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4) 제1계명 :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4)

출애굽기 20 :1 – 17

1계명 :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 이어 1계명이 계속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부터 2회로 나누어서 서론적인 말씀으로 10계명이 갖는 특징적인 모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10계명은 케케묵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앞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말씀, 10계명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계명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참 하나님이신 그분만을 섬길 것을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이 계명이 10계명에서 제일 첫 번째 계명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제2계명 이하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은 바로 제1계명의 말씀과 직결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제1계명에 대한 바른 이해와 고백이 없다면, 우리는 나머지 명령들을 바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또 나머지 계명들을 지킬 이유나 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1계명이야말로 10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또 근본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보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삶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어떤 믿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적어도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1) 첫째는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물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계신다면, 또 하나님이 오직 한 분 계신다면, 그분의 존재는 내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 상관없는 생각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해 해답을 주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생겨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는 우리 스스로 창출해 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 인생은 그분의 뜻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왜 사는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이 찾아질 수 있습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생의 삶의 길, 우리 인생의 윤리, 도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인간 스스로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면,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는 인간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뜻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있게 하셨고 그분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 지혜롭고 더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바로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길, 윤리나 도덕과 깊은 연관을 갖습니다.

(3) 셋째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갖는 중요성은

그 믿음 여하에 따라 죽음과 영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나 고백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죽음과 영원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해답은 인간의 추정 혹은 상상의 기초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알 수 없다”라는 불가지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한 철학도는 죽음 너머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내가 가서 보고 돌아와 알려주겠다고 폭포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서 해답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즈음엔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을 연구해서 어렴풋이 그림을 그리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신다면,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지으신 분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서 죽음과 영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바로 죽음 그리고 영원의 세계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참으로 우리 인생에 심대한, Profound한 영향을 주는 문제입니다. 그 믿음에 따라 인생의 목적이, 살아야 하는 길이, 그리고 죽음과 영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줄거리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경의 제1계명 말씀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어떤 성경은 나 외에는 ‘besides me”를 내 앞에 “before me”로 옮겨 놓고 있기도 합니다.

(1) 먼저 이 말씀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 왔습니다.

1) 첫째는 다신론(Polytheism)을 말하는 주장들이 있어 왔고 오늘도 있습니다.

중동 신화는 대표적으로 다신론을 말해줍니다. 신은 한 분이 아니라 여러명이라는 주장입니다. 어떤 때 이 주장은 범신론-하나님과 자연 혹은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하게 보는 주장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오늘 다신론을 믿는 대표적인 나라는 일본입니다. 그들은 수백만 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는 단일신론(Henotheism)을 말하던 시대나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신은 지역에 따라 여러 신이 있는데 각각 자기 지역을 관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가 전쟁에서 이기면, 패한 나라는 승리한 나라의 신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시도다”라는 표현은 단일신론적인 요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고상하고 또 깊은 영향력을 준 것은 유일신론 (Monotheism)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 계신다는 주장입니다. 다른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인류의 정신사와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는 다 유일신론을 주장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신이란 우상이요, 헛것입니다. 이것이 제1계명이 선언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천상, 천하에 한 분 뿐이십니다.

(2) 둘째로 제1계명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이시다”라는 이 주장은 인간의 추리나 사색의 결론이 아니라, 바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하고 깨달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해낸 존재가 아닙니다. 추리의 산물도 아닙니다.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존재가 아닙니다. 심리적인 투사의 열매도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백성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가르고 광야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광야에서 먹을 것, 마실 것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보여주신 역사와 사실을 우리는 계시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이 지키는 유월절 절기는 허구에 근거한 인간들의 축제일 뿐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인류 역사상 가장 고상한 인격, 위대한 사랑의 사람이셨던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계시지도 않은 하나님을 계신다고 증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제1계명의 선언은 인간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하신 역사, 그들이 경험한 것, 그 삶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백입니다.

(3) 셋째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선언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이 시간도 그 하나님 앞에 앉아있으며, 바로 그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정말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함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걸음을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자든지 깨든지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나 숨을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며,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도 거기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 의식 없이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수많은 거짓과 실수를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부담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이 두려움, 깨어있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이 사실은 부담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또한 무한한 위로와 격려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오늘 나갈 길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 앞길이 불안해 보여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어도 우리는 주저앉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 고난과 역경의 폭풍이 몰아쳐도 우리는 꺾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신다면 절망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좌절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셨다면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유일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내일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4) 넷째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 인생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변화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인생, 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삶이란 바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의 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인생을 사는 것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 인생은 달라져야 합니다.

1)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과의 교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관심하다면 과연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사귀는 기도를 무시하는 사람은 죽은 하나님,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믿는 것이지, 살아 계신 성경의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과의 관계, 그분과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2)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생에서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 먼저,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사람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기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참으로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나만도 못한 하나님이라면 왜 믿으시렵니까? 이런 하나님 믿어서 뭐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뜻은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3) 그리고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분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전부에 미쳐야 합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은 물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달라져야 합니다. 아니 달라지라고 주님은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인생,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만을 내 앞에 모시는 인생입니다.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1.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한 분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인생의 현장에는 거짓된 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출세의 신, 쾌락의 신, 황금의 신, 명예의 신, 성공의 신, 여러 신들이 우리의 영혼을 좀 먹어가고 있습니다. 출세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쾌락이, 황금이, 명예의 추구가, 성공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출세, 쾌락, 황금이나 명예의 추구, 성공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말씀으로 길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현대판 다신주의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삶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종교생활, 혹은 교회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등 여러 삶의 모습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을 Practical Atheism, 실제적 무신론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one among many가 아닙니다. one beyond many, 모든 영역의 삶을 세우는 기초요 근거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위에 우리는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사회생활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섬기는 삶입니다. 제1계명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여기에서 “네게”는 단수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도매값으로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네게,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그리고 제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한 분뿐이신 하나님, 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신 살아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이 하나님 앞에 오늘도 앉아있다는 이 자각이 살아있습니까? 살아 계신 그 하나님, 유일하신 참 하나님 때문에 내 인생은 얼마나 변화되고 있습니까? 주님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해야만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이 방해가 되는 것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이런 생각들을 지금까지 해보시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부터 그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100살에 나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흘러간 아름다운 신앙의 한 모습으로 여겨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충격적인 사건으로 나의 사건으로 받아드려야 됩니다. 우리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신앙의 점검표로 삼아야 됩니다.

이제 저는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 지식, 명예, 권력, 자식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입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보다 뒤에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1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7절 하반절 말씀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제1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을 지킴으로서 여러분들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되는 복을 받는 복의 시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위기의 시대입니다.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혼란이 일어나는 이유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선택이 많아졌습니다. 선택이 많아졌기 때문에 선택이 어렵습니다. 선택이 많아졌다는 것은 선택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많아졌지만, 자유가 어렵습니다. 자유가 많아졌는데 자유가 많아져서 좋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더 구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이 행복을 구하지만 행복은 더 많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삶에 복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명한 기준이 됩니다. 이 말씀대로만 살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복을 주시고 우리의 삶에 깨어지고 망가진 것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십계명은 원칙과 기준입니다. 우리 삶에 핵심적인 기준들이 담겨있습니다.

오늘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일계명을 살펴봅니다. 이 계명은 무신론자들이나 타종교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독선적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이것은 복음입니다. 일계명이지만 사실 십계명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강조하는 핵심적인 주제가 1계명에 있습니다. 성경은 사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책이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그래서 그분을 우리가 마땅히 섬겨야 할 분으로 알아가게 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1계명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절대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의 계명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은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분명해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1계명이 중요하고 첫째를 첫째 자리로 올려놓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크게 두 가지의 흐름, 범신론과 무신론이 있습니다. 한쪽은 신이 있다는 것이고 하나는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다 신이기 때문에 나무도, 태양도, 동물도, 사람도, 아이도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누구든지 신을 선택할 수 있고, 내가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물건 고르듯이 자기가 맘에 드는 신을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신이 없다고 합니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 무신론이 강세를 띠고 있습니다. 그중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무신론 전도사인 도킨스와 히친스 입니다.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지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히친스는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출간하여 신앙인들에게 위협적인 공격을 쏟아부었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의 석학으로 똑똑한 사람이 신이 없는 것을 증명해 내는 설득력 있는 책을 써서 많은 지성인들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신은 없다』 『예수는 신화다』 등의 무신론적 공격이 강세를 띠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십계명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여기에서 “나 외에는”이라는 말은 “내 앞에서”, “내 면전에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앞이 어디입니까? 주님의 면전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우상을 섬기든지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여 년간 노예로 살았던 애굽의 문화는 다신론이 배경이었습니다. 별별 신을 다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속받은 백성들로서 하나님만 섬기도록 요청받습니다. “너희들의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이다. 다른 신은 없다. 오직 한 분이시다.” 가나안의 새로운 농경문화 안에서 그곳의 다양한 우상에 무릎 꿇지 말고 참 신이신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을 너무 잘 만듭니다. 우상 제조기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별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우상을 만듭니다. 근원적인 불안함 때문에 우상을 자꾸 만들어 냅니다. 왜 종교가 생겼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종교를 만들고 다양한 신들을 만들었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자기의 생활과 일상에 아주 가까운 것들, 자기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신으로 만들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신은 유형, 무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날은 무형으로 신을 많이 만듭니다. 인간의 이성이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으로 신을 판단하고 히친스나 도킨스 같은 사람들이 신을 만듭니다. 이성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규명하고 입증할 수 없는 것이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성이 만들어 낸 것이 과학이고 과학이 오늘날 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이 인간의 문명을 바꾸고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 같지만 과학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더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돈, 맘몬의 신이 최고의 신입니다. 신은 계속 바뀝니다. 신발을 바꾸듯이 계속 바뀝니다. 인간이 의지할 만한 것을 만들어서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하나님을 섬기다가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봐도 가나안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깁니다. 솔로몬 왕도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왕권을 얻는 좋은 출발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잡다한 신을 섬깁니다.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많이 들이면서 그들의 우상도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잡다한 신들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질적인 번영, 돈이 많은 솔로몬은 부자였습니다. 군사적 파워,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리차드 포스터가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우상은 money, power, sex인데 이 전체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물질적인 파워, 성적인 쾌락이 자리잡으면서 마침내 나라가 나뉘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첫 번째 계명에 대한 순종 유무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가 아니면 다른 것을 섬길 것인가? 여기에 타협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보를 하지 않으십니다. 첫 번째 계명을 깨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갑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하나님 없이 누렸던 부와 명예와 쾌락이 얼마나 허무한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누리고 누리는 데 만족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멈추고 싶은데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더 추구하고, 더 얻고, 쌓는 데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으면 그만둬야 하는데 그래도 끊임없이 또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심판입니다. 죄 아래에 있는 인간에 대한 심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긴 결과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타락의 시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솔깃한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길 때, 인간다워집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니 마음이 허망해져서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인생의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우주의 고아가 됩니다. 근본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죽을 때까지 방황하고 허무로 끝이 납니다. 만물의 으뜸이시고 근본이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인생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1계명은 예배의 대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이 없다며 신을 부정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신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예배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주제는 없습니다.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정하는 순간 인생의 길이 달라집니다. 소를 섬기는 나라에 가보면 소가 그 사회의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회는 소 수준 이상 올라갈 수 없습니다. 돈을 섬기면 돈이 삶의 기준이 됩니다. 모든 결정에 돈이 끼어듭니다.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누구를 섬길 것인가가 결국 내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가 됩니다. 우상숭배에 빠지는 이유는 “무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지식,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개인뿐 아니라 사회, 국가, 역사를 망가뜨려 놓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받기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양보할 수 없는 기준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광야에서 불러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실 때 부름 앞에 먼저 모세가 하나님께 “하나님!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당신이 누구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는 영어로 “I am Who I am”이고 “나는 나”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따로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모세가 모르니까 대답을 하셨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 말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고 누구에 의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이나 누가 만들어 낸 어떤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안해 낸 개념이나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라면 누구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의 지지나 박수가 필요한 분이 아니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이 아니고 하나님은 홀로 영원히 영광 가운데 자존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시라고 합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에게로 돌아가니 인간이 만든 모든 피조의 세계는 그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운행되고 그분으로 인하여 온 우주가 존재하고 마지막도 그분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높고, 강하신 분이 없고, 완전하시고, 비교를 당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질투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나란히 올려놓는 것을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존재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비교를 거부하신다는 의미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의 중심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기를 원하시는 절대적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계명은 우리의 내면을 살피게 하는 계명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잘 섬기고 율법을 행했던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유는 너희가 나를 섬긴다고 하고 나를 존경한다고 하는데 너희들의 마음을 보면 내게서 멀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셨던 관점은 외적인 행동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 1계명은 우리가 주일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고 헌금을 하는 그 자체보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할 때 다른 신은 우상이고, 오늘날의 우상은 우리 마음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책망받지 않으려면 신앙의 중심부, 지금 주일에 나와 예배드리는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매일 암송했던 것이 “쉐마”입니다. 그 말씀이 신명기 6장 4절에서 6절 말씀으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이 말씀을 외우고 암송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은 단순한 외적인 것이 아닌 마음을 다하는 것, 뜻을 다하는 것,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고 사랑의 관계 안에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2장 37절 말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하십니다.

십계명이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의 관계와 연결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굉장히 배타적인 것이고 독점적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다른 것도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아내에게 너무 멋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줬는데 알고 보니 아내에게만 사준 것이 아니라 다른 여자에게도 사준 것이라면 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독점적이고 배타적입니다. 내가 50%만 사랑하고 저쪽이 50%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 공평하게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모호한 관계로 지낼 수 없습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굉장히 민감한 것입니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사랑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마음의 중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본다는 것입니다. 십계명 준수는 외적인 행동보다 생각과 마음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신앙을 가볍게 다루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도 얼마나 하나님께서 민감하고 예민하게 우리를 대하시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서도 하나님은 이 자리에 앉아있는 행위 자체에 감동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굉장히 강력한 단어입니다. 계명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풀어가야 합니다. 사랑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계명은 굉장히 무겁고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이 율법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거리를 두지 않고 친밀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런 계명은 무겁지 않습니다. 주일은 즐거운 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일은 너무나 기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연서입니다. 성경을 아주 힘들게 보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연애 책입니다. 하나님이 이보다 우리를 더 사랑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구구절절했기 때문에 시편의 시인들은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율법도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은 독점적이고 배타적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 말씀이 의무나 억압이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이기에 그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들어가 있고 어디에 마음이 많이 끌리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실 말씀은 참 많을 것 같은데 딱 하나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사랑한다는 말은 못했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을 합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 번 물으셨는데 세 번 다 질문은 하나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딱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멋지게 살고 있나도, 어떤 위대한 헌신을 하는가도 아닌 진짜 주님을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50대 50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만 섬기는 것이지 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대신 올려놓는 것을 우리는 우상이라고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1계명은 예배를 강조하는 것이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 속에서도 우리의 운명이 엇갈립니다. 예배를 왔다고 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도 우상숭배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그 재단이 하나님을 배신한 우상을 섬기던 재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예배 속에서 어떤 때는 위로가 필요도 하지만 내 위로 내 만족이 우선이 되면 예배는 나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리가 됩니다. 우리가 은혜받아야 하지만 예배의 중심은 우리가 은혜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높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온 초점이 하나님에게 기울어져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 이름에 합당하게 올려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구제도 하고, 사회사업도 하고, 전도도 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첫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쩌다 보면 구제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 되는 것처럼 여겨져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부분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봉사로 헌신하는 분도 계시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을 내는 것과 하나님 그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하나님께 관심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 그분만 온전히 섬기는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배는 결국 우리의 주인이 누구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에는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노예에서 벗어났다고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주인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주인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세상의 다른 것들이 주인이 되어 유혹합니다. 누구를 주인으로 삼을 것인가? 오늘 이것이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우리의 욕망에 따라 바뀝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으면 세상의 거짓된 신들이 우리의 주인이 됩니다. 이런 것들이 들어가면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주인에 의해서 인생이 끌려갑니다. 돈이 그냥 돈이 아닙니다. 돈을 잘못 추구하다 보면 그 돈이 나를 지배해 버리고 그 돈이 나의 주인이 됩니다. 돈이 내 인생을 끌고 갑니다. 그러면 돈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느냐 행복하게 해주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불행하게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이기적인 하나님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올려놓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가치가 있고 질서와 안정이 찾아오며 우리의 삶에 행복이 찾아오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은 다 거짓된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다 속이는 것입니다. 우상을 따라가면 삶이 꼬이고, 무너집니다. 돈이라는 것을 따라가 보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혼란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을 가장 복되게 하는 삶의 열쇠가 됩니다. 가정이나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세상의 힘이 우리의 가정을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장 첫 번째로 모시고 섬기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그 나라 그 민족 그 역사까지 영향을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뒷전에 밀리고 하나님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순간 개인이나 가정이나 역사나 모든 국가의 운명은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상태로 갑니다. 최고의 하나님께 최상의 예우를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올려놓으시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이 있다면 깊은 각성과 회개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을 내 인생의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개인과 역사와 모든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하나님이 뒷자리로 밀려납니다. 점점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밀려납니다. 첫째를 첫째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망가집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물질을 숭배하느냐 하나님을 숭배하느냐의 싸움입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 무엇이 있느냐입니다. 오늘날은 좋은 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최상의 하나님을 놓치는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은 “only”입니다.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은 다른 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입니다. 인간을 속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참된 하나님만을 여호와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서 다른 어떤 것에도 밀리지 않기를 축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모든 엉클어지고 깨어지고 무너진 것이 있다면 돌이키고 회복시키는 일은 딱 하나입니다. 1계명 하나만 정확하게 붙잡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에 다함이 없는 기가 막힌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성경에 나타난 우상숭배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제1계명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제1계명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뿐임을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계명의 세부 율법

1)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과 복 (출애굽기 22:29-31, 23:13-19, 24-33)

첫아들, 첫 새끼를 하나님께 바치라(출애굽기 22:29-30)

첫 것을 드리는 것은 여호와를 공경하는 표입니다(신명기 26:2, 10, 잠언 3:9).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지라(출애굽기 22:31)

부정한 고기를 금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도록 성별시켰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출애굽기 23:13-19)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리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지니라”라고 명령하셨고, 3대 절기를 지키게 하셨습니다(출애굽기 23:13-19).

가나안 정복 약속과 그곳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복(출애굽기 23:24-33)

건강, 후손, 장수, 보호와 세력 확장, 큰 보상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섬기면, 그 땅에서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병을 제하여 주어서,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25-26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위엄’(두려움, 공포)을 앞서 보심으로(27절) 모든 원수가 달아나게 하시고(민수기 22:3, 여호수아 2:9, 11), ‘왕벌’을 보내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심으로(28절, 신 7:20, 수 24:12) 승리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가나안 족속을 한꺼번에 쫓아내면 들짐승이 번성하여 사람을 해치게 되므로, 조금씩 쫓아내실 것인데(29-30절), ‘홍해에서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 하수까지’ 지경을 정하시고 그 땅 거민을 쫓아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1절).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와 처벌 규정(출애굽기 22:18, 20, 6:14-15, 12:2-13:18, 18:9-14)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2:18, 신명기 18:9-14)

무당은 ‘귀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자’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신접한 자는 돌로 쳐서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레위기 20:27, 신명기 18:20). 요한계시록 21:8에서 둘째 사망에 들어갈 자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우상 숭배자들’이 있습니다. 심령술이나 점술은 오늘날에도 크게 성행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은 성도들에게 우상 숭배에 대하여 특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출애굽기 22:20)

우상을 위하여 자신의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바치는 자들은 반드시 진멸(살해당하게 시키다)해야 합니다(신명기 7:16, 20:16-18).

우상숭배 장소, 우상의 이름, 성읍, 우상 숭배자와 그 자녀와 생축의 진멸하라(신명기 12:2-3, 13:12-18)

우상숭배는 탐구하지도 말고 흉내도 내지 말라(신명기 12:29-31)

우상숭배를 유혹하는 자들은 돌로 쳐서 죽이라(신명기 13:1-11)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지, 친구가 유혹하더라도 듣지 말고, 성경에 위반되는 예언이나 꿈이 그대로 이루어져도 믿지 말고, 오직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마태복음 24:4, 24).

식용 짐승 규례와 피의 식용 금지(신명기 12:21-25)

식용 짐승은 각자의 처소에서 잡아먹고, 제물용 고기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에서 먹도록 규정하셨습니다. 피는 육체의 생명과 동일시되고(레위기 17:11),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합니다(히브리서 9:22). 피를 먹는 행위는 이방 우상 숭배자들이 즐겨 행한 제사 의식이었고,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가 됩니다.

주후 49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요긴한 일’ (우상,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 사도행전 15장에는 주후 49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율법을 전체적으로 폐하지 않고 꼭 지켜야 할 ‘요긴한 것’(사도행전 15:28)으로 결정하여 발표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은 ‘우상과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십계명 준수를 위한 세부 율법을 온전히 세움으로 교회의 기틀을 다지고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초석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마무리

예배의 대상에 대한 교훈

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1) ‘추모 예배추도 예배는 심각한 우상숭배입니다.

‘추모 예배’와 ‘추도 예배’는 천주교의 추도식과 우리나라 제사 풍습을 기독교적으로 변형시킨 것으로,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어디에도 ‘죽은 자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20에서는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5-16)

2) 죽은 자는 하나님의 영역과 권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시켜 준다는 초혼술사, 점쟁이, 무당, 박수,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애굽기 22:18, 레위기 20:6, 신명기 18:9-14). 하늘 아래 어떤 권세자도 죽은 사람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하나님의 품속에 있음을 믿고 맡길 뿐, 과도히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에게 제사’하는 것이 ‘우상 숭배’와 같은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시편 106:28-29).

3) ‘해맞이는 심각한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인 해에게 소원을 빌고 해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해를 섬기는 것은 심각한 우상 숭배입니다(신명기 4:19, 17:3-7, 욥기 31:26-28, 에스겔 8:15-18, 스바냐 1:5-6).

1계명을 범한 자의 최후

1) 완고(頑固)하여 사신 우상에게 절한 사울 왕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완고함’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았으며(사무엘상 15:23), 사무엘 선지자가 죽자 ‘신접한 여인’을 청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은 죄(역대상 10:13-14)로, 비참하게 패망했습니다.

2) 왕정 시대의 대표적인 우상 숭배자 여로보암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끝까지 우상숭배를 떠나지 않음으로(열왕기상 13:1-33), 하나님의 예언대로(열왕기상 14:10-11) 그 집에 생명 있는 자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멸망하였습니다(열왕기상 13:34, 15:29). 이후 ‘여로보암의 길’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는 삶의 관용어가 되었습니다(열왕기상 13:33, 열왕기하 3:3 등).

1계명의 구속사적 교훈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제1계명을 범하였습니다. 아담은 여자를 통해 뱀을 새로운 신으로 받아들이고 뱀의 말(창세기 3:4)을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생각이나 사상은 모두 우상 숭배입니다(골로새서 3:5, 요한일서 5:21).

예수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오신 참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불신은 가장 심각한 우상 숭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성부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여러 차례 선언하셨으나, 마귀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도무지 그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한 일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은 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요한복음 5:10-18).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한복음 8:58)라고 선언하시고,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선포하셨을 때(요한복음 10:30), 유대인들은 살기등등하여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요한복음 14:8-9).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요한복음 1:1)이시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빌립보서 2:6-8), 유대인들은 성자 하나님을 공경하기는커녕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마귀를 아버지로 믿는 가장 무서운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요한복음 8:44).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는 ‘다신주의, 혼합주의, 유물주의’를 모두 배격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이 있게 해서는 절대 안 되며, 오직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 적용을 위한 질문 *

  1.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껴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함께 나누십시다.
  1.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믿는 신앙이 내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1.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제1계명 말씀에 우리는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이 강해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 문헌들을 인용하여 편집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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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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