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필자의 인생이 180도 바뀐 배경 (Ⅱ)

[LA=시니어타임즈US] 본지는 2020년 7월부터 최익주 선생의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가제)> – 국민의 반성과 국가적 전환점(부제)을 저자와의 합의 하에 글이 출판되기 이전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는 회차별로 매주 한편씩 실리게 되며, 글의 배포는 무방하나 무단전재는 금한다. 글의 소유는 전적으로 저자 최익주 선생에게 있음을 알리며,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무방하다.

<그렇게 선진국이 가능해?>는 저자가 20년여 전부터 대한민국이 인간적으로는 물론이고 총체적으로 한계에 봉착했고, 또다시 혼란과 위기와 망국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을 연구했다. 이에 저자는 대한민국이 부디 새롭게 출발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산업화 이후의 시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련의 최근 사건들을 통해 그 문제점 되짚으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바르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편집자주> 

8. 필자의 인생이 180도 바뀐 배경 (Ⅱ)

앞(Ⅰ)에서도 강조했듯이 여기에서 거론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이해를 구한다.

※) 여기서 거론되는 사건에 연관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여기서 소개되는 사건(과거) 관련자들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우리의 관심사를 과거로 후퇴시키려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아마도 여기서 거론되는 사람 중에는 좋지 않은 과거가 드러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유로 피차 안타까운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민족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는 가해자와 피해자이기 쉽고, 사실은 이러한 우리가 모두 안타까운 희생자들이다.
그래서 여기 내용에 연관된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사회문화와 미래와 후대를 위하는 당연함과 애국충정으로 승화해주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서로가 당하고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갖가지 우여곡절 중 하나로 여겨주기 바라며, 가능하다면 잘잘못에 연연하지 말고 인생의 소중한 교훈과 추억과 보람으로 간직해주길 바란다.

③ 당시에 필자가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

③―1. 관세청 홈페이지에서 필자를 위해 ’임시게시판‘ 제공

당시에 필자의 사건은 관세청에서 심각한 사안들이었고, 세관 공무원들에게 상당한 반응과 호응이 있었다. 그래서 관세청 홈페이지 운영자가 ‘자유게시판’ 바로 옆에 ‘임시게시판’을 나란히 만들어주었고, ‘자유게시판’에 마우스를 가져다 대면 《자유게시판은 민원인들이 이용하는 공간이어서 최익주씨 사건은 ‘임시게시판’을 이용해주세요.》라고 안내 멘트를 달아놓았을 정도다.
그런데도 관세청은 사건을 통째로 덮어버리려고 안달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만일 관세청 홈페이지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면 당시 상황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 후에 ‘관세청 홈페이지 개편작업을 한다.’라는 안내가 있었고, 과거 자료들을 모두 없애버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혹시 관세청과 계약을 맺어서 도메인(홈페이지 제작)을 제공·관리해준 업체가 있었다면 지금도 모든 자료가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물론 지나버린 나의 사건을 이제 또다시 문제 삼거나, 불명예를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③―2. 세관장이 필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

필자가 관세청 홈페이지에서 광주본부세관장을 비난했고, 믿을 언덕이 생겨서인지 세관장은 필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서 입막음을 시도했다. 하지만 필자도 세관장과 감시과장(사무관)을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로 맞고소(고발)했다.
필자는 갈 수 있는 데까지 사건을 끝까지 끌고 갈 생각이었고, 그래도 안 되면 차라리 부당한 처벌이라도 받아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명예훼손 재판 진행 중에 세관장이 고소를 취하해버렸고, 사건이 끝나버렸다.
필자가 고소한 건은 ‘혐의없음’으로 끝나버려서 기소도 되지 않았다. 이후에 필자는 대검찰청에 재항고했고, 추운 2월에 대검찰청 정문 앞에서 상복과 상투를 차려입고 한나절 1인 시위하는 것으로 사건을 접었다. 더는 개인적으로 해볼 방법이 없었다.

(※ 광주세관장은 조기(명예)퇴직을 조건으로 승진해서 광주세관장으로 왔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후에 관세청장이 되었다.)

③―3. 검찰에서 겪은 코미디 같은 이야기

광주지방검찰청에서는 광주세관 감시과장의 월권행위(권한남용)를 오전에 조사하면서
“대한민국에 이런 공무원이 있어요? 이놈은 모가지가 100개는 되나 보죠?”라고 놀라워하면서 똑바로 조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점심 식사하고 와서는 “오전에 작성한 조서가 어디로 없어졌다. 처음부터 조서를 다시 작성해야겠다.”라고 말하고는 태도가 180도 돌변했고, 무혐의로 바뀌었다.

③―4. 모 신문사 기자의 사건취재 이야기

지방의 유력일간지 기자는 다른 취재를 접어버리고 5일 동안 오직 필자의 사건만을 A4 용지 20여장 분량을 앞뒤로 깨알같이 취재했다. 그는 나에게 “기자생활 15년(?)에 사건 하나를 이렇게 장시간(5일 연속) 취재하기는 처음이다,”, “5-6회 나눠서 보도하겠다.”, “사무장님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중간에 어떠한 압력과 협박과 유혹이 있어도 절대 약해지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자.”라고 말했다.
필자는 “내가 기자님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다. 기자님이 적극적이어서 감사하다.”라고 답했고, 다음날 사회면 톱으로 「광주본부세관 비리묵인 의혹」으로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런데 그 기자의 상사(부장)는 고향이 전남 xx군이었고, 1회분 기사가 나가자 광주세관 직원들 중에서 xx군 출신 세 명이 신문사에 찾아갔으며, 그것으로 보도는 끝나버렸다.
기자는 필자에게 “할 말이 있다.”라고 전화해서 만났다. 그런데 기자는 더는 보도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면서 “미안하다. 내가 밥값을 내겠다.”라고 했다.
필자는 기자에게 “그렇게라도 취재해주고 기사화해줘서 감사하다. 수고 많았다.”라고 말해주고 헤어졌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제발 당신이 압력을 받았을 뿐 돈을 받아먹고 포기한 것은 아니길 바란다.’라는 순진한 생각과 바람을 가지면서 커다란 아쉬움과 함께 안타까움을 억눌렀다.
그리고는 그러한 나의 경험과 시야를 좀 더 멀리, 아니 수십 년 후로, 어쩌면 사후가 되거나, 그것도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각오했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위로했으며,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머나먼 미래로 보류해놨다.
물론 필자는 이미 대한민국 사회와 국민성과 인간성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고, 외롭지만 가장 평범하고 순수하고 상식적인 서민의 입장으로 모든 상황을 의연하고 꿋꿋하게 진행하기로 작심했었다. 하지만 언론들조차 참담한 꼴들을 보였으며, 필자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③―5. KBS ‘추적60분’ PD와의 전화 통화

KBS 추적60분에서 “사건을 다루고 싶다.”라고 PD에게 연락이 왔다. 필자는 ‘드디어’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자료들을 몽땅 보내줬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PD가 전화해서 “두 건을 결재 올리는데 한 건이 채택되면 다른 한 건은 더는 다루지 않고 그대로 끝나버린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어왔다. 마치 내가 경쟁입찰에서 부당한 담합에 경쟁자로 참여하는 느낌이었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인 KBS 그것도 가장 공정하고 깨끗해야 할 ‘추적60분’에서 무슨 짓들인가? 하는 참담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필자는 PD에게 “두 건이 준비되었으면 결재를 올리면 되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했고, 추적 60분 보도도 무위로 끝났다.
아마도 PD는 필자가 적극적으로 응수하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PD의 말(“두 건 중 하나만 선택”)이 사실일지라도 필자의 사건이 아닌 다른 건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중요하고 간절할 것이고, 어떻든 뒷구멍으로 돈을 건네면서 사회와 정의와 개혁을 운운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공영방송 KBS의 추적 60분(PD)에게 큰 충격을 받았고, 그간에 학교에서 배우고 생각해왔던 대한민국의 민족성과 역사와 문화와 관행들과 인간성과 인간관계 등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다시 인식하고 살펴보게 되었으며, 차라리 인생을 완전히 밑바닥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6. 또 다른 KBS 기자와의 뺑소니 신고사건 이야기

KBS 이야기가 나왔으니 또 다른 기막힌 사건을 소개한다.
필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심야에 면소재지 도로를 주행하다가 뺑소니(음주) 차량사고를 목격하고 신고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건 담당 형사가 세 번이나 필자를 찾아왔고, 매번 조서를 다시 받아갔다. 필자는 세 번째에 형사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형사는 “미안해서 할 말이 없다. 사실은 뺑소니(음주운전) 운전자가 경찰국 출입기자의 처 작은아버지라고 한다. 그런데 상부에서 사건을 신고자에게 뒤집어씌우도록 요구해서 조서를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런 청탁과 압력이 있더라도 윗선에서 알아서 거절해야 하는데 나(형사)에게 계속 다시 조서를 받아보라고 압박에 가까운 부탁을 한다.”라고 털어놨다.
이어서 형사는 “뺑소니를 친 가해자가 xx군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등 좋은 일을 아주 많이 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한 것은 사실입니다. xx경찰서가 생긴 이래 유치장에 그토록 면회객이 많이 다녀간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실을 거짓으로 바꿔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요?”라고 소신 있게 말하고 시간을 다시 한번 빼앗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는 이전에 작성된 내용을 자기가 혼자 다시 읽고 답하면서 알아서 조서를 작성했다. 예를 들어서 「사고 순간을 목격했습니까? 예. 목격했습니다.」였던 것을 「예, 확실히 목격했습니다.」로 문장마다 더욱 명백하고 단호한 표현으로 작성해서 가져갔다.
그런데 며칠 후 KBS xxx기자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고, 우리 사무실의 지하 다방에서 만났다. 기자는 나에게 당시 상황을 물어봤고, 자세하게 가르쳐줬다. 그러자 기자는 “사실은 사무장님이 신고한 사고의 가해자가 바로 제 처의 작은아버지인데 정말 좋은 분입니다. 절대 뺑소니하실 분이 아닌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다각도로 알아보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직접 신고자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무장님 말씀을 듣고 보니 의심이 없어졌고, 사무장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기자에게 “그분이 정말 좋은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잠시 서먹하게 시간이 흘렀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내가 “나는 기자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xxx 기자가 기자님에게 H(모임)에 가입하자고 했었지요? 내가 그 모임의 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나에게 “예. 그때 너무 바빠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참석했더라면 제가 지금 ‘형님’이라고 했을 것인데 지금이라도 형님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하여튼 안타깝게 되었고, 기자님의 입장도 애매하게 되었겠습니다.”라고 위로했다.
그러자 기자는 “형님이 검찰에서 다시 한번 조사를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때 형님이 ‘당시는 날씨가 흐리고 비가 와서 똑바로 보지 못했다.’라고 진술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피해자(부상자)는 저희가 책임지고 치료해주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기자에게 “나도 검찰에다 선처해주도록 최선을 다해서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크게 기대는 마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테이블 위에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놓고 “성의표시로 드리는 것이니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돈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그에게 “이럴 것까지 없습니다.”라고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저희도 기자생활 하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성의로 주는 돈은 받습니다. 성의 표시니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기자에게 “형사가 작은 아버님의 선행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정말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어떻든 인간은 완전하고 완벽하지 못해서 기나긴 인생에서 한 번이든 여러 번이든 잘못하기 마련이고, 잘못할 때는 타의일 수도, 자의일 수도, 고의일 수도, 불운일 수도, 우연일 수도, 꿰임일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단 한 번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생에 치명적인 오점이 남을 수도 있고, 치명적인 오점을 여러 번 저지르고도 밝혀지지 않아서 양심과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런저런 것을 감안하고 고려해서 좋게 진술하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분의 선행을 생각해서 나름대로 노력할 것입니다. 봉투는 가져가세요.”라고 거절했다.

(※ 이후 그는 우리 모임에 가입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 기자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서 모임에서는 그러한 이야기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목포지청(검찰)에 신고인 조사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조사계장은 나를 보자마자 기선을 제압하듯이 으름장을 놓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고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나도 한판이든 대판이든 혼내주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 순간에 검사가 들어왔고, “내가 직접 받겠다.”라고 말하고는 매우 정중하고 상냥한 태도로 진행했다.
검사는 외부의 압력 겸 청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사계장이 어떻게 할 것인지도 알고 있었으며, 간단하고 사소한 사건인데도 검사가 직접 조사를 진행했고, 나는 있었던 그대로 진술했다.
끝마무리에 검사는 나에게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나는 “가해자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두운 밤에 꽤 비가 많이 왔고, 대로의 중앙선을 따라 누워있던 피해자가 일어나려고 무릎을 드는 순간에 범퍼 끝에 무릎이 살짝 걸렸는데 운전자가 혹시 몰랐을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검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저도 운전을 합니다만 개구리 한 마리가 차에 치여도 알기 마련입니다. 바쁘신 시간에 먼 길 오셨는데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마무리 인사를 했다.
뺑소니 사고를 신고하던 날(밤에) 지서에서 경찰은 나에게 “완전히 미제로 끝날 사건인데 신고해줘서 정말 감사하다. 뺑소니 차가 검문소를 막 통과해버려서 차 번호를 조회해서 집으로 찾아갔는데 기사가 음주한 상태였다. 경찰국장 표창장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개인택시 면허가 좋겠습니까?”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사건이 경찰서로 넘어가자 오히려 신고자를 뺑소니 사건의 가해자로 몰아버리려고 했고, 그것이 대한민국 사회의 일면이었다.
이후에 필자는 지인으로부터 ‘일본으로 신혼여행 갔다가 폭주족에 의해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겪었던 경찰서에서의 이야기’를 소상하게 듣고 정말 놀라게 되었고, 일본인들의 옳고 아름다운 인간성과 사회의식이 참으로 부러웠으며, 우리가 얼마나 열등하고 부정하고 비열한 민족성과 국민성과 인간성과 인간관계와 사회문화와 역사였는지 한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나를 찾아왔던 그 기자는 이후에 KBS 본국으로 올라갔고, ‘추적60분’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에 뺑소니 사건을 조사했던 형사는 정말 소신 있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연락이 된다면 만나보고 싶다. 우리 사회는 너무 열악하고 열등해서 윗사람에게 처세하고, 아부·아첨하고, 뇌물·상납하는 사람이 승진하고 좋은 보직을 차지해서 문제다.
만일 우리의 민족성과 문화와 국민성과 인간성과 인간관계와 사회의식이 월등했다면 그 형사처럼 소신 있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뒷받침을 받았을 것이고, 직장에서도 제대로 승진했을 것이며, 조직을 합리적으로 잘 이끌어갔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선진복지 국가를 실현했을 것이다.

(※ 당시만 해도 나는 죄를 뒤집어쓴 억울한 사람들에 대해서 막연하게 들어본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직접 죄를 뒤집어쓸 뻔했고, 그처럼 억울한 피해자들이 꽤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며, 우리 사회와 국민성이 얼마나 한심하고 심각한지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관세청 사건을 계기로 나는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단체에서 한동안 활동하게 되었고, 정말 무고하고 억울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피해자들을 꽤 많이 목격했다. 나는 피해자들이 당하고 겪었던 기막힌 사건들과 피해자들의 인생을 압축해서 소책자로 엮어보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그때 엮어놓은 가본(원본)만 보관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억울한 사건으로 인해서 커다란 충격과 불행과 고통은 물론이고 시간도 정신도 의식도 인생도 어느 시점에서 모두 정지되어버렸다. 역시 그들은 자기 사건이 제대로 밝혀지고 바로잡아지면 “대한민국에 사법정의가 세워지고, 부정부패가 없어지고, 사법개혁이 성공한다고 생각했고, 모두들 자기 사건을 최고의 개혁(부정부패 척결) 모델”로 생각(착각)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필자는 그들을 겪어보면서 ‘자칫 잘못하면 나도 망가진 인생이 될 수도 있겠다.’라고 걱정되었고, 사건을 통째로 내려놓기로 작심했으며, 지금까지 들먹이지도 떠올리지도 않고 살았다.
내가 세관(관세청) 사건을 진행했을 당시에 필자는 업무 시간이 끝나서 집으로 발길을 돌리면 모든 생각을 멈췄고, 집에서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으며, 내가 어떤 일로 애를 먹고 있는지 아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을 정도로 태연하게 행동했다.)

(※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서 당연하게 살아가던 필자는 이런저런 일들은 당하고 겪으면서 충격과 실망이 너무나 컸다.
필자는 대한민국에서 40년여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고 활동하고 깨우치고 인간관계 했던 모든 것을 수없이 되새겨보게 되었고, 아예 기존의 나를 통째로 내려놓게 되었으며, 인생을 최하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해보기로 작심했다. 왜냐면 내가 우리 사회에서 보고 배우고 겪고 당한 것들로는 도저히 인간답게 살아갈 자신이 없었고, 우리 사회 역시 정상을 유지해가기 힘들다는 것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도 사회도 문화도 인간도 인생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고,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필요성과 압박감과 사명과 열의와 집념과 책임으로 바뀌었으며, 당연히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근본과 뿌리부터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고, 우리와 서양에서 ‘응애’ 하고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차이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③―7. 당시에 필자를 흐뭇하게 했던 사람들

광주본부세관과 관세청 사건에서 나를 개인적으로 뿌듯하고 흐뭇하게 했던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광주본부세관의 사무관 2명(운영과장, 감사과장)과 공무원 한 명이다. 이제 세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첫째, 광주본부세관 운영과장과의 이야기

광주본부세관장의 지시를 받아서 운영과장(사무관, 총무과장과 같음)이 수시로 나와 접촉하고 대화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끝날 때쯤에는 개인적으로 친해졌고, 퇴근 후에 간혹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하고 지냈다.
짐작하건대 그는 세관장의 요구(바램)를 곧이곧대로 나에게 말하지 않았고, 자기 소신대로 나를 상대했던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운영과장이 나와 친해진 사실을 세관장이 알게 되었거나, 어쩌면 운영과장이 세관장의 지나친 요구들을 노골적으로 묵살해버렸을 수도 있다.
당시에 세관이라는 조직의 생리를 속속들이 이해했던 필자는 운영과장을 대면하면서 항상 그가 마주할 수 있는 애로점들을 염두에 두었고, 오히려 필자가 언행을 자제하면서 조심했다. 때로는 그가 곤란해질까 싶어서 아예 필자가 인간적인 부담을 껴안고 상대했고, 서로의 마음이 통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후에 사건이 흐지부지되면서 그와의 만남도 뜸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목포세관으로 전보되었던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그간에 바빠서 연락하지 못했다. 목포로 초대하고 싶다.”라고 했다. 필자는 “고맙다. 내려가면 만나자.”라고 답하고 인사말로 넘겼다. 그런데 그런 전화가 몇 차례 반복되었고, 나는 그에게 “괜찮고 고맙다.”라고 답했다. 그런데도 그는 일관된 태도였고,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목포에서 만났다.
그는 신안비치호텔 전망대층의 중식당으로 안내했고, 이미 정식을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두 사람이 정식을 소화하기가 힘들어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그는 진지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무장을 상대하는 내내 항상 인간적으로 빚을 진 심정이었고, 미안했다. 그래서 목포로 꼭 초대하고 싶었다.”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오히려 내가 항상 미안하고 고마웠다.”라고 말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와 만나 이후에 그는 더 큰 불이익을 당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이후로 필자는 인연도 활동도 대부분 중단했고, 총체적인 개혁을 위한 연구와 분석과 반성과 대안 마련에 몰두했다. 실제로 필자는 ‘이미 죽어버린 것처럼’,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숨만 쉬고 살아갈 정도로 힘들고도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고립해서 최하 생활과 밑바닥 인생으로 초집중해서 살아왔다. 그래서 운영과장에게 연락하지 못했고, 인연이 끊어졌다.
그 운영과장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잘 있는지 궁금하고, 얼마나 변했는지 만나보고 싶다. 혹시라도 이 내용을 접한다면 연락해주면 좋겠다. 나도 기회가 되면 꼭 찾아보도록 노력하겠다.

둘째, 광주본부세관 감사과장 이야기

책자를 수거해버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자가 광주본부세관 감사계장을 만난 이후에 감사과장이 부임했다. 감사과장은 광주본부세관장이 나를 고소한 명예훼손 사건을 담당했다. 감사과장은 필자가 광주세관 감사과에서 한 번 만나서 전반적으로 대화했고, 법정에서 잠깐 얼굴을 봤던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는 세관장의 소 취하로 사건이 끝나면서 감사과장과도 끝났다.
그렇게 시간이 꽤 지났는데 감사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밖에서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라고 했다. 필자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밖에서 만날 필요는 없고, 업무적으로 일이 있으면 내가 세관으로 가겠다.”라고 거절했고, 또 거절했다. 그런데 그는 다시 전화해서 “사실은 저를 위해서 사정하는 것이니 잠깐이라도 만나주면 감사하겠다.”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래서 인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나에게 “사실은 제가 3일 후에 발령이 나서 이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사무장님에게 죄진 마음이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사무장님을 한 번이라도 만나서 죄송했다는 말씀이라도 드려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저를 위해서 만나주시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후에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반드시 사무장님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나는 그가 광주를 떠나는 상황에서 나에게 위로 겸 자기 처세(후한이 없도록)를 목적으로 형식적인 예의를 차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수식과 가식이 전혀 없었고, 있는 그대로 솔직담백했으며, 순수한 인간미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간에 겪었던 것들이 뇌리를 스쳤으며, 그래도 안타까움이 많이 사그라지면서 흐뭇했다.
나도 그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헤어졌다. 사실 그는 단순히 세관장의 심부름을 했을 뿐 나와 직접 충돌한 일은 없었다. 아마도 그는 광주세관에 부임해서 세관장을 대신해서 사건을 진행하면서 평소에 그가 지녔던 정의감에 어긋났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쩌면 그는 세관장에게 소 취하를 권유했거나, 강권했을 수도 있다. 물론 세관장은 명예훼손 고소로 필자를 굴복시키려고 했겠지만 나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고, 감사과장은 법정에서 그러한 나의 모습에 느낀 바가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떻든 세관장은 명예훼손으로 나를 고소했지만 사실은 입막음도 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세관장은 소송을 끌어갈 실익이 없었고, 계속 끌어갈 수도 없었을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면 광주세관 내부의 여론은 물론이려니와 관세청(장) 역시 사건이 장기화되거나, 악화되거나, 또다시 어디서 어떻게 복잡해지면 곤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도 감사과장의 전화와 이야기를 회상하면 만감이 교차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당시에 필자는 결코 범죄자가 아니었고, 피해자와 가해자도 아니었으며, 승리자와 패배자도 아니었고, 오히려 시대와 사회와 현실의 벽들을 뛰어넘어서 인간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민주적으로 의연해졌다. 실제로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의 실체와 실상 등 모든 것을 완전히 뒤집어보고, 돌이켜보고, 무너뜨리고, 다각도로 정리·분석하고, 새로 태어난 갓난아기처럼 인생을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등 훨씬 더 진실해지고 충실해지고 진지해지고 정교해졌다.)

셋째, 광주본부세관 공무원 이야기

사건이 복잡한 양상일 때 광주세관 공무원 한 명이 나에게 만나자고 전화했다. 그는 “사무장 혼자 너무 많은 것을 감수하면서 애를 쓰고 있는데 우리들도 돕겠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정말 고맙다. 하지만 이미 상황이 기울어져서 여러분이 나서도 본전도 거두기 힘들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라고 만류했다. 그는 필자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이 잠깐 당황해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철이 들면서 대한민국에 적응할 수 없었고, 적응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한 인생을 희생하더라도 우리의 사회문화와 후대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관을 출입하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수시로 돈 봉투를 전달하는 ‘부정부패 당사자’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더러운 놈들과 수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저런 것을 간추려서 서로 반성하고 좋아지자는 뜻으로 책자를 만들어서 배포한 것이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위에 계란이라도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이 이미 틀렸고, 당장은 나만 피해를 감수하면 끝난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끌어들이면 그것까지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고, 오히려 내가 힘들어지고, 입지가 좁아지고, 혹시라도 한 사람이라도 피해당하면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게 된다.
만일 이후에 여러분과 함께해서 모두가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하면 그때는 도움이든 동참이든 요청하겠다. 지금 상황은 아무 성과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희생 또한 최소한으로 그쳐야 하고,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그것이 나를 도와주고 이해해주는 것이니 마음만으로 받겠으며, 그것으로도 감개무량하다.”라고 고마움을 표현해줬다.
그리고는 그가 더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도록 “내가 상황을 봐서 여러분이 필요하면 곧바로 연락할 테니 조금도 동요하고 고민하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③―8. 관세청장이 국무조정실장에 이어서 부정부패방지위원회 초대 위원장 물망에

설상가상으로 더욱 기막힌 일들을 소개한다.
필자가 배포한 소책자(‘부정부패이야기’) 수거를 지시했던 관세청장이 국무조정실장으로 영전했고, 새롭게 신설될 부정부패방지위원회(일명 ‘부방위’) 위원들 중에서 그가 당연직 위원장이 되었으며, 이어서 초대 위원장에 정식으로 임명되려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관세청장(국무조정실장)이 ‘부방위’ 초대 위원장이 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청와대와 언론들과 각계에 줄기차게 항의했고, 다행히 다른 사람이 임명되었다.
당시에 만일 그가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면 필자는 똥통(인분)을 다량 준비해서 차에 싣고 광화문(정부청사)에서 엎어버리는 등 퍼포먼스 소동과 현장 구속과 감옥살이까지 각오했었다.
필자는 「그 일이 크든 작든 이익이든 손해든 나쁜 놈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해버리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해버리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고, 희생과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문제 삼아야 하고, 결국은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것을 교훈으로 여기고 살았다.

③―9. 우리의 거래업체를 괴롭힌 사무관(광주세관 감시과장)이 부정부패방지위원회로 옮겨

더욱 기막힌 일은 광주세관에서 우리 거래업체에게 불법(월권)으로 불이익(일방적으로 세금 조기납부 요구)을 강요했던 감시과장(사무관)이 ‘부정부패방지위원회’로 전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일선 세관의 사무관이 부방위로 발령을 받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누가 언제 어떻게 보고 들어도 기막힌 일일 수밖에 없다. (당시에 감시과장은 필자에게 호되게 당했고, 나에게 한동안 안절부절하면서 쩔쩔맸다. ‘감시과장’은 위의 ‘감사과장’과는 부서 자체가 다름)

③―10. 김대중의 “민주주의는 정당정치” 발언

당시에 필자가 강력하게 개혁을 요구(탄원)한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주변에서는 김대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뚱딴지처럼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라고 발언해버렸다. 이는 김대중이 ‘민주주의는 정당을 통해서 정치하고 개혁하는 것이지 국민은 가만있어라.’라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김대중이 대통령으로서 어떤 형태로든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각계각층은 김대중의 생각과 입을 주시하고 있었고, 문제아들은 초조해하고 있었으며, 한쪽은 진정한 변화와 발전과 개혁을 기대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의 입에서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더는 기대할 것도, 조심할 것도 없어졌다. 김대중은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했고, 그 순간부터 조기 레임덕에 빠져들었으며, 평생을 함께했던 잔챙이(측근)들은 더는 김대중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고, 반평생 함께했던 측근들이 김대중과 거리를 두었으며, 비열하고 교활하게 자신들의 정치생명(연장)을 위해서 살아남기에 급급했고, 김대중은 자신이 만든 정당에서 퇴출당하기에 이르렀다.
김대중의 어록을 찾아보면 어느 날 갑자기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라고 했던 뜬금없는 말이 나올 것이다.

③―11. 노무현의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방법)은 안 돼” 발언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추가한다. 이후에도 필자는 노무현에게 참다운 개혁을 당연히 기대했고, 개혁안까지 직접 손에 전달해줬다. 하지만 당선을 전후로 그의 실상과 주변을 둘러보고 극도로 실망했고, 당선과 동시에 안하무인으로 교만해지고 도도해진 것을 보고 비탄함까지 느껴졌으며, 참담한 실패와 비참한 결말을 확신·경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필자는 사회 전 분야에 대한 개혁안을 직·간접의 경로로 측근들에게 전달하면서 참다운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노무현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은 안 된다.”라고 거부했다. 노무현의 이런 뜬금없는 이야기도 어록을 찾아보면 나올 것이다.

(※ 필자는 김대중에 이어서 노무현의 실체와 그 주변(핵심 측근)을 직접 만나보고 돌아다녀 보면서 완전히 실망하고 분개했다. 그리고는 개혁에 대한 희망은 물론 기대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했고, 그의 참담한 실패와 비참한 말년을 확신했으며, 아예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로 각오했고, 인간이 최초에 ‘응애’하고 태어나는 순간(영향, 문화, 관행, 무의식 등)부터 동서양의 차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③―12. 특별한 이야기(청와대 사정비서관)를 하나 소개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두 번째로 임명된 청와대 사정비서관은 필자의 오랜 지인(모임 회원)이었다. 그와는 20대 후반에 알게 되어서 20년여를 모임하면서 가족끼리도 잘 알고 지내는 가까운 사이였다.
김대중 정권의 첫 번째 사정수석은 박주선이었다. 하지만 박주선은 연정희(김태정 법무장관의 아내)의 옷 로비 사건으로 물러났고(김태정과 박주선은 광주고 출신), 사정수석의 힘이 너무 막강해서 견제가 어렵다는 비판으로 인해서 직급이 ‘사정비서관’으로 낮춰졌고, 필자의 계원(지인)인 N씨(광주일고, 사시·행시 양시 패스)가 사정비서관이 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관세청(광주세관)의 공격으로부터 수세로 몰리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오직 대한민국에서 상식과 양심을 지닌 평범한 국민과 서민의 입장으로 있는 그대로 겪어보고 당해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절친했던 모임 회원(사정비서관)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전화 통화도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사정비서관)에게서 전화가 왔고, 한참을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내가 “xx형. 사정비서관 나으리께서 소인에게 친히 전화를 주셨고, 벌써 긴 시간 통화했는데 사실은 아주 바쁘실 건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하실 말씀이 뭔가요?.”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폭소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물었다. 필자는 “형이 나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다는 것은 이미 틀렸다는 이야기 아니겠소? 형이 감당하고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면 극비리에 알아서 했을 것이고, 나에게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겠지요? 만일 형의 목이 여러 개여서 하나가 꺾어져도 다시 살아날 자신이 있으면 무리를 해보든지”라고 말했다. 계원은 “그렇지?”라고만 답변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그에게 내 사건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에 그는 나에게 전화해서 김대중의 자식들(홍업, 홍걸)의 게이트(부정비리) 사건에 개입할 것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아마도 사정비서관인 그는 주변에서 사건에 대한 은폐와 축소에 대한 압력을(부담을) 받았을(지녔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찌할까를 고민하다가 개입하지 않기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전화할 때는 이미 올바른 결정을 내려놓고 마음을 달랠 겸 나에게 전화했던 것이다. 언제인가 그는 또 다른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전화해서 의견을 물었다. 당시에도 그는 나름대로 결정을 내려놓고 아쉬움과 떳떳함과 뿌듯함과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나에게 전화해서 의견을 물었다. 다시 말해서 내 성격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비겁하고 음흉한 짓을 생각했다면 나에게 절대 알리지 않고 처리했을 것이다.)

이상이 필자가 가장 좋아해서 무조건 열렬하게 지지했고, 참다운 개혁을 기대했던 민주화(김대중 정부) 시대에 겪은 것들이다. 다음 주제들에서는 필자가 노무현 정부 시대에 겪은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④ 180도로 바뀐 인생을 살아오면서

첫째, 우리 역사에서 힘도 세력도 없는 순진한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한 일들을 당했을지 실감했다.

둘째, 필자는 그간에 참담했던 우리 역사와 민족성과 문화와 관행들을 잘못(막연하게만) 이해했었고, 현실에서의 산적한 문제들에 무관심했으며, 인생을 대충(무난하고 원만하게)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셋째, 정의(진실, 진심, 충심, 양화)가 불의(위선, 허식, 궤변, 악화)를 구축(감당)하지 못하면 오히려 구축 당하게 된다는 점을 실감하고 뼈저리게 반성했고, 허약한 정의는 결국에 정의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넷째,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난해함을 깨달았다.

다섯째, 필자가 사건을 잘못 진행·해결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사람들이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순진한 사람들이 위축되는 결과가 되었으며, 한동안 그에 대한 죄의식에 짓눌렸고, 비로소 대한민국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되었으며, 인생이 180도 달라져서 사명감과 책임의식과 희생정신으로 승화했다.

여섯째, 그간에 헛살아버린 세상과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로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기로 각오했고, 기존의 활동과 인연과 취미를 최대한 끊기로 작심했으며,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켜서 남겨진 인생의 기력과 여력을 오직 분석과 대안 마련(미래)에 집중했다.

일곱째, 연구가 깊어질수록 진정한 정의는 인류애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승화하고 포용해서 책임지고 해결해내는 참다운 능력이고, 단순한 개인의 정의감(성질, 분노)과 막연한 비판(무지, 선, 무책임)과 무모함(교만, 아집)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덟째, 미래 언제인가(무엇인가, 누군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용해서 끝까지 책임지고 해결하기로 살아왔다.

⑤ 필자가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염려하고 예상했던 세 가지

첫째, ‘특별한 머리도, 능력도, 권력도, 부자도, 세력도, 인연도, 실력도 없는 필자가 나름대로 연구해본들 과연 보람이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세상이 급속도로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개방되어간다. 그래서 정부와 권력만으로는 현실을 끌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고,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가 중요해질 것이다. 나도 연구가 잘 되면 우리 사회와 미래와 후대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연구에 성공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알릴 수나 있을까?’라고 걱정되었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당시에 컴퓨터가 보급되고 있었고, 정보화·여론화 시대로 급속도로 발전해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20년 후에는 개인들도 얼마든지 자기 것을 내놓을 수 있고, 표현하는 시대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셋째, 당시(20년 전)만 해도 나이가 60이면 실질적인 활동과 인생이 끝나던 시대였다.
하지만 갈수록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있고, 건강 역시 좋아지고 있으며, 60에도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필자가 우려하고 예상했던 세 가지가 모두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필자가 현실적으로 빛을 보거나, 사람들에게 최소한이나마 알려졌거나, 현실적으로 결실과 보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⑥ 필자와 국운을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와 암벽

그간에 세상은 필자가 예상했던 대로 바뀌었다. 하지만

첫째,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의식향상과 국운은 깊은 수렁에 빠졌고, 깊은 절벽과 암벽과 마주하고 있다. 실제로 종북·좌파·주사파·친중·반미 세력이 나라를 장악했고, 이들이 급속도로 몰락하고 붕괴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현재로서는 결코 쉽고 간단하지가 않다.

둘째, 우리는 5천 년 역사(얼음의 8/9)를 방치해둔 채 75년 현대사(얼음의 1/9)에 급급(안주)했고, 여전히 고질적(민족성)이고, 후진적(문화)이고, 저질적(관행들)이고, 차별적(인간관계)이고, 굴종적(상명하복)인 연장선에서 극단적인 이념과 대립과 분열과 적개심과 적대감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자유민주주의에 필수적인 밑바탕과 자질과 자격과 리더십에서 역행되고 있다.

셋째, 어른들도 어린이들도 전문가들도 지식인들도 중구난방으로 자기를 표현하면 그만인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치 있는 옥석을 가려내기 어렵고, 국민들은 장기적이고 거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안목을 확보하기 어려워졌으며, 시대에 역행하는 음흉한 사람들의 시도(분노, 악감정, 역적 짓)들이 쉽게 먹혀들고, 수준 높은 사회문화를 위한 진지함과 철저함과 정교함과 논의과정과 협조에 치명적이다.

넷째, 오늘날은 “인생은 60부터”, “100세 시대”로 불릴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현실에서의 여유(시간, 비용, 관심사, 인생, 관계)를 인간으로 너무나 당연한 건강과 여행과 취미와 먹거리와 볼거리와 구경거리와 사후세계와 소모적인 놀이(체험)문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위기와 위협과 위험의 해결에는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다.

( ※ 여기에 관련된 내용은 물론 당시에 필자가 ‘광주세관장’과 ‘관세청 1·2차 감찰팀’과 ‘관세청장’과 ‘광주본부세관 직원들’과 소송(검찰, 법원)에 관계된 내용과 각계에 호소했던 상당 부분의 원고가 보관되어 있다.
필자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는지, 우리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국민성이 자유민주주의에 합당한 자질과 자격이었는지, 실제로는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 왜 대한민국이 현대사(민주주의) 75년에도 불구하고 상식과 양심이 맥을 추지 못하고 무너졌는지, 심지어 지금처럼 저질·잡종·말종에 불과한 종북·좌파·주사파·친중·반미 세력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런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해결책도 전환점도 실마리도 찾지 못하는지를 적나라하고 명료하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조만간 철저한 원인분석과 대대적인 반성과 성숙한 승화와 인간다운 포용과 서로의 용서와 굳건한 화합과 실질적인 통합과 총체적인 극복과 정교하고 치밀한 대안 마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 최익주 선생은 전남 목포 출생으로 목포북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광역시로 이사해서 북성중학교, 동신고등학교, 조선대학교 경영학과(78학번)를 졸업했다.

군생활을 오산비행장 방공포부대에서 병장 만기 제대, 3년간의 개인 사업을 했으며, 관세사무소에서 16년 동안 사무장으로 지내다가 광주세관과 관세청과 부정비리 문제로 싸움(형사소송)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실체와 실상을 깨닫고 인생을 180도 선회. 이후 밑바닥부터 다시 터득하고 통달해야 한다는 각오로 시민단체(2-3년), 택시기사(2년 6월), 생산공장과 건물경비(10년여)를 전전하면서 노동자 생활을 해왔다.

저서로는 <이제는 바꿔봅시다(1997.7.30.)> <대화로 여는 새아침(1999.9.20.)> <사랑하는 선·순·아에게 제1-4권(2018.7.13.)>이 있다.

 

다음은 “9. 필자가 관공서에서 겪은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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