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천국, 천국, 천국을 향하여 (11)-천국에서 누가 크냐?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서 누가 크냐?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마태복음 18 : 1 ? 4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들어가는 말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주님께 물어볼만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천국에 입성할 사람들인데 그곳의 삶을 전혀 알 수 없는 우리로서는 과연 천국에서 어떤 사람이 크냐는 문제는 우리의 흥미 있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점점 가까워지자 제자들은 그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메시아 왕국이 눈앞에 다가온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 나라에서 과연 자기들 중에 누가 큰 자가 될 것이냐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나라에서 제가끔 큰 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이 문제에 대하여 주님께 물어보기로 하고 주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묻게 된 것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본 이 질문은 어른의 관점에서 나온 것입니다. 경쟁적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 속에 익숙해 있는 어른들의 관심은 누가 더 크냐에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크다는 개념은 내면적이거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량적이고 외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천국의 주인공이라고 답변하시면서 어린아이는 신앙의 대표적인 모델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은 제자들의 시기와 다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님이 홀연히 변형되셔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집니다. 일명 변화산 사건을 체험한 것이죠.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를 질문하십니다. 본문 1절 말씀의 “그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건져 올린 고기의 입에 있는 돈으로 세금을 내라고 지시한 때입니다.

지금까지의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곧 떠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위치에 관해서 궁금해집니다. 지금까지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베드로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 같고, 그 다음이 야고보와 요한일 것으로 추측을 합니다. 마가복음 10장 말씀에 보면 야보고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부탁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서로를 향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부글거리는 상황에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한심한 일입니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크냐? 자리싸움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동상이몽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데 제자들은 정치적인 해방을 꿈꾸며 자리다툼을 벌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아신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웁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3절 말씀에,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지금처럼 눈에 보이는 자리다툼이나 하는 그 태도를 가지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마음을 돌이켜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면 왜 어린아이와 같아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 말은 어린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와 삶의 가치를 가진 자만이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줄거리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천국을 소유하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4절 말씀에,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본문 말씀은 자신들 중에서 천국에서 제일 큰 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과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대답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 말씀을 통해 자신들에 관한 관심으로만 가득 찬 제자들의 이기주의적인 질문과 겸손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답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의 자기 중심주의적 질문

편견은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으로 끌어내립니다. 제자들이 말한 천국과 메시아의 의미는 예수님의 그것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들이 소망한 천국은 로마로부터 해방된 평화로운 이스라엘이었고, 그들이 바라본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해 낼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누가의 증언대로 예수를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기대했던 것입니다(누가복음 24장 21절). 이렇듯 진리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편견은 온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인간적 왕으로 끌어 내렸고 천국 시민의 영적인 복을 유한한 인간의 물질적 부요와 권세로 대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편견은 자신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모든 육적 문제의 해결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맙니다. 편견은 진실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편견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단지 편견은 모든 일과 상황을 자신이라는 잘못된 기준에 맞춰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해 버리고 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통과 무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질문한 “그때”(1절)는 예수께서 장차 자신에게 닥쳐올 고난과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신 직후였습니다(마태복음 17장 22-23절). 즉 그들은 자신들에 관한 문제에만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께서 당할 고난과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욕심은 타인을 바라보는 눈을 막아 버립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는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돌아볼 여유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마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하던 제자들이 실제로는 예수님의 고통과 무관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듯이, 욕심과 자기애로 가득 찬 사람들은 자신들이 장악하고 맹세했던 사랑을 실천해야 할 때에, 그들의 도움과 위로를 필요로 하는 자들과 무관한 자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곳에는 분쟁과 분열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베드로는 후에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돈독한 신임을 받는 제자로서 밧모 섬으로 귀양 갔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순결한 신앙의 소유자였고 그의 형제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의 제물이 된 열정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대하고 훌륭하며 고결한 성품을 지닌 그들이 본문 말씀에서 보여 주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랑과 희생, 봉사의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분쟁과 분열, 다툼의 모습으로만 일관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아무리 훌륭한 신앙과 재능, 그리고 인품을 소유한 자와 그들이 모인 집단이라 할지라도 이웃을 위한 희생과 사랑의 실천이 없이 자신들의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그곳은 사랑과 기쁨, 화평 대신에 시기와 질투, 다툼과 분쟁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수차례에 걸쳐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천국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 하는 제자들의 질문은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정치적 해방을 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 되시면 자신의 신분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천국과, 예수님께서 생각한 천국은 너무나도 다른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 말씀은 순종하는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이 말씀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 이 말씀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모습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의 순수함 

어느 날, 한 미국 교회에 5살짜리 어린이가 주일학교 교실에 왔는데, 부모 이름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아이 이름은 브라이언(Brian)이었는데 성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서양에서는 같은 이름이 많고 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을 찾으려면 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의 성을 알려고 물었습니다. “브라이언! 아빠 이름이 뭐지?(Brian, what’s your daddy’s name?)” 그때 아이가 평소에 아빠를 부르는 것이 이름인 줄 알고 대답했습니다. “대디(Daddy).” 할 수 없이 선생님이 또 물었습니다. “브라이언! 엄마 이름이 뭐야?(Brian! what’s your mommy’s name?)” 아이가 또 대답했습니다. “마미(Mommy)” 결국 성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성을 알까 고민하다가 선생님이 기발한 질문을 했습니다. “브라이언! 아빠가 엄마를 뭐라고 불러?(Brian! what does your daddy call your mommy?)” 그때 아이가 약간 어른 목소리 흉내를 내며 말했습니다. “헤이! 베이브!(Hey, Babe! 여보, 자기야!).” 

어린아이들 앞에서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순수하니까 그대로 배웁니다. 가끔 어린아이들은 엉뚱한 말을 하는데, 때로는 그 말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을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 아만다(Amanda)란 5살짜리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만다가 고열로 병원에 가니까 의사 선생님이 진찰하려고 그녀의 귀를 보며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있을까? 도널드가 있나?(Who’s in there? Donald Duck?)” 아이가 말했습니다. “노(No).” 귀를 다 살펴보고 난 후 의사 선생님이 아이의 코를 진찰하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있을까? 미키 마우스가 있나?(Who’s in there? Mickey Mouse?)” 아이가 말했습니다. “노(No).” 코 진찰도 끝났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아만다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누가 있을까? 바니가 있나?(Who’s in there? Barney?).” 그때 아만다가 대답했습니다. “노! 제 가슴에는 예수님이 있어요. 바니는 속옷에 있어요(No, Jesus is in my heart. Barney is on my underwear).” 얼마나 순수한 모습입니까? 바로 그런 모습 때문에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지 잘 말해주는데, 누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까?

회개하는 자

주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 이 땅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 이 땅에 제국을 세우고 그들은 개국공신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주님을 끊임없이 버리게 하자 따르는 군중들의 숫자는 점차 적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숫자가 느는 것을 거의 절대 선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그런 사람의 기대와는 반대로 가르치고 행동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가진 제국의 희망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그럴 즈음에 주님의 제자 중에 3명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본문 바로 앞장에 있는 마태복음 17장에서 변화산 사건을 체험합니다. 그때 주님이 변형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엄청난 장면을 목격한 3명의 제자들이 나머지 제자들에게 그 얘기를 하자 제자들 사이에는 다시 제국에 대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곧 제국이 세워질 것 같으니까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가며 “주님 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가?”라는 주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서로 자신이 제일 큰 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일 연장자인데다 목소리가 컸고, 주님이 “반석”이란 별명을 붙여주시고 천국 열쇠를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제일 사랑받는 자니까 자신이 제일이라고 주장했고, 불같은 성격을 가진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는 “요한아! 너는 형도 몰라보냐?”고 말하며 자기가 큰 자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이 세리라는 돈 많이 버는 자리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까 자기가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이고, 안드레는 자기가 주님을 따른 최초의 제자니까 최고라고 주장했을 것이고, 나다나엘은 가문의 혈통은 자신이 제일 좋다고 주장했을 것이고, 가룟 유다도 자신의 돈궤를 맡을 정도로 주님의 신뢰를 받으니까 자기가 제일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논쟁하다가 마침내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논쟁하지 말고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 묻고 주님의 결정대로 따르자!” 그래서 본문 1절 말씀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예수님!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그 질문에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본문 2절 말씀에 먼저 저희들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주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를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 “돌이켜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 “회개”임을 알려줍니다. 

회개란 가치관의 변화, 마음의 변화, 신분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진실한 회개에는 반드시 선한 변화가 있습니다. 진실한 회개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변화시키고, 외모까지 변화시키고,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킵니다. 그 중에서 본문 3절 말씀처럼 주님은 어린아이들처럼 변화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어른들은 대개 안주하려고 하고 아이들은 항상 질주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대개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싫어합니다. 자신의 길을 고집하고, 자신의 삶을 편하게 생각하고, 이제까지 하던 방식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다른 좋은 길이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기 방식대로 그냥 삽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제가 한번 해봐도 돼요?”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데, 그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교회와 교인이 전통과 관습에 매여 변화되지 않으려는 것은 죽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 3절 말씀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이나 “결단코”라는 강조적인 표현을 써서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이루려는 놀라운 일을 놓치게 됩니다. 자신을 돌이켜 선한 일에 참여하기를 힘쓸 때 천국에서 큰 자가 됩니다. 

겸손한 자

본문 3절 말씀에서 주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을 자세히 묵상하면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자기만 생각하는 미성숙한 면을 비롯해 많은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씀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결국 주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의미는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내려가는 길입니다. 위대함은 겸손할 때 주어집니다.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은 세상적인 성공 가치관을 가지고 누가 큰 자인가를 물었습니다. 그처럼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도 돈을 많이 벌고, 큰 명예와 권세를 얻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복을 판단하는데, 그런 가치관은 신앙생활의 초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큰 자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시선을 받기를 원하면서 교만과 자기기만에 빠져 결국 영혼이 망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그냥 헌신해야지 더 높아지고 더 사랑받고 더 복을 받으려고 헌신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지만 그 헌신 때문에 더 사랑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최고로 사랑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으려고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받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더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자만심만 키웁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새 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악 된 생각이 있는데, 이 문제 좀 도와주세요. 저는 주일에 교회에 오면 제가 교인들 중에 가장 예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요?” 그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자매님! 그 문제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것은 죄가 아니에요. 단지 큰 착각이니까요.” 그처럼 자기가 잘났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듯이 자기 영성과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착각이 심해지면 어느 죄보다 무서운 교만의 죄로 발전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는 대단하다! 나는 잘났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몸을 불사르는 헌신을 해도 그 헌신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감추려고 할 때, 그런 사람이 나중에 천국에서 큰 자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순수한 자 

어린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순수함입니다. 어린아이는 “척!”하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인 척, 있는 척, 그리고 아는 척 하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왜 그래요?”라는 질문이 참 많이 합니다. “엄마! 하늘은 왜 파래요? 왜 신호등은 녹색인데 파란 불이라고 해요?” 반면에 어른이 될수록 그런 호기심과 순수함은 없어지고 계산만 복잡해집니다. 계산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어느 날, 한 아빠가 “고 피쉬(Go Fish)”라는 카드 게임을 4살 된 아이와 했습니다. 몇 번의 게임에서 4살 아이가 연거푸 이기니까 그 아이는 한참 자기 자랑에 빠졌습니다. 그 자랑을 듣고 아빠가 말했습니다. “얘야! 너무 자랑이 심하구나! 아무래도 너에게 ”겸손(humility)”을 가르쳐야겠다.” 그때 아이가 아빠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그 겸손 게임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왜 가끔 어린이들이 말 같지 않은 말을 하는데 사랑받습니까? 아이들의 순수함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순수함을 기뻐하십니다. 너무 계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계산적으로 살지 않으면 남에게 항상 당하면서 살 것 같지만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따릅니다. 특히 아이들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고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어떤 곤경에 처하면 그 이유를 알려고 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생겼나? 누구 때문인가?” 그런 질문을 하다보면 불평과 원망과 책임 회피가 나오고, 그런 식으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은 결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고민에 빠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믿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성경은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믿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철저히 믿고 의지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길과 생각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철저히 믿으면 그때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을 지속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생은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모험이 됩니다. 그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적절하게 공급해주십니다. 

로버트 펄검(Robert Fulghum)이라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캔자스시티 타임스(Kansas City Times)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저는 삶의 지혜를 대부분 유치원에서 배웠습니다. 지혜는 높은 학력에 있지 않고 유치원의 모래박스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나누고 공정하게 노는 법을 배웠고, 남을 때리지 않고,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남의 것을 가지지 않고, 남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미안하다고 말하는 태도를 배웠고, 차를 조심하고, 손잡고 서로 모여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높고 낮은 것에 대한 구분이 없고 모두가 똑같습니다. 그런 순수한 평등정신이 있어야 삶의 지혜도 생깁니다. 우리는 부족한 점이 참 많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과 도우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을 철저히 순진할 정도로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복은 하나님을 겸손하고 순수하게 따르고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나라 천국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가는 곳이고, 심령 천국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아니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힘주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의 믿음이라고 하니까 어린 신앙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특성이 어떠합니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잘 따르고, 부모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혼나면 금방 울고 잘못했다고 합니다. 또 어린 아이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천국을 소유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불러서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에게 “애야, 이리와라” 하실 때 어린 아이는 순순히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실 때, “왜 불러요 ?” “뭐 하려고 오라고 해요?” 묻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순종하는 모습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름에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늘 주일 날 여러분을 불러서 이 전에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지 않으시면 한 사람도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인데 주님께서 나를 불렀습니까? 그런데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불순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경찰서에서 여러분 부르면 안 가고 버팁니까? 법원에서 출두하라고 하는데도 안 갈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도 법에 불순종하는 사람에게는 용서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주일 예배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순종하고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이 다음에 죽어서 가는 천국도 천국이지만 왜, 우리 심령에 심령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부름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복 받는 비결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 시간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예배 시간이 되면 교회로 자동적으로 나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3절 말씀에, 어린 아이처럼 돌이켜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얼굴 표정부터 달라집니다. 그리고 혼이 날까 무서워 눈물부터 흘립니다. 부모에게 혼나면 마구 울고 잘못을 빌라고 하면 “잘못 했어요”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바로 이런 어린 아이의 특성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찌할꼬” 하는 상한 심령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옷을 찢는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애통함으로 죄를 회개하는 사람이 될 때에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적당하게 넘어가는 사람이 된다면 심령의 천국도 이루어지지 못할 뿐 아니라, 하늘나라도 갈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요엘 2장 12절에서 13절 말씀에,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회개는 돌이키는 신앙을 말씀합니다. 돌이키는 신앙을 가지시고, 천국을 소유하시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본문 3절에서 4절 말씀에, 어린 아이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야 만이 천국에서 큰 사람이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교만한 어린 아이 보았습니까? 어린 아이는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길을 가면서도 부모의 손을 잡고 가려고 하고, 모르는 곳을 혼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순종도 중요하고, 회개도 아주 중요하지만, 자신을 낮추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낮아지지 못하고 신앙이 실족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겸손에 대하여 자신에게 와서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 말씀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도 높아 질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 말씀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도 여러분, 교만한 사람의 심령에는 절대로 천국이 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택함 받을 때 낮은 자리에 있을 때 택함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고, 사도 바울 역시도 낮아질 때 사도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사울의 이름은 큰 사람이라는 뜻이고, 바울이라는 이름은 작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름까지 고쳐가면서 스스로 작은 사람임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만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 말씀에서, 교만한 사람은 대적하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순종하고, 회개하고, 낮아지는 사람들이 되어서 심령 천국을 이루어가면서 하나님 나라까지 상속받는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들로서 큰 자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우리도 여전히 세상적인 큰 자 개념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제자들 상호간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며, 사단의 까불림을 당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 앞에 겸손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른처럼 높아진 마음을 회개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를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가르침을 겸손히 받아들여 그대로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큰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겸손히 낮추게 하여 주시고 천국에서 큰 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문헌을 인용하여 올린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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