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분명히 있습니다 (3) 지옥에서 부르짖는 고통과 절규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지옥 분명히 있습니다 (3)

지옥에서 부르짖는 고통과 절규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누가복음 1619 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교육 방법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것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것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효과가 있을까? 어떤 것이 더 교육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당근이 있어야 하지만, 때로는 채찍도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와 같은 동일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함을 받은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면서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야 합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보다 더 간절한 심정으로 천국을 사모하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천국과 지옥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게 되면 천국에 관한 이야기보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많은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거의 안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교인들이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어두워 보이고, 보편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는 현대 사상과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주 최근에 조사한 보고서에서 의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설교를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교인들이 희망하는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보면, 구원과 영생을 포함한 내세에 관한 설교를 듣고 싶다는 교인들이 전체 조사자의 1.5%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내세를 가르칩니다. 그것을 심각한 진리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주제로 하는 결코 우리가 피해가서는 안 되는, 피할 수도 없는, 피해서도 안 될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의 상태는 죽을 때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 결정하면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결단을 하느냐,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올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줄거리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옥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사는 환자가 싫어한다고 해서 주사 놓는 것을 피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환자가 아파도 수술해야 합니다. 환자가 아무리 무서워하고 절망해도 “당신은 시한부 인생”이라고 의사는 말해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는 그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딕슨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강단에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더 많이 했더라면 우리 사회가 지옥과 같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무디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지옥이 없다면 성경책은 다 불태워 버려야하고,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건축할 필요도 없고, 있던 예배당도 오락장소로 개조해 써야한다” 저는 이 말이 지극히 옳은 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인생의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믿을 필요도 없으니까 당연히 예배당을 아름답게 지을 필요도 없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옥의 사실을 부인할 수는 있어도 지옥의 실재를 없애 버릴 수는 없습니다. 불은 믿든지 안 믿든지 태웁니다. 독약은 믿든지 안 믿든지 죽습니다. 지구는 믿든지 안 믿든지 둥글고 회전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인정하던 거부하던 천국과 지옥은 확실하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단은 불 못에 들어갈 때가 얼마 남지 않는 줄을 알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운 목사들이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고 또 못 믿게 합니다. 그들은 종교 다원주의라고 하는 그럴듯한 이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종교와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선물이나 갖다 주면서 항상 웃고 있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도 아니며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8장 44절 말씀에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로 행하고자 하느니라” 분명히 세상에는 마귀의 자식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자식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마귀와 함께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지옥에 집어넣어 고통을 당하게 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그곳에 보내지 않습니다. 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왜 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 41절 말씀에, 본래 이 지옥이란 장소는 마귀와 마귀들을 따르는 그의 졸개들을 위해 예비 된 곳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이 마귀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사단을 자기의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이 아닌 마귀를 선택해서 그를 추종하다 보니까 마귀가 가 있는 지옥에 그도 가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곳이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질서와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봄에 파종하고 여름에 거름 주고 김을 매면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고생하는 것은 가을 추수기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추수기가 되면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서 불에 태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에 모든 인간을 심판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놓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1분에 수백 명이 죽고, 1시간에 수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에 수십만 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입니다.

본문 말씀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라고 하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문 말씀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터툴리안과 대부분의 성경 해석학자들은 이 이야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재 인물들의 이야기였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부자는 자색 옷과 비단옷을 입었습니다. 날마다 연회를 베풀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죽었습니다.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어느 한 때가 되면 죽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이 땅에 와서 정한 만큼의 인생을 살다가 정한 때에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할 인생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 오는 세월 속에서도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본문 말씀에, 이 땅에서 비참하게 살았던 거지도 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호화호식하며 살았던 부자도 죽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부자는 장사지냈다는 말이 있는데, 거지 나사로는 장사지냈다는 말이 없습니다. 돈 없는 나사로를 누가 장사지내 주었겠습니까? 청소부들이 발견하고 치웠을 것입니다. 반면에 부자는 그 도시가 생긴 이래 가장 긴 장례 행렬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비석도 크게 세우고 관도 아주 비싼 것으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는데,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부자는 지옥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말씀에서 부자는 지옥에서 계속적으로 거듭 절규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 그것이 23절과 25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25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러니까 절규하는 부자를 통해서 비추어진 지옥이라고 하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한마디로 고통의 장소요, 고민의 장소라고 하는 겁니다. 끝없는 번민과 괴로움의 장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에 막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가도 고민이 어느 정도 지나면 끝나니까 우리가 생존이 가능한 겁니다.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특별히 성경에서는 지옥을 “불 못”이라고 했고, “무저갱”이라고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슬퍼하는 곳”, “울며 통곡하는 곳”, “영원히 멸망하는 곳”, “쉼이 없는 곳”, “불과 유황으로 고통받는 곳”, “불이 꺼지지 않는 곳”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의 지옥은 악한 자들이 처하게 될 심판의 장소로서 영원한 형벌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지옥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음부”, “스올”, “하데스” 등으로 묘사되었고, 헬라어로는 “게헨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이곳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한 골짜기로서 우상숭배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여 태워 죽였던 곳입니다. 후에 잘못된 신앙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섬기게 된 이스라엘은 힌놈의 골짜기에 쓰레기를 버리게 되었고, 그 쓰레기를 태우기 위하여 그곳에 불을 지펴 언제나 쓰레기 타는 연기와 악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는 저주와 더러움과 악취가 가득한 골짜기로 지옥을 연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옥의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악취가 나고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힌놈의 골짜기를 바라보면서 지옥을 상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상징은 어디까지나 상징입니다. 상징보다 실재가 더 무서운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우리가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처형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그 현실은 더 무서웠다고 합니다. 지옥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옥은 아주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대해서 마가복음 9장 48절 말씀에서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이라고 했고,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 말씀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 지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M. R. Rich라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100만년 동안 불붙는 난로 위에 누어있는 편이 더 낫겠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이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그곳에 마실 물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곳에는 물 한 방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본문 24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24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보십시오. 부자가 얼마나 뜨겁고 갈증이 났으면 나사로를 시켜서 물 한 방울이라도 혀끝에 떨어뜨려 달라고 애원했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세상에는 아직도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어 그들을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였겠습니까? 어느 환자는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이 고통은 곧 끝나게 됩니다”라고 했다지만 그러나 여러분, 지옥에서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절망적인 고통이 어느 한순간, 어느 정한기간 동안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도 견딜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끝이 없는 곳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

본문 25절 말씀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거니와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괴로움을 받느니라” 저는 이 괴로움이 단순히 육체적 괴로움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봅니다. 육체적인 괴로움은 죽음으로써 끝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괴로움은 영적인 괴로움입니다. 끝없는 정신적인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고통스러운 것이 계속될 때에 이 고통을 멈추기 위해 자살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고통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후에 영원한 정신적인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옥에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지옥의 형벌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무신론자 프랜시스 뉴튼은 “나는 영원히 정죄 받았구나!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되었으니 누가 나를 구원하리요? 아! 지옥과 저주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나는 받게 되었노라”고 절규하면서 죽었던 것입니다.

28절 말씀에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과 고민에 몸부림치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을합니다. 본문 28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이미 이 고통의 부르짖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려면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하고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이 소리를 토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보십시오. 지옥에 가 있는 이 부자가 소리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형제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는 이곳에 왔거니와 내 사랑하는 형제들만은, 내 사랑하는 부모님만은, 내 사랑하는 후배들만은, 내 사랑하는 친구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 소리는 그냥 일상적으로 내뱉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는 처절한 절규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는 곳이요, 영원한 목마름과 캄캄한 어두움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통곡소리가 있는 곳입니다. 귀신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지옥의 정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합니까?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경에 대한 깊은 오해입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갔고,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가난하다는 것이 미덕은 아닙니다. 가난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게을러서 가난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게으름이 미덕일수는 없지 않습니까?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가고,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했을까? 본문 말씀에서 부자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보다 분명한 대답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 부자의 일생 속에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죄를 회개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30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30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어떻게 했을 것이라고 합니까? 회개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옥에 가서야 뒤늦게 비로소 회개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죄가 없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회개했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천국에 도달하는 날 나는 천국 문에서 하나의 현판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현판에는, “오직 회개한 자”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인 우리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는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 가서 그들에게 외쳐주면, 전해주면 회개할는지도 모릅니다. 죄로부터 방향을 전환하고 돌이키는 회개 없이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이라고 했습니다.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서 내 삶을 전환시키는 결단이 없다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가만히 살아가다 보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와 함께 강조되어야 될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어야합니다. 저는 나사로가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믿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이 그것을 증거 해 줍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 그가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비록 그의 삶이 가난했지만 그 곤고한 삶이 오히려 더 하나님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나사로는 그의 인생의 역경과 불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그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믿음이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나라에 가는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부자는 세상에서 당당히 살았겠지만 부자의 이름조차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명함을 가지고 다녔을까요? 이 세상에 살 때 나사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나사로. 나의 사랑하는 아들. 그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지옥에 관하여 제일 많이 언급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곳을 제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지옥에 가서야 지옥을 알았습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거기서는 물 한 모금의 온정도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지옥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긍휼 없는 진노와 형벌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인생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오직 이 땅에 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부자는 지옥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구원의 기회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만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전도에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친척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전도하십시오. 심지어 나이든 부모님이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있지는 않습니까? 훗날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고 지옥에서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을 그 영혼을 생각하고 전도하셔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과연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몇 가지 큰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거지 나사로도 죽었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한 이치이기에, 죽는다는 사실은 구별도 없고, 예외도 없습니다. 남들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고, 위로하고, 하관 장소에까지 따라가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을 땅 에 묻고 서 있으면서도, 나도 잠깐 후면 저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시간과 순서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누구나 다 죽게 됩니다. 조금 먼저 갈 수도 있고, 조금 뒤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죽는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전도서 1장 2절 말씀에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렸던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부귀, 영화, 공명을 누렸던 솔로몬 왕이 노년이 되어 기력이 쇠잔할 때, 즉 죽음을 생각하고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고 보니, 천년, 만년, 언제까지나 부귀, 영화를 누리며 살 것 같았던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강한 자나 약한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지혜로운 자나 우매한 자나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일반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전도서 2장 16절 하반 절에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역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 어느 날 죽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나사로처럼 살다가 죽느냐, 부자처럼 살다가 죽느냐, 뜻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다가 죽느냐, 헛된 일을 따라 다니다가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혹 거지 나사로처럼 산다 할지라도 주님을 떠나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천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천국으로 들림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국과 지옥 둘 중 한 곳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생각하기를 내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매 주일은 아니더라도 때때로 교회를 드나들었고, 가끔씩 헌금도 바쳤으니 천국까지야 못 간다고 하더라도 천국 부근까지야 가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죽음의 문턱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며, 결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완충 지대나 중립 지대는 없습니다.

중세시대, 지금의 천주교인 가톨릭이 극도로 부패했을 때, 거대한 베드로 성당을 지으면서 건축비가 부족하게 되자,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 있다고 하는 “연옥설”을 강조하며 골프 회원권과 같은 값비싼 천국행 표를 팔았습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이 연옥설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기에는 조금 부족하고, 지옥에 가기에는 조금 아까운 사람들이 머무는 곳인데, 그의 후손들이 죽은 그를 위해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던지, 공덕을 많이 세우면, 연옥에 있는 그의 부모, 또는 선조들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거짓된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의 권세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한낮 인간에 불과한 교황이, 그의 입으로 나오는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교회의 부패를 말하고,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은 모두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하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형틀에 손발이 묶인 채 산채로 몸을 가르고 각을 떠는, 처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불의한 권세 앞에, 부패를 꾸짖고 개혁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화약을 안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이, 목숨을 버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때 성령의 충만과 감동을받은 “마틴 루더” “칼빈” “쯔빙글리”이와 같은 신학자들이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 아래 담대한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교회의 부패를 질타하고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아직도 그들의 교리에 “연옥설”을 두고 있습니다. 선행을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해서 연옥에 있는 사람이 천국으로 쑥 올라가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천국과 지옥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고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 갑니다. 거기에는 절충도,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변개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지옥 간 부자의 입을 통해,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알고, 그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자가 겪는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먼저 지옥은 뜨거운 곳입니다. 24절 말씀에서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하고,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20절 말씀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라고 말씀합니다. 21장 8절 말씀에는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대형 빌딩이나 호텔 같은 큰 건물에 불이 나면, 직접 불에 타서 죽는 사람보다 유독 가스에 질식해서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오래전 대구 지하철 참사도 수백 명의 사람이 유독 가스 때문에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유황은 엄청난 유독가스를 분출합니다. 그것이 불에 탈 때는 그 독가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뿜어져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옥은 불과 유황이 함께 타는 곳이기 때문에, 그 뜨거움과 고통의 정황은 가히 짐작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은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23절 상반 절 말씀을 보면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라고 말씀하시고, 24절 하반 절에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고, 28절 말씀에서는 “고통 받는 곳” 이같이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 말씀에서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지옥에는 기쁨, 소망, 노래가 없습니다. 그곳은 끝없는 절망, 끝없는 좌절, 영원한 고통, 영원한 괴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보다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은, 지옥의 고통이 일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밤과 낮 세세토록” 계속된다는 데 있습니다. 제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얼마 후엔 지나가리라는 기대가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마귀조차도 인내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밤도 낮도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공포와 고통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영원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영원히 행복하고 아름다운 영원이냐, 아니면 영원히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영원이냐,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전에 어떻게 사느냐, 육신의 몸을 입고 있을 이 때에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사후 영원의 세계를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25절 말씀에,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면 육신의 눈은 감겨지고, 비로써 영혼의 눈이 밝아지는데, 천국에 갈 자는 죽음의 순간, 천국을 바라보고, 평안과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옥에 갈 자는 죽음의 순간에, 지옥을 바라보고 공포로 전율하며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진력하셨던 대 전도자 “빌리 그래함”목사님은 “당신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는 동안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천국과 지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천국 갈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은, 이 땅위에서 사명을 마치고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지옥 갈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은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입니다.

지옥 간 부자가 다섯 형제의 구원을 염려했다는 사실입니다. 27절과 28절 말씀에,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자기 고향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에게 끔직한 지옥의 고통을 알려서 이 처절하게 고통 받는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옥의 고통을 겪고 있던 부자에게, 마지막으로 생각난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오게 될 형제들이었습니다. 지옥 간 부자가 형제들 영혼 구원이 시급함을 깨닫고, 그들이 그 지옥에 올 것을 안타까워했다면,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아는 우리들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우리 형제들을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지옥으로 굴러떨어지면서, “나를 살려 주시오! 나를 살려 주시오!” 소리 지르며 절규하는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나의 형제, 나의 이웃들의 고함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 곁을,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그를 살려내지 않는다면 그건 살인입니다. 만일 내가 그 누군가에게 영생의 기쁜 소식, 구원의 소식,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옥에 가게 됐다면, 나는 그 영혼에 대한 피 값을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9장 16 말씀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 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섬기며 나누는 헌신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18장 23절 말씀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누가복음 19장 28절 이하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면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루살렘성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음이 없이 철저하게 파괴되어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저들이 인간의 주인이신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절하게 절규하며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미리보시고 아셨기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곧 하나님의 눈물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눈물은 곧 죄 가운데서 신음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연민의 눈물, 자비의 눈물이었습니다. 창조자께서 친히 눈물을 흘리기까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구원의 길로 나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천국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모범이 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붉은 보혈을 흘리심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부자가 형제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그 내용이 이미 구약성경인 모세오경과 나머지 선지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에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거둬 고아나 과부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신명기 14:28-29). 선지자 이사야는 가난한 자의 물건을 탈취하는 죄를 꾸짖고(이사야 10:1-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이사야 58:6-7). 예레미야도 이방인, 고아,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고 가르치고(예레미야 7:5-6), 에스겔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에스겔 18:12-18). 아모스, 미가, 스가랴, 말라기 등 계속해서 성경은 부자가 잘 몰랐다고 생각한 그 사실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가지 않아도 이미 성경은 그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면 다르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절)

기록된 성경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다 확실한 표적, 충격요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실이라고 믿어질 만한 증거가 있으면 제대로 경고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의 모습은 여기서도 마치 바리새인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확실한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그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절) 기록된 성경의 경고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라면 아무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권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와/ ‘죽으면 반드시 천국과 지옥이 있으니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꼭 믿어야 한다’고 간증한다면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통해서도 증명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말씀에서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나사로도 보려고 모였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를 합니다.

만약 부자의 말대로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 돌아왔으니 대제사장들도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결코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놀랍게 여길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결코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택한 자들만이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록된 성경의 충분성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 성경을 거절하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하고 돌처럼 단단한지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말해준다 해도 이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높고 교만합니다.

참 흥미롭게도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거부하고 그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은 정말 비유 속 아브라함이 말한 것처럼 성경을 무시한 것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이의 증언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무리

정말 지옥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직접 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별로 생각을 안하고 살고,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특히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죽고 난 뒤에 지은 죄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심판이 있다면,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있다고 생각했는데 없으면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았으니까요.

그러나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고 세월 흘러가는 대로 살았는데 지옥이 있다면 죽고 난 뒤에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하나님이 없어서 못 만난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 못 만난 것일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지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을까요? 앞에서 인용한 예화를 다시 인용합니다.

♥ 물고기 두 마리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그것을 집어삼키려고 하자 다른 물고기가 타일렀습니다. “저 지렁이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삼키면 바늘에 걸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아.” 그러나 다른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까지 갔다 온 물고기가 있으면 증명해 봐. 저 지렁이를 욕심내서 나 못 먹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는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며 비웃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갔다 온 사람이 있으면 내게 데리고 와 봐, 그러면 믿을게.” 이런 사람들은 끝내 하늘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지렁이를 삼킨 물고기처럼 후회해도 죽음 이후에는 이미 늦습니다. 불신에서 싹튼 교만은 사람의 판단력을 리게 만들어 멸망의 길로 인도할 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어느 날 설교를 하면서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단 5초만 지옥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존 웨슬레도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지옥을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지옥 이야기를 하면 싫어합니다. 지옥은 사람들이 죄짓지 말라고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종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끔찍한 지옥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사랑이 있지만 동시에 공의가 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우주를 공의롭게 다스리는 재판관이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랑만 있고 공의가 없으시다면 이웃집 마음씨 좋은 복덕방 할아버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우주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 지은 자를 반드시 심판하시고 벌을 주셔야만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관한 경고를 무시합니다. “설마 그런 곳이 있겠어?” “설마 없겠지” “죽으면 끝이니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죽고 난 뒤에 지옥에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부인하든 부인하지 않든 지옥 그 자체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육신을 떠나는 순간 천국과 지옥, 천국과 음부로 갑니다. 유황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음부는 영원한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과 죽음의 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드셨을까요? 지옥은 인간을 위해 만드신 곳이 아닙니다. 원래 마귀와 그 졸개들을 위하여 예비한 곳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꼬임에 빠져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짓게 되어 지옥 불에 들어갈 운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지옥에 대한 경고가 나오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며 지옥에 간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하여 생생히 경고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지옥을 절대 피해야 할 장소, 두렵고 고통스런 곳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지옥, 유쾌하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지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경고하고 있을까요?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입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목사님은 지옥 설교를 하시다가, “여러분의 손가락을 불에다 대고 있어 보라. 잠시 동안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이 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온 몸이 불에 들어가 죽지도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생각해 보라.” 고 했습니다.

지옥은 탈출구가 없는 곳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문 입구에는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고 하는 글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지옥에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고통만 계속되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0: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 ‘무저갱’이란 바닥이 없는 구덩이,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영생은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의 영생은 영원한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고통이 실제로 있는 곳입니다.

모든 종류의 사람이 섞여 지내는 곳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흉악범, 살인자, 행음자, 우상 숭배자, 등 모든 종류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뒤 범벅이 되어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1: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요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테르(Voltaire)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생겨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지만 이제 불란서의 한 사람이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해 없애 버리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장담을 했고, 또 “100년 안에 성경은 다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던 그에게도 죽음의 날이 다가 왔습니다. 그 때 그는 의사에게 이렇게 애원을 했다고 합니다. “아!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였구나. 의사여,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보물의 절반을 주겠소” 그 때 의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6주간도 못 삽니다” 이 의사의 말에 그는 극도로 고민하며 의사를 못 살게 들볶다가 마지막에는 “나는 멸망으로 들어간다!”고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가 죽은 후에도 기독교는 파괴되지 않았고, 성경책은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8월 초, 어느 날이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는 하늘로부터 전단이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시민들에게 경고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것은 8월 6일 아침까지 히로시마에서 50리 이상 밖으로 대피하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 내용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웃었습니다. 8월 6일 아침 B29 비행기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히로시마 시민 20만 명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블로거 여러분, 그 어떤 죄인이라도 지옥에 안 가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천국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해져야만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우리들에게 요한1서 편지를 쓰면서 이 편지는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 5:13)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으면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시간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지옥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한 고통과 고민 속에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정말로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내 가족의 영혼을 왜 외면하십니까? 내 남편, 내 아내, 내 이웃이 구원받지 못해서 장차 지옥에 갈 것이 확실하다면 왜 그들을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주시는 주 앞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들이 듣지 않는다고 변명하시렵니까? 아니면 살아가는 인생 해결이 너무 바빠서요? 그렇더라도 한 영혼보다 더 중요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온 천하보다도 한 영혼이 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교훈을 기억하십시오. 아직까지 다가올 영원한 세상을 믿지 않고 그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께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여러분 천국은 진짜입니다. 그리고 지옥도 진짜입니다. 이 땅에서 기록된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면 영원한 세상에서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영원히 고통스럽고 소망이 없는 그곳에서 땅에 있는 가족들만이라도 이곳에 오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전도에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전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 죽기 전에 전도해야 합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전도해야 합니다. 지금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 이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이자 사명인 전도를 위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다니엘 12장 3절 말씀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성도 여러분은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담대하게 천국과 지옥의 주인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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