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10계명,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1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 : 34 – 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들어가는 말

십계명을 살펴보는 가운데, 모세를 통해 받은 구약 율법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더욱 더 그 의미가 확대되었는가를 보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있는 어떤 것도, 십계명의 가치를 경시하거나 그 표준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이 사실임을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삶과 가르침 모두에서 율법을 완수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율법을 철저하게 성취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과 행실에서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이 율법의 근본 목적까지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직전에 이 새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이 말씀은 주님의 삶의 기초가 되는 원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원리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의 충동에 사로잡혀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신 최고의 진리즉 사랑으로써 살아가는 곳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봉사가 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주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시작하셨는데, 가르치시는 중에 모든 율법의 근본이요 원동력이자 최종 목적이 사랑임을 밝히는 이 새 계명을 선언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한일서 2:7-8). 실로 이 계명은 옛적부터 있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계명은 사랑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이미 있어 왔던 율법을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또한 대한 이러한 요약은 주께서 인용하신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미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신명기 6:5, 레위기 19:18).

그렇다면 이와 같이 옛 계명을 반복하는 데 불과한 새 계명에 있어서 무엇이 새롭다는 것입니까? 그 답변은 이미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요한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이 이 계명에 비춘 빛이라는 점입니다. 요한이 새 계명이 기록된 요한복음 13:34-35절 말씀을 기록한 것도 역시 당시 주님의 제자들의 사랑의 원리에 따른 삶을 통해서 빛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요한은 “새 계명은 그에게와 너희에게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옛 계명을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확연해진 새로운 빛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옛 계명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이 새 계명을 주의해 보고, 다음에는 기독교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새 계명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줄거리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십계명을 고찰하는 가운데, 모세를 통해 받은 구약 율법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더욱 더 그 의미가 확대되었는가를 보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있는 어떤 것도, 십계명의 가치를 경시하거나 그 표준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이 사실임을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생활과 가르침 모두에서 율법을 완수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율법을 철저하게 성취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과 행실에서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그 율법의 근본 목적까지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직전에 이 새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이 말씀은 주님의 삶의 기초가 되는 원리를 밝힙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권리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의 충동에 사로잡혀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신 최고의 진리 즉 사랑으로써 생활하는 곳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봉사가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주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시작하셨는데, 가르치시는 중에 모든 율법의 근본이요 원동력이자 최종 목적이 사랑임을 밝히는 이 새 계명을 선언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 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한일서 2:7, 8). 실로 이 계명은 옛적부터 있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명은 사랑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이미 있어 왔던 율법을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또한 대한 이러한 요약은 주께서 인용하신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미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신명기 6:5, 레위기 19:18).

그렇다면 이와 같이 옛 계명을 반복하는 데 불과한 새 계명에 있어서 무엇이 새롭다는 것입니까? 그 답변은 이미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요한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이 그 계명에 비춘 빛이라는 점입니다. 요한이 새 계명이 기록된 요한복음 13:34, 35를 기록한 것도 역시 당시 주님의 제자들의 사랑의 원리에 따른 생활을 통해서 빛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요한은 “새 계명은 저에게와 너희에게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옛 계명을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확연해진 새로운 빛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옛 계명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이 새 계명을 주의해 보고, 다음에는 기독교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새 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옛 계명을 담고 있는 새 계명

십계명을 어기는 것마다 모두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랑을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으로써 삶을 통제하고 지도한다면 십계명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에 관해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빛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8-10).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간단하면서도 위엄 있는 이 사랑의 원칙을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을 통해 십계명이 성취되는가를 주의해 보면서 열 가지 계명 전부를 상기해 보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만일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말이 삶 가운데 나타내며 마음의 생각과 아름다움을 모두 발휘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뜨겁게 사랑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다른 신을 모실 여지가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십계명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과 관계된 계명은 완전하게 지켜집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면 이 사람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것도 두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강한 애정의 힘 때문에, 이미 새긴 우상이 있을지라도 이는 산산이 부서지고 사라집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신성 모독의 샘을 마르게 하고 위선자의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일은 바로 이러한 사랑에서 생겨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써 예배에 임할 수 있고 사랑으로 예배 행위들을 취할 수 있을 때는 안식일을 몹시 반기고 안식일의 모든 특권을 진심으로 기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십계명의 후반부에 나오는 인간 상호간에 관계된 계명으로 넘어가 다른 계명들에 대해 작용하는 사랑에 대해 살펴봅시다. 그러면, 부모님께 복종과 공경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유일무이한 충분한 능력은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제단에서 사랑의 불꽃이 꺼지는 두려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살인할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비열하게 사랑을 사칭하는 모든 종류의 성적 부정행위는 확실히 사랑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 부정행위는 그것이 사칭하는 바로 그 사랑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더욱더 추잡해져 갑니다. 이웃에 대해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이웃에게 재산의 피해를 주는 도둑질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말을 조심하고,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가 될 수 있는 소문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퍼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다스려서 소문을 내려는 생각조차 없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으며 마음의 갈망을 채우고 모든 탐심을 방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 오직 사랑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는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을 바르게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는 새 율법의 보다 풍성한 의미를 진술하기에 부족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실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얻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그 가지가 담장 너머로까지 뻗어나가는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입니다. 글자에 얽매이는 단순한 사람들의 좁은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사랑은 종종 사치스러우며 방탕하고 분별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와 같이 단순한 감각적이며 퇴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귀한 치료제가 있는데. 사랑은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그 치료제를 아낌없이 나누어 줄 것입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근본적인 힘으로서의 사랑의 가치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사랑을 다른 충동들과 대조시켜 보아야 합니다. 의무는 기계적이고 정확하며 규칙적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단순한 의무를 넘어서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며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무는 율법만을 지키는 반면에 사랑은 그 이상으로 행하여 율법이 지니는 참 뜻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따라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로마서 5:7) 여기서 의로움과 선함의 차이는 의무와 사랑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일을 체면 때문에 하려고 합니까? 사람들은 타인이 지켜보는 일은 조그만 일까지도 다 신경을 써서 아주 규칙에 따라 행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필시 보는 사람에게서 불리한 비판을 듣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은 외형적인 평가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일 외로운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도울 수 있거나 절망뿐인 토굴 감옥에 희망의 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비판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 그의 태도는 종종, 무심코 그 행동을 보게 되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또한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실을 아주 엄격하게 자제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많은 일을 감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러한 사람은 흔히 바로 이런 충동 때문에 외식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행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힘으로써 행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명성을 유지하거나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는 일에 전혀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선한 행동을 이루는 원동력인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온 율법을 이룹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새 계명

온전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율법을 온전하게 이루는 것이라는 진술에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털끝만치도 사욕이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가, 그리스도 한 분이 보이신 사랑의 삶을 제시하며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 이 그리스도의 삶을 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성육신하신 사랑이셨습니다. 주님의 전 존재와 삶은 세계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삶은 율법의 완전한 성취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과 마귀의 증거까지도 주님의 완전하심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생애 동안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알리느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의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빌라도는 모든 증거를 조사한 후에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겠노라”고 바른 판결을 내렸습니다. 주께서 암흑의 지하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을지라도 마귀가 주님을 보고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고 암시하는 바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과 마귀에 이르기까지 삼중적으로 증명된 이 순전함은 주님의 완전한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충성함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친구들과 적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즉 이따금 폭군과 압제자들에 대해 쏟으신 맹렬한 분노와 압제 받는 자들을 항시 부드럽게 대하시는 주님의 행동에서 사랑이신 주님의 면모가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무슨 질문을 하든지 그 답변은 여하튼 사랑 안에서 결정됩니다. 주님의 인격에 관해 질문을 하면, 그 인격의 특성들 하나하나가 다 사랑에서 나오므로 그 특성 전체는 결국 사랑으로 귀착됩니다.

주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주께서 사랑의 힘에 사로잡혀서 말씀하시고 행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소년 시절부터 성인 시절까지 고향 나사렛에서의 삶에서부터 선생으로서의 공적 사역을 하시고 그 이후 줄곧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걸어 나가신 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깊은 사랑의 길입니다. 일생동안의 주님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사랑으로 말미암는 행위 외에는 그 어떠한 행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께서 오가신 때를 살펴보고 지체하거나 서두르시는 일, 물러나셨다가 돌아와 활동하신 이 모든 일을 살펴보면 주님의 전 생애는 사랑 그 자체를, 그것도 율법의 성취로서의 사랑을 찬란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랑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 사랑 없는 자들의 죄를 속하였습니다. “죄는 불법”이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에게는 속죄가 필요하였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속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죄의 행동 원리를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들 중 하나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는 이기적인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보여주는 최상의 증거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잘못의 책임을 떠맡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류의 죄를 속량한 십자가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린도후서 5:21). 성육신하신 사랑인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흠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모든 사람의 잘못과 죄를 떠맡으셨습니다. 이것이 속죄의 신비인데, 이 사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죽음의 신비는 한없으신 신적 사랑이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만이 지닌 탁월성입니다. “나는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목숨을 버릴지라도 다시 얻을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을 다시 얻으신 후,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사도의 말대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모든 행위의 원동력이 됩니다. 삶의 자극제인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의 행위들을 유발시킵니다. 사랑이 최상의 이유이기 때문에 모든 추론도 역시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바울이 말씀한 사랑의 시만큼 사랑의 생활을 잘 묘사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놀라운 묘사 가운데서 사랑에 의한 율법의 완성이 아주 완벽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 묘사에는, 자기에게 사랑이 있다고 하는 자를 철저히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들어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율법을 어기는 것은 모두 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은 모두 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거나 주님의 사랑의 충동에 고의적으로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시내산을 벗어나서 지낼 수 있는 곳은 갈보리뿐입니다. 왜냐하면 시내산의 법전에 나타난 모든 취지를 이를 수 있는 곳은 사랑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홀리신 갈보리 언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때란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에 거하며 마음을 지배하는 때뿐입니다. 생활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통치하시게 하십시오. 그러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사랑으로 행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율법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고 시험하는 일은 옛 계명으로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새 계명으로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날에 한 모든 행동의 동기를 살펴보고 고든 말의 원인을 추적해 보며 모든 사상의 개념을 조사해 보십시오. 그리고 만일 그렇게 한 결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대해 만족하여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자신을 철저히 조사하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사랑 없음을 확인하게 되고 깊은 절망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감 때문에 오히려 지금도 살아 계시는 분 곧 영원하신 사랑의 주님을 의지하는 새 생활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새 계명의 표준이 주님이시고, 새 계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 시며,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새 계명을 지킴을 통해 얻는 결과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주님에게로 귀결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므로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성도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의 장면은 주님의 마지막 만찬입니다. 잠시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제자들과는 이별 직전에 갖는 마지막 만찬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별 직전이나 죽음 직전에는 가장 중요한 말이나, 마지막 부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남기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런데 주님의 명령에 이상한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새 계명”을 준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사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 율법에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인용하여 사랑을 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구약의 율법을 요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장면에서 주께서는 “율법에서 말하는 것 같이”, 또는 “내가 전에 말하였던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라” 하시며 이 계명은 분명히 새로운 계명이며 따라서 구약의 계명과는 구분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당부하시는 ‘사랑하라’는 계명은 왜 새 계명입니까?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성경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그의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을 보면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 계명은 “새 계명” 또는 “그의 계명”일까요? 34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가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새 계명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에 이전의 사랑의 계명과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 때문에 주의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오셔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니, 제자들은 주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17절은 구체적으로 이 새 계명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장의 구절을 통해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 때문인 것을 확증할 수 있고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란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 즉 죽음을 통한 십자가의 사랑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많은 과실을 맺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서로 사랑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자들 모두에게 그들이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2절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의 새 계명은 언제나 그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십자가에서 피를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라고 주께서는 죽음 직전에 새 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새 계명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나아가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는 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도록”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나아가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을 성령을 통해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이 새 계명은 천국의 유일한 계명입니다. 또한 주님과의 새 언약 속의 유일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한 요한일서 4장 7-8절은 새 계명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즉,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증거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들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으니, 그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증거, 제자로서의 증거는 오직 이 사랑이요, 이 사랑을 순종하여 행할 때, 우리가 구하는 데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이 새로운 계명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간구는 다 응답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을 행하는 자를 통해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교회가 풍성해지고, 직장이 변화되며, 나아가 사회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과 구별시키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지킬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이 바로 이 십자가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해야만 세상과 구분되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명하시길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면서 이 사랑을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육신을 죽이고 성령을 따라 살 때에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인데, 도리어 육신대로 살면서 새 계명의 사랑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생명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도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육신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계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고 기도를 통하여 성령 충만을 구할 것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에만 이 사랑의 새 계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새 계명을 알리시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새 계명을 교훈하기 전에 겸손한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는 겸손 없이는 새 계명의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치지 않는 끝없는 사랑!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시는 실패함이 없는 사랑! 예수님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상태는 정반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제 곧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에 대해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높아지고 싶어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계하고 헐뜯고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데, 제자들은 도리어 미움과 시기에 점점 더 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새 계명을 주시기 전의 조치로 ‘발을 닦는 일’을 생각해 내십니다. 이는 겸손함이 없이는 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느닷없이 대야와 수건을 가져오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면서도 교만한 제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발을 먼저 닦아 주겠다고 나서는 제자마저 없었습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자존심을 꺾지 않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네 놈들이 먼저 굽실거리지 않는데 내가 뭐하러 먼저 굽실거리겠는가! 네 놈들보다 먼저 내 자존심을 꺾지 않겠다!’ 임박한 죽음을 앞둔 주님과 버릇없는 제자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제자들을 꾸중하며 화를 퍼부었을 텐데, 주님은 묵묵히 열두 제자의 발을 만지시며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그들의 자존심과 교만이 부서지지 않고는 이 위대한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없으며,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동참할 인물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때에 주께서 몸소 보여주신 겸손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제자들의 교만을 완전히 무너지게 합니다.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도망갔던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 부끄러움과 자기 부정의 겸손 위에 이제는 주를 위하여 주님과 똑같은 사랑으로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작은 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리의 문제가 아니면 양보하며 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회와 직장에서도 겸손한 마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둘째로 중요한 사실은, 이 새 계명은 오직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이해하고 느낀 자들만이 지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으면 안됩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이 목사님이나 교우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항상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감동합니다. 그후 예수님을 바라보면 참 좋을 텐데, 계속 같은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사람에게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사람에게서 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예배와 설교를 통해, 기도와 묵상을 통해 이 사랑을 맛보셔야 합니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십자가의 그 사랑을 체험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오직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한 자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사랑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 체험되는 주님의 사랑과 그 선하심을 아는 자의 복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하고 큰 것인지요!

셋째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을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주님과 함께 한 후, 형제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놀라운 방법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할 때 닮은 꼴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랜 친구는 서로 닮습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닮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후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닮은 후, 내 형제, 내 이웃으로 나를 닮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님을 닮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로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즉, 바울을 본 받는 것이 주님을 본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새 계명은 불구하고의 사랑을 요청합니다.

새 계명은 ‘때문의’ 사랑도 아니요 ‘만일의’ 사랑도 아닙니다. 새 계명의 특징은 상대방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내게 행하신 사랑을 나도 그들에게 인내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로마서 5장 6-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의 단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괴수 같은 타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이웃이 험악하고 나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참으로 새 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에 포함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자신의 육의 세력을 죽이기 위하여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새 계명은 성령의 살아 있는 역사가 우리 마음 속에 있을 때에 실천되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평생 신앙의 연단과 훈련을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유일한 새 계명이요, 이 특이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만방에 드러냅니다. 이 사랑을 행하는 주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복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미소가 그들에게 비췰 것입니다. 그들 주변의 사람들이 환하게 천국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무리

사도 바울이 말씀한 사랑의 시만큼 사랑의 삶을 잘 묘사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8절 말씀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이 놀라운 묘사 가운데서 사랑에 의한 율법의 완성이 아주 완벽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 묘사에는, 자기에게 사랑이 있다고 하는 자를 철저히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들어 있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율법을 어기는 것은 모두 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은 모두 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거나 주님의 사랑의 충동에 고의적으로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시내산을 벗어나서 지낼 수 있는 곳은 Calvary 언덕뿐입니다. 왜냐하면 시내산의 법전에 나타난 모든 취지를 이를 수 있는 곳은 사랑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홀리신 Calvary 언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때란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에 거하며 마음을 지배하는 때뿐입니다. 삶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통치하시게 하십시오. 그러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사랑으로 행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율법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고 시험하는 일은 옛 계명으로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새 계명으로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날에 한 모든 행동의 동기를 살펴보고, 모든 말의 원인을 추적해 보며 모든 사상의 개념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한 결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이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대해 만족하여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자신을 철저히 살펴보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사랑없음을 확인하게 되고 깊은 절망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감 때문에 오히려 지금도 살아 계시는 분 곧 영원하신 사랑의 주님을 의지하는 새 삶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새 계명의 표준이 주님이시고, 새 계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며,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새 계명을 지킴을 통해 얻는 결과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주님에게로 귀결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므로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성도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합시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은 십자가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 후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 생명 가운데 성령을 따라 행하면 반드시 새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러한 놀라운 사랑을 우리 이웃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가능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길은 내가 내 십자가를 질 때에 나타납니다. 내 십자가란 죽음을 말합니다. 즉, 내가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명은 나를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야만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를 바울은 믿음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러한 믿음의 삶이 정확하게 새 계명을 지키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의 가장 분명한 정체성은 새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임을 확신한 가운데 철저하게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강해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들을 정리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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