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 [17]

광주 5·18 정신의 상징적 무장난동자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19년 1월부터 518사건과 관련한 신간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The War of 5∙18 History between Moon Jae-in and Chun Doo Whan)>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연재를 시작한다.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은 5.18사태 전문가인 김대령 박사의 16년간의 연구 결산으로 지난해 11월 26일을 기해 출간됐으며, 인터넷 서점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편집자주>

제3장 ∙ 광주시민 쏜 5·18 유공자들

2. 광주 5·18 정신의 상징적 무장난동자

황석영은 계엄군 광주 재진입이 거의 확실해진 5월 27일 새벽 3시경의 도청 방어병력 현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도청 방어병력은 도청의 담벽 주위로 전면과 측면 쪽에 2, 3명이 1개조가 되어 2 미터 간격으로 밀집 배치되었다. 도청의 뒤로는 약 40여 명 정도만 부속건물에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전원은 도청 전면 건물 1층부터 3층까지 복도의 유리창을 전부 깨고 도청 앞 광장을 향하여 배치됐다. 당시에 지하실은 무기고로, 1층은 부엌, 2층은 식당으로 사용했던 원래의 민원봉사 건물에는 무기고의 다이너마이트를 의식하고 50여 명을 2층에다 특별히 배치했다(황석영 1985, 233).

이때 기동타격대원들은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떤 상태였는가? 그들은 전날 난생 처음으로 총을 만져 보았으며 아직 총 쏘는 법을 몰랐다. 그저 전날 오후 기동타격대원으로 편성되자마자 밤 12시까지 시내를 순찰하다가 밤 12시에 저녁 식사를 하였을 뿐이었다. 대부분 청소년들이요, 도청에서의 첫날밤인지라 더러는 끼리끼리 장난을 치느라고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이 막 들려 하였을 때 새벽 2시 30분에 도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그냥 잠만 깬 것이 아니었다.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새벽 2시 30분에 주로 10대 청소년들이었던 기동타격대원들을 깨워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도청을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제145회 국회 청문회 1989, 105).” 이 명령이 대부분의 기동타격대원들에게는 황당한 명령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기 위해 기동타격대에 지원 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무장시민 권력이 지배한 세상이 된 줄만 알고 벼슬 얻은 기분으로 기동타격대원이 되었던 것인데, 한 번도 사격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청소년들더러 국군과 전투를 벌이라니 졸지에 심적 공황 상태가 되었다.

사진 20 ▲ 광주해방구 치안대였던 기동타격대 대원들 대부분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청소년들이었다. 사진에서 만16세의 기동타격대원이 이소룡 영화 간판 앞에서 이소룡의 무술 흉내를 내며 장난치고 있다.

박남선 상황실장이 동신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19세의 청소년 윤석루를 5월 26일 아침 기동타격대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윤석루가 낮 12시에 모집한 기동타격대 대원들은 그보다 두 살 정도 어린 17세 청소년들이었다. 그러면 그들에게 도청을 사수할 비장한 각오가 있었는가? 그날 오후에 기동타격대로 편성된 후에 경찰장갑차를 타고 광주 시내를 순찰하는 그들의 모습이 담긴 위 사진이 그들의 정신 자세를 대변한다.

기동타격대는 광주해방구 통치기구의 첫 공식 조직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기동타격대원으로 임명되자마자 전용차가 지급되었고, 경찰복과 군복 비슷한 제복차림으로 그 차를 타고 으시대며 순찰하는 것은 광주해방구는 그들의 세상임을 느끼게 하는 행차였다.

광주사태 기간 중에 광주 무등여관 인근 극장에서는 이소룡의 무협 영화 “사망탑”을 상영하고 있었다. 위 사진에서 만 16세의 한 기동타격대원이 체구에 비해 길어 보이는 카빈소총을 어깨에 메고 경찰장갑차 위에 우뚝 서서 이소룡 영화 간판을 배경으로 이소룡 흉내를 내는 쇼를 하고 있다.

기동타격대 제2조는 조장 박승열 외 대원 박명국, 김상규, 박영수, 안성옥, 김두전 등 총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날 오후의 순찰을 마치고 도청에 들어간 제2조 대원들은 도청에서 양답배를 한 갑씩 피운 후 도청을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동타격대는 시민군이라고 불러 주기에는 너무도 엉성한 조직이었다. 만약 무장시민들이 밤 12시까지 무기 반납을 안 하면 계엄군이 광주에 재진입할 것이라는 말이 있어서 윤석루 기동타격대장이 제2조에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순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순찰 도중 운전 미숙으로 교통사고를 낸 제2조는 사실상 집단 탈영인 무단 외박을 한 사실을 안성옥이 증언한다:

기동타격대 사무실에 들어가니 몇몇 대원들이 생과자를 먹고 있었다. 누가 갖다준 모양이었다. 그것을 먹고 있는데 도청 안의 캐비닛에 들어 있었다는 양담배를 한 갑씩 나눠주었다. 자정경에 기동타격대 대장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순찰을 요청하여 1조와 2조가 출동했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 우리 차가 운전미숙으로 인해 넘어져버렸다. 조장인 박승연 씨가 다치고 총 한 자루가 부러졌다. 우리는 조장을 싣고 기독병원으로 갔다. 기독병원에는 워낙 중상환자가 많아 조장 정도의 외상은 환자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응급치료만 받고 다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으로 순찰을 나갔다. 이때 조장이 도청으로 들어가지 말고 피곤하니까 이곳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들어가자고 했다. 우리는 모두 동의하여 대한극장 옆에 있는 구일구여인숙으로 갔다. 지프차는 여인숙 대문 앞에 세워뒀다(안성옥 1989).

3. 총기난사 직전 깡소주 마신 청소년들

기동타격대 제2조는 차와 총을 지급받고도 그 날 밤 여인숙에서 외박한 후 다시는 도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2조와 달리 제6조 대원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가구공으로서 기동타격대 제6조 대원이었던 나일성은 “기동타격대는 광주의 보루”라는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그의 소대는 무기 지급받은 직후 깡소주를 미시고 담배를 피웠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곧바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비상이 걸리고 도청에서 총기를 지급했다. 순식간에 도청에 긴장감이 돌았다. 나도 카빈과 실탄 2클립을 지급받았다. 즉석에서 총 쏘는 법을 배웠다. 우리 소대는 도청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배치지역으로 가려는데, 소대원 한 명이 우리를 잡아당겼다. 그는 우리를 지프차 안으로 데려갔다. 그가 소주 1병을 지프차에 감춰 놓았다며 모두 나눠 마시자고 했다. 더 털어보니 담배도 2개피 있었다. 우리는 마치 ‘죽음의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아주 근엄한 표정으로 깡소주를 마시고 담배를 돌려 피웠다.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막상 광주를 침입하는 계엄군을 직면하게 되자 ‘그들은 분명 나의 적이다’라는 생각이 머리에 꽉찼다. 정전된 상태라 온 시가지가 캄캄했다(나일성. 1989).

그러나 나일성의 증언록 제목과 달리 TNT창고 옆에서 깡소주를 마시고 담배피는 무장괴한들을 광주의 보루라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일성의 소대원들은 대부분 십대 청소년들이었다. 경찰이 사라진 광주해방구에서 기동타격대는 경찰을 대신하는 민중의 지팡이였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기동타격대원으로 임명 받은 첫 날 총으로 약탈한 소주를 마시고 순찰 다녔으며, 남은 소주 한 병을 총과 다량의 실탄과 수류탄을 지급받은 직후 또 마셨다.

지난 2017년 9월 26일 오후 4시 40분께 철원에서는 진지 공사를 마치고 도보로 부대 복귀 중이던 육군 병사가 갑자기 날아든 총탄에 머리를 맞아 숨진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 발생으로 인근 사격장에서의 사격 훈련 안전 수칙 준수 여부가 도마에 올랐다. 이처럼 대낮에 현역이 맑은 정신으로 사격 훈련을 받아도 교관과 조교를 비롯한 사병들 중 누구 한 명만 잠시 방심해도 언제 총탄이 엉뚱한 곳으로 튈 줄 모르는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 하물며 단 한번도 사격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청소년들이—훈련장의 단발 사격이 아닌—연발사격이 되는 자동소총을 지급받은 후에 깡소주룰 덜컥덜컥 마신 후 총기난사를 하였을 때는 그 총탄이 어디로 튀었겠는가?

5.18광주의거청년동지회도 무장시민들이 5월 27일 새벽이 밝기 전에 소주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취한 채 총기난사 준비를 한 사실을 기록한다:

우리는 도청을 빠져나와 시민들이 실어준 4홉들이 소주 한 병과 빵 몇 개로 ‘최후의 만찬’을 했다. 이승에서는 더 이상 뭘 먹을 수 없는 사선으로의 출정에 앞서 가진 소주와 빵으로 된 최후의 만찬이었다. 학생들은 계속 도청안으로 들어갔고 건너편 공중전화 박스에서 시민군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 시민군도 아마 마지막으로 꼭 전해야 할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5.18광주의거청년동지회 1987, 128).

게다가 청소년들이 받은 훈련은 약 30분간 받은 얼차려가 전부였다. 한쪽에서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깡소주를 마시고 있었을 때 다른 한쪽에서는 윤상원이 들불야학 학생 등을 모아놓고 얼차려를 실시하였음을 황석영은 이렇게 기록한다:

3시경, YMCA에 남아 있던 고등학생과 군 미필자가 대부분인 청년들은 무기를 지급받기 위해 도청 무기고 앞으로 줄을 지어 구보로 들어갔다. 윤상원이 무기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무기를 받으러 온 청년들을 똑바로 정렬시키고, 짐짓 그들을 긴장시키기 위하여 ‘앉아, 일어서’를 수십 회쯤 반복 실시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30분 동안 어둠 속에서 실탄과 카빈 소총이 지급되었다(황석영 1985, 237).

사실 들불야학 학생들은 전혀 전투조가 아니라, YWCA 내의 왕년의 빨치산 장두석 사무실에서 유언비어 유인물을 등사하여 시내에서 배포하는 홍보반이었다. 들불야학 청소년들은 총과 실탄을 지급받은 뒤 YWCA 회관으로 복귀하였으며, YWCA가 5월 27일 무장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던 유일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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