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의 거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별세

미국외교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전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100세를 일기로 운명을 달리하였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전설적인 존재로 지난 1960년대 미국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용되고 이어 국문장관에 발탁되어 닉슨 대통령과 포드 대통령 밑에서 미국 외교를 주도하였고 월남전 종식, 중국 개방, 소련과의 데탕트 등 당시의 세계 외교를 리드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미국 외교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가장 존경받는 정치 외교 인사로 기억된 인물이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독일에서 태어나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히틀러 나치 정권으로부터의 박해를 피해 처음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탈출하였고 15세에 가족 모두가 미국 뉴욕에 안착하였다. 이같은 난민 출신으로 후에 국무장관직에 오르며 전세계 외교에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월남전 종식 업적으로 노벨상 평화상을 받고, 미국 정부의 가장 높은 민간인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받았으며 그의 회고록 백악관 시절을 집필해 미국 전국 도서상도 받았다. 외국 이민자 출신으로 가장 높은 업적과 명예를 달성한 개인적으로도 높은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가 국무장관시 일어난 캄보디아 폭격과 동 티모르와 다른 국가들의 쿠데타 동조 등으로 소위 전쟁범죄자라는 비난도 받았는데 이는 다분히 정확한 사실을 모르는 낮은 수준의 정치적 공세에 불과하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1923년 독일 유태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1930년대 히틀러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 유태인 박해로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많은 친척들이 유태이 수용소로 보내지면서 키신저 가족들도 독일을 떠나 우선 영국에 정착한뒤 키신저가 15세일때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공립 고등학교를 다니고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키신저는 미군에 징집되 유럽으로 파병되었다.

2차대전에서 프랑스와 독일 전투에 참전하고 숱한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게된다. 직접 실전 전투에도 참가하고 대 독일군 첩보전에도 가담하여 첫 정보수행도 경험하게 된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키신저는 독일 출신으로 독일어에 능통한 점으로 전후 독일내 비나치화 정책을 수행해 나치당원 색출, 조사를 담당하였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키신저는 하바드 대학에 진학하고 처음에는 평범한 회계사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가 역사와 외교과목을 공부하면서 외교의 길을 택하게된다. 하바드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도 마친 후 이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되면서 점차 미국 외교계와 정치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발을 넓히게 되는데 특히 케네디 정치대학원에서 국제관계 세미나를 주도하면서 록펠러 가문의 넬슨 록펠러를 만나 정치계에 알려지면서 마침내 닉슨 대통령과도 만나게 되고 그의 국가안보보조관으로 임명된다. 이때가 그의 나이 45세인 1968년이었다.

키신저는 확실한 외교 지식과 깊은 이해로 닉슨 대통령과 완벽한 주군, 신하의 관계를 이루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더욱 복잡해지기만하던 월남전의 종식을 위해 크게 헌신하였으며 숱한 난관속에서도 월맹과 휴전 협상을 계속하여 마침내 파리 조약을 성사시켜 미국의 월남전 종식을 이루게 된다.이 업적으로 키신저는 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월남전 종식 후 키신저는 월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미국의 국제적 위상과 새롭게 부상한 소련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그 해결책을 모색하며 닉슨 대통령과 함께 중국 개방과 중국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놓고 비밀리에 중국 북경을 방문하여 닉슨 대통령의 모택동과 주은래 수상과의 회담을 성사시킨다.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소련과의 냉전 대결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사건이었으며 중국의 개방으로 미국의 대 소련 냉전 승리라는 귀결을 갖게하는 역사적 전략적 사건이었다.

이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닉슨 대통령이 월남전 종식 달성을 하였음에도 국내적 정치상황으로 초유의 대통령 사임을 한뒤에도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미국의 대외적 일관적 외교수행의 대명아래 후임 포드 대통령의 국무장관으로 계속 재직하였으며 미국의 월남전 참전과 철군 후의 혼란한 세계 외교 정세를 이끌어갔다.

포드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공식 국무장관직에 물러난 후에도 키신저는 대 소련 냉전 정책수행에도 계속 직, 간접적으로 미국 외교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후의 모든 미국 대통령,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 부시 2세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중국과도 똑같은 지속적 영향력있는 관계를 이루어왔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학자로서, 외교가로서, 또한 세계적 명망높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 역사에 깊히 새겨질 인물로서 현대 세계사에 중추적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또한 독일 태생으로 박해받는 유태인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최고의 명예와 명성을 얻은 입지전적 삶으로 미국 이민자 역사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통 서유럽 및 미국의 외교사에서 중요한 중추적 인물로 기록될 것이며 힘의 균형이라는 외교의 중심정 사상을 재집대성하고 실천한 대 외교가로서 역사의 큰 자취를 남기었다.

김태수 국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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