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5)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며 섬기지 말라

 

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5)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며 섬기지 말라

출애굽기 20 : 1 17

2계명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의 제2계명은 앞의 제1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제1계명이 “경배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2계명은 “경배의 형식”에 초점을 둠으로써 뚜렷한 구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제2계명인 “우상숭배 금지”의 명령은, “하나님의 유일 신앙”의 제1계명과 필연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하나님 외의 어떤 우상을 만들어 섬기거나 숭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1계명에 이은 2계명의 등장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

우상숭배는 단순한 조각이나 조형물을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술품, 즉 그림이나 조각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는 어떠한 형상이나 그림을 향하여 “섬기는 우둔함”을 말하는 것일 뿐 그러한 것을 만들어 내는 재능이나 예술 자체가 우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그 후에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라” (출애굽기 25:18)는 말씀 그리고 독사에 물려 죽어 가는 백성들을 위해 “놋 뱀”을 만들라고 하신 명령(민수기 21:8, 9)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찮은 십자가 장식품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어떤 능력, 즉 마귀를 쫓거나 자신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서의 능력을 믿고 간직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를 자아내게 하는 우상 숭배의 무서운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자신의 의지와 소망을 어떤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보다 더욱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물질적이거나 무형적인 것을 막론하고 모두 다 우상이 됩니다.

줄거리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질투하시면서까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청하십니다. 오늘도 인간이 지어낸 우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념일 수도 있고, 문화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그동안 저는 십계명은 케케묵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명령임을 말씀드렸고, 첫 번째 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계명이 주는 메시지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계명, 우상을 만들고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어떤 이들이 이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의 반복이 아니냐고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을 반복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의 초점이 첫째 계명처럼 다른 신들에 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이 금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예배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습관적 잘못들에 대해서입니다.

첫째 계명은, 우리에게 “나는 예배의 최고 대상인 여호와 주 너의 하나님이라”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그 한 분 외에는 어떤 신도 두지 말라고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한 분 참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서, 사람들의 예배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어떤 것을 만드는 행위를 금하고 있습니다.

둘째 계명의 이해

과거 초창기의 일부 청교도들이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만드는 것 자체가 금지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미술을 우상 숭배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적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둘째 계명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사진 찍기를 싫어하고 집안에 그림을 걸어 놓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리가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을 주신 후에 즉시 하나님은 성막에 속한 물건들 중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를 두 그룹의 형상으로 가리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러 성소에 들어갈 때 입은 옷의 가장자리에도 방울과 석류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무슨 모양이든지 만드는 것을 금지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예배를 돕는 보조물로서 형상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가보면 한때는 형상들이 서 있었으나 이제는 텅 비어 있는 벽감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형상들이 제거된 이유는 그것들이 단순히 무슨 모양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앞에 불이 켜있고 예배자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계명을 위반하는 행위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 이 계명의 강조점은 마지막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자신을 도울 어떤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독실한 신자들은, 자기들은 형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공언합니다. 또 자기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말할지라도 이것은 둘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둘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일이란, 사람이 실제로 형상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예배를 돕는 형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다. “물질적인 것은 영적 것을 돕지 못합니다.

사람의 형상을 만드는 이유

둘째 계명을 내리신 이유를 보다 주의깊게 살펴보기 위해서, 왜 사람들이 형상이나 그림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그 것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답은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있는데 그것이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나 매일 하나님과 교제한며 살아가는 사람치고 기도하도록 자신을 돕는 그림이나 형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주일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며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배할 때 자기들 앞에 놓인 형상에게서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회복된 영적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 있는 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며 예배하는데 있어서 돕는 수단을 갈망한다면, 바로 그 점에 의해서 그에게 영적 의식이 없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또한 이 영적 의식의 결핍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나타내는 것을 전혀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 보려고 한 시도는 지금까지 결국 다 하나님을 잘못 묘사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사람들로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무엇인가 만들지라도 하나님을 잘못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게다가 그들이 예배하려고 할 때는 더구나 잘못된 그 형상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해 더욱 그릇된 개념을 가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깨닫도록 돕는 어떤 종류의 형상을 세우는 순간 바로 그는 하나님에게 있는 본질적인 면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 형상이 조각이나 그림 혹은 어떤 예배 제도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그것을 가리켜 “이것은 내가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돕는 보조물로 만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무슨 짓을 했는가 그 결과를 살펴보십시오, 조각이나 그림 혹은 예배 제도는 제한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그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자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그의 존재는 끝이 없고 그의 능력은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한성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어떠한 형상을 만드는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부인하는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단지 형상 자체가 거짓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잘못 인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 형상이 거짓되고 제한된 것이라면, 그것을 예배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습니까?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언 23:7). 하나님을 잘못 표현하고 있는 형상에 의해서 생겨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사고는 그릇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우상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 우상은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시편 115:6, 7). 이어서 우상숭배에 대한 철학이 나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그와 같으리로다.” 사람은 다 자기가 섬기는 신과 같아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을 닮아갑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우상이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갖는다면, 그는 자신의 신과 같이 그릇되어집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내리신 두려운 이유입니다. 이것은 그저 일시적인 계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다른 모든 명령처럼 영원한 원칙에 근거해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무엇에든지 견주려고 하지 말라. 그러한 노력은 하나같이 다 실패하게 마련이고 오히려 사람에게 끊임없이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둘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현대인들에게도 과거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 둘째 계명을 깨뜨릴 위험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둘째 계명을 위반하는 몇 가지 예로는 사제 제도의 부활, 종교의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감정, 기독교의 종교적인 의식들을 부당하게 높이고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 공공연한 자연 숭배, 예배와 종교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인간 숭배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든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하게도 자신들을 위하여 만든,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다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실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제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그는,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마음에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일을 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는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영혼을 사제에게 맡길 때는 언제나 사제가 그 사람에게 형상이 되고 우상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일이 행해졌을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은 왜곡되었고, 그 결과 예배하는 자들이 타락하였습니다.

이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성직자가 횡포를 부려 왔던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습니까? 스페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스페인의 몰락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솔직히 스페인 국민들이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지녀 왔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를 않고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제 제도는 허다히 많은 악을 일으키는 여러 근원 중의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특히 사제 제도는 지금까지 둘째 계명을 깨뜨려 왔습니다. 하나님은 첫째 계명에서 “나는 네 하나님이니 나를 경배하라”고 말씀하시며, 둘째 계명에서는 “내게 직접 오너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너와 나 사이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교통 외에는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에서도 똑같은 위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예배, 아름답고 예술적인 환경이 진정한 예배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그릇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영적 본성에 미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과연 어떤 형태의 의식주의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영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생활이 성령의 열매를, 그리스도의 성품을, 하나님의 생명력을 나타내 보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주의가 진정 신앙에 도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항시 감각으로 시작해서 감각으로 끝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순전히 미적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참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이 아니라 거짓 미적인 것으로 포장된 신에게 가까이 간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개신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개신교회는 많은 회중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모든 남녀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자격으로 예배드립니다. 이처럼 각 개인이 제사장의 자격으로 예배할 때, 화려한 예배 의식에 현혹된다면 과거 사람들이 새긴 우상이나 그림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한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우상 숭배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주의 만찬에 있어서도 이를 단순한 기념 의식 이상의 어떤 것으로 만들려는 심각한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시도에는 아주 큰 위험이 따릅니다. 최근에,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주의 만찬은 참석자들의 신앙을 돕는 어떤 신비한 요소가 있다”는 주장을 발설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명령하신 것처럼 주의 만찬에 참석하여 그리스도를 기억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의식이 그 이상의 어떤 신비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때 거기에는 큰 위험이 따릅니다. 주의 만찬에 특별한 어떤 감화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 의식은 그리스도의 위치로 올라가서 우상숭배의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그 의식이 행해지자마자, 그 의식 이면에 있는 모든 영적 진리는 손상을 입습니다.

좀 더 높은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오늘날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도는가를 기억하십시오. 아무도 자연의 역할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꽃, 골짜기, 언덕, 햇빛, 새, 이런 것들은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통해서 자연에 이를 수는 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모든 자연을 열어 보여주는 신비한 열쇠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자연을 통해서 창조주인 하나님께 올라가려고 하는 자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꽃을,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 예배에 사용할 때는 언젠가 거짓 신을 모실 수밖에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에 대한 지나친 숭배 역시 사실 인간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주의란 미명하에 인간을 사고의 중심에 놓는 것은 하나님이 마땅히 계셔야 할 자리를 인간의 것으로 대체하는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려고 한다면 그들을 구속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이르기 위해서 피조물이며 구원의 대상인 인간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둘째 계명에 내재된 경고와 약속

둘째 계명과 연결된 하나님의 엄숙한 경고와 은혜로운 약속을 특별히 주의하여 보십시오. 이 구절은 사람들이 흔히 잘못 이해하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계명의 앞부분을 읽은 다음 뒷부분으로 넘어가서, 만일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그 죄 때문에 그의 자식을 벌하실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명백히 다음 세대에서 나타나는 죄의 결과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결론 부분의 말이 지니고 있는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일 사람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창조주의 자리에 올려놓는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바로 그 죄악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의 후손 삼 사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무엇인가를 놓고 예배를 드린다면, 혹은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를 놓으려고 하는 예배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 때 사람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다 그들의 후손들도 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시 예배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개념을 그들의 자식에게 전달될 것이고, 그들 자식의 왜곡된 예배에 대한 의식은 또 그들의 후손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는 가운데서 스스로 범하는 잘못을 마찬가지로 그들의 후손에게도 저지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자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일 중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보다 낮은 차원의 문제를 들어서 자녀들에게 악한 영향력과 습성을 물려주는 것의 폐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물며 구원과 관계된 이 문제에 있어서는 무엇으로도 그와 같은 행위가 지닌 두려움을 경감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자리에 놓으면 그는 바로 그 습관을 자기 후손에게 넘겨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참으로 끔찍한 유산을 이렇게 해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 끔찍한 경고와 함께 나란히 붙어 있는 은혜로운 약속인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말씀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이것은 만일 어떤 사람이 우상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것도 놓지 않은 채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면, 그 결과 그의 자식의 자식도 그와 꼭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현저한 대조에 주의를 기울여보십시오. 즉 하나님께서 죄악은 삼 사대까지 갚으시지만 은혜는 천대까지 베푸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후손에게 참되고 확고하며 전심을 기울이는 순수한 예배를 물려주려고 한다면 그는, 잘 못된 예배를 물려주는 사람이 그의 후손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감화를 그의 뒤를 잇는 천대 후손들에게까지 끼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라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만일 그가 사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면 혹은 의식이나 자신이 만든 어떤 물건을 통하여 예배하고 있다면 그는, 바른 예배를 드릴 때에야 비로소 얻는 본질적인 복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 앞으로 오라고 즉 직접 예배드리라고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있을 때나, 음악의 형태와 양식에 신경을 쓸 때, 또는 그리스도 고난의 표상들인 떡과 포도주가 차려진 식탁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설교를 뚫고 나아가고, 표상들을 넘어서며, 하나님을 마주 볼 때에야 비로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예배에 이르지 못할 때 언제나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는 까닭에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감사하게도 오늘날은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됩니다. 휘장이 갈라졌고 제사장이 사라졌으며 의식도 보이지 않게 치워졌으니 이제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부터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로 곧장 통하는 길이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은 제사장이나 선지자 혹은 설교가 없이도 곧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고 바른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를 두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본질적으로 우상숭배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 행위를 그의 고대 백성들 즉 이스라엘의 시대에도 싫어하셨고 오늘날도 여전히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우리 자신뿐 아니라 천대의 후손까지 복 받는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1. 감리교회에서 널리 알려졌던 Charles Allen 목사님은 2계명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하던 중 제2계명에 대하여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섬기지 말라는 이 두 번째 계명은 오늘 현대인들이 가장 덜 죄책감을 느끼는 계명이지만, 성경에서 이 계명은 다른 어떤 계명보다도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고. 첫 번째 계명이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끌어 올려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라면,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이 세상 어떤 것과 같은 위치로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또 이 계명은 하나님을 섬길 때 섬기는 방법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방법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목적만 좋으면, 방법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목적도 좋아야 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도 좋아야 합니다. 제2계명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바른 방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섬겨야 함을 이 계명은 깨우쳐 줍니다.

  1. 이제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 우상을 섬기거나 절하지 말라는 이 계명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1)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두 번째 계명은 하나님을 어떤 보이는 존재로 형상화시켜 섬기는 것을 금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보이시지 않기에 참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볼 수 있는 것이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리의 눈은 너무 가까이 있는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같이 제한된 눈으로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면, 그 같은 욕구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런 제한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란 제한된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억나게 해주고, 생각나게 해주는 어떤 상징 혹은 형상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형상들이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형상 자체를 섬기고 예배하는 일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민수기 21장 말씀에 나타난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입니다. 식물도, 물도 부족하게 되자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불 뱀이 나아와 백성들을 물음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놋으로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명하시면서, 누구든지 놋 뱀을 보는 사람은 나음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명령하자 놋 뱀을 보는 사람들은 뱀의 해독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놋 뱀에 대한 기사가 열왕기하 18장 말씀에 다시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이 여러 우상들을 깨뜨려 부술 때에, 모세가 만들었던 이 놋 뱀도 부셔버립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이 놋 뱀을 향하여 분향하며 섬겼기 때문입니다.

놋 뱀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놋 뱀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억나게 해주는 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징물을 사람들이 절하며 섬기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왕 히스기야는 이것들을 깨뜨려 부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 형상, 어떤 물건과도 동일일 수는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어떤 형상과 동일시 할 때, 성서는 그것이 우상숭배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전쟁에 들고 나갔다가 빼앗긴 사건입니다. 법궤만 들고 나오면 이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패배하고, 법궤를 이방 민족에게 빼앗기기까지 한 것입니다. 또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법궤, 성전,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깨우쳐 주는 거룩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형상으로 대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대신 어떤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을 예배하는 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우상숭배를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2) 둘째로 2계명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든 것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지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음 받은 것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외침입니다. 하나님은 형상화 될 수 없는 분이실 뿐 아니라 그분은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든 것과는 무한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Kierkegaard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결코 지음 받은 피조물로 대치되실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상숭배라고 하면 우리는 돌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형상 앞에 절하는 것을 연상하면서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더 이상 그런 미신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은 훨씬 더 교묘하게, 위장된 우상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들, 그것들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돈일 수 있습니다. 어떤 ideology, 이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제도나 문화일 수도 있습니다. 민족주의나 국가 지상주의 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나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보다 앞선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나라에 대한 충성 때문에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일 수 있습니다.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문화를 배우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화를 따라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포기한다면, 그 문화는 우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다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다면, 그러한 인생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든 것들입니다. 어떤 형상, 어떤 우상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교묘한 우상들이 현대인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섬기지 말라는 이 두 번째 계명, 많은 현대인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계명처럼 느끼고 있지만, 이 계명처럼 오늘 우리에게 도전과 각성을 안겨주는 계명도 많지 않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우상들이 우리의 영혼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형상화 시켜서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것들은 결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좌지우지하는 인생보다는, 내가 하나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 가운데는 오늘도 교회 문턱을 부지런히 밟고 다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그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믿는 하나님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 나타난 대표적인 우상숭배의 이야기를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발견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 40주야를 머물 때입니다. 백성들은 아론에게 가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니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자고 말합니다. 백성들이 금 고리를 벗어서 모아오자 아론은 이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금송아지가 만들어지자 백성들은 큰 축제를 벌입니다. 이 금송아지가 바로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말하면서 춤을 추며 뛰어 놉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는 여전히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을 찾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출애굽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 신은 눈에 분명히 보일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신을 부르는 것 아닙니다. 낯선 신을 찾고 있는 것 아닙니다.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성경 말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지어낸 하나님, 내 이성의 한계에 매어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는 하나님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기에, 필요하면 찾을 수 있고. 필요 없으면 버려도 무방한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좋지만, 부담을 주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내 생각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요리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성경 말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편의에 맞게 내가 제작한 하나님입니다. 여전히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참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내가 지어낸 하나님입니다. 우상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교회 문턱을 밟고 다니면서도 내가 만든 하나님, 우상을 숭배하다가 삶을 마친다면 이것처럼 후회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차라리 교회 문턱을 드나들지 않았다면 different story,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출석을 하면서도 우상을 숭배해 오고 있다면 이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스스로의 믿음을 살펴보십시다. 내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하나님, 하나님이라 해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성경 말씀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은 나를 좌지우지 하셔야 합니다. 내 뜻 앞에서 그분이 깨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가 깨어져야 합니다. 내 주관, 내 가치관, 내 패러다임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야 합니다. 나를 깨뜨리시는 하나님, 그분이 진정 성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이십니다.

  1. 여러분,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이같이 독선적인 것처럼 보이는 명령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왜 질투하시면서 이런 명령을 주시는 것입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말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청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시기하고 미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이 사랑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 대한 죄는 3,4대에 그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 대한 은총은 천대에 이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그 노함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비, 그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생들이 우상에 매어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인생들이 거짓된 것을 붙들고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진정한 자유와 진리의 길이 있는데,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며 방황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향해 명하시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 오늘 이 시대에는 옛날 같은 우상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훨씬 발전되고, 훨씬 교묘한 우상들이 수많은 생명, 수많은 영혼들을 훔쳐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우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형상화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교회의 문턱을 밟고 다니지만, 우상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짓도록 명하시고 그 안에 각양의 예술적인 미적 감각을 살리도록 지극히 적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어 성막을 꾸미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예술적인 재능을 주셨고 이 재능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

1) 예술적 재능의 오용을 금하심

십계명의 제2계명에서 우리는 인간의 예술적 재능의 활용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예술적 재능이 하나님을 대신한 숭배의 목적으로 우상을 만드는 데 활용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에게 주신 재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활용되지 아니하고 인간의 욕구에 의한 우상 숭배의 목적이나 주술을 위한 목적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2) 잘못된 예배 행위를 금하심

요한복음 4장 24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실제로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제사드리기 위하여 만드신 성막이나 성전 그 어느 곳에도 자신의 형상을 실제적이거나 혹은 상징적으로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갖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그 인간성이 극도로 타락한 애굽에서 출생하여 보고 배우며 자라서 이제 막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주위를 환기시키고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라난 애굽은 수많은 우상들이 난무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들을 보고 듣고 배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행여 하나님을 이러한 형상의 대신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오늘의 시대에 주는 의미

이 계명은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말씀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대의 흐름 속에는 우리 주위에는 점점 그 수효를 더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교회에 있어서의 이러한 문제는 날로 그 심각성을 더하여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의식과 교리가 성경을 외면하는 경우입니다. 또한 학문이 하나님의 능력을 우선할 경우가 이러한 경우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우상을 조각하며 절하여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유

1) 질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신성은 절대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역이 그 어느 것에 의하여 침해되거나 훼손되어질 때, 결코 좌시하시지만 않으신다는 사실이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본문 말씀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거룩하신 신성이 보고 듣지 못하며 말도 하지 못하는 한 낱 우상에 견주어서 그 형상을 만들어 놓고 “너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기게 될 때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질투는 진노의 화살이 되어 그들의 심장을 꿰뚫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자손 삼사 대까지 묻는 죄의 값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 값은 자신이 담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본 계명에서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키는 죄”를 짓는 자들에게 대하여는 그 죄 값을 자손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숭배하는 자의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미치는 영향은 다른 그 어떠한 죄 값보다 비싸게 치러짐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 자손 천 대까지 베푸시는 은혜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는 자손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죄 값을 갚으시지만 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자손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 은혜를 베푸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은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사무엘상 15:22)라고 말씀하신 대로 계명을 듣고 지킨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종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말씀을 매 절기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어 듣게 하라고 하셨으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희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바로 행하는 순종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순종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직접 몸으로 순종하여 지킬 때 비로소 그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행함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의 패역한 자들의 멸망은 모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속의 복의 주인공들은 순종함으로 복을 얻었습니다. 순종은 성도의 최대의 능력이요, 미덕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향한 성도의 순종은 자손 천 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 중의 비결입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1. 오늘 이 시대의 우상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내가 제일 쉽게 섬기게 되는 우상은 무엇입니까?
  2. 이 시대 우상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3. 이 우상의 유혹을 우리는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이 강해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 문헌들을 인용하여 편집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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