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혜 칼럼] 자살의 유혹을 이기면 상급이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죽을 만큼 힘들 때가 있다. 그야말로 죽을 만큼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그것을 자살이라는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반대로 죽을 만큼 힘든데도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만큼만 살자며 자살의 유혹을 벗어나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국가가 되었다. 2003년부터 2019년까지 2017년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는 한 번도 자살률 1위를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경제대국 순위11위라는 우리나라에서 자살률 1위라니 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2020년 기준으로 하루에 38명꼴로 자살을 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한국에서 자살은 이제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사람의 생명인데 그 아까운 생명을 스스로 손상하고 자살을 하는 일만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오죽하면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릴 생각을 할만큼 힘들고 고통스럽고 문제를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을만큼 괴로웠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살은 결코 방조하거나 묵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층 더 주변의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자칫 자살을 해서 나하나 없어지면 모든 복잡한 문제가 해결 될 것 같은 유혹을 받을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자살을 할 만큼 어떤 모욕과 수치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수욕을 참고 사는 편이 자살함으로 일으키는 문제보다는 훨씬 가볍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 자살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당사자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인생에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졌을 때 자살의 유혹에 넘어가고 싶은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때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즉 내가 죽었을 때 누가 가장 좋아할까? 그리고 누가 가장 슬퍼할까? 를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내가 청년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결혼 전까지 다니던 직장은 은행이었다. 은행은 그야말로 고객이 맡긴 돈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100%여야 하는 곳이다. 저녁에 마감을 하고 입출이 1원이라도 틀리면 직원들은 퇴근을 하지 못한다.

지금이야 은행에서 돈도 지폐계수기로 세고 모든 숫자를 컴퓨터로 입력하고 처리하니까 매우 정확하고 빨리 일을 처리하게 되었지만 내가 은행에 근무하던 1970년대만 해도 모든 계산을 수기로 하고 계산은 주산에 의지해서 하던 때이다.

입금과 출금 전표를 끊어 영업을 한 후 저녁에는 계산계가 모든 전표를 수압해서 계정별로 계산을 한다. 그렇게 나온 숫자와 출납계에서 하루종일 돈을 수납하고 돈을 지불해주고 남은 현금이 틀림없이 정확하게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직원들이 퇴근을 할 수 있다.

나는 10년 동안 은행에 근무 하면서 각계를 두로 거쳐서 업무에 비교적 능숙한 편이었다. 은행 자체적으로 직원들의 업무자질을 높이기 위해서 매년 ‘사무경진대회’를 열곤 했다. 나는 지폐산에 나가서 일등을 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근무하는 은행에서는 통털어 돈을 제일 빨리 세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은행원이 돈을 빠르고 정확하게 세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야말로 돈장사가 은행업이니 들어오고 나가는 돈을 정확하고 빠르게 세어서 받고 내주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래서 신입직원이 입행을 하면 처음 6개월간은 아무일도 안 맡기고 오직 출납계에서 돈을 세는 훈련만을 시킨다.

그만큼 돈을 정확하게 셈하는 것은 은행원의 자질중에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근무하던 은행에서는 출장을 가서 수납을 해 오는 때가 있었다. 주로 거래처 학교일때가 많았다. 은행원이 출장을 나가서 학생들의 등록금을 서무과에 앉아서 직접 받아서 저녁에 은행에 가지고 와서 입금을 하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날 나는 거래처 학교에서 수납을 해 온 돈을 출납계에 넘겼다. 그리고 잠시 나가서 은행근처에서 볼일을 보고 은행에 들어 왔는데 은행 안의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보니 출납을 맡은 주임이 마감을 했는데 잔고에서 현금 5천원이 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수납해 온 돈을 넘긴 나를 의심하는 것이다. 내가 오기전에 분명히 잔고가 맞았는데 내가 돈을 넘겨주고 나서 5천원이 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분명하게 내가 수납해온 돈은 정확하게 넘겼는데 5천원이 비는 것이 왜 내책임이란 말인가?

당시 출납계를 맡은 사람은 이웃 도의 지역 대의원의 아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아버지의 백으로 은행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평상시에도 업무를 정확하게 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번번이 자신이 업무처리를 잘 못해서 직원들의 퇴근이 늦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날도 마감 잔고가 맞지 않아서 직원들이 퇴근을 못하게 되자 나에게 핑계를 돌린 것인 줄은 모르겠지만, 내가 외부에서 수납해온 돈을 마지막으로 넘기고 오천원이 빈다고 말하면 누가 들어도 내가 출납계에 들어갔을때 오천원을 훔쳐 가져 갔다는 말로 들린다.

일단 빈 돈을 출납주임이 물어넣고 모두 퇴근을 하였다. 하지만 누명을 쓴 나는 억울했다. 도저히 그냥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시내를 배회하며 다니다가 문득 혹시 출납주임이 돈을 세다가 현금분류통 밑으로 돈이 밀려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돈을 넘기기까지 잔고가 맞았다면 내가 넘긴 돈을 풀어서 합산하면서 현금분류통 밑의 틈새로 돈이 밀려서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은행으로 갔다. 그날 숙직하는 직원이 있다가 내가 들어 오는 것을 보더니 저녁을 먹고 올테니 잠시 은행에 있어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러라고 하고서 출납계 안으로 들어섰다. 지불계 앞에 놓인 나무로 된 현금통을 번쩍 들었다. 아… 그곳에 오천원권 한장이 얌전하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기뻐서 소리라도 지를뻔 했다. 그러면 그렇지 잔고가 맞았다면 그 돈이 어디로 갔겠어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숙직담당 직원이 돌아왔다. 나는 기뻐하며 그 남자직원에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 일을 책임자인 대리에게 당장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택시를 타고 출납담당 대리님 집으로 찾아갔다. 대리님은 반가이 맞아 주셨고 내 이야기를 듣더니 함께 기뻐해 주셨다. 나는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은행에 출근해 보니 은행 분위기가 싸늘했다. 어제 내가 집으로 찾아갔던 담당 대리가 나를 불렀다. 내가 근무하던 은행의 이층에 있던 다방(커피숍)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출납담당주인이 현금통 밑에서 나온 오천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오천원을 훔쳐 갔다가 들통이 나니까 다시 들어와서 현금통밑에 오천원을 넣어 놓고, 혹은 본 사람이 없으니 (숙직원은 저녁 먹으러 나갔다) 내가 거짓말로 현금통 밑에서 오천원이 나왔다고 꾸며 대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은행의 책임자들은 모두 내말 보다는 돈 많고 유력한 집안의 아들인 그 출납주임의 말을 신뢰하고 나를 믿어 주지 않았다. 기가막힌 역반전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다. 책임자는 나에게 경위서를 자세히 써서 내라고 하였다.

나는 사실 그대로 기술하여 제출했다. 그렇지만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들은 내가 돈을 가져갔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꿈 많은 열아홉살의 나이에 나는 사회 생활의 부조리와 쓴맛을 처음으로 단단히 보게 된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의 말을 들어 주기 보다 무언지 백이 있고 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의 말에 힘을 실어 준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아무튼 대세는 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게 누가 누명을 씌워도 반론을 펴고 도와줄 집안 배경이 없다는 것이 슬펐다.

책임자가 나를 불러서 협박을 했다. 내가 돈을 훔쳐 갔다고 시인을 하면 없었던 일로 넘어가겠지만 현금통 밑에서 돈을 찾았다고 우기면 할 수없이 경찰을 불러서 조사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상시 나를 딸처럼 예뻐해 주시던 지점장님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내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의 생각속엔 가난한 집 딸인 내가 돈을 탐내서 훔쳤을 거라는 쪽으로 아예 생각을 굳히고 있는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수면제를 먹고 죽을 결심을 했다. 그렇게 해서 내 결백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엄마에겐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았다. 은행에서 일어난 일을 엄마에게 울면서 다 털어 놓았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용하다는 철학관으로 데리고 갔다. (엄마도 나도 예수믿기 전의 일이었다) 철학관에서는 내가 삼재가 끼어서 그런 일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문제가 해결이 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엄마와 집으로 돌아와서 일단 죽으려던 생각을 접었다. 내 머리속으로 상상력이 발동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자살을 한다면 …내가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관련된 은행의 직원들은 우리가 잘못 생각했구나 뉘우치며 자책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결백은 밝혀지지 않은 채 도둑질이 걸리니까 자살했다는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해석은 전적으로 산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엄마와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은 평생 가슴에 한이 맺힐 것이다. 공부도 제대로 못 시켜서 어린 나이에 직장 생활 하다가 누명을 쓰고 죽은 딸이 얼마나 가엾고 불쌍할까 생각하니 내가 절대로 죽어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끝까지 살아서 내가 잘되는 것만이 나를 억울하게 한 자들에게 되갚아 주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갖고 나는 단호하게 자살을 포기하였다. 이튿날 은행에 나가서 나는 책임자에게 단 한마디를 했다 .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무마 되었다.

하지만 그후에 내가 그곳에 근무하면서 받은 냉대와 다른 직원들의 싸늘한 눈총과 분위기는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결국 내가 그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갈 때 까지는 내 마음이 결코 편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당당하려 노력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었으니까… 내가 죽지 않고 삶으로서 치르는 댓가라고 생각하고 견디어 냈다. 그때 멀리서 들리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면서 교회에 나가면 내 억울함을 풀어줄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내가 잠시의 억울함을 못 참고 자살을 했더라면… 세계가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나라에 큰 손해를 끼쳤을 것이다. 미래의 선교사가 될 사람이 하나 없어진 셈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뿐이겠는가? 삼남매인 나의 자녀들도 없었을 것이다. 한참 성경암송을 잘해서 귀여움을 받는 나의 외손녀 로아도 없었을 것이고 귀여운 외손자 로이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억울했지만 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삶을 통하여 결백을 증명하리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에 이 사건을 맡기기로 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였다. 시간이 가장 힘이 세다고… 시간이 해결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이 문제도 시간이 흐르면 진실이 밝혀지리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세상이 핑크색이 아닌 것을 인생의 초반전에 깨닫게 된 것이다. 전에는 나만 잘하면 다 잘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졌었는데 내가 잘해도 누명을 쓰거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오명을 뒤집어 썼지만 그후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생각도 성숙해 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과 사람에 실망한 내가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살의 유혹을 이겨낸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상급이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 짓 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겔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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