71).

그러나 그로부터 10개월 후의 공식 증언에서는 홍금숙이 말을 바꾸어 어머니와 함께 두 오빠를 찾았다고 하고, 시민군 차를 도청이 아닌 광주공원 부근에서 탔다고 하였다.

사진 56 ▲ 광주청문회 증언을 한 지 열 달 후 홍금숙의 말은 또 바뀐다. 게다가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일신방직 여공들을 ‘여대생’이라고 호칭한다.

도대체 홍금숙이 그 자랑스러운 시민군 활동 경력을 감추면서까지 거짓말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20] 그것은 그녀가 5월 17일 이후 주월동 집에 있지 않고, 백대환 등 무장청년들과 황금동 한일여관에서 합숙한 사실을 꽁꽁 감추기 위함이었다.

홍금숙과 동행하다 사고당한 박현숙의 언니 박현옥의 증언에 따르면 5월 22일 무장청년들은 여고생 박현숙과 그녀 친구를 황금동 한일여관에 데리고 가서 합숙한 후 이튿날 정오가 다 되어 갔을 때 함께 미니버스에 태우고 주남마을로 갔다:

현숙이 친구 말을 들어보니 현숙이가 22일 도청으로 가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도왔다고 했다. 그날 밤은 친구 한 명과 여관에서 잠을 자고 23일 정오가 다 되어서 미니버스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같이 차에 탔던 홍금숙의 말에 의하면 차에는 현숙이 등 여학생 서너 명과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를 포함해 모두 18명이 타고 있었는데 남자들은 모두 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화순방면으로 나가는 중이었다(박현숙, 박현옥 1989).

박현옥의 이 증언은 홍금숙이 전 날 밤부터 23일 아침까지 주월동 집에 있었는지 아니면 백대환 일행과 더불어 황금동 한일여관에 있었는지에 대한 중대 단서이다. 홍금숙의 허위증언처럼 그녀가 5월 23일 주월동에서 도청까지 걸어왔다가 다시 광주공원으로 걸어가서 우연히 그 차를 타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며칠째 가출 상태였다. 그녀는 한일여관에서 15명 가량의 무장청년들 취사 시중을 들며, 늘 같이 다니느라 23일에도 주남마을 채석장 쪽으로 같이 차를 타고 갔던 것이다.

이 사건 발단의 또 한 명의 생존자 증인은 홍금숙과 같이 차를 탔던 여고생 박현숙의 남동생 박대우이다. 박현숙의 경우는 시민군 활동이 목적이 아니라,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대우를 데리고 객지에서 쌀이 떨어져 백대환 일행의 빨래를 임감으로 얻었다가 22일에는 한일여관에서 합숙하고,[21] 23일에는 시키는대로 주남마을에 같이 갔다. 어린 남동생이 혼자 오래 굶고 있게 놔둘 수가 없어서 같이 데리고 가려 했는데, 차를 타 보니까 청년들이 복면을 하고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박대우의 눈에는 미니버스에 탄 장정들이 복면무장괴한들로 보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리겠다며 하도 누나를 보채니 데리고 갈 수가 없어서 서방쯤에서 내려주었다. 박현숙의 어머니 구길성 씨의 증언에 따르면 현숙이도 그때 같이 내리고 싶어했는데 시민군들이 현숙이는 못 내리게 했다(박현숙, 구길성 2006, 134).

박현숙의 언니와 어머니의 증언을 합해 읽으면 보다 정확하게 사건 발단 경위가 재구성된다. 고영태와 같은 담양 출신 박현숙은 신의여상 3학년에 재학중이었으며 남동생과 더불어 동신전문대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박 양은 5월 18일 외출하였다가 21일 저녁 늦게 자취방에 와 밀린 빨래를 하였다. 그리고 22일 오전 10시에 백대환 일행이 24인승 미니버스를 몰고 박 양을 픽업하러 왔다:

집 앞을 지나가던 봉고차를 타고 도청으로 나간 뒤 현숙이는 잠깐 누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참 후 돌아온 그 애는 다시 차를 타고 효죽동파출소 앞까지 오더니 동생을 내리게 했다. 자기는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동생에게는 집에 들어가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현숙이 친구 말을 들어보니 현숙이가 22일 도청으로가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도왔다고 했다. 그날 밤은 친구 한 명과 여관에서 잠을 자고 23일 정오가 다 되어서 미니버스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박현숙, 박현옥 1989).

즉 사고는 5월 23일 발생했지만 박현숙은 5월 21일 혹은 그 이전부터 백대환 일행과 더불어 시민군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 차에 탄 13명의 특수기동대 대원들의 빨래 아르바이트를 하였다.[22]

백대환과 김남석과 황호걸 등103번 차를 타고 다니던 특수기동대는 폭약반이었다. 채석장 다이너마이트 창고는 주남마을과 가까운 지원동 에도 있었으며, 전에도 무장난동자들이 이곳에서 자주 다이너마이트를 강탈해 갔다. 5월 21일 주남마을을 거쳐 순천에 갔었던 심재훈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서울 주재 기자는 시민군 폭약반이 화순탄광 등 주남마을 주변에서 했던 활동을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는 화순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을 차량에 가득 싣고 나오는 시민군과 마주치기도 했다. 복면을 쓴 채 무장한 시민군들이 도망치는 경찰을 붙잡아 차에 태우고 질주하는 모습도 보였다(심재훈 1997, 68).

폭약반에게는 주남마을이 5월 23일 초행길이 아니었다. 서청원 광주주재 조선일보 기자는 광주사태 상황이 너무도 심각하여 아주 긴급한 사건들은 한가하게 신문사로 송고할 겨를 없이 정부에 직접 알리기 위해 총리실로 입전 보고하였다. 서 기자의 5월 21일자 입전 보고문에는 그 날 심재훈 기자도 목격한 폭약반 활동 상황이 이렇게 보고되어 있다: “오후 4시10분 광주 지원동 석산 화약고에서 다이너마이트 1상자 탈취. 시내로 진격중.”

서청원 기자의 입전 보고에는 빠져 있지만 바로 이때부터 도청에는 난동자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도청을 폭파하러 한다는 소문이 퍼져 주민 대피령이 내려지고, 산수동 주민들이 모두 피난가고, 도청 직원들도 모두 도망가고, 인근 여관에서 유숙하고 있었던 광주사태 취재기자들도 일단 취재를 중지하고 모두 도망갔다.

폭약반 버스는 그 다음 날인 5월 22일에도 주남마을 도로를 통과하여 나주를 왔다 갔다 했었다. 23일 폭약반 버스 사고 장소는 무장난동자들이 21일과 22일 양일간에 걸쳐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해 갔던 지원동 석산 화약고에서 불과 백여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5월 23일 점심시간 직전에 처음으로 실탄 지급을 받은 공수대원 몇 명이 ROTC 장교 도용현 중위 인솔 하에 처음으로 석산 화약고 앞에서 경비를 선 지 불과 20여분만에 폭약반이 미니버스를 타고 다시 출현하였다.

홍금숙 본인은 광주청문회에서 그녀가 탄 미니버스가 나주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렇듯 홍금숙의 증언으로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5·18측은 그녀가 탄 차가 화순에 일신방직 여공 김춘례 할아버지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는 주장과 나주로 관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방직공장 여공들과 홍금숙을 태운 그 미니버스는 광주 외곽으로 가는 초행길이 아니라, 바로 전 날에도 나주로 가서 김오진을 태우고 송정읍과 비아면을 경유하여 전남도청으로 돌아왔다(김오진, 양인화 2013).

홍금숙의 일행 중 백대환과 김남석과 황호걸 등 광주일고 1980년 졸업 동기 남자들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복면을 하고 총을 든채 남의 제사집에 가는가?

이재의와 전영호가 다시 황석영 이름으로 출간한 2017년판 신간에서 황석영은 5월 23일 똑같은 사건이 두 번 있었다는 주장을 추가한다. 즉, 일신방직 여공 시민군 김춘례와 고영자가 첫번째 미니버스 사고로 죽은지 3시간쯤 지난 후 두 여고생 홍금숙과 박현숙이 두번째 미니버스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금숙의 증언록에 이 네 명의 여자가 모두 한 버스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23] 방송통신고 학생 황호걸 군이 홍금숙과 같은 차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도 홍금숙의 광주청문회 증언으로 확인된다.

백대환 일행이 타고 다니던 103번 차는 특수기동대 차량이었다. 그 미니버스 안에는 다량의 TNT와 기관총과 많은 실탄과 수류탄이 실려 있었다. 대원은 운전사를 포함하여 12~14명이었다(5.18광주 의거청년동지회 1987, 103-104).

홍금숙 일행이5월 23일 나주로 관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24인승 미나버스 안에는 관을 실을 공간이 전혀 없었다.

5월 23일 기관총을 장착한 미니버스가 화순에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는 거짓말과 나주로 관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는 거짓말 등 두 개의 거짓말의 조건을 충족시키려다 보니 황석영의 2017년판 책에서는 두 대의 미니버스가 3시간의 간격을 두고 각각 다른 시간에 주남마을을 향하여 달려가다가 똑 같은 사고가 반복되었다는 소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미니버스와 승합차가 따로따로 각기 다른 시간에 주남마을 방향으로 주행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도로 양편에서 나란히 주행하였다. 채석장 쪽 차선을 달리던 승합차에는 M1919기관총이 장착되어 있었다.

버스 안의 무장청년들이 사격을 멈춘 후에도 계속 총성이 울렸다는 홍금숙의 증언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총은 문병소 중사의 정찰조가 홍금숙이 탄 버스를 향해 쏜 총이 아니었다. 문 중사 일행이 두 대의 버스가 정차해 있는 도로 쪽으로 이동하자 지원동 버스 종점 쪽의 무장시민들이 문 중사 일행을 발견하고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문 중사 일행은 버스를 엄폐물로 삼고 응사하였다. 당연히 총소리는 더 가까이서 들렸지만 그 총은 홍금숙이 탄 버스에 대고 쏜 총이 아니라, 지원동 버스 종점 쪽 무장난동자들을 향해 쏜 총이었다. 그때 홍 양 버스 쪽으로 날아온 총탄은 17세의 안성옥 군 등 지원동 버스 종점 쪽의 무장시민들이 쏜 총이었다(안성옥 1989).

안성옥의 증언이 문병소 중사의 증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문 중사 일행 중 한 명이 무장시민 총에 맞았으므로 문중사 일행은 부상자를 등에 업고 일단 주남마을 쪽 임시 본부로 복귀하였다. 잠시 휴시 후 지원동 쪽 동정을 정찰하러 가는 길에 보니 여전히 24인승 미니버스 그곳에 정차해 있으니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사고 발생 시점과 구조 활둥 사이에 두 시간의 격차가 있었던 이유은 그 증언으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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